21
6명이 칼을 들고 사울을 둘러싸자 지켜보던 가나에가 삿갓을 벗고 칼을 뽑아 사울에 가세했다.
“죽이지는 마시오.”
가나에가 가까이 오자 사울이 속삭였다.
몇 합을 상대해보니 이들 모두는 겨우 초보적인 칼 잡기를 마친 무사였을 뿐이었다.
사울의 속삭임에 가나에는 흥! 하며 코웃음을 흘렸지만 가나에도 겁도 없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들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달구지꾼으로 따라와 칼을 든 4명을 제외하고 호위로 고용된 2명의 무사는 자칫 봐주었다가는 섣부른 칼날에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사울과 가나에의 상대는 처음부터 칼잡이로 고용된 무사 둘이었다.
얼굴이 강파르고 성질이 급해 보이는 무사1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이얍! 하는 기합과 함께 무사1의 한발이 앞으로 내딛으며 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비슷하게 내려쳤다.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금계독립세가 실패하면 곧 요격세(腰擊勢)로 바뀌어 허리를 노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사1의 칼이 사울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칠 때 사울은 한발 뒤로 물러나 피했다. 사울의 예상대로 금계독립세가 실패하자 내려갔던 칼이 사울의 허리를 노리려고 우요격세로 바뀌었다.
무사1의 칼보다 느리게 피한다면 허리가 잘려나갈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피하지 않고 앞으로 한발 나갔다.
사울이 한발 앞으로 나가자 허리를 노리던 무사1의 칼날이 사울의 허리 뒤에 있게 되었다.
무사1이 고수라면 사울이 앞으로 나갈 때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겠지만 무사1의 공격하기에 급급해 사울의 수를 읽지 못했다.
무사1의 칼날이 사울의 허리 뒤의 허공을 가르자 무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사울이 바로 앞에 있는 무사1의 얼굴을 칼 손잡이로 때렸다.
아악!
얼굴을 맞은 무사1이 칼을 놓치고 주저앉았다.
무사1을 주저앉힌 사울의 칼은 뒤에서 엉거주춤하게 칼을 들고 서있는 일꾼 1,2의 다리를 후려쳤다.
탁! 탁!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일꾼 1,2가 어이구! 하는 비명을 지르며 한 놈은 쓰러지고 한 놈은 다리를 부여잡고 껑충껑총 뛰었다.
사울의 검이 인정이 있는 반면 가나에의 칼은 사울보다 인정이 없었다.
먼저 공격을 가한 가나에는 피하며 칼을 휘두르는 무사2의 칼을 칼집으로 막고는 칼등으로 이마를 베고 지나갔다.
칼등으로 베였어도 살수(殺手)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가나에의 칼은 살기까지는 없었다.
칼등에 이마를 베인 무사2의 얼굴에 순식간에 피가 흘러내렸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무사2가 칼을 버리고는 황급히 주저앉으며 살려달라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일꾼 3,4가 다투어 칼을 버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사울과 가나에가 더 이상 공격할 마음이 없이 바라보자 다리를 맞아 깡총거리던 일꾼1을 데리고 일꾼 3,4가 황급히 도망쳤다.
가나에가 쫒으려하자 사울이 손짓하며 가나에를 만류했다.
“대항하지 못할 테니 그냥 놔두시오.”
조선말을 모르지만 쫓지 말라는 사울의 뜻을 알아챈 가나에가 칼을 칼집에 넣고 삿갓을 집어 썼다.
“살려주시오. 물건을 다 가져가도 좋소이다.”
아직 정신이 있는 일꾼1가 사울을 보며 사정했다.
“너희를 죽일 마음도 없고 물건을 가져가지도 않을 것이다. 이 물건 주인이 오이시라고 알고 있는데 오이시 집이 어디냐? 오이시를 만나면 내가 물건을 빼앗아 가져갔다고 할 테니 집을 알려주고 물건은 너희들이 가져라.”
“명파옥 뒷집이오.”
사울의 말에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일꾼1이 사울이 거듭 말하자 결국 오이시 집을 알려주었다. 사울과 가나에는 서둘러 출발했다.
오이시의 집은 명파옥과 담을 맞대고 있었다.
명파옥에서 담을 넘으면 바로 오이시 집이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마사무네 때문에 미우라는 명파옥을 나왔다.
이미 밤이 깊어져 어느 집이고 불을 켠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우라가 나오자 기다리던 마사무네와 골목길을 나와 맞았다.
“알아냈는가?”
“가세!”
마사무네를 데리고 다음 골목에 들어간 미우라가 여자가 알려준 오이시 집에 도착했다.
솟을 대문이 높이 치솟은 한옥이었다.
왜관에 사는 일인들을 비롯하여 부산포의 왜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무역에 종사했기에 대부분의 일인 풍습을 누리고 살았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집을 일본식으로 짓고 살았지만 오이시는 조선의 한옥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계단 위에 있는 대문으로 올라간 미우라가 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역시 단단하게 빗장을 질려있어 꿈쩍도 안했다.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본 미우라는 마사무네에게 담을 넘자고 눈짓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때 골목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우라와 마사무네를 급히 골목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달려온 사내는 사울에게 다리를 맞아 깡충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 일꾼 세명이었다.
일꾼들은 급히 대문을 두드리며 ‘나리’를 소리쳐 불렀다.
안에서 즉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대문을 열어준 하인이 물었다.
“나리는... 나리에게... 나리! 큰일 났습니다! 습격을 당했습니다!”
일꾼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일꾼의 외침에 사랑방에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나왔다.
비단 옷을 입은 남자와 조선의 선비 차림이거나 사냥꾼 차림의 남자들 3명이었다.
“습격이라니! 누가 습격을 했단 말이냐?”
비단옷을 입은 오이시가 물었다.
“누군지는 모릅니다. 무너미고개를 넘어오는데... 칼 가진 무사 2명이 갑자기 습격하였습니다.”
“칼 가진 무사 두 명... 우리 무사들은 모두 여섯 아니냐... 고작 두 명이 습격하였는데 당했단 말이냐?”
“예사 놈들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모두 당하고 소인만 겨우 칼을 막아내다가 도망쳐 나리께 알리러 온 것입니다.”
“급히 가봐야겠습니다. 모두 준비해라!”
선비 옷을 입었지만 허리띠를 두르고 칼을 2자루나 찬 무사가 외쳤다.
일꾼들이 다급하게 들어올 때부터 신발을 신고 있던 사냥꾼 차림의 남자 2명이 사랑 아래로 뛰어내려 행간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칼을 들고 나왔다.
손에 한 자루를 들고 허리에 한 자루를 차는 것으로 보아 셋 모두 왜인무사로 오이시의 측근 사무라이였다.
측근 사무라이가 출발 준비를 하고 하인이 마당에 관솔불을 피우는 등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 모습을 열어진 대문을 통해 미우라와 마사무네가 지켜보고 있었다.
미우라는 오이시만 조용히 습격할 것인가 이들 모두 한꺼번에 상대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텐가?”
마사무네가 미우라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저놈들도 문록의 역 때 조선에 남은 사무라에 같은데 같이 처리 할텐가?”
“우린 일개 병사를 처리하러 온 게 아니야.”
“하지만... 오이시보다 항왜 병사들이 어디에 사는지 더 잘 알 수도 있지 않겠나.”
마사무네의 말에 미우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정보를 알고 나서는 벨 것인가?”
마사무네의 말에 미우라가 슬몃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베더라도 칼 소리가 나면 안되네.”
미우라의 당부에 마사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히 굴지마라!”
여기저기 켜놓은 관솔불로 훤해진 마당에서 출발을 서두르는 측근무사를 보며 오이시가 소리쳤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무사와 하인들에게 말했다.
“어느 놈들인지 이곳 부산포에서 우리 물건을 빼앗으려 습격하였다면 철저하게 준비한 놈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멀리 달아났을 것이야.”
“하지만 밤이 깊어서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측근 무사가 말했다.
“야심한 밤에 그놈들을 찾는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조선 포교의 눈에 나면 곤란해진다. 우리 물건은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이니 쉽게 처분할 수도 없어. 내일 날이 밝아 천천히 추격해도 늦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저희가 철저히 수색하여 놈들을 잡아 들일테니 나리께서는 걱정 마십시오.”
오이시의 말에 측근 사무라이가 대답했다.
“네놈이 오이시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우라와 마사무네가 불쑥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미우라와 마사무네를 보고 사무라이들이 오이시를 보호하듯이 감쌌고, 하인들은 움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뒤처져 들어온 마사무네가 대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누구냐?”
측근 사무라이 중 대장인 듯한 사무라이가 소리쳤다.
“네놈이 오이시냐?”
미우라가 거듭 물었다.
미우라가 한발 앞으로 다가가자 오이시가 쏘아보며 대답했다.
“네놈들이 물건을 빼앗은 놈들이냐?”
“이놈들이 아닙니다.”
미우라보다 도망쳐 온 일꾼이 먼저 소리쳤다.
“오이시, 네놈은 누구 밑에서 문록의 역을 치렀나?”
미우라가 이제까지와 달리 일본말로 물었다.
미우라가 일본말로 묻자 오이시도 측근 사무라이도 더욱 긴장하며 쏘아보았다.
“네놈들은 누구 밑에서 종군하였느냐? 네놈들 이름과 주군을 말하여라.”
미우라는 오이시를 감싸고 있는 측근 사무라이들에게도 물었다.
“이놈들...!”
측근 사무라이 중의 하나가 거침없이 칼을 뽑자 나머지 두 명도 재빨리 칼을 뽑았다.
그러나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은 실력이었다.
마사무네는 미우라의 지시대로 칼 소리가 나지 않게 사무라이의 칼을 두 번 피하고 재빨리 베었다.
미우라는 2명을 상대하였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2명의 사무라이가 칼을 뽑았을 때 미우라의 칼은 두 번 허공에서 춤을 춘 후에 칼집에 다시 들어갔다.
미우라와 마사무네는 오이시의 측근 사무라이들에게 정보를 얻으려고 하였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그들의 칼이 형편없는 칼잡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개 졸병에 지나지 않은 병사였기에 정보를 물어볼 가치도 없었기에 벤 것이었다.
순식간에 측근 무사들이 죽자 오이시는 그 틈을 이용해 집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하인은 차마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일꾼2은 사울에게서 도망친 것처럼 재빨리 대문으로 뛰었다.
사무라이들을 벤 마사무네가 오이시를 쫓아 방안으로 따라가고 미우라가 일꾼을 뒤따라갔다.
도망친 일꾼은 빗장을 벗겼지만 그뿐이었다.
미처 대문을 열기도 전에 미우라의 칼에 쓰러졌다.
사랑방으로 들어온 오이시는 칼 대에 거치해놓은 칼을 들고 뽑아 뒤따라 들어온 마사무네를 겨누었다.
“멈춰라! 사무라이면 누군지 정체를 밝혀라! 이 집에는 아직 무사들이 많다!”
오이시가 외치며 겨누었어도 마사무네가 그대로 돌진했다.
오이시가 마사무네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쳤지만 슬쩍 옆으로 피한 마사무네가 칼을 쥔 오이시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위로 쳐들었다.
손목이 비틀린 오이시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치자 칼이 오이시의 발등에 떨어지며 발을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린 오이시의 입에 마사무네의 칼집이 들어와 막아버렸다.
이제 더 이상 대항할 생각이 없어진 오이시의 눈은 살려달라는 간절한 애원으로 마사무네를 바라보았고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뒤따라 미우라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미우라가 눈짓하자 마사무네가 오이시의 입에서 칼집을 뺐다.
“지금부터 허튼 소리를 한마디라도 뱉으면 바로 죽일 것이다.”
상황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미우라의 목소리는 마당에서보다 차분해져 있었다.
오이시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록의 역 때 조국을 배반하고 조선에 항복한 장군들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죽여라!”
오이시가 변명을 하자말자 미우라가 마사무네에게 명령했다.
“잠시만요... 다시...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이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제1군 고니시 유기나가님의 심복 무장인 요시무라 사이키치는 어디 사느냐?”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구로다 나가마사님의 부부장이던 기타모리 간노스케 밖에 모릅니다.”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일단 발목을 하나 잘라라.”
“정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오이시가 애원하며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기타모리는 어디에 사느냐?”
“도, 동래에…. 그는 여기서 역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야카는 어디 사느냐?”
“사야카는… 모,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너의 노모와 가족들이 아직 일본에 사는 것을 알고 있다.”
“조선에서도 항왜장군들은 특별히 취급하여 누구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기타모리밖에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는 오이시를 미우라는 차갑게 바라보았다.
나무에서 소리 없이 날아오른 부엉이가 골목길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담장을 타고 이동하던 쥐를 두발로 움켜쥔 부엉이가 다시 날아올라 선회하더니 처음 날아 오른 나무에 가볍게 앉았다.
한발에는 아직 살아있는 쥐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사울과 가나에가 오이시의 집이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골목길을 환하게 비추었고 부엉이가 쥐를 사냥해 나무로 돌아가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오이시 집에 당도한 사울은 대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보고 안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사울이 대문을 살며시 슬며시 밀자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