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우라와 마사무네가 부산포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발밑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다대포진을 출발하여 10리 길을 걸어 한양으로 향하는 기요하라, 요사유키, 다케다와 헤어지고 다시 20리 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왔다.
미우라의 계획은 부산포에 낮에 도착하여 폐쇄된 왜관과 왜관 주변에 살고 있었던 왜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하였지만 다대포에서 만난 산적들을 죽이고 파묻는데 시간을 써서 한나절이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처음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기다니...’
오른 쪽으로 보이는 영도를 보고 걸으면서 미우라는 살짝 찜찜함 기분이 들었다.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계획에 없던 산적을 만나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계획의 차질이 주어진 임무의 먼지와 같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이내 떨쳐냈다.
영도를 뒤로하고 걸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부산포가 눈에 들어왔다.
부산포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미우라는 마사무네에게 쉬어가자고 말했다.
“강성이 좀 쉬어가세.”
마사무네는 대답 없이 미우라가 앉은 바위의 건너편 바위에 앉았다.
엉덩이를 내려놓기 전에 습관처럼 주위를 새삼 둘러보았다.
“여기도 사람이 없군.”
마사무네가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말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바다를 끼고 온 거네.”
한양으로 향하는 3명의 사무라이와 헤어지고 줄 곳 바다를 끼고 걸어온 이유를 설명하듯 마사무네를 쳐다보았다.
“저기 보이는 것이 부산포야.”
미우라가 부산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부산포 뒤로 10리 정도 걸어가면 동래포가 있고 동래포에는 제법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지. 부산포 근방에 왜관이 있었고 조선과 일본이 거래를 했지. 왜관에 300명이나 되는 일본인이 거주하여 조선인과 거래하였기에 조선에서 동래도호부를 설치하여 관리했지. 내가 조선 상륙을 다대포로 하지고 한 이유가 부산포 근방은 동래도호부가 가까워 낯선 사람은 금방 눈에 띨 것이기 때문이야.”
미우라가 마치 남의 나라 말을 하듯 일본으로 지칭하며 말했다.
조선 사람으로 행세를 하였지만 자기 나라를 왜국으로 하고 자기 백성을 왜인으로 말하기 싫어서일 것이었다.
“가보았나?”
“어디? 부산포에?”
“아니 왜관 말일세. 300명이나 거주했다니 꽤 켰을 테지.”
“가보지는 못했네. 다대포에 주둔할 때 배를 타고 지나치면서 봤지만 상륙하지 못했네. 그때는 우리 군의 무사들도 부산포에 주둔할 때이니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네.”
“괴괴하군.”
마사무네가 부산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사무네의 말대로 부산포는 사람이 살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술년에 왜군이 물러간 이후에 조선 조정에서 부산을 비롯하여 개항했던 3군데 왜관을 폐쇄하고 왜인과의 모든 거래도 중지시켰다.
임진왜란 전에 왜관에 거주하며 무역하던 왜인들은 왜군이 물러갈 때에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왜인이 남아있지 않았다며 어떻게 알아보려고...?”
마사무네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하핫! 걱정 말게.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전부 돌아갔겠는가. 가세.”
미우라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고 일어섰다.
여우고개에서 요사유키와 다케다를 스쳐 지났지만 사울과 가나에는 그들이 일본인이고 더구나 두 사람이 찾는 사무라이라는 것을 몰랐다.
일본인을 만나면 바로 알아볼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던 가나에는 두 사람이 멀어진 후에야 칼을 잡은 손을 비로소 풀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제가 일본여자인걸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했어요.”
남자들과 지나칠 때 가나에를 지켜보던 사울은 얼음같이 굳어지는 가나에를 보고 언제라도 칼을 뺄 수 있게 준비했지만 가나에 스스로 고백을 하니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긴 아무리 조선 사람으로 변장을 했어도 무기를 가진 사무라이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을 나란히 걸어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릅시다.”
여우고개를 다 내려와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 마을이 보이자 사울은 서둘렀다.
가나에의 팔을 끌고 가다시피 하여 마을 가까이에 이른 사울은 가나에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
“마을 가까이에 주막이 있을 겁니다. 주막에는 사람들이 밥을 사먹거나 술을 마시는 곳입니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잠을 자기도 하는 곳이고요. 일본에 있는 객점과 같은 곳입니다. 더구나 여기는 부산포가 지척이고 경상남도에서 가장 큰 고을인 동래포가 한낮거리니까 주막에 많은 사람이 모일 거예요. 만약 사무라이들이 이 근방에 상륙했거나 이 근방에 목적이 있으면 주막에서 잠을 잘 수도 있고 밥을 먹을 수도 있어요.”
가나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주막에 들어가 살펴볼 테니 가나에도 유심히 살펴봐야 해요.”
“알았...”
“쉿!”
가나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울이 얼른 자기 입에 손가락을 대어 말을 막았다.
“가나에님은 말을 하면 안 돼요. 조선에 있는 동안은 벙어리라고요. 알았어요.”
사울이 다시 단호하게 주의를 주자 가나에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라이를 발견하면 재빨리 내게 알려줘요.”
가나에가 동그란 눈을 크데 뜨고 고개를 저으며 사울을 바라보았다.
“왜요?”
“으으으...”
가나에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벙어리 흉내를 내며 손짓으로 뭐라고 했다.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알려주냐고요?”
사울의 말에 가나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을 살며시 잡아요. 그리면 내가 가나에를 볼게요. 알았죠?”
가나에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을 입구에 이르자 사울이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더니 마을의 끄트머리에 있는 초가로 걸어갔다.
사울의 뒤를 따라 걷던 가나에가 초가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나오자 급히 사울에게 바짝 붙으며 손을 잡았다.
순간 사울이 번개같이 지팡이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으으으으...”
깜짝 놀란 가나에가 얼른 사울을 잡은 손을 놓고는 사무라이가 아니라는 얼굴로 이상한 음성을 냈다.
술 취한 남자가 지나가자 긴장하여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이 가나에를 안심시켰다. 사울이 가나에를 앞세우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지붕이 낮고 대문이 작아 겉으로 보기에는 좁고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주막 안은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대문에 들어서면 정면과 양옆으로 집이 지어진 ㄷ자 모양의 주막은 마당 가운데에 널찍한 평상이 놓여있어 평상의 사방에 걸터앉아 밥이나 술을 먹는 곳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갔을 때에는 세 명의 남자들이 술상을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대문에 들어서서 주막을 훑어보자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인사했다.
“좀 조용히 잘 곳이 있소?”
“둘만 잘 방 말이오?”
사울이 말하자 남자가 코웃음 치듯이 사울을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양반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여긴 그런 방 없으니 부산포에 객관이나 가보시오.”
“부산포까지 갈 형편이 안 되니 들어온 것 아니겠소.”
“낼이 동래장이라 상인들이 많아 두 사람만 따로 내줄 방은 없소이다. 묵든지 가던지 마음대로 하시우.”
“하참... 그럼 방이나 한번 보고 결정하겠소.”
“이런 젠장... 객방이 다 같지... 저쪽이니 마음껏 보고 결정하시오.”
사울의 말에 주인이 아니꼽다는 얼굴로 코를 팽 풀 고는 바지에 쓱 문지르고 사라졌다.
사울은 주인의 불평을 무시하고 객방으로 다가갔다.
가나에가 엉거주춤한 얼굴로 사울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자 가나에의 소매를 잡고 끌고 갔다.
손님이 묵는 방은 모두 3개였는데 방마다 일곱 여덟 명의 남자들이 누워있거나 앉아 있다가 사울이 문을 열자 일제히 바라보았다.
사울은 ‘실례했소. ‘미안하오. ‘이방도 꽉 찼네...’ 등으로 말하고는 가나에가 방안에 있는 남자들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 방을 살펴보았다.
사울의 의도를 눈치 챈 가나에가 남자들을 유심히 보았지만 사무라이라고 할 만한 남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부산포까지 가야겠소!”
방 3개를 모두 살펴보고 가나에가 고개를 흔들자 사울이 소리쳐 말하고는 주막을 나왔다.
“저쪽에도 주막이 있을 것이니 가봅시다.”
사울이 가나에를 재촉해 마을 외곽의 밭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이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을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동네 개만 으르렁거리거나 짖어대기 시작했다.
반대편에 있다는 주막은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막에 도착한 사울은 주모에게 밥을 주문했다.
“방이 있소?”
국밥을 가져온 주모에게 사울이 물었다.
“한방은 장꾼이 많아 들어갈 틈이 없고, 한방은 나리 둘만 들었는데...”
“나리 두 사람이요?”
나리라는 말에 사울이 긴장하며 주모를 바라보았다.
“갓 쓰고 도포 입었으니 나리겠지요. 상것들하고 잘 수 없는지 둘만 쓴다고 밥값을 적잖이 내놓아서...”
“어디요? 내가 가서 한번 사정이나 해봅시다.”
“나리께서 사정하면 같은 양반이니 들어줄지도 모르지요. 뒷방입니다.”
사울이 보따리에서 지팡이를 꺼내들고 일어섰다.
가나에도 보따리에서 칼을 꺼내 들고 사울의 뒤를 따랐다.
마당 뒤로 돌아가자 뒷방이 보였다. 사울이 가나에에게 속삭였다.
“내 뒤에서 방안에 미우라나 사무라이가 있으면 내 손을 꼭 잡으시오.”
가나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 앞에선 사울이 방문을 잡고 말했다.
“실례하겠소이다.”
사울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벌컥 방문을 열었다.
방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
사울이 힘을 주어 몇 번 잡아당기자 덜컹덜컹 소리를 내었다.
“누……. 누구요?”
안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방문의 고리가 벗겨지며 열렸다.
“에그머니나!”
방안에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여자는 미쳐 옷을 다 입지 못하고 한쪽 팔만 낀 상태에서 사울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미처 가리지 못한 젖가슴을 얼른 입고 있던 옷으로 가렸다. 여자의 머리가 상투를 튼 것으로 보아 남장을 하고 다닌 모습이었다.
“뭐야! 웬 놈이야?!”
남자의 상체도 벗겨진 상태였는데 미처 저고리를 여밀 사이도 없이 득달같이 튀어와 문을 가로막았다. 방안에 남자만 둘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던 사울도 남녀가 정분난 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에 당황하여 얼른 문을 닫았다.
“뭐야! 누구야!”
문이 닫히자마자 남자가 험악한 목소리로 외치며 방문을 벌컥 열었다.
남자가 방을 나오며 미처 짚신도 신지 못한 상태에서 흥분하여 말했다.
“누구시오? 누구신데 남의 방문을 함부로 여는 거요!”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단호하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싫은 듯 목소리는 한껏 낮추었다.
“잘못했소이다. 내외가 있는 줄 몰랐소이다.”
“대체……. 대체......”
남자는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이놈의 주모를 그냥……. 나리 두 분이 아니라 내외라고 말을 해야지…….”
사울이 화를 내는 듯이 말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남자가 급히 잡았다.
가나에는 이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모퉁이에서 지켜보았다.
“잠, 잠시만......”
사울도 가나에를 남장을 시켜 동행하고 있으니 남자가 말하지 않아도 상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외가 자는 방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창고로 쓰는 헛간이었다. 헛간이라고 불쏘시개로 쓰는 짚을 보관하였기에 충분히 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규슈에서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김해와 다대포진, 그리고 지금의 주막까지……. 꼬박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한 두 사람은 등을 대고 눕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