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강하면서도 부드럽다.
벨 때는 뼈까지도 벨 정도로 날카롭고, 찌를 때에는 사람을 꿰뚫은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옆으로 눕히면 어린아이 힘으로도 휘어지게 만들 수 있다.
사울은 성문에 박힌 칼을 밟아 탄력을 이용해 단숨에 성벽 위로 올라갔다.
“쏴라!”
우두머리의 명령 소리에 돌아보니 총포부대가 조총에 화약을 넣는 등 총을 발사하기 위하여 급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손 빠른 몇몇은 이미 발사준비를 마쳤는지 막 사울을 겨냥하는 중이었다.
“죽여! 조선인을 죽이라고 바보들아!”
탕! 탕! 탕!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핑! 핑! 핑!
사울의 귓가에 총알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사울은 지체 없이 해자로 뛰어 내렸다.
“저기다!”
“총포 준비! 화살 준비!”
해자에 들어간 사울이 고개를 내밀었다.
“쏴라!”
핑! 핑! 핑!
요란한 조총소리와 피웅... 하는 화살소리가 울렸다.
휘익!
닌자가 휘파람을 불자 말이 달려왔다.
“요치야... 가자!”
닌자가 말에 올라 말하자 요치가 쏜살같이 달렸다. 그때,
탕! 탕! 탕!
핑! 핑! 핑!
조총소리와 화살소리가 들리고,
끼이익!
하는 문 열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워...!
닌자는 급히 말을 세워 숲으로 말을 몰았다.
성을 바라본 닌자는 깜짝 놀랐다.
이미 잡히거나 죽을 줄 알았던 사울이 해자에서 나와 숲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사울의 뒤로 뒤쫓는 사무라이들이 낙엽처럼 뛰어 내렸다.
급히 열린 성문에서 끼릭끼릭하며 연도교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리가 채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기병들이 해자를 뛰어넘어 달려왔다.
도망치는 사울과 가장 앞서서 뒤쫓는 사무라이 사이의 거리는 약 30여 미터.
뒤쫓는 사무라이에게 잡히기 전에 사울이 숲으로 도망칠 수 있지만, 이미 해자를 넘은 기병에게 잡힐 것이다.
닌자는 급히 말을 몰아 사울에게 달려갔다.
숨이 끊어지도록 숲으로 달리던 사울은 옆에서 말이 달려오자 칼을 세워 들고 잔뜩 경계했다.
닌자가 사울의 앞에서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크게 허공을 발로 차며 멈췄다.
“타!”
닌자가 소리치며 사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옥을 탈출할 때 자신을 도와준 닌자인 것을 확인한 사울은 급히 올라탔다.
하아!
닌자는 숲으로 급히 내달렸다.
투두두둑!
두 사람의 뒤로 총알이 나무에 박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핑!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이어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박히었다.
말은 잡목을 헤치며 달려갔다.
그들의 뒤로 총과 화살을 쏘며 사무라이들이 달려왔다.
잠시 후 기병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두두두두...!
수십 명의 기병이 숲을 달리자 거대한 물체가 숲을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들은 새들이 날아오르고 멧돼지며, 사슴이 깜짝 놀라 말에 앞서 달려 나갔다.
잡목을 짓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뒤쫓는 기병들이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숲이 끝나고 갈대밭이 시작되었다.
시야가 넓어지자 닌자가 다시 한 번 말을 재촉했다.
휘히잉!
갑자기 말이 울부짖으며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말을 진정시켜 앞으로 나가보니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밑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이 뛰어서 건너기에는 너무 넓었다.
“무기를 내리고 무릎을 꿇어라!”
어느새 뒤따라 온 사무라이들이 새의 날개처럼 펼쳐 두 사람을 포위했다.
“너희들이 이곳으로 도망칠 줄 알고 뒤따라만 온 것이다.”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어라!”
우두머리가 다시 소리치며 손을 들자 포위한 사무라이들이 화살과 총을 들어 일제히 겨누었다.
“멈추시오!”
사울이 소리쳤다.
“나를 잡아가시오. 이 사람은 이번 일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나만 잡아가시오. 그렇게 약속한다면 그대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겠소.”
“닥치고 말에서 내려라! 네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지만 저놈은 주군의 명령을 받아야겠다!”
우두머리가 화를 억누르며 소리쳤다.
사울이 사무라이와 대적하는 동안 닌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의 귀에 속삭였다.
“요치야, 나를 살려다오. 한 번 만 달려다오.”
“저놈의 목숨까지 이 자리에서 끝내고 싶지 않으면 말에서 내려라! 발사 준비!”
“잠깐! 내리겠소. 나만 잡아가면 내리겠...”
“하아!”
단발마의 외침이 들리더니 말이 절벽으로 박차고 나갔다.
“저... 저... 쏴라!”
탕탕탕탕!
조총 소리와 핑핑핑...! 화살 소리가 뒤에서 들리고 말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안 돼! 건널 수가 없어!
사울이 외치며 닌자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는 말은 이미 허공에 내달리고 있었다.
강물을 깊었지만, 강폭이 좁아 물살이 거세게 흘러갔다.
깊이 가라앉은 사울이 솟구쳐 오르는 동안에도 거센 물살에 밀려나 제대로 올라갈 수 없었다.
물살에 밀려나면서 헤엄친 사울이 뭍으로 올라왔을 때는 떨어진 곳보다 한참이나 멀리였다.
저 멀리 보이는 낭떠러지 위에서 사무라이들이 조총과 화살을 겨누고 사울과 닌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의심스러운 것이 보이면 일제히 총을 쏘고 화살을 쏘았다.
사울은 그들의 눈을 피해 급히 강둑의 잡목 속으로 숨었다.
등에 멘 보따리와 손에 들은 칼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잡목 속에 숨어 닌자와 말을 찾았다.
그러나 강물 위에도 강둑에도 닌자와 말은 보이지 않았다.
거센 강물에 떠내려갔다고 판단한 사울은 강기슭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100미터를 더 내려가자 나루가 나오고 나루 옆 10m 정도의 강둑에 허름한 집이 나왔다.
나루는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나무가 썩어 부서져있었다.
잔뜩 경계하며 집으로 다가간 사울이 뭍으로 올라와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이 비어있는 집 같았다.
빈집인 것을 확인한 사울이 안으로 들어가 다락으로 올라갔다.
2층의 다락에서 내려 보니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울은 강물을 자세히 살폈다. 지치지도 않고 한참을 살피던 사울의 눈에 저 멀리 말머리가 보였고 닌자의 검은 옷도 보였다.
말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강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만 물살에 자꾸 밀려갔다.
집을 나온 사울은 가까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여보시오!”
하지만 대답도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사울은 여러 차례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할 수 없이 강물로 들어갔다.
말에게 가까이 다가간 사울은 말을 목을 껴안고 기절해 있는 닌자를 발견했다.
말이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닌자가 껴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말의 목에서 닌자를 떼어 내 뭍으로 끌고 왔다.
닌자의 맥을 짚자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제 맥이 끊겨 죽을지 몰랐다.
우선은 닌자를 살려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을 때 배를 압박해 물을 빼주면 살 수 있다는 게 생각나 닌자를 세워 뒤에서 안아 배를 압박했다.
하지만 닌자는 물을 토하지도 않고 정신이 들지도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닌자를 안고 있는 동안 닌자의 몸이 얼음처럼 차갑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서둘러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닌자를 눕힌 사울은 다시 닌자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은 푸르게 변하였고, 입술이 검게 변했다.
혼절한 상태에서도 입술은 물론 손과 발, 심지어 피부까지 파르르 떨었다.
차가운 강물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당연하였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얼어 죽을 것이다.
부엌에서 마른 짚을 찾아내어 바닥에 깔고 닌자를 그 위에 눕혔다.
우선 젖은 옷을 벗기는 게 우선이었다.
사울은 닌자의 옷을 하나씩 벗기었다.
닌자가 호흡을 편하게 하기 위해 복면을 벗겼다.
제법 화사한 얼굴이 나왔다. 얼굴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검은 옷을 벗기자 제법 두꺼운 겉옷이 나왔다.
두꺼운 겉옷도 강물이 푹 젖어있었다.
겉옷을 벗기자 속옷이 나왔다.
속옷을 벗기는 사울은 닌자의 가슴이 봉곳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까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닌자의 봉긋한 가슴을 무심하게 보아 넘겼다.
마침내 닌자의 아래 속옷을 벗긴 사울은 깜짝 놀랐다.
허억!
닌자는 여자였다.
사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다시 한 번 살펴봐도 닌자는 여자였다.
그제서야 갸름하고 아름답게 생긴 얼굴도, 봉긋한 가슴도, 갸날픈 몸도 눈에 들어왔다.
닌자가 남자든 여자든, 무엇이든 어서 살려야했다.
닌자의 옷을 모두 벗긴 사울은 볏짚을 이불처럼 닌자의 몸을 덮었다.
서둘러 불을 피웠다.
부싯돌이 젖어 불을 피우는데 시간이 걸렸다.
혹시 뒤쫓는 사무라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연기가 거의 나지 않는 마른 싸리나무를 구해 불을 피웠다.
그런데도 연기가 피워 올랐다.
연기는 멀리서도 볼 수 있기에 이곳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이지만 닌자를 살리려면 할 수 없었다.
불이 본격적으로 타올랐지만 조선의 방처럼 온돌이 아니기에 닌자의 몸을 데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닌자의 맥은 점점 더 희미해져 이제 느낄 수조차 없이 희미했다.
몸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고, 푸른 얼굴도, 검은 입술도 여전했다.
사울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옷을 벗었다.
옷을 모두 벗은 사울은 닌자의 옆에 누웠다.
미처 닌자의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닌자의 몸이 그대로 전해졌다.
손을 뻗어 한 손은 닌자의 어깨를 잡고, 한 손은 허리를 잡아 닌자의 몸을 옆으로 돌려 눕혔다.
차가워진 몸은 마치 굳은 것처럼 돌아갔다.
옆으로 누운 닌자의 등을 잠시 보다가 안았다.
닌자의 차가운 몸에 닿은 사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울은 한동안 닌자를 안고 있었다.
처음에 얼음을 안은 것처럼 차갑다가 사울의 온기가 전해져 차츰 옅어져갔다.
체온을 전해주며 잠시 가만히 안고 있던 사울은 손바닥을 펴서 닌자의 피부를 마찰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사지하는 사울의 팔이 저려올 때 쯤 닌자를 뒤에서 안고 있는 사울은 닌자의 체온이 자신의 체온과 같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추위에 돋아난 닭의 돌기가 사라지고 얼어서 굳어있던 살도 부드럽게 돌아왔다.
얼굴도 푸른 기색이 사라지고 입술도 붉은 기가 돌았다.
위험한 상태가 지난 것이다.
비로써 닌자를 안고 있는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울은 옷을 입고 닌자를 바로 눕혔다.
처음으로 닌자를 바로 쳐다보았다.
스무 살이 넘었을 듯한 나이에, 어깨보다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
얼굴의 생김새는 계란처럼 갸름한데 턱 아래 하관이 계란보다 약간 더디게 빠졌지만 작고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아니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마는 반듯하고 넓었으며 머리카락이 만나는 곳에서 원을 그리듯이 가지런했다.
눈썹은 아미에서 시작하여 중간에 한번 굽이쳐 귀 쪽으로 길게 흘렸다.
풍성하지는 않지만 살이 도톰하게 올라와 짙게 보였다.
아미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적당하였고 잔털이 없이 깨끗했다.
감은 눈은 눈두덩이 넓은 것으로 크고 시원해보였으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모습이 한번 고집을 세우면 꺾지 않은 기개도 있을 것 같았다.
코는 오뚝하여 납작한 일본 사람의 코보다 살짝 높았지만 양옆의 광대가 올라와 오뚝한 코를 감쌌다.
인중이 깊게 보이는 것은 역시 양 볼의 광대가 높기 때문이다.
입은 적당한 크기로 닫혀있었지만 혈색이 돌아온 입술은 두툼했다.
조선에서는 작은 입에 앵두 같은 입술이 미인으로 치는데 닌자의 입술은 앵두보다 길고 두툼하였으니 입술만 본다면 조선의 미인은 아니었다.
다물어진 입술이지만 꼬리가 살짝 올라가 옅은 미소를 짓는 것 같았고,
붉은 기운이 돌아 하얀 얼굴과 비교하면 짙은 동백꽃 같았다.
새근거리며 숨 쉬는 입술 사이의 이빨이 보였는데 하얀 이가 가지런했다.
이를 검게 염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혼 전의 처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닌자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