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마지막이라는 듯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형으로 둘러서서 대결의 장을 만든 수백 명의 병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서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이 대결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 아니... 대결이 아니라 사울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성주 시마즈 야스히로와 심복 사무라이들은 방금 사울이 나온 천수각 입구 쪽에 있었다.
성주는 물론 심복사무라이들도 대결이 벌어지면 사울의 죽음 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비웃음과 동정이 담긴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울은 성주와 사무라이들 사이로, 방금 걸어나온 야시로 성의 입구에 조금 전에 자신이 죽인 사무라이의 목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목만 덩그러니 굴러와 있는 모습은 미처 눈을 감지 못하고 사울을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천수각 안에는 눈을 뜬 목 말고도 사울의 칼에 베어져 죽은 4명의 사무라이 시체가 더 있을 것이다.
사울은 미마사카로 눈길을 옮겨 말했다.
“그럼...”
이윽고 사울이 천천히 칼을 뽑았다.
사울이 미처 칼을 다 뽑기도 전에 어깨 위로 칼을 곡추세우고 있던 미마사카가
‘까아아앟~~~!’
하는 기합을 지르며 달려왔다.
거리는 불과 10발자국이었다.
검을 어깨에서 하늘로 곧추세우고 앞으로 내민 왼발을 바꾸지 않고 뜀을 뛰듯이 달려오는 자세는 시현류의 내려베기 자세였다.
‘첫 공격을 의심하지 말고 베어라’
‘온 힘을 다해 상대를 죽여라.’
시현류의 특징을 머릿속에 그려놓은 사울은 이미 이세 미마사카가 어떻게 공격할지 알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한 내려베기를 한다.
상대가 첫 공격을 막으면 그 힘으로 앞으로 내달리며 가슴이나 허리를 벨 것이다.
그렇게 공격하려면 상대보다 칼이 더 길어야 유리했다.
만약 상대가 첫 공격을 피한다면 일반 검법으로 생각하고 피할 것이다.
즉 오른 어깨에 칼을 두고 내려베기면 뒤이어 오른쪽으로 칼을 올려 가슴이나 허리를 베는 것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러나 시현류는 상대가 생각한 반대 방향으로 두 번째 공격을 하는 것이어서 보통 사무라이는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사울의 침입으로 성안이 시끄러워지자 성문의 경비병도, 망루의 경비병도 모두 시끄러운 성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역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 허리에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칼을 찬 닌자가 성벽에 접근했다.
하지만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닌자가 성으로 침입하기에는 성벽이 너무 높았다. 닌자가 성벽에 붙어 침입할 방법을 찾을 때 성안에서 사울의 외침이 들렸다.
“미우라 다이스케!”
사울의 외침을 들은 닌자는 흠칫 놀라 마치 소리가 나는 성안이 보이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들고 성안을 바라보았다.
“미우라 다이스케 나와라! 너와 대결하려고 찾아온 조선의 싸울아비다!”
연이어 외치는 소리를 들은 닌자의 눈이 무서우리만큼 반짝였다.
닌자의 크고 투명한 눈은 성으로 침입할 방법을 찾으려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높고 긴 성벽만이 보였다.
마음이 급해진 닌자는 혹시 성문 쪽에도 소란이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 다고 생각해 성문으로 달려갔지만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도대체 누가 미우라를 찾지?’
성문에서 망루의 경비병을 살핀 닌자는 경비병이 성안을 보고 있는 사이에 해자를 넘는 다리를 건넜다.
숲속으로 달려갔다.
해자를 건너 숲까지 이어진 100여미터의 길에 닌자의 모습이 완전히 노출되었지만 모두 성안에 정신이 팔려있어 닌자를 발견한 경비병은 아무도 없었다.
숲에 들어간 닌자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울이 성에 침입하기 전에 성을 살피던 바위 위였다. 닌자는 바위에 우뚝 서서 성안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 모습이 마치 늑대가 서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천수각의 남쪽 입구의 문이 열리고 사무라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 처음에는 창을 든 경비병들이 쏟아져 나와 문을 막듯이 반원을 그리며 줄지어 섰다.
그 뒤에 사무라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닌자가 보기에 가장 급이 낮은 아시가루(足輕)들이 나와 원을 그리듯 반원을 만들자 그 뒤로 단계 급이 높은 가치(徒士) 사무라이가 나왔다.
가치는 경비병 사이사이에 섞여 섰다. 그 모습이 경비병으로 감당이 안되면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치 뒤로 최고급 사무라이(侍)들이 나왔다.
인원이 많아질수록 문을 중심으로 반원이었던 것은 점점 원의 형태로 되더니 사무라이들이 나오며 원을 만들었다.
사무라이들 중에 한명이 원 안으로 걸어가 한쪽에 서자 마침내 검은 옷을 입은 닌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원 안의 다른 쪽에 섰다.
‘대결이다!’
바위에서 지켜보는 닌자가 생각했다.
사무라이와 닌자의 대결.
닌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검승부를 벌이는 대결은 사람의 목숨을 찰나라고 할 만큼의 순간에 승패가 결정 나고 한사람이 죽는다.
그 찰나...
눈을 깜박이는 그 순간에 승패가 결정 날 수 있기에 모든 시선이 대결하는 곳에 집중되었다.
닌자가 침입하기에는 지금이 완전한 기회지만 닌자 역시 대결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미우라 다이스케를 찾는 소리를 들었기에 누가 미우라를 찾는 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무라이 앞에 서서 대결을 앞 둔 닌자는 비록 두건은 벗어졌지만 너무 멀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닌자가 마침내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약 5발걸음 정도. 기다리던 사무라이가 이윽고 칼을 뽑았다.
닌자의 긴장된 입에서 침이 꼴깍 소리를 내며 목을 넘어갔다.
미마사카는 사울이 준비도 하기 전에 공격해 왔다.
그러나 시현류를 연구한 사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미마사카의 첫 공격을 피한 사울은 일반 사무라이의 행동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미마사카의 시간을 빼앗아 호흡을 흩뜨려 트리고, 자신이 칼을 빼서 준비도 하기 전에 미마사카가 공격할 것을 사울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칼을 빼서 자세를 잡기보다 자연스럽게 내려트려 놓았다.
한순간에 달려와 내려베기가 실패한 미마사카가 왼쪽으로 칼을 움직여 가슴을 베려고 할 때, 내려트리고 기다린 사울은 우요격세로 미마사카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갔다.
미마사카의 칼이 미처 사울의 가슴에 도달하기 전에 사울의 칼이 미마사카의 가슴을 지나 목을 지나갔다.
하지만 미마사카는 역시 사무라이였다. 사울의 칼이 가슴을 베기 전에 한발 뒤로 물러나 피했다.
미마사카는 두번째 공격을 찌르기로 변형했다.
칼을 앞으로 내질러 가슴을 찔렀다.
미마사카의 찌르기가 다가오자 사울은 몸을 틀어 피했다.
아차...
시현류를 상대하려면 일반 무사의 행동과 달라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사울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왼쪽으로 틀어 피했다.
그 순간 미마사카의 칼은 옆으로 틀어 사울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피할 시간이 없는 사울은 급히 칼을 들어 막았다.
챙!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무사의 대결에서 칼을 칼로 막는 우둔한 짓을 벌인 것이다.
미마사카는 역시 사무라이였다.
사울이 칼을 칼로 막는 순간 허리에 찬 소도를 뽑아 사울의 허리를 베었다.
칼이 하나인 사울은 급히 칼을 거두고 물러섰지만 허리의 옷이 베어져 펄럭거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허리가 두 동강이 나는 순간이었다.
3초식.
순식간에 3초식이 흘렀다
. 3초식 동안 사울은 미마사카의 공격을 피하고 막기에 급급했다.
미우라가 3초식이면 미마사카의 목을 벨 것이라고 했는데 사울은 단 한 번도 공격하지 못한 것이었다.
만약 미우라와의 대결이었으면 사울은 죽었을 지도 모른 것이다.
허리를 벤 미마사카의 소도를 피한 사울은 몸을 한 바퀴 돌려 우뚝 섰다. 몸을 한바퀴 돌리는 순간 사울의 눈에 미마사카가 양손에 칼을 든 모습이 들어왔다.
오른 손에 장도를 들고 왼손에는 미처 칼집에 넣지 못한 소도를 들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미마사카의 상태를 파악한 사울은 곧바로 두손으로 칼을 잡아 표두로 미마사카의 머리를 두쪽 내려고 내려쳤다.
미마사카는 사울의 칼이 머리에 내려오자 장도를 들어 막았다. 사울의 칼을 막고 왼손의 소도로 사울의 허리를 다시 베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미마사카의 소망일 뿐 이었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나더니 사울의 칼은 미마사카의 장도를 지나 가슴으로 베어나갔다.
위험을 느낀 미마사카는 소도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사울의 칼을 피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승부는 끝났다.
사울의 칼은 미마사카가 막은 장도를 힘으로 내려누른 다음 가슴을 베려고 다가갔다.
미마사카는 밑으로 내려간 장도를 들을 사이가 없어 왼손의 소도로 막으려하였지만 사울의 칼은 옆으로 틀어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미마사카는 두 손에 칼을 들었지만 어느 칼도 목을 노리는 사울의 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미마사카는 양손에 든 두 개의 칼을 먼저 떨어트렸다.
챙그렁...!
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잠시후 미마사카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5초식이었다.
5초식 만에 미마사카를 베었지만 사울이 쉽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만약 사울이 시현류를 몰랐다면 미마사카가 예상한 곳으로 피했을 것이고 미마사카의 두 번째 공격으로 사울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든 사울이 이겼다.
미마사카의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지자 지켜보던 사무라이와 경비병이 모두 놀라 얼굴로 입을 열지 못했다.
“미우라 다이스케! 어서 나와라! 나와 대결하자!”
사울은 시마즈 성주를 바라보며 버럭 소리쳤다.
시마즈의 안색이 흐려지더니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사울이 시마즈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미우라 다이스케와 대결하게 해주십시오! 미우라 다이스케를 죽여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
사울이 한발 앞으로 나가자 시마즈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미리 준비한 그물을 일제히 던졌다.
사울은 자신을 사로잡으려고 그물을 던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재빨리 그물을 피해 물러섰지만 소용없었다. 그물은 사방에서 날라 왔고 사울의 몸을 그물에 집어넣지 않더라도 몸 위에 쏟아져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마즈... 이게 무슨 짓이냐!”
그물 속에서 사울이 소리쳤다.
“미우라 다이스케와 대결하게 해라! 미우라 다이스케! 네놈과 대결하기를 원한다. 사무라이 답게 나와 대결하자! 네놈을 죽여 원수를 갚을 것이다!”
사울은 그물 속에서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울의 칼을 빼앗고, 창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거꾸로 매달린 사울은 아래를 보았다.
바닥에서부터 거의 2m 정도 띄워졌다. 묶인 발이 천정의 끝에 닿아 멈추었으니 감옥의 높이는 거의 5m에 이른 것이다.
눈을 이리저리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돌로 만든 감옥은 네모반듯했고 끝에서 끝의 길이가 5m 정도였다.
사울은 감옥의 중앙에 있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으며 감옥 문은 견고한 철로 격자로 만들어 안을 감시할 수 있게 했으며 문을 제외한 3면은 돌이었다.
돌 벽의 중앙에 화톳불이 있어 희미하게 감옥을 밝혔다.
체중이 모두 실려 묶인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거친 줄이 발목의 살을 파고들어 살이 벗겨진 것 같았다. 또한 피가 거꾸로 몰려와 얼굴도 벌겋게 물들었고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허억!’
점차 목의 숨구멍이 막혀 고통스러워졌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어차피 미우라를 만나 대결하면 이기든 지든 없어질 목숨이었다.
“미우라와 대결하게 해주시오!”
울분에 찬 사울은 다시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누구하나 상대하지 않았다.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외치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울은 차츰 치쳐갔다.
‘침착하자.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사울은 조용히 기를 모으며 기다렸다.
죽을 목숨이면 미마사카를 베었을 때 죽었어야 했다.
미마사카보다 더 고수들이 지켜보았는데도 사울을 살려서 감옥에 가두었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 연장 된 것이었다.
기를 모으며 차분히 기다리자 분노가 차츰 진정되었다.
사울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의식을 집중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던 사울의 귀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넷….
발소리는 십여 명 이상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하는 마찰음이 들리고 사울의 몸이 아래로 내려졌다.
마지막에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쿵하는 소리가 감옥에 울렸지만 이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하자 아프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완전히 내려진 사울의 몸을 사무라이 두 명이 양쪽 겨드랑이를 끼고 일으켜 세웠다.
“횃불을 가까이 비춰라!”
횃불을 든 사무라이가 사울의 얼굴 가까이 횃불을 들이 대었다.
우뚝 선 사무라이와 사울의 사이에 횃불이 비춰 졌다.
사울의 앞에 처음 보는 사무라이가 서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과 다부진 어깨...
사울이 알고 있는 미우라 다이스케의 모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