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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추이기담집
작가 : 이은성
작품등록일 : 2022.2.3

추이꾼에 대해 알고 계시오?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떠돌며 기이한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들을 이르지.
세상에는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삶이 사는 법이고, 우리 눈에는 뵈지 않는 삶이 역동하며 제 이야기를 하는 법이라오.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기담 모음집입니다.

rio_siena@naver.com

 
채홍 : 오색의 다리
작성일 : 22-02-17 00:18     조회 : 176     추천 : 0     분량 : 8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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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렁이는 빛깔이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점멸하였다. 나그네는 길게 고개를 빼어 시리게 갠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하게 걷힌 하늘 위로 색색의 다리가 드리웠다. 그것은 기묘하게 꿈틀대는 듯도 하였고 우직하게 버티고 선 양도 하였다.

 “날씨 좋네.”

 폐부 깊숙이 스미는 청량한 공기가 물기를 가득 머금고 푸르렀다. 나그네는 사뿐히 걸음을 떼었다.

 

 

 

 채홍彩虹

 : 오색의 다리

 

 

 

 

 “오라버니는 어데를 가는 중이라구?”

 “사방팔방 발길 닿는 곳에를 가는 중이지. 그러다 우리 연화 같이 어여쁜 아이가 있거들랑 아주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일렁이는 치맛자락이 꼭 하늘 위로 놓인 다리 같았다. 그 고운 빛깔이며 손 끝에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며. 여염집 앞에서 한껏 아양을 떠는 기생 하나에 붙들린 사내의 모양새가 영 측은하고 한심했다.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찬 것은 그런 탓이었다. 들릴 줄은 몰랐는데도 사내의 귀가 퍽 밝았던 터인지 나그네와 사내의 눈이 마주했다. 이크. 무어라 한소리를 들어도 변명할 길이 마땅치 않겠구나. 그리 생각한 것과는 달리 사내는 픽 웃어보였다.

 “오라방?”

 “어어, 연화야. 여기 마침 내 막역한 지기가 왔구나.”

 도통 영문을 알 길이 없어 어물어물 하였더니 이제 사내는 능청맞게도 어깨동무를 하며 나그네를 끌어당겼다. 뭐? 누가 누구의 지기라고?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라 나그네는 입만 뻐끔대었다.

 “예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려무나. 이 친구가 이 나이를 먹도록 여즉 여색에 눈이 멀어 다른 곳에선 코빼기도 뵈지를 않더니 이런 곳에서야 겨우 마주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오라버니, 어여쁜 아이들을 같이 보내드릴까?”

 “아니, 아니. 그 고운 마음씨는 고맙지만 벗과의 오랜 회포를 풀고 싶으니 우선은 단 둘이 시간을 보내게 해주련.”

 그런 경위로 정신을 차려보니 사내는 나그네와 마주앉은 채였다. 나그네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할 말을 찾다가 은근 슬쩍 사내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척 보아도 값이 나가는 고운 비단옷에 주렁주렁 매달린 색색깔의 주영이 눈에 들었다. 돈을 쓸 데가 차고도 넘쳐 여색에도 아낄 줄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하였다. 헌데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영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간 무탈하시었나.”

 나그네를 이전에도 보았다는 듯 말하였다.

 “……뉘시오.”

 “거 참, 서운하게 이러기인가.”

 “사람을 착각한 모양인데 이만 일어나겠…….”

 “호접.”

 사내의 잇새에서 흘러나온 두 음절이 낯설지 않았다. 나그네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자리에 눌러앉히며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설마.”

 “이것도 연이라면 연이겠지. 문가의 환이네, 추이꾼 양반.”

 느른하게 웃는 낯은 눈에 익은 듯 낯선 것이었다. 허나 자각을 하고 보니 귓전에 익은 이름자, 말하는 투와 음성, 문장의 중간에서 삼키며 여유롭게 이어가는 호흡까지도 귀에 익었다. 꿈에서 만난 이미 아득해진 기억이 제 눈 앞에 나타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뻔뻔한 낯짝을 하고 웃고 있으니 외려 이것이야말로 꿈이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왜 여기 계시오?”

 “그러는 자네야말로 왜 이런 데에 있나. 뭐 재미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알 필요 없소.”

 “까탈스럽기는. 허면 내 자네의 구미가 확 당길만한 이야기를 하나 해줄 터이니 자네도 여기 있는 연유를 알려주시게.”

 나그네는 사내의 얼굴을 가만 보았다. 언뜻 노여움이, 혹은 원망이 실린 눈초리였다. 그러나 사내, 환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를 않는 모양새였다. 얄미운 얼굴. 꿈에서 보았던 것이 과연 저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모양새였다. 그때의 그는 어디로 갔던가. 그랬다. 사내와 나그네는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인연이 있었다. 흰 나비 일렁이며 허공을 가득 메우던 꿈에서 마주한 일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사내는 마치 세상 모든 근심과 시름을 짊어진 양 그리도 우울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 앞에 앉은 이는 키득키득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 것이 한 마리 능구렁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전에 보았던 그 사람의 허물을 뒤집어 쓴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그네는 하릴없이 입술을 열었다.

 “추이꾼이 다니는 길에 언제는 연유가 있었으며 또 언제는 갈 길이 있었겠소. 그저 발이 이끄는대로 흩어지다 사라지는 것이 추이꾼의 삶인 것을. 예서 도깨비 나으리를 만난 것을 보니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외다만 나으리께 드릴만치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으니 송구스럽소.”

 “시시하기는.”

 환은 즐거운 듯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나그네는 그 웃음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몸을 반쯤 돌려앉았다.

 “이제 그 구미가 당길만한 이야기를 해보시오.”

 “채홍. 알고 계시오?”

 채홍. 그 단어에 나그네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걷힌 하늘 위로 오색의 다리가 기묘하게 꿈틀대는 양 하였다.

 “무지개 말이오?”

 “추이꾼이라더니 영 무지렁이군, 그래.”

 “그러는 그쪽은 나불대는 입술에 자물쇠라도 채워놓지 않고선 견디질 못하는 모양이오.”

 환은 가벼이 어깨를 으썩였다. 마치 아무 말 않고도 나그네의 속을 얼마든 긁어놓을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무의미하게 시간만 헤아릴 바에는 그러는 편이 나았다. 그래, 이 알 수 없는 도깨비의 말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그네가 막 몸을 일으키려던 차, 환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채홍의 끝을 찾고 있네. 예까지 말하면 자네도 무언가 감이 오겠지.”

 두 사람의 사이에서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채홍의 끝. 추이꾼들 사이에서는 농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무지개의 끝을 찾는 이는 가장 원하는 소원 한 가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나그네도 그 정도의 이야기라면 추이꾼들의 모임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허나 그런 이야기는 어린애들 구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실제로 겪은 이가 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이야기.

 “머리를 굴려보시게나. 영 믿지를 못하는 눈치로군.”

 “그도 그럴게…….”

 “우습지 않나? 구설에나 오르는 추이꾼과 도깨비가 이리 마주앉아 대화하고 있는 와중에, 바로 그 추이꾼이 고작 채홍 하나 믿지를 못한다니.”

 말뽄새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도 밉상인지. 나그네는 미간을 쨍그리며 환을 보았다.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모양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과 그것이 어찌 같겠소.”

 “다를 건 또 뭐가 있겠나. 편협하기는.”

 “……거 적당히 하시오.”

 “잘 생각해보시게. 무지개의 끝을 찾는 이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 단순히 추이꾼들 사이에 떠도는 농이라고 생각하기엔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그런 이야기가 왜 하필 추이꾼들 사이에서나 떠도냐는 말일세. 소원을 이룰 수 있다던가 재물을 안겨준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아주 껌벅 죽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러니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시게. 채홍은 말이야, 이물이란 말일세.”

 이물. 두 음절에 나그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추이꾼이라면 응당 그런 법이지.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웃는 환의 얼굴이 영 얄미웠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차고 일어날 것처럼 들썩이는 엉덩이를 간신히 눌러앉힌 나그네는 목을 가다듬으며 환을 재촉했다. 그래, 그래서 무어란 말이오. 그 채홍이라는 이물을 쫓는 이유가 무엇이고 또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오. 묻고자 하는 말은 자꾸만 목구멍으로 치미는데 나그네는 어찌 된 영문인지 단 한 마디도 입술 밖으로 쉬이 내뱉을 수가 없었다. 허나 환은 그조차도 다 안다는 양 굴었다.

 “어떤가, 같이 가는 것이. 나는 소원을 이루고 자네는 채홍의 정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걸세. 자네도 추이꾼이니 썩 나쁜 제안은 아니질 않나.”

 “그냥 말해줄 생각은 없는 것이오?”

 “그야 그것 외에는 나도 잘 모르거든.”

 가벼운 목소리가 신경줄을 벅벅 긁어놓았다.

 “허나 도깨비들이 아무래도 추이꾼들보다는 오래 사는 법이니 말일세. 아는 것도 그만치 많지 않겠나. 도깨비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이물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한데 세월의 흐름이라는 것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닐세.”

 “그 도깨비 양반께서 지금은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 것 같소이만.”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일 아니겠나. 어차피 자네도 마땅히 목적지가 없었다면 그 소문의 진상을 파헤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일이지. 나야 본래 채홍을 쫓는 이였고, 자네는 이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니 서로 손해볼 것도 없지 않겠어?”

 나그네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동행하기에는 불편한 이였으나 그의 말이 영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도깨비란 원래 이런 것인가. 나그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동행하겠소.”

 

 

 

 

 

 그것은 그리 유별날 것은 없었으나 기묘한 여로였다. 우선은 추이꾼과 도깨비라는 그 구성원이 그러하였고 채홍을 찾아 떠난다는 그 목적이 그러하였다. 특별한 동행이라기에는 다소 한 편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었으니 동행이라기도 겸연쩍은 데가 있고, 두 사내는 그저 나란히 길을 걸으며 이따금은 대화를 섞었다가, 이따금은 허공에 정적을 흩었다가도 하였다. 어색하게 지속되는 공기 속에서 오가는 대화는 오롯이 문답이었다. 어찌하여 추이꾼이 되었느냐, 어이하여 도깨비 마을을 떠나 바깥으로 나왔느냐, 어찌 흐르는 이물들을 돕느냐, 왜 채홍을 쫓느냐. 그러나 두 사내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어느 쪽도 정작 가장 깊고 진득한 이야기에는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어느 한 쪽도 쉬이 속내를 내보일 작정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오가는 질문은 서로의 겉만 핥아대고 있었다.

 나그네는 그저 초조할 따름이었다. 그 속내야말로 음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 나그네는 오롯이 채홍 하나만을 목적으로 이 여로에 동행을 결정한 것이 아닌 탓이었다. 이미 귀촌에 대한 기록은 다른 추이꾼을 통해 추이록에 남은 터였다. 허나 도깨비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은 그리 상세하지 않은 탓에 나그네는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자라도 더 기록해내고 싶었다. 그리 기록해낼 수 있는 추이꾼이 자신이기를 바랐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추이꾼이기를 원했다. 나그네에게는 기묘한 욕심이 있었다.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이물에 대한 탐구심, 그 어느 추이록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물을 알아내려 안달내는 욕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속내를 사내가 과연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정말로 짐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내는 실로 교묘하게도 나그네의 바람을 빗겨가고 있었다. 나그네는 채홍은 고사하고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조차 실낱만큼도 얻어낸 것이 없었다. 얄미운 도깨비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그 얄미운 도깨비의 속내는 어떠한가 하면, 기실 도깨비 환의 머릿속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 형형색색의 무지개에만 정신이 홀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는 것이 어쩌면 옳은 표현이리라. 한 걸음을 떼면 손에 잡힐 듯 하고, 또 한 걸음을 떼면 다시 저만치 성큼 멀어지는 그 아득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그리도 원망스럽고 애타고 간절하더라. 추이꾼 나그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가 무어가 중할까. 환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눈 앞에 일렁이는 채홍 뿐이었다. 그 신기루 같은 다리 뿐이었다. 언젠가 꼭 달안개 같은 이를 마음에 품은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닿을 듯 닿지 않는 모양이 달안개와 같다고 생각하였건만 지금 보니 그 모양새가 채홍과도 꼭 같다. 아지랑이 같고 달안개 같으며 무지개 같은 이. 꼭 만날 수 없는 정인의 모습처럼 그리 손끝새로 빠져 나가는 오색빛만이 그리도 중하였다.

 “……형씨?”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그네가 환을 부르고 있었다. 번뜩 고개를 들어 나그네를 돌아보니 나그네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어, 어어. 얼빠진 소리를 내며 답을 하니 나그네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하고는 핀잔을 주었다. 고 얄미운 주둥아리에 무어라 쏘아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 그만두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념을 털어냈다. 그 모양을 가만 바라보던 나그네는 여전히 웃었다.

 “왜, 무슨 일로 불러.”

 “아니, 꼭 넋이 나간 것처럼 굴기에.”

 “진짜로 넋이 빠질 일은 없으니 안심하게.”

 “에이, 아무렴은.”

 도깨비에게도 넋이 있게, 하는 말은 그만두었다. 부러 환을 자극하여 좋을 일은 없었다. 도깨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바가 없으니 우선은 비위를 맞추어두자. 그러면 나중에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제 얘기를 늘어놓겠지, 싶었다.

 “도깨비는 사람보다 몇 배는 오래 산다지.”

 “사람의 삶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긴 시간을 보내지.”

 “허면 형씨…아니, 나으리는 사람 친구도 사귀어 보셨소?”

 그러자 환은 잠시 밭은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그래, 보았지.”

 그리고, 보냈지.

 

 

 

 

 

 도깨비의 시간은 사람의 몇 배로 느리게 흘렀다. 그것을 느리게 흘렀다 해야할지 오래 흘렀다 해야할지. 도깨비 또한 시간을 빗겨갈 수는 없으나 그 자체로 멈춰진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도깨비라는 것이 본디 사람의 손때가 묻은 닳아빠진 물건에 사람의 혼이 깃들어 생겨나는 이물인지라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한 존재였고, 강한 몸은 쉬이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태어난 그대로 늙지도 병들지도 않으니 그야말로 모르는 이에게는 불로불사의 해답처럼만 여겨지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불로도 불사도 기실 그다지 달가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사람이 짐승에게 곁을 내어주고 정을 주고나면 사람보다 몇 배는 짧은 짐승의 시간 탓에 가슴앓이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정이라는 것이 온당 그런 것이 아니던가. 줄 때는 주는 줄도 모르고 받을 때는 받는 줄도 모르다가 자리를 비우고 사라지고 나면 텅 빈 구멍만 남아 허하게 바람이 숭숭 새어들어올 적에야 아, 내가 마음을 주었구나, 하는 그런 것이. 한낱 미물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러한 정이 있을 터인데 도깨비와 사람 사이에선들 그런 일이 없을까. 사람의 시간은 짐승보다 길었고, 도깨비의 시간은 사람보다 길었다. 도깨비에게는 찰나처럼 짧을 사람의 시간 동안에도 마음이 가고 정이 가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도통 막을 방법이 없었다.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런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더니 흘러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져버렸다. 환은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매정하지도 못했다. 어떤 이는 그에게 물러터졌다며 농조 섞인 비아냥을 늘어놓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그에게 그런 마음을 다 이해한다며 진심 어린 위안을 건네기도 하였다. 그렇대도 그 어느 것 하나 환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없었다.

 어떤 이의 고통에 온전히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떠난 이들은 저들의 시간을 충분히 누리다 갔으며, 본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그만치 짧다는 것 또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환이 원망하는 것은 다만, 다만 자기 자신이었다.

 “답답한 소리 하고 자빠졌소.”

 “……엉?”

 “수명이 다른 거야 그렇다손 치고, 그게 왜 나으리가 원망스러울 일이오? 나으리가 죽였소? 지들이 멋대로 떠났지.”

 “허나…….”

 “그들의 수명이 거기까지였다고? 그러니까 그건 옥황이나 삼신할미에게 따져야 할 것 아니오. 그걸 가지고 왜 미련하게 스스로를 원망한단 말이오. 그러고 있으면 뭐 이미 삼도천 다리 건넌 양반들이 ‘야, 그 꼴 퍽도 보기 좋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이러고 있을까봐? 도깨비라고 뭐 대단한 얘기나 있을 줄 알았더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오.”

 환은 입을 다물었다. 나그네의 어투에는 날이 서 있었으나 목소리는 성이 나지 않았으며 달리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나그네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팔짱을 끼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환을 보았다. 픽 웃음을 뱉었다.

 “나으리도 미련하기 짝이 없소.”

 “자네 말이 심하네.”

 “나도 미련하고.”

 그러고는 휘 돌아서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가는 모양이, 환은 어쩐지 더는 무어라 말해서는 아니 될 것 같은 기분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휘적휘적, 느린 걸음으로 나그네의 뒤를 따랐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사, 누구나가 사연 하나 둘은 가지고 살아갈 터인데.

 “이보시게, 안내꾼 두고 가실텐가?”

 “거 데려가서 뭐하겠소. 하나도 도움 안 되는걸.”

 

 

 

 

 

 우거진 수풀이 나타났을 때, 둘은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거기가 끝임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바로 저 수풀 너머에. 둘은 잠시 숨을 고르고 수풀을 헤쳤다. 그리고 기나긴 여로의 끝에서 그들은 채홍을 보았다. 채홍의 끝을 보았다. 그 오색으로 눈이 아린 다리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가. 추이꾼들 사이에서 풍문으로만 떠돌던 채홍의 정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던가.

 그들이 마주한 것은 커다란 눈이었다. 눈. 고이 감은 채로 뜰 줄을 모르는 거대한 눈이었다. 그리고 오색으로 빛나는 비늘, 한 올 한 올이 비단결처럼 고왔던 털오라기, 창백한 옥을 깎아 섬세하게 조각해낸 것만 같은 영롱한 뿔.

 “……그러니까 채홍이.”

 나그네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허.”

 환은 허한 웃음이 섞인 숨을 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채홍이 감은 눈을 떴다. 나그네와 환은 그 눈을 마주했다. 영롱한 빛깔이었다. 금방이라도 홀려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빛깔의 그윽한 눈동자였다.

 “채홍의 정체가 그대요?”

 그러나 채홍은 답을 않았다. 다만 기지개처럼 기다란 하품을 내뱉고는 홀연히 하늘로 날아올라, 그대로 훨훨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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