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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추이기담집
작가 : 이은성
작품등록일 : 2022.2.3

추이꾼에 대해 알고 계시오?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떠돌며 기이한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들을 이르지.
세상에는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삶이 사는 법이고, 우리 눈에는 뵈지 않는 삶이 역동하며 제 이야기를 하는 법이라오.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기담 모음집입니다.

rio_siena@naver.com

 
우인 : 빗물이 서리는 숨결
작성일 : 22-02-17 00:16     조회 : 180     추천 : 0     분량 : 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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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이 차올랐다. 희끄무레하게 일렁이는 시야 끝에 물기가 서렸다. 목구멍까지 먹먹한 습기가 스며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마다 숨통이 조여왔다. 몸이 무거웠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걸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기나긴 장마였다. 도통 끊이지를 않고 비가 내려왔다.

 

 

 

 우인雨人

 : 빗물이 서리는 숨결

 

 

 

 

 툭.

 머리 위로 떨어진 차가운 감촉은 흡사 빗방울과 같았던 탓에 여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잔뜩 찌푸린 빛깔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모양이었다. 변덕스러운 하늘이 언제 비를 떨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걸음을 서둘러야겠어. 여인은 옷깃을 바짝 여미며 발을 딛었다. 허공에 온통 습습하게 물기어린 비 내음이 났다. 그것이 걸음을 뗄 적마다 짙어져 마치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양 하였다. 여인의 무거운 걸음은 점차 느려지다 종래에 온전히 멈추었다. 시선의 끝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뒷모습이 여인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박혔다. 하늘을 올려다 본 채로 선 사내는 무어가 그리도 허망한지 온통 혼을 빼놓은 얼굴이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어쩐지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저어.”

 입술을 떼어 그이를 부르자 돌아보는 얼굴은 여인이 알던 것과는 분명하게 다른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안심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물어오는 그이의 목소리는 먹먹하게 젖어있었다. 그이가 입술을 뗄 적마다 뻐끔뻐끔 공기방울 뱉는 소리가 나는 듯 하였다. 아아, 귀에 익은 그이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수천수백 번을 닳도록 들었던 목소리. 수만 번을 그렸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밀려드는 듯 했다. 여인은 연유를 알 수 없이 사내를 붙들고만 싶었다. 마치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여인은 그에게 반드시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무어가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인은 다만 사내에게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강하게 이끌렸다. 그를 도와야만 했다.

 “이리 말씀을 드리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추이꾼입니다.”

 사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럴 줄을 알았다. 그런 시선을 감내해야만 할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사내가 눈을 휘어 웃어보였다.

 “그렇습니까.”

 뻐끔뻐끔. 물고기와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혹여 근래 이상한 일을 겪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그리 물었더니 사내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여인을 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알 수 있었다. 무어라 더 말을 이어야 할까. 여인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말을 고르던 순간에 사내가 말을 꺼내었다.

 “잠시지만 동행하시겠습니까.”

 여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렸다. 산천초목이 온통 물기를 먹다 못해 물러 죽을 때까지도 비가 내렸다. 그게 언제부터였던가. 햇수로는 딱 다섯 해가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사내의 고향에서였다. 사람들은 천지신명을 찾고 우사를 찾으며 제를 올렸다. 그러나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외려 제를 지내면 지낼수록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하늘에서 쏟아붓듯 비가 내렸다. 사내가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또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산천초목이 물러 죽어버리자 마을에는 먹을 것이 없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이제 생계조차 막막해졌다. 온 몸이 습기에 절어 퉁퉁 불어터졌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하고자 젊은 청년들을 선발하여 산 너머 마을에 식량을 구해오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우연히, 정말 아주 우연히 사내가 그 무리에 합류하고야 만 것이다. 이웃마을에 식량을 구하러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비가 그쳤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알았다. 그 가운데 누군가가 비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뒤로 사람들은 한 사람 씩을 돌아가며 마을 밖으로 내보내 비가 멈추는 지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가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임을 알게 된 바로 그 날, 사내는 그 길로 짐을 꾸려 마을에서 쫓기듯 떠났다. 사내는 제 스스로 떠나겠다고 사람들에게 그리 말하였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 마을에서는 그랬다. 사내를 달가워하는 이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모두가 불어 죽기 직전이었으니 응당 그럴 만도 하였다. 사내는 그것을 모두 이해한다 말했다.

 “어디를 가도 일주일이 지나면 비가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갈 길을 잃고 헤메기만 하였다. 왜 하필 제게만 이런 일이 생기느냐며 운명을 원망도 해 보고 하늘을 탓하기도 해보았으나 이미 정해진 일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정말로 운명이 존재는 하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오갈데 없이 떠돌았다. 속절없이 하루아침에 갈 곳 잃은 방랑자 신세가 되어서는 어디를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도 알지 못한 채로 막연한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일 년을 낭비하고 난 뒤에야 사내는 제 그 괴상한 운명이 좋은 일에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은 우연히 머물게 된 가뭄이 난 마을이었습니다. 일주일을 머물자 비가 내렸죠. 마을 사람들이 그리도 간절히 원하던 비였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제가 거기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거기 계속 있었다가는 그 비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것이 불보듯 뻔했으니까요. 그래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는 줄곧 메마른 마을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내는 몇 번인가 들렀던 마을에 다시 들르기도 하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반가이 맞아주었고, 사내가 머물면 여지없이 곧 비가 내렸다. 어찌 비가 내릴 무렵만을 딱 맞추어 오느냐며 사내에게 농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비가 내릴 무렵을 알고 있는 것만은 맞으니 사내는 그저 가만히 웃곤 하였다.

 “이번에도 일전에 들렀던 마을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을이 말랐다던가요.”

 “잠깐의 비 정도는 괜찮을테니 말입니다.”

 여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웃었다. 그러나 여인은 어째서인지 그 미소가 석연치 않았다. 사내의 미소는 어딘가 눅눅한 데가 있었다. 자작하게 내리는 비처럼 촉촉하게 젖어 어쩐지 우울한 데가 있었다. 진정으로 웃음이 나와 웃는 것은 아니겠구나. 여인은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사연을 가진 이들은 으레 그러하였다. 특히나 이물에 관여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의 사연과 분명히 다르기에 더욱 그랬다. 애써보아야 그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가 버렸을 텐데. 한 때 여인이 그러했듯이.

 갈 곳을 잃고 떠도는 것은 추이꾼도 같은 입장이었다. 여인은 더 머물 곳이 없어 스스로 떠나기를 선택하였다지만 사내도 같은 사정일까. 홀로 떠도는 것은 그리 쉬운 일도, 즐거운 일도 아니었다. 제 스스로 떠나겠다 말하였어도 여정을 떠나본 이만이 알 수 있는 외로움이나 설움이 존재하는 법이다. 사내에게도 필시 그런 것이 있을 터였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외로움. 여인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는 어떠한 설움. 그럼에도 사내는 웃었다. 섧게도 웃었다. 공기는 또 어느새 물기에 젖어 눅눅했다. 사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아마도 제 눈에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인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곧게 보았다. 사내의 표정은 그림으로 그려놓기라도 한 양 변한 데가 없었다. 가만히 숨을 삼키는 행간이 지나치도록 길게만 느껴졌다. 사내가 입술을 떼었다. 잇새로 물거품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제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추이꾼이 겪는 일 중에 언제는 믿음직한 일이 있었냐만은 사내가 하는 이야기는 정말로 바로 듣고 납득하기에 어려운 말이었다. 하늘이 흐렸다. 허공에는 비냄새와 같은 물비린내가 진동하였고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물방울 터지는 듯 일렁이는 소리가 엉켜들었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저는 천천히 젖어가고 있습니다.”

 사내의 말과는 달리 그의 옷은 바짝 말라있었다. 여인은 사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물에 잠겨가고 있습니다.”

 하며 들어보이는 손이 느리고 묵직했다.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밭은 숨이 턱 끝에서 치밀었다. 사내의 음성은 그렇게나 위태했다. 여인은 사내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그 몸짓을 보고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다 알아요. 그러니 부러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좋아요. 그리 말하는 것처럼.

 

 

 

 

 

 “인연 참 질기네.”

 주막에서 마주한 것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태연자약하게 손을 흔들어뵈는 모양은 마지막에 보았던 그 때와 다를 것이 없어 여인은 외려 안심이 되었다. 갓 걸음을 떼기 시작한 햇병아리 추이꾼보다야 훨씬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가벼이 목례를 하여 인사에 답했다.

 “그새 길벗도 만들었나봅니다.”

 “이 분은 제게 처음 이 일을 알려주신 추이꾼 나으리십니다.”

 “이제는 내 말도 막 씹어드시고.”

 측은지심으로 도와주었더니 은혜도 없고 정도 없네. 나 원, 서러워서 살겠나. 나그네는 그리 투덜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은 사내에게 그를 소개했다. 사내는 조용히 침잠하는 눈길로 나그네를 바라보았다가 눈을 휘며 웃어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물에 잠긴 목소리는 나그네의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어이구, 그쪽은 꼭 교인과도 같은 음성을 내십니다.”

 교인. 여인은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이물의 일이다. 그리고 여인이 나그네에게 사내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 사람은 오던 길에 만난 나으리신데 다니는 곳마다 그리도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천천히 물에 잠겨가고 있다고 하십니다. 벌써 목구멍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하십니다. 이대로라면 나으리께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기고 말 테지요. 그러니 나으리, 나으리께서 이 분을 부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속사포처럼 떠들어대는 모양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 법도 하건만, 나그네는 의외로 제법 진중하게 여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차츰 젖어가는 몸, 점차로 무거워지는 팔다리, 마침내 차오르는 숨. 잇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간신히 뱉어내는 물거품이요, 머리 위로 끊임없이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에 두통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일을 다섯 해를 겪었다. 통상적으로는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도 사내는 가물어 죽어가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비를 내렸다. 누가 보아도 이물의 일이었다. 평범한 이는 알 수 없는 추이꾼들의 일이었다.

 “저는 알지 못하는 이물입니다. 허나 나으리께서는 저보다 오래간 이물을 쫓으셨지요.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좋습니다. 이 분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알고 계시다면 부디, 꼭 알려주세요.”

 나그네가 미간을 좁혔다.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에 골몰하는 듯 하였다. 여인은 그 모양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남의 일인 것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조급해 할 이유도 없건만 여인은 그리도 조바심을 내었다. 나그네는 잠시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나그네와 눈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나그네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여인이 그리 재촉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마도 잃어버린 남편이 떠오르는 탓이겠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의 그림자가 사내의 모습과 겹쳐보인 탓이겠지. 또한 이물에게 아들을 빼앗겼던 제 처지가 떠올라서인지도 모른다. 우스운 일이었다. 기껏 추이꾼이 되어놓고도 사람의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물을 쫓으면서도 이물과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나그네도, 여인도 그러했다.

 나그네는 내려놓은 등짐을 풀어 닳아빠진 서책을 꺼내었다. 추이록이라 이름새겨진 서책은 얼마나 만지고 얼마나 넘겨대었는지 꺼낸 것만으로도 풀석이며 종이 먼지를 날렸다.

 “비. 비…비라.”

 그리고 나그네의 손이 멈춘 책장 위에 선명하게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인.”

 

 

 

 

 

 초라한 어둠이 내렸다. 일렁이는 호롱불을 곁에 두고 두 사내는 마주보았다. 여인은 옆 방에서 잠이 든 지 오래였다. 아주 중한 일이라도 말하려는 것처럼 나그네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였으나 사내는 여전히 무어가 그리도 마냥 괜찮은지 달라진 데 없는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알고는 있소?”

 “짐작은 합니다.”

 뜬구름 잡는 듯 머리도 꼬리도 잘라낸 말에도 사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외려 한숨이 터져나오는 것은 나그네였다. 하아.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뱉어내었다. 쩝. 입술이 바짝 말라 괜히 입맛을 다셨다.

 “여태껏 버틴 것도 용하다는 것도?”

 “여기까지 닿을 수 있을 것조차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허면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계시오?”

 사내는 웃었다. 웃는 듯이 울었다. 일그러진 입꼬리가, 휘어진 눈매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그네는 필시 사내가 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신세를 진 것이 죄송해서 어쩌지요.”

 “저 여인은 당신만을 보는 것이 아니니 괘념치 마시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딱하여.”

 이 양반 좀 보시게. 나그네는 기가 찼다. 사내는 이미 여인이 저를 잃어버린 남편과 겹쳐 보고 있다는 것도, 제 자신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찌 뻔뻔하게 그 곁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오갈데 없이 썩어 문드러진 마음만을 간신히 움켜쥔 채로 살아가는 사람의 곁에서. 사내는 얼 빠진 표정의 나그네를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뭐?”

 “그 분을 그 분으로 보지 않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는 늘어놓는 사연이라는 것이 어쩌면 딱하고, 또 어쩌면 아주 흔한 신파극이었다. 흔한 이야기였으나 나그네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 뿐이었다. 흔한 사람들이 사는 흔한 이야기 속에서의 기이한 것.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그네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은 뒤 가만히 사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나긴 걸음을 걷던 와중도 사내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가물어 지쳐버린 마을에도 웃는 이는 있었다. 사내가 만난 것은 그런 여인이었다. 쉼없이 머리 위로 비가 쏟아져 내리건만 그런 사내에게도 햇살같은 미소를 선물한 여인이었다. 그 곁에 있자면 순간이나마 내리는 비도 멎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비가 멎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사내는 그 곁에서 그 미소를 보자면 물기 찬 숨통이 비로소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 여인이 있었다.

 가뭄이 길게도 이어가던 마을이었다. 산천초목이 모두 지쳐 바싹 말라 누렇게 늘어진 날이었다. 사내는 길을 걷던 끝에 마을에 도달하였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사내에게는 어느 것보다 익숙한 냄새였다. 사내는 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사내는 햇빛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진동하는 것은 역겨울 정도의 햇빛 냄새였다. 뙤약볕이 내리쬐어 땅바닥은 쩍쩍 갈라지고 사람들은 조갈이 일어 숨을 헐떡였다. 사내는 이곳이야말로 제가 머물 곳이라 여겼다. 이레 정도를 머물면 비가 쏟아질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충분히 비를 뿌리고 자리를 뜨면 되겠구나, 그리 생각하였다. 그리 작정을 하고 마을에 들어섰을 때, 어느 여인을 보았다. 모두가 지쳐 송장같은 걸음을 떼는 와중에도 여인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사내는 그이에게 한 눈에 마음을 빼앗겼던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웃는 낯을 보면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라도 그 미소를 보면 한 눈에 혼을 뺐을 것이다.

 사내는 머무는 동안 여인과 부쩍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여로를 지나던 와중 스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건만, 옷깃만 스쳐도 연이라더니 마을 어귀에서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연이라면 연이었나보다. 사내는 더욱 더 깊이 여인에게로 빠져들었다. 허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이별을 재촉했다. 나그네는 하루 이틀 날짜를 세었다. 이레. 이레를 버텼다. 비가 내린 뒤로 이레가 지났다. 이제는 정말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었다. 여인의 곁에 있을 적이면 웃을 수 있었다. 숨통이 트여 비로소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허나 이제는 그런 시간도 전부 끝이었다.

 여로를 떠난 뒤에도 생각이 밟혔다. 발이 묶여 떠나지를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빙글빙글 맴도는 얼굴이 해사한 그 얼굴 하나 뿐이었다. 그런 여인이 있었다.

 “그이를 닮았다는 말이오?”

 “저를 다른 분의 그림자로 보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끼리끼리 논다더니.”

 나그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찌 이리 미련한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어찌 이리도 미련하고 딱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는 지천에 깔린 흔해빠진 사연이오.”

 “예, 그렇지요.”

 “그런데도 보고싶은 것이오?”

 “그러니 계속 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내는 웃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마음을 전할 용기도 없으면서.”

 “감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곁에 머물 수도 없는 사람인데요.”

 “……나 참. 꼭 그이가 그대 마음을 받아준다는 확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게요. 그런 확신도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사내는 여전히 웃었다. 나그네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 미소를 보자면 그저 갑갑한 심정을 참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전할 수 없어요. 사내는 그리 말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 나그네는 괜히 모난 소리를 뱉었다.

 조용한 밤, 창호문 너머 새어나가는 음성을 듣는 이가 있었다. 여인은 가만 숨을 집어삼켰다. 언젠가의 마지막 날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여인은 이제 추이꾼이 다 되어버린 듯이 가슴이 아픈데도 눈물을 참을 수가 있었다. 운아, 하고 짧게 누군가의 이름을 읊기야 하였으나.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쏟아지는 폭풍우에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는 날이었다. 사내는 그 비를 견디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죽어버렸다. 떠난 자리에는 물기만이 축축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비가 도통 그칠 생각을 않습니다.”

 “그러게요. 몸이 무거운 날씨지요.”

 “비를 싫어하시나 보아요.”

 다정하게 웃는 낯이 묘하게도 익숙한 분위기였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이를 보았다. 그리고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아, 정말로 햇살 같은 여인이구나.

 “아무래도 쳐지기 쉬운 날씨지요.”

 그리 대답하자 그이는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이만하면 홀릴 법도 하였다. 그리도 맑게 웃는 얼굴에 여인은 씁쓸하게 마주 웃었다. 그이는 말했다.

 “저는 비가 참 좋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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