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크흠. 그 때는…… 내가 미안했다.”
선심 쓰듯 던져진 사과에 프레이의 녹안이 사느랗게 가라앉았다.
“너도 참, 다 지난 일로 굳이 사과까지 받아야겠다니. 하여간, 이래서 여자아이는.”
“할머님, 제발!”
중재자이자 조모와 마찬가지로 프레이에게 사과해야 하는 입장인 베네피트가 프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돌로레스가 더욱 역정이 나 투덜거렸다.
“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느냐?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손녀라는 것이 좋은 일로 조모의 말년을 편히 해줄 생각은 않고 부득불 사과하라며 저러고 있는데! 피트, 네게도 섭섭하다. 네가 백작인데, 일개 백작 영애에 불과한 네 누이 마음 좀 풀어보겠다고 내게 사과를 시켜? 남매가 참으로 우애가 좋구나, 흥!”
손자의 만류에도 구시렁구시렁 덧붙이는 말만 봐도 전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더는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프레이는 실랑이를 벌이는 조모와 동생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저는 사과를 받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단지 베네피트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뿐이에요.”
“뭐?”
“누님!”
사과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 하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나.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으로 엉망이 된 영지의 뒷수습을 떠맡길 심산으로 거짓 사과를 입에 담는 가족들이 새삼 지긋지긋했다.
프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미련 없이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해서! 네 동생이, 레지우드 백작이 힘들게 마련한 화해의 장을 이런 식으로 박차고 나가? 심지어 내가 사과까지 했는데? 저런 되먹지 못한!”
손녀의 태도에 분개한 돌로레스가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그에 프레이는 차게 웃으며 우아한 동작으로 동생을 향해 예를 차렸다.
“일부러 화해의 장까지 마련해주셨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 유감입니다, 백작님. 그리고 백작 대부인? 받고 싶지 않은 사과를 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랍니다. 최근 사교계에 두문불출하고 계신다지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 간의 예의를 아주 잊으신 모양이군요.”
몇 달 전부터 사교계에서 완전히 외면 받은 돌로레스의 처지를 교묘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베네피트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누님, 말씀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한 건데, 왜? 그러게 할머님 좀 잘 챙겨드리지 그랬니. 나도 했던 일을 네가 왜 못 해?”
“그야……! 사교계의 일은 여인들의 일이지 않습니까.”
“베네피트, 레지우드 백작인 네가 그런 말을 해서야……. 안주인이 없으면 당연히 그 쪽도 네가 챙겨야 해. 친척들의 도움을 받건 가신들을 기용하건, 귀족들의 일은 사교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어.”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와 누님은 입장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네가 더 유리한 입장이니까. 나는 백작 대리라는 붕 뜬 상태로 영지와 사교계 양쪽을 챙겨야 했었고.”
“…….”
“저, 저! 봐라, 피트. 내가 뭐랬니. 네 누이는 아직도 레지우드 백작위에 미련이 남아 있다니까!”
“이런.”
프레이는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는 투로 제 조모를 돌아보았다.
“저런 상태이시니 사교계도 등을 돌리지. 피트, 할머님의 망상병을 저대로 둘 참이니?”
“허?”
“누님! 언행을……!”
“안타깝게도 저는 레지우드에 그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보같이 레지우드를 위해 살던 저는 이제 없어요. 아시잖아요.”
프레이는 가족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살짝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당신들이 나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 * *
“……늦었습니다.”
누군가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통보였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슴을 치고 울며 부정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레이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마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탓이리라.
그래. 내 몸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심지어 많은 징후들이 있었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허물어졌다는 걸.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쉬셔야 한다고. 그것 밖에 치료법이 없다고. 허나 아가씨께서는 그러지 않으셨…… 예. 쉴 수가 없으셨죠.”
백작가의 주치의인 펄만은 안쓰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 프레이는 태연한 얼굴로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었다.
벨벳 소재의 나이트가운을 걸친 어깨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새하얀 잠옷 소매 밑으로 드러난 손목은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창백했다.
“아가씨처럼 체내 마나로가 활성화되어 있는 사람은 매 순간 숨 쉬듯 마나가 생성됩니다. 물론 이를 적절히 소모할 수 있다면 문제될 게 없지만, 안타깝게도 아가씨께서는 마법을 사용하실 수 없어…….”
파리한 안색, 결 나쁜 회갈색 머리칼, 불투명한 암녹빛 눈동자가 프레이의 상태를 대변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천천히 죽음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마나를 배출해내는 치료도 이미 최대 치료 가능 횟수만큼 받으셨고…….”
“한 번 더 받으면?”
“절대 안 됩니다! 치료 도중 사망……하실 겁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한 것뿐이라 프레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펄만이 병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레이는 멍하니 앙상해진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볼품없이 말라버린 거람. 한 때는 뽀얗고 반들반들하니 꽤 예뻤는데.
‘우리 레이는 손이 진주처럼 고우니 나중에 고생하지 않고 잘 살겠구나.’
7년 전, 먼 타국에서 중요한 거래를 마치고 영지로 돌아오던 길에 급사한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말씀이었다.
볕 좋은 날, 정원에서 부녀간의 단란한 티타임을 가질 때면 늘 내 손을 토닥이며 칭찬해 주셨지.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을 건사하는 나를 격려해 주시며, 어디서든 나는 사랑 받을 거라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해서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인가.”
자신의 수명을 묻는 목소리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펄만은 공허한 녹안을 발견하고 한숨을 삼켰다.
“일 년 남짓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긴 휴가네.
프레이가 창밖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파릇한 싹이 움텄다. 하늘은 높푸르고 구름은 폭신한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흩어져 있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기엔 지나치게 좋은 날씨다.
* * *
프레이 앨리슨 레지우드의 삶은 누가 봐도 기구했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 동생인 베네피트를 낳고 산후열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녀의 데뷔탕트를 사흘 앞두고 마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친척들은 아버지의 장례식 전부터 호시탐탐 레지우드 백작위를 탐냈다.
인근 영지의 영주들은 물론, 지금껏 교류한 적 없는 귀족들까지 하이에나처럼 레지우드 령을 기웃거렸다.
때문에 프레이는 아버지를 애도할 틈도 없이, 가문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그녀는 우선 레지우드 백작위를 물려받으려 했다.
언젠가 작위를 두고 동생과 겨루게 되더라도, 일단은 작위 자체를 지키는 일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된다! 백작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베네피트가 계승해야 해!’
선 선대 레지우드 백작 부인이자, 프레이의 조모인 돌로레스가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손녀의 작위 계승을 반대했다.
그녀는 프레이를 천지분간 못하고 감히 백작위를 넘보는 도둑 취급했다.
동생이 성인이 되면 작위를 넘기겠다는 프레이의 맹세에도, 돌로레스는 요지부동이었다.
프레이는 좌절했다.
물론 조모의 반대에는 친척들의 이간질도 작용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완전히 계승한 백작위보다는 비어있는 백작위가 더 차지하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실상 조모의 반대는 친척들의 농간보다 고릿적 편견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여자는 계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백 년도 전에 성문법에서 지워진 구습 말이다.
돌로레스는 프레이가 오래 산 늙은이의 현안을 무시하고, 법을 내세워 조모를 핍박한다고 억지를 썼다.
거기에 더해 이렇게 서럽게 사느니 자신도 아들의 뒤를 따르겠다며, 거나한 가짜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결국 프레이는 조모의 뜻대로 작위 계승을 포기했다.
집안 어른을 연달아 잃을 수도 없었고, 친척들에게 조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명분을 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프레이는 한층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백작과 백작 대리의 권한은 엄연히 그 무게가 달랐으므로.
* * *
‘프레이, 이제 막 성인이 된 네가 영지를 운영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
‘걱정 마렴. 우리가 도와주마.’
친척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백작 저를 들락거렸다.
그들은 프레이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틈만 나면 백작 저에 똬리를 틀 구실을 찾았다.
천만 다행으로, 방계 문제에 한해서는 돌로레스가 프레이보다 더 극성맞게 대처했다.
물론 그 또한 훗날 백작위를 물려받을 베네피트를 위해서였지만, 프레이는 감지덕지라 여겼다.
만약 돌로레스가 친척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다면 문제는 꽤나 심각했을 테니.
프레이의 고난은 집안 단속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가신들 또한 친척들이 들먹였던 예의 경험 부족을 핑계로 명령에 불복하거나 그녀를 속이려 들었다.
그들은 꾸준히 프레이를 시험하고 이용하려 했다.
선대 백작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만큼, 가신들의 방식은 때로 친척들보다 더 은밀하고 교묘했다.
그러나 프레이는 아버지를 도와 오래도록 레지우드를 떠받쳐온 사람이었다.
처음 2년은 프레이도 몹시 고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차츰 일에 익숙해지면서, 가신들의 반발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내부가 다소나마 안정되자, 인근 영지의 귀족들 역시 함부로 레지우드에 손을 뻗지 않았다.
게다가 프레이가 미묘한 줄타기로 그들 세력 간의 균형을 잡자, 알아서 탐욕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프레이는 자신이 바란 대로 아버지가 일궈낸 가문과 영지를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아가씨는 대리인 아닌가.’
꼬리표처럼 붙은 대리라는 자격은 늘 프레이의 발목을 잡아챘다.
백작이라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길을, 백작 대리라는 이유로 두 번, 세 번 돌아가야 했다.
격무, 고립, 견제, 무시, 음모…….
달콤함조차 없는 백작 대리라는 독배는 조금씩 프레이를 망가뜨려갔다.
백작이 아니기에 성과에 대한 보람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 책임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그래도 프레이는 버텼다.
아버지의 유산인 레지우드를 잃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아직 어린 동생인 베네피트가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프레이에게 베네피트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태어나 어머니에게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한 아이였기에, 부녀는 백작 부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언제나 베네피트를 사랑으로 키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하하! 무슨 그런 재미있는 농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