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클럽 미모사(3)
“그래도 다행인 건, 적어도 그 녀석들이 사냥을 멈추진 않았다는 거야.”
사냥터가 버젓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사냥꾼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앤드류는 서둘러 지시했다.
“그러면 이제 흩어져서 수상한 놈들이 있는지부터 보자. 마약을 위해서는 버섯이 필요하고, 버섯을 위해서는 시체가 필요해. 아마 그 녀석들은 어딘가에서 또 마땅한 시체를 찾고 있겠지.”
그 말을 들은 주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 지금 흩어지자는 거야?”
“셋이서 뭉쳐 다니면, 오히려 저쪽에서 접근을 못해 올 거 아니야. 그러니 혼자 온 척 놀다가, 수상한 놈이 접근을 하지 않는지 보자고. 알았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주아는 풀 죽은 얼굴로 규호와의 팔짱을 스르륵 풀었다.
“그,그래.”
“그러면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이 자리에서 보자고. 알았지?”
앤드류는 이 말만 남기고 어깨를 들썩이며 클럽 저편으로 사라졌다. 클럽 음악에 맞춰 발걸음이 움직이는 걸 봐서는 그냥 높고 싶은 마음뿐인 것 같았다.
“그럼 수고해.”
규호 역시 그녀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럽의 요란한 불빛과 시끄러운 음악이 그의 자취를 단숨에 집어 삼켰다.
“선배…….”
같이 있고 싶었는데.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 말을 억지로 집어 삼켰다.
주아는 결국 주위를 살피다가 어정쩡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맞아, 난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다. 이 생각 하나가 억지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은 지금 마약 사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 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클럽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술을 주문했다. 불편한 차림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 껴서 노는 건 엄두가 안났던 데다, 사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다.
뭣보다 지금은 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목적대로 행여 수상한 사람이 없나 주위를 가만히 살폈다. 하지만 다들 웃고 떠느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주아는 주문한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시끄러운 소음에 천천히 의식을 기댔다.
그런데 그런 그녀 옆에 누군가 자연스럽게 앉았다.
“혼자 왔어요?”
갈색빛이 도는 금발과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외국인이었다. 이제 갓 스무살 남짓 되었을까. 이국적인 외모였지만, 콧잔등에 옅읕 주근깨가 있어 어딘가 몸만 큰 소년처럼 보였다.
“네, 혼자 왔어요.”
주아는 얼떨결에 그의 말에 대답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주아가 주문한 따랐다.
“잘 됐네. 나도 혼자 왔거든.”
이 말과 함께 그는 술을 들이마셨다. 주아는 얼떨떨한 포정으로 자기에게 접근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무언가 듣는 것만으로도 차분히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아는 입가의 술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나저나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유학 생활을 오래 했어요. 그런데 아는 친구는 없어요. 나, 보기보다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하하하, 나도 그런데. 그래서 이런데 친구도, 애인도 없이 혼자 왔잖아요.”
그러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네? 당신 같은 미녀가요?”
남자가 치켜세우자, 주아는 피식 웃으면서 손사레를 쳤다.
“칫,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이 클럽에 왔을 때부터 당신만 보였는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슬그머니 주아에게 몸을 기댔다. 주아는 잠시 멈칫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이어서 아예 손을 들어 주아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지 말고 같이 한 잔 할래요? 취했으면 기대도 되는데.”
남자는 주아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취기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사각거리는 울림이 되어 기분 좋게 살갗을 두드렸다.
주아의 심장이 빠르게 흘렀다.
이어서 그녀는 조용히 남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남자 쪽으로 향했다. 주아의 눈과 남자의 은회색 눈이 번쩍거리는 클럽 불빛 사이에서 몇 초간 엇갈렸다.
그리고 주아는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속삭였다.
“그런 말은 네 송곳니부터 감추고 해, 개자식아.”
철컥, 작은 핸드백 속에 준비해 놓은 은탄환 권총이 장전되는 날카로운 소리가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 *
“하하하하하하!”
남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광소를 터트렸다. 주아는 그런 그에게 쏘아 붙였다.
“뭘 쳐 웃어?”
“그러면 웃으면 안 되나요?”
지금 자신을 향해 총이 겨눠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되려 느긋하면서도 여유로운 어조로 주아에게 말했다.
“이 나라는 뱀파이어라는 이유로 아무나 총을 쏴서 죽이나보죠? 이거 국제법 위반 아닌가?”
“아무나? 너희들이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 죽여서 마약 재료로 쓴다는 걸 모를 줄 알아?”
“증거는?”
그 말을 들은 주아는 잠시 멈칫했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물론 이 클럽이 어떤 식으로든 마약과 연이 닿은 건 맞지만, 눈앞의 남자가 꼭 거기에 연결 되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남자는 곧장 이 빈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정말 클럽에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온 거면 어쩔 거죠?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내가 끔찍한 범죄와 거리가 있다면?”
“그,그게…….”
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상한 놈을 잡을 생각만 했지, 이런 식으로 반격이 들어올지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당황한 주아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주아를 잡아 삼킬 것처럼 다가왔다.
“그래도 당신, 마음에 들어.”
남자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일렀다.
“이렇게 빠르게 내 정체를 간파하는 여자는 드물거든. 거기다 핸드백에 총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는 더 드물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주아와의 얼굴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다정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때요? 나랑 정말 친구할 생각 없어요? 나 생각보다 나쁜 남자 아닌데.”
그의 목소리가 주아의 의식을 흔들었다. 은탄환 권총을 거머쥔 그녀의 손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남자의 속삭임 한 마디가 그녀의 몸을 옥죄고 있던 긴장을 툭 하고 풀어냈다.
“내게 송곳니가 있든,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혼자 온 것 같은데, 그냥 함께 술 한 잔 해요.”
그러면서 남자는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부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주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술잔에 손을 뻗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의 말에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 쿵!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굉음을 내면서 둘 사이로 날아들었다.
사방에 그릇과 술잔의 파편이 튀었다. 주위에 있던 손님들은 때아닌 소란에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소란의 중심 속에서 눈을 부릅 뜬 앤드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앤드류는 송곳니를 내보이며 흡사 짐승과 같은 으르렁거림을 내뱉었다.
“오랜만이구나, 아스트라.”
앤드류는 주아에게 술을 권하던 남자에게 무뚝뚝한 인사를 건넸다. 아트라라고 불리워진 나자는 앤드류를 향해 반갑게 눈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앤디.”
앤드류는 그를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광대 새끼가아아아아아!”
“광대라니, 말이 심한데.”
아스트라는 앤드류를 보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윽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아스트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금 전과 달리 반짝이는 빛과 형형색색의 기묘한 일렁거림을 온 몸 가득 두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광대가 아니라 마술사야. 오직 한 명의 귀부인을 섬기는 마술사.”
“닥쳐, 사기꾼 주제에!”
앤드류는 그를 노려보며 손톱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의 손톱은 잘 벼린 단도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전투태세를 유지한 채 여전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주아를 다그쳤다.
“뭐해, 정신 차려!”
“어,어?”
앤드류가 다그치자 주아는 그때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얼이 빠진 얼굴로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뭔가 이상했다. 앤드류가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들어 일대를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뭐,뭐지? 저 자식이랑 몇 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머리가 이상해졌어.”
앤드류는 아스트라를 턱 짓으로 가리키며 경고했다.
“저 자식은 환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오감을 속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최면도 걸 수 있지.”
“그래서 내가…….”
“저 자식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마.”
앤드류의 말을 들은 주아는 능숙하게 장전한 은탄환을 핸드백에 꺼냈다. 아무래도 평범한 존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은탄환을 보자 아스트라가 알은 채를 했다.
“티토노스가 말한 마녀가 그쪽인가 보네?”
그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손에서 아름다운 장미 몇 송이가 자라났다. 아스트라는 주아에게 꽃을 내밀며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동생이 실례가 많았네. 형으로서 대신 사과하고 싶은데, 괜찮겠어?”
- 탕!
격발음과 함께 총알이 정확히 장미를 꿰뚫었다. 환상으로 만들어낸 장미는 총알이 스치자마자 그대로 스르륵 사라졌다.
아는 권총을 움켜쥔 채 아스트라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 너한테 내가 실례를 저지를 것 같으니까.”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아스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되려 주아에게 은은한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그는 주아를 향해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나라에서 마약으로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우리는 그냥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가려고 했을 뿐이야. 지만 중국의 감시가 생각보다 강해서 여기에 머물고 있을 뿐이지. 곧 해외로 떠날 건데, 그냥 모른 척 해주면 안 돼?”
그의 목소리에는 모종의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거부하기 힘든, 감정을 밑바닥부터 흔드는 차분한 호소.
“으으윽! 시끄러워!”
주아는 귀를 막고 고함을 빽 하고 질렀다. 티토노스와는 다른 의미로 성가신 능력이었다. 그냥 듣고만 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납득하게 된다.
아스트라는 그런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티토노스 말이 맞네. 엄청 과격하다더니.”
그 순간, 앤드류가 서둘러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앤드류는 고함을 내지르며 힘껏 그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날 잊었냐!”
앤드류의 주먹이 빠르고 강하게 아스트라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으윽!”
갑자기 기습을 당한 아스트라는 그대로 구석으로 처박혔다. 앤드류는 그런 아스트라를 비웃으며 재차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스트라, 넌 잔재주만 많지, 몸은 약해 빠졌어.”
아스트라는 상체를 힘겹게 일으키며 웃음을 지었다.
“주먹질 하나로 그분 마음에 든 남자답네.”
“닥쳐!”
앤드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스트라는 그런 그에게 대꾸했다.
“맞아. 나는 마술사로서 내 주인을 기쁘게 해줄 뿐이지 싸움은 못해. 그러니 싸움을 잘하는 동생을 새로 들였어. 소개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앤드류 앞으로 튀어나왔다.
아까 클럽 앞을 지키던 경비원이었다. 경비원은 굳은 얼굴로 그를 막아섰다.
“큭!”
예상 밖의 기습에 앤드류는 재빨리 뒷걸음쳤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경비원의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튀어나온 송곳니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스트라는 경비원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이쪽은 케팔로스, 내 새로운 동생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