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겐 아주 어색한 당신 (1)
“뭐? 누구 마음대로?”
앤드류는 일방적인 통보에 발끈했다. 하지만 미연은 강경했다.
“수사관과 외부인 둘에게만 이 사건을 전담시키기에는 부담이 너무 커. 거기다 마약을 유통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제조하는 게 확실하다면 이건 중대 문제야.”
미연에게는 조금의 타협도 없었다. 앤드류는 자신이 더 이상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아를 채근했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설마 저 제안을 수락할 생각은 아니지?”
하지만 주아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오른 채 꿈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선배가 나,나랑 같이……?”
“야!”
참다못한 앤드류가 빽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규호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제가 영 못미더우신 모양이군요.”
그는 앤드류를 향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실 한국에 오자마자 협력 제안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아를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때 두 분이서 상당히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미처 말을 못 꺼냈습니다.”
갑작스런 규호의 등장에 주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자 난리를 친 것뿐이었지만, 당시 규호의 눈에는 둘이 사뭇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름 중국 공안과 함께 마약 사건을 수사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니 협력할 수 있도록 수락해주시겠습니까?”
예의 바르면서도 강경한 제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규호라는 남자는 거절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앤드류는 못내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칫, 마음대로 해.”
* * * * *
“으아으아으아.”
집으로 돌아온 주아는 곧장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기를 잠깐, 갑자기 앤드류에게 고개를 휙 돌리더니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선배가 나한테 미련이 남은 걸까?”
앤드류는 경멸 어린 얼굴로 주아를 쏘아 보았다. 티토노스에게 공격을 당해서 부상까지 입어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저거란 말인가.
“너 혹시 귀가 아니라 머리가 다친 건 아니냐? 이 상황에도 남자 타령이야?”
“타령이라니! 어쨌든 규호 선배랑 나는 함께 사건을 해결할 동료잖아. 그러니까 서로 간의 관계는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어서 그런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아의 표정은 행복과 설렘에 겨워있었다. 앤드류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너는 자존심이 없냐. 네 고백을 듣고도 아무 말 없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이제 와서 대답을 해줄지도 모르잖아.”
“그랬으면 진즉에 대답을 했겠지.”
앤드류는 냉정하게 판단했지만, 주아는 계속해서 규호를 감쌌다.
“사실 선배에게 나는 모르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난 그런 것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어.”
“그래서 한 게 나를 동거인 어쩌고 남자 어쩌고 하는 거냐?”
앤드류는 지난 번 일을 꼬집으며 반문했다. 그 말을 들은 주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혹시 선배 의식해서 그러는 거 많이 티 났어?”
“응. 그것도 엄청.”
그 말을 듣자 주아는 말꼬리를 흐리며 변명조로 일렀다.
“남자들은 은근히 질투가 심하니까……선배도 반응할지 모르고……”
“문제는 남자가 질투를 안 하면 진짜 가망 없다는 거야. 질투가 없는 건 관심도 없다는 뜻이거든.”
거기까지 들은 주아는 참다못해 언성을 높였다.
“야! 너 누구 편이야!”
“이게 편 갈라서 싸울 문제냐?”
앤드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이내 주아는 제풀에 지쳐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왜지? 대체 왜지? 왜 선배는 귀국하자마자 사건에 협조하려고 하는 걸까? 내가 걱정되서 그런 거겠지? 내가 신경 쓰이나? 대체 무슨 뜻일까? 응? 선배는 왜 그럴까? 으아아아악!”
여차하면 조만간 정신줄을 놓을 기세였다.
앤드류는 그런 그녀를 타박했다.
“도대체 그 헤실거리는 바보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야단이야?”
“바보라니! 말조심해!”
주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설렘과 행복에 젖은 얼굴로 지난날을 회상했다.
“선배는 말이야, 음, 뭔가 아주 울창한 숲이나 높은 산 같은 남자야.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회복이 된다고 해야 하나. 너도 선배 몸에서 이끼나 풀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그래. 확실히 같이 있으면 공기가 달라지긴 하더라.”
앤드류는 습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아주 잠깐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이끼와 짙은 풀 냄새가 잔향처럼 남아 있다.
기이할 정도로 짙은 냄새였다.
도저히 사람의 것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선배는 내가 초보 수사관이었을 대부터 이것저것 자상하게 가르쳐주셨어.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남자인 줄 몰라. 거기다 얼굴도 잘생겼고, 능력도 있지.”
주아는 앤드류의 속내도 모른 채 신이 나서 규호에 대해 잔뜩 떠들었다. 한참 그녀의 말을 듣던 앤드류는 슬쩍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선배라는 작자, 너랑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거냐?”
앤드류의 뜻 모를 질문에 주아는 발끈했다.
“무슨 소리야! 선배가 그러면 너 같은 괴물이라도 된다는 거야?”
앤드류는 대답 대신 슬쩍 말을 돌렸다.
“그래, 차라리 괴물이었으면 다행이겠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무엇인지 모를 미심쩍음.
규호라는 남자를 떠올릴 때면 어째서인지 그게 떠나지 않았다.
“좋아, 그래도 힘내자! 내일 부터는 규호 선배랑 함께 한다! 후아후아!”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주아는 규호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 그저 한 없이 들뜬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 * * * *
“야, 뭐해. 곧 출근 시간인데.”
아침 일찍 앤드류는 평소와 달리 꾸물거리는 주아를 불렀다.
안 그래도 오늘은 지금까지 진행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새롭게 합류하게 된 규호와 일정을 맞추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평소라면 본인이 먼저 서둘렀을 사람이 늦장을 부리다니.
“잠깐만! 나 화장 다 안했어!”
주아의 방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앤드류는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거울을 보며 열심히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는 주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가 무슨 화장이야?”
앤드류는 황당해서 물었다. 지금까지 후줄근한 옷차림에 머리를 질끈 감아 올린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옷 한 번 제대로 차려 입은 적 없는 그녀였다.
“아씨, 오랜만에 해서 어색해 죽을 것 같네.”
하지만 주아는 그런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열심히 화장을 그렸다. 앤드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던 중 화장대 구석에 준비되어 있는 하이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구두도 신을 생각이야?”
“당연하지. 하이힐을 신으면 다리 라인이 살거든.”
“정도껏 해!”
참다못한 그가 주아를 타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했다.
“뭐가! 선배 앞인데 그냥 이러고 나가? 당연히 꾸미고 가야지!”
그리고서 주아는 자신의 얼굴을 앤드류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그래서 나 어때?”
“몰라!”
앤드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일갈했다. 하지만 주아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화장에 열중했다.
고백에 제대로 된 답도 안한 남자 때문에 저렇게까지 하다니.
앤드류는 서슴없이 자신에게 은탄환을 박아 넣었던 주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몸서리쳤다.
“……자기, 귀국했으면 미리 말해주지. 보고 싶어 하는 얼굴 많은데.”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지만 아무래도 최미연 과장님이 맡기신 일이 더 급해서요.”
“과장님도 참, 너무하신다. 귀국한 사람 환영회도 못하게 하시고.”
그렇게 한껏 준비해서 출근했지만, 그런 주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혀 뜻밖의 광경이었다.
먼저 와 있는 규호 앞에 연합 내에서 연하 킬러로 유명한 한서영 대리가 몸을 딱 붙인 채 친근한 척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주아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은 채 서둘러 규호를 불렀다.
“선배! 저희 왔어요!”
규호와 한참 이야기하던 서영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알은 채를 했다.
“어머, 우리 주아 왔어?”
“오랜만입니다. 한서영 대리님.”
주아는 깍듯하게 직함까지 불러서 말했다. 서영은 그 말을 듣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리는 무슨, 언니라고 부르랬잖아.”
그 말을 들은 주아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대답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신데, 제가 언니라고 부르면 버릇이 없어 보이잖아요.”
주아의 입에서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서영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 이내 평정을 되찾은 후 애써 웃어보였다.
“후후후. 우리 후배, 못 보던 사이에 예의가 참 철저해졌네?”
“다 대리님을 본받아서 그렇죠, 뭐.”
주아는 바로 받아쳤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영은 자신에게 맞서는 주아의 팽팽한 기류를 읽은 것인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듣자하니, 이번에 용케 은탄환을 지켰다면서?”
“네. 아직 미연 과장님이 제게 이 사건을 맡기기로 하셔서요.”
“그래? 같은 은탄환 소유자로 조언 하나 해줄까?”
서영은 주아의 은탄환 홀스터를 축 치고는,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운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어. 알지?”
이 말을 끝으로 서영은 흥흥 거리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주아는 눈을 부릅뜬 채 서영을 한참이고 노려봤다. 옆에 있던 앤드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야?”
“한서영. 나랑 같은 은탄환 소유자인데, 연하 킬러로 유명한 여자야.”
연합 내부에 있는 은탄환 권총은 총 17정.
연합에 소속된 수사관 중 엘리트에게만 배정되는 특별한 무기다.
미연에게 고집을 부려 겨우 은탄환을 지켜낸 주아와 달리, 서영은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지금까지 은탄환을 소지하고 있었다.
실력이나, 외모나 우습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앤드류 역시 그것을 간파했는지 넌지시 그녀에게 일렀다.
“긴장해야겠다. 아까 그 여자, 너보다 훨씬 예뻤어.”
“닥쳐.”
주아는 앤드류의 걱정을 짧게 일축했다.
“왔구나, 늦었네?”
규호는 이런 복잡한 속내를 모르는지, 밝게 웃으면서 그들을 반겼다. 주아는 그를 보자 마자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준비할게 많아서요. 기다리느라 힘드셨죠?”
“괜찮아. 나도 오랜 만에 연합 직원들이랑 인사도 하고 좋았어.”
과연 방금 전 그것을 순수한 인사라고 봐도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규호 본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는 주아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맡게 된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해준다고?”
“마,맞아요. 어쨌든 이제 함께 수사를 해야 하니까요.”
주아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자료를 꺼냈다.
그때, 갑자기 앤드류가 끼어들었다. 그는 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사건에 대해 맨 정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