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마녀와 괴물이 함께 사는 방법 (2)
“으윽, 이게 뭐야.”
앤드류는 연합에서 지급한 혈액 팩을 한 모금 빨아 마신 뒤 인상을 썼다. 주아는 그런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연합에서 너 같은 흡혈종을 위해 특별히 만든 거니까 감사히 먹어.”
“2차 대전에 먹었던 전투 식량보다 맛없는 건 처음 먹어본다.”
앤드류는 우거지상을 쓰면서 팩에 담긴 혈액을 마셨다. 주아는 혈액 팩이 비워지자마자 그를 채근했다.
“자, 그래서 밥도 먹었으니 일을 해볼까?”
연합 내부에 있는 취조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그녀는 앤드류와 독대하고 있다.그때와 달리 지금은 취조자가 아닌 협조자로서 함께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지만, 그래도 눈 앞의 괴물은 여러모로 안심할 존재는 아니다.
주아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얼마 전 항구에서 입수한 약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새하얗고 걸쭉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연합의 수사관은 물론, 주아를 몇 달간 괴롭혀 왔던 신종 마약, 백야(白夜).
주아는 백야가 든 약병을 힐끔 바라 보며 취조하듯 앤드류에게 물었다.
“우선 너는 백야에 대해 잘 안다고 했지?”
“그래. 제조자랑 잘 알고 지내던 사이거든.”
“그러면 하나씩 묻도록 하지. 우선 백야의 재료는 뭐야? 사실 우리 연합은 이 마약의 재료가 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간단해. 흰매미 시체 버섯으로 만들어.”
앤드류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툭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주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흰매미 시체버섯? 나도 일단은 마녀라 그게 뭔지는 알아. 흰매미 시체 버섯에는 환각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리 강하지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원한을 품고 죽은 시체에서 자란 흰매미 시체버섯을 가공해서 만들지.”
앤드류는 혈액 팩을 쭉 짜낸 뒤, 남은 비닐 껍질을 아무렇게나 버리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먼 옛날 드루이드가 광전사를 만들 때 사용하던 비법이야. 흰매미 시체버섯을 원한을 품고 죽은 시체 위에서 키우면, 원념을 빨아 먹고 기괴하게 부풀어. 그걸 가공한 뒤에 몇 번 처리를 하면 지금 보는 백야가 완성되지.”
그 말을 듣자 주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그래서 구울과 네크로맨서들이 꼬인 걸까?”
“아마? 둘 다 시체를 뜯어 먹는 놈들이니까.”
시체 위에서 자라는 버섯으로 만든 마약. 그리고 시체와 연관되어 있는 내통자.
조금씩 실마리가 보였다. 주아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선 그러면 일단 시체 도난 사건이 있었는지 조사부터 해야겠군.”
그런데 갑자기 앤드류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돌연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문 밖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앤드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들어 코를 킁킁거렸다.
“갑자기 근처에 이끼와 풀 냄새가 나. 보통 이런 건 깊은 산속에서나 나는 냄새인데. 왜 그게 여기서 나는 거지?”
“뭐,뭐라고?”
주아는 기겁해서 되물었다. 예상 밖의 반응에 앤드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주아는 헐레벌떡 앤드류를 윽박질렀다.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데! 빨리 말해!”
“어디보자 5미터…….”
“5미터? 그렇게 가까이?”
“5미터, 4미터, 3미터, 2미터……”
앤드류는 태평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조금씩 그 숫자가 줄어들자 주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나 오늘 화장도 안하고 왔는데!”
주아는 서둘러 머리를 매만지며 앤드류에게 슬쩍 물었다.
“야, 나 오늘 얼굴 어때?”
“변 함 없이 시궁창 같아.”
앤드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주아는 그런 그를 무시무시한 얼굴로 쏘아 보았다.
“야, 앞으로 5분간 혓바닥 놀리면 총으로 입천장을 뚫어버릴 줄 알아. 알았냐?”
그러기를 잠시, 취조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주아는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새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흠흠, 들어오시죠.”
곧 문이 열리며 단정하게 머리를 내린 남자가 얼굴을 비췄다.
전반적으로 서글서글하면서도 차분한 인상의 사내였는데, 두 눈 만큼은 투명한 바닷물을 보는 것처럼 깊이가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앤드류는 이 남자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아 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서는 사람이 아닌, 흡사 자연물에서나 날 법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여기에 있었구나,"
남자는 주아를 보면서 알은 채를 했다. 주아는 새삼 놀란 얼굴로 답했다.
“어머, 규호 선배. 귀국하셨다는 말은 들었어요. 인사를 이제 드리네요. 이해해주세요. 제가 조금 바빠서요.”
주아는 어울리지 않게 존대까지 썼다. 규호라고 불린 남자는 옅게 웃으며 사과했다.
“그냥 인사나 하고 가려고 했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우리 주아는 늘 바쁘구나..”
“후후후. 아시잖아요. 저 부르는 사람 많다는 거.”
그러다 규호의 눈초리가 옆에 있던 앤드류로 향했다
“이쪽은 누구시지?”
주아가 재빨리 나서서 그에게 설명했다.
“말씀 못 들으셨나요? 현재 수사에 협조중인 외부인 입니다.”
“반갑습니다. 정규호입니다.”
규호는 싱글싱글 웃으며 앤드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앤드유는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움츠러들었다는 사실에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뭐야, 이 헤실거리는 바……”
그러려는 찰나, 주아가 뒤에서 앤드류를 보며 눈을 치켜떴다. 말 곱게 하지 않으면 가만 안두겠다는 무언의 협박이 분명했다.
“……람직한 분은? 아시는 분인가?”
앤드류는 즉시 꼬리를 내리고 타협적으로 나섰다. 그러자 주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선배. 이 분은 앤드류씨에요. 외국에 오래 계셨던 분이라 한국어가 서투르니 이해해주세요.”
“듣자하니, 동거 중이라면서?”
규호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주아는 흥미 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벌써 소문이 났나요?”
주아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부끄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동거라기보다는 일선 상의 협의로 저와 함께 동행 하고 계실 뿐이에요. 그게 더 합리적이기도 하고……또 뭣보다 남자가 함께 있으면 저도 여러모로 든든하고요.”
“그래.”
규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무언가 아쉬운지 고개만 살짝 떨어트렸다. 주아는 그런 규호에게 넌지시 일렀다.
“선배가 귀국하실 줄 알았다면, 제가 직접 협조를 구했을 텐데요. 참 아쉬워요.”
“어쩌다보니 타이밍이 그렇게 됐네.”
그 말을 끝으로 규호는 취조실 밖으로 몸을 틀었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나중에 밥이라도 먹자.”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주아는 그가 문 밖으로 완전으로 나갈 때 까지 우뚝 서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규호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고 그녀는 지친 얼굴로 은탄환을 장전하며 앤드류에게 일렀다.
“야, 그냥 총 몇 방만 맞자.”
“왜? 나는 최선을 다했잖아!”
앤드류는 억울해서 항변했지만, 주아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냥 내가 기분이 거지같아서.”
“자,잠깐만! 진정해!”
취조실 안에는 영문 모를 누군가의 애탄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 * * * *
“후우.”
주아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감각을 날카롭게 집중시켰다.
공기의 흐름, 바닥을 끄는 소음, 그림자의 흔들림, 조금씩 다가오는 흙냄새.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지표가 되어 머릿속에 궤적을 그린다.
이어서 바닥에서 훈련용 마네킹이 튀어나왔다. 주아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은탄환은 정확히 마네킹의 머리 부분에 적중했다.
뒤따라 바닥이 열리며 훈련용 마네킹이 곳곳에 튀어나왔다. 주아는 재빨리 몸을 구르면서 은탄환의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빠르면서도 신속하게 마네킹의 급소 부분을 가격했다.
은탄환을 허락 받은 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던 훈련.
연합 내부에 있는 훈련장에서 이렇게 뒹굴다보면 이상하리만큼 머릿속이 편안해진다.
“히유, 제법인데?”
그렇게 그녀가 훈련에 열중하고 있을 찰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앤드류가 저편에서 걸어 나왔다. 앤드류는 훈련용 마네킹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고작 총 몇 방 맞춘 걸로는 부족해. 누군가를 죽일 생각이면…….”
그는 손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신속하게 마네킹의 목 부분을 가격했다. 서걱, 하는 간결한 소리와 함께 마네킹의 머리 부분이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해야지.”
주아는 그의 등장에 눈길도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시비 걸 생각이면 꺼져라.”
“시비는 무슨 시비. 그냥 걱정 되서 와 본건데.”
그리고 앤드류는 슬쩍 주아를 떠보았다.
“저 남자냐?”
- 탕!
그의 발치 아래 은탄환이 박혔다. 한줄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확인한 앤드류는 키득거렸다.
“정답인가 보네.”
그 말을 들은 주아는 힘없이 대답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래, 저 남자야. 이 은탄환의 전주인.”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다가 고백했던 상대야. 됐냐?”
앤드류는 짐짓 놀란 투로 말했다.
“예상 밖인데?”
“알아. 확실히 나랑 선배랑 어울리지는 아니지.”
“그러니까 말이야. 확실히 저렇게 착해 빠져 보이는 사람과 너 같은 짐승은 어울리지 않지.”
그 말을 들은 주아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왜 그래! 나도 수사관이 되기 전에는 꿈과 낭만을 아는 소녀였어!”
“맞아. 내가 성실하고 근면한 청교도였을 때가 있었던 것처럼.”
앤드류의 대꾸에 주아는 할 말을 일었다. 앤드류는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는건데? 차이기라도 했냐?”
“폐에 구멍 나고 싶지 않으면 닥쳐.”
주아가 쏘아 붙이자 앤드류는 웃옷을 슬쩍 들췄다. 그리고 대리석처럼 차갑게 갈라진 근육의 굴곡 사이를 가리키며 빈정거리는 투로 답했다.
“자, 까짓 거 몇 번 갈기고 말해줘.”
주아는 고개를 훽 돌리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몰라.”
“뭐?”
“모른다고! 나도 몰라!”
주아는 답답해서 속에 있던 말을 마구 내질렀다.
“고백은 했는데, 그 다음날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중국에 갔어. 제대로 된 대답도 못 들었다고! 그러다 갑자기 귀국하고는 아예 남처럼 대해. 아까 봤지? 그게 자신에게 고백한테 할 사람의 태도냐?”
고백에 대한 대답은커녕, 그냥 오래 알고 지낸 후배와 사무적으로 대화하는 수준이다.
미워하지도, 반가워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 그냥 그저 그런 사이.
앤드류는 짐짓 진지한 투로 조언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총을 겨누고 어서 고백에 대한 대답을 말해달라고 협박해. 그리고 대답을 안 해주면 팔 다리를 하나씩 날리면 되잖아.”
“미쳤나?”
“뭐 어때. 차이면 어차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텐데.”
앤드류의 대답에 주아는 도끼눈을 뜨고 타박했다.
“넌 진짜 총을 부르는 재주가 있어.”
“몰랐어? 그게 내 매력인데.”
앤드류는 여기까지 말하고 빙글거리며 웃었다. 주아는 그런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앤드류라는 남자, 말을 하면 할수록 어째 자신이 말려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존재였다.
“그래서 수사는 어떻게 할 거야?”
앤드류가 화제를 돌렸다. 주아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네킹 머리 부분을 발로 툭툭 치며 답했다.
“시체와 관련되어 있는 거라면,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을 알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