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격한 남자는 탐지견 대신으로 (2)
“뭐? 할 일을 다 하다니?”
주아는 되돌아온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앤드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피 한 모금에 일 한 번. 이 정도면 공평한 거래 아닌가? 난 네 피를 딱 한 모금 마셨으니, 이 정도면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지금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거야? 빨리 가서 쫓으면 저 녀석들의 유통망을 찾을 수 있단 말이야!”
눈앞에서 단서가 멀어지고 있단 사실에 주아는 애가 타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죽을 고생을 해서 겨우 여기까지 왔고, 앤드류 덕에 내통자까지 찾았다.
그런데 그걸 눈 뜨고 놓칠 판이었다.
“그래서?”
앤드류는 애탄 그녀와 달리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앤드류는 인상을 쓴 채 쏘아 붙였다.
“탐지견에 투견 노릇까지 해줬으면 만족 할 줄 알아야지. 어디서 명령이야.”
아무래도 더 이상 앤드류는 그녀의 일에 협조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주아는 네크로멘서가 도망친 방향과 앤드류를 번갈아 보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쓸 모 없는 게!”
주아는 이 말만 내뱉고 네크로멘서를 뒤쫓았다. 앤드류는 멀어져가는 주아의 모습을 보면서 빈정거렸다.
“왜 그래, 방금 전에는 너보다 쓸 모가 있었는데.”
주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다행히 상대가 노인이어서 그런지 달리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추격을 얼마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게 훤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쫓으면 잡을 수 있다.
중요한 증인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멈춰!”
주아는 소리치며 위협조로 허공에 총을 쐈다. 그 소리를 들은 네크로멘서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면서 서로의 간격을 계산했다. 잘만 하면 다리라도 맞춰서 잡을수 있는 거리였다.
그 순간, 갑자기 둔탁한 기계음이 일대를 울렸다.
- 기이이이잉.
주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레일이 움직이면서 쌓여 있던 드럼통 수 십 개가 자신에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 네크로멘서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서 자신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함정이다.
이 생각 하나가 주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멍청한 짓이었다. 지금 눈앞의 내통자를 쫓는 단 생각에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홀로 뛰어들어오지 아니했는가. 여기는 구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던 곳이다. 동료라면 잔뜩 있을 게 분명했다.
설마 이것까지 계산하고 자신을 여기로 데리고 온 걸까.
“젠장!”
드럼통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덮쳤다. 주아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하지만 드럼통의 수가 훨씬 많았다. 쏟아진 드럼통은 우르르 굴러가면서 그녀의 상체를 강하게 때렸다.
“으윽!”
주아는 신음을 집어 삼키며 뒤로 나뒹굴었다.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이대로,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그녀는 오직 이 집념 하나에 몸을 지탱해 겨우 일어났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아는 비틀거리다가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머리에 맺혀 있던 피가 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
주아는 맺힌 피를 보면서 탄식인지 모를 목소리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짙어져 가는 피 냄새를 따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몽롱한 그녀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 귀한 피를 멋대로 흘려대고 있었군..”
앤드류였다.
그가 비릿한 비웃음을 입가에 담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주아는 흔들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든 채 그에게 물었다.
“왜……왔어……?”
“그냥 생각해보니 조금 아쉬워서. 고급 와인이 땅에 나뒹굴고 있으면 누구라도 아까워하지 않겠아?”
앤드류는 상처 입은 주아를 부드럽게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가볍게 속삭였다.
“너 같이 구하기 어려운 특식이 멍청한 이유로 망가지는 꼴을 가만 볼 수 있나.”
이 말을 끝으로 주아는 정신을 놓았다.
* * * * *
눈을 뜨자 하얀 병원 천장이 보였다.
이어서 잊고 있던 통증이 싸늘하게 주아의 전신을 짓눌렀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 하나가 선명하게 그녀의 의식을 꿰뚫었다.
나는 또 실패했구나.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이 현실이 몽롱하게 가라앉았던 주아의 의식을 붙들어 올렸다. 슬프거나, 분하거나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코앞에 직면했다는 막막함만 뼈저리게 느껴졌다.
“정신이 드나?”
미연의 목소리가 그녀를 뒤흔들었다. 주아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미연이 다리를 꼰 채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아는 힘겹게 중얼 거렸다.
“과……장님…….”
“아주 거하게 사고를 쳤어.”
미연은 주아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 듯 따박따박 그녀의 잘못을 짚어가기 시작했다.
“감금하고 있던 위험 생물을 멋대로 반출시켰고, 그 녀석을 이용해 혼자 허락 없이 수사를 진행했지. 제대로 된 영장조차 없이 말이야.”
미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아의 가슴을 찔렀지만, 그녀는 차마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미연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연은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거기다 지난번에 성당 봉사활동으로 담갔던 김치를 50포기나 몰래 빼돌렸더군.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인으로서 김치를 훔쳐간 건 용서가 안 돼.”
거기까지 말하고서 미연은 주아를 또렷이 바라봤다. 고작 몇 초이뿐이었지만, 주아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깨달았다.
“혹시 할 말 있나?”
미연의 질문에 주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윽고 미연은 단호하고 침착하게 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주아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주아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옆구리에 차고 있던 홀스터에 손을 뻗었다. 기절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탄환과 권총은 홀스터에 고이 담긴 채 그녀 옆구리에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홀스터를 벗었다.
주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것을 미연에게 내밀었다.
“네. 반납하겠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결코 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 덜컥하고 찾아와버렸다.
꼭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잘라 내어 주는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자신에게든 따질 염치가 없다는 것을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야, 그거 없으면 날 어떻게 하려고?”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앤드류가 병원 문 옆에 기댄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미연은 그의 얼굴을 보자 마자 깜짝 놀라물었다.
“분명 지하 삼중 감옥에 처넣었는데, 어떻게 탈출한 거야?”
“오늘 내가 특식을 먹어서 힘이 좀 팔팔하거든. 대충 부수고 나왔지.”
앤드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옷이 잔뜩 구겨진데다 생체기도 있는 것을 봐서는 탈출할 때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조금 거슬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야.”
앤드류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갑자기 은탄환을 낚아챘다. 그리고 미연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거, 왜 멋대로 빼앗아가?”
“나는 연합의 책임자다. 무능력한 부하 직원의 권리를 회수할 권리와 의무가 있어.”
미연 역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받아쳤다. 앤드류는 그런 미연을 향해 비꼬듯이 물었다.
“아, 그래? 그러면 이제 네가 나를 감당할 건가?”
앤드류는 미연 앞에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뾰족하게 솟은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참고로 말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면 이성을 잃어. 마녀의 피가 아니면 만족을 못하는데, 어떻게 할 셈이지? 본보기로 여기에 있는 사람 두엇 정도 먹어 치워줄까?”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학살극을 벌일 기세였다. 미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지?”
그 말을 들은 앤드류는 주저 하지 않고 주아를 가리켰다.
“난 저 마녀의 피가 필요해. 마녀의 피는 마력을 가득 담고 있어서 저만한 특식도 따로 없거든.”
“다른 마녀의 피를 구해서 주지.”
미연은 재빨리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앤드류는 기가 차다는 투로 물었다.
“지금 귀족인 나와 협상하려 하는 건가?”
“가능하다면.”
미연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앤드류는 허탈하게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나도 구미가 당기는 거래 조건을 제시할게. 이건 어때? 내가 왜 한국에 왔는지 궁금하지 않나?”
앤드류는 그러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약품 병이었는데, 거기에는 하얗고 걸쭉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아까 항구에서 주운 거야. 이게 뭔지 알아보겠어?”
“이건……!”
미연과 주아는 그게 무엇인지 한 눈에 알아봤다.
그건 그들이 모를 리 없는 물건이었다.
그들은 물론 연합의 수사관 모두를 몇 달 동안 고생하게 만든 문제의 원인이기도 했다.
앤드류는 약품 병을 보면서 설명을 이었다.
“100ml만 복용해도 최소 10일은 피로도, 굶주림도 느끼게 하지 않는 희대의 마약, 백야(白夜).”
백야(白夜).
이름 그대로 희고 걸쭉한 빛을 띤 마약.
조금만 복용해도 허기도, 피로도 느끼지 못한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맑은 정신과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한다.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이 치솟고, 성욕과 식욕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꼭 세상의 주인이 된 것과 같은 고양감과 쾌감이 며칠이고 쉬지 않고 뒤따른다.
하지만 백야(白夜)는 그저 밝은 밤일 뿐, 아침은 아니듯이 이 모든 것은 약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약효가 끝나면 곧바로 어마어마한 탈진감과 절망감, 피로가 찾아온다. 약을 복용한 후에 느끼는 활력은 앞으로 미리 쓸 체력을 끌어다 쓰는 것이기에 복용자에게 남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공허 속에서 복용자는 오직 이 약만 찾아 헤매다 몸과 정신이 망가져 숨이 끊어진다.
효과와 부작용이 실로 커서 쉬지 않고 피해자는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급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연합이 골머리를 앓게 만든 마약이었다.
“난 이 마약의 제조자를 찾아 한국에 왔어.”
앤드류는 폭탄과도 같은 말을 그들에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주아와 미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깜짝 놀랐다. 미연은 충격적인 그 말에 주아의 처분을 까맣게 잊은 채 그에게 되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나와 같은 귀족이야.”
앤드류는 여기까지 말하고서 무심한 듯 쓸쓸하게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내 아내를 죽인 범인이기도 하지.”
그렇게 말하는 앤드류의 표정이 실로 무거웠다. 방금 전과 같은 장난기 어린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주아와 미연은 둘 다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무거운 공기가 잠시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갓다.
잠시 후, 앤드류는 사뭇 다른 어투로 어색한 침묵을 깨트렸다.
“이번에는 내가 제안할까?”
앤드류는 낚아 챈 은탄환 홀스터를 주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 복수를 도와줘. 그러면 네 수사에 협력하지.”
“그 도움이라는 건, 내 피를 말하는 거지?”
주아는 앤드류가 부둣가에서 자신의 피를 마셨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의 피를 마신 앤드류는 푸른 불꽃을 두른 채 흡사 야수와 같이 날뛰었다. 앤드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가 쫓고 있는 놈을 나도 쫓고 있어. 그 녀석과 싸우기 위해서는 저 마녀가 필요하다.”
하지만 미연은 여전히 강경했다.
“연합에 실력 있는 수사관은 많아. 다른 사람은 어때?”
“싫어. 난 저 마녀가 아니면 안 돼.”
주아는 자신 앞에 있는 은탄환을 멍 하니 보다가 물었다.
“왜 하필 나야?”
미연 말대로 연합에 실력 있는 수사관은 많았다. 뱀파이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자신은 오히려 고문에, 탐지견 대용으로 활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체 이 뱀파이어는 왜 자신의 편을 들어주려고 하는 것일까.
“음, 나는 말이야. 멍청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
주아의 물음에 앤드류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했다.
“멍청하고, 앞 뒤 안 가리고,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볼 줄 몰라서 똑똑한 놈들에게 여러 번 이용당했지. 그러다보니 머리 좀 쓴다는 녀석을 보면 영 기분이 좋지 않단 말씀이야.”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주아를 보면서 씩 웃었다.
“그런데 저 마녀는 나보다 더 멍청해. 그래서 적어도 날 이용하지는 않을 것 같단 확신이 들어. 이제 왜 내가 저 마녀를 원하는지 알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