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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나는 세상 구하겠다는 미친놈이다
작가 : 노가다뛰는도련님
작품등록일 : 2022.2.3

복수를 위해 세상 구하겠다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

 
1. 이 글은 소설이다
작성일 : 22-02-03 22:35     조회 : 159     추천 : 0     분량 : 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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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글을 쓴다는 건 나 같은 조무래기가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영역이었다.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특별함이 필요한 일 중 하나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기에 글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많은 독서를 한다던가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즐긴다. 하지만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사람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보다도 혼자 사색하는 걸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나는 글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다. 그래도 글을 쓰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

 

 나는 세상 구하겠다는 미친놈이다.

 

 ​

 

 아무도 내게 세상 구하라 한 적은 없다. 나는 평범하다. 게임이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하늘을 날 수도 불을 뿜는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세상 외면해도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감히 어느 누구도 내게 손가락질 못한다. 평범한 자에게는 평범한 삶이 어울리듯 굳이 유별난 삶을 살 이유는 없다. 나는 보장된 삶, 편안한 삶, 안정된 삶을 살아왔던 도련님으로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 역시 평온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도 내가 세상 구하겠다며 나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

 

 이건 정의가 아니라 복수이다.

 

 ​

 

 2008년 11월, 내가 근무하던 군부대에서 식중독 사건이 터졌었다. 지역 뉴스에 보도될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생활관 화장실마다 긴 줄이 늘어서며 환자가 넘쳐났다. 다만, 나만큼은 별 탈이 없었다. 원래 어릴 적부터 감기 한 번 들지 않는 튼튼한 체질이었다. 하지만 3일 후부터는 나 역시 복통이 시작되었다. 당장 군의관을 찾아가 보았지만 별다른 진료 없이 변비약 3알만을 받아올 뿐이었다. 남들은 식중독 때문에 하루 종일 설사라는데 너는 그 반대라며 신기해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변비 환자가 되었다. 문제는 약을 먹어도 별 차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복통이 심해지며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당직사관에게 다시금 의무대 방문을 보고한다.

 

 ​

 

 "너무 아파 차량 후송을 요청드립니다."

 

 ​

 

 말 그대로 너무 아파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당시 당직사관은 멀쩡해 보인다는 이유로 차량 지원은 거부하고 알아서 걸어가라 했다. 이게 얼마나 사무쳤으면 아직까지 그 당직사관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덕분에 첫날이 오는 그날, 아픈 배를 부여잡고 의무대까지 걸어가야 했다. 진짜 문제는 그 후부터이다. 힘겹게 도착한 의무대에서 또다시 별다른 진료 없이 변비약을 처방 한 것이다. 이번에는 변비약 3일 치를 받았다. 부대로 돌아온 나는 공식적인 꾀병 환자가 되었다.

 

 ​

 

 나는 일병이었다.

 

 ​

 

 식중독으로 부대가 난리가 난 상황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그런 놈으로 찍혀버렸다. 차량 후송까지 요청할 정도로 아프다 했는데 고작 변비약을 받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부터 무조건 참아야 했다. 얼마나 아프건 나는 고작 변비이기 때문이다. 생전 변비란 걸 걸려본 적도 없었으니 변비가 원래 이렇게 아픈 건 가라며 참을 뿐이었다. 참고 또 참다 보니 휴가 날까지 참았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나는 참았다. 고작 변비 가지고 가족들 걱정 끼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도 못 자며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본 부모님은 사태가 심각함을 감지하곤 곧바로 근처 병원 응급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하품이 나오던 응급실이 피검사 결과가 나오자 비상이 걸렸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 수치에 몇백 배라며 CT 등 온갖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

 

 상세불명의 장폐색증, 그것이 나의 병명이었다.

 

 ​

 

 장은 이미 썩어버린 상태였다. 너무 오래 참아버린 것이다. 의사는 이걸 어떻게 참았냐며 혀를 내둘렀다. 당직의사는 더 큰 병원으로 빨리 가보는 게 좋겠다며 나를 내쫓기 바빴다. 곧바로 이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병원으로 이동하여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다. 수술 후 눈을 떠 배를 보니 명치부터 요도까지 배꼽 부위만 살짝 돌려서 배를 갈라놨다. 장이 썩은 부위가 워낙 넓어 말 그대로 배를 열어버린 것이다. 수술 자체도 고통스러웠지만 회복 기간은 더 고통스러웠다. 회복 기간 내내 물 한 모금도 못 마셨으며 매시간마다 위액을 토해야 했다. 배가 반으로 갈린 상태에서 토를 하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퇴원하기까지 정확히 50일 입원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니 부대 주임원사가 찾아오기도 했다. 나를 퇴원시키려는 주임원사와 담당 의사의 말싸움이 병실까지 들려왔다.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살릴 자신 있으면 데려가보라는 담당 의사의 호통에 주임원사는 돌아갔다.

 

 ​

 

 후련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부대로 복귀 해야했다.

 

 ​

 

 부대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일은 각서를 쓰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부대에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였다.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나왔다. 법적 효력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이따위 각서를 쓰게 만드는 군이 한심했고 이런 것들을 가족이라며 전우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당장 내 앞에 있는 각서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항명할 용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고작 수술 한번 한걸로 내 인생이 끝난 건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야했다. 아직 내게는 나를 열렬히 지지해 주고 도와주는 부모님과 뭐든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군 제대 후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

 

 미국의 생활은 즐거웠다. 한국에서는 온갖 참견이 있었다면 미국에선 그 누구도 내게 간섭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면 그냥 하면 되는 단순한 삶이었다. 좋아하던 농구도 실컷 하고 기타 연주라는 고상한 취미까지 생겼다. 덕분에 나의 남은 삶은 아주 밝고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유학 첫 해 겨울, 장폐색 수술을 다시 받게 된다. 의사가 그랬다. 장이란 건 추워지면 기능도 떨어진다고, 아무리 식의 요법하고 운동해도 호전되지 않고 나이가 듦에 따라 악화만 될 거라며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했다.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 동안 얼마나 더 수술하고 고통받아야 할지 그 고통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죽고 싶었다. 병원 옥상에 올라가 자살도 해보려 했지만 수술 직후였던지라 한 걸음 떼는 것조차 버거웠다. 옥상까지 가기도 전에 쓰러져 죽을 거 같았다. 죽겠다는 놈이 쓰려져 죽는 게 두려워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다.

 

 ​

 

 결국 두 차례의 수술 후 세 번째 겨울이 오기 전,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27세의 고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부모님은 미국에 다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이 나라에서 사람 취급받으려면 대학은 나와야 한다며 어떻게든 나를 미국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도대체 그깟 대학 졸업장이 뭐라고 그렇게나 나를 사랑한다던 부모님이 죽기 싫어 돌아온 나에게 다시 미국을 가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대학 졸업장만 따오는 조건으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했다. 어차피 대학 졸업장만 따면 그만이기에 공부는 할 필요가 없었다.

 

 ​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인 좀비 같은 인생이었다.

 

 ​

 

 당연히 국가를 상대로 소송도 해봤다. 부대 내에서 장이 썩은 건 분명한 사실이니 작은 보상이라도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겐 복통으로 의무대를 두 번이나 방문하여 변비약을 받은 것과 휴가 날 이미 장이 썩어버린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 의료 과실은 인정하지만 보상은 없다는 대법의 판결은 모든 것을 끝냈다. 입대할 때는 대한의 건아, 다치면 남의 집 자식이라는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었다.

 

 ​

 

 뭐, 이 나라에서는 흔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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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원하는 것도 없다. 실패한 인생인 내게 돈을 써야 하는 부모님에게 죄스러웠다. 그때부터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내게 쓰이는 이발 비용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교통비도 아까워 학교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홀로 지냈으며 홀로 돌아갔다. 그냥 그대로 모두에게 잊히고 싶었다. 그렇게 무료한 대학 생활을 보내는 와중에 뉴스에서 재미난 문구를 보게 된다.

 

 ​

 

 '이게 나라냐'

 

 ​

 

 수백만의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이며 촛불시위가 시작된 거다. '이게 나라냐'라는 문구가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군에서 다치고 그대로 버려지는 일은 이 나라에선 흔한 이야기지만 내게 만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억울하진 않았다. 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단지 공허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촛불은 내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명예롭게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왠지 그곳에 앉아 있으면 탱크가 올 거 같았다. 계엄령이 떨어져 광화문 광장으로 탱크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탱크 위로 뛰어오를 생각이었다. 탱크에 오르기만 하면 계엄군은 나를 쏠 테고 역사는 나를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던진 멋진 청년으로 기록해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냥 탱크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알아서 쏴줄 테고 알아서 위인으로 기록해 줄 테니 말이다. 죽음 후에 있을 나에 대한 평가도 실패한 인생이 아닌 멋진 청년으로 기록 것이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

 

 하지만 탱크는 오지 않았다.

 

 ​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3월 1일 다시 찾아갔다. 태극기가 넘쳐흐르는 그날이면 틀림없이 목적을 이루리라 믿었다. 준비 단단히 하고 아침부터 찾아가 기다리기 시작했다. 촛불이 횃불이 되기를 밤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촛불은 한없이 고요했고 탱크도 오지 않았다. 또다시 아무 희망도, 목적도 없는 대학으로 돌아가 의미 없는 졸업장을 위한 출석체크를 해야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날 때 즈음 내 마음에 불을 집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시민 여럿이 전경 한 명을 붙잡곤 온갖 욕을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전경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 거지? 장이 썩어가는 와중에도 꾀병 환자라길래 참았건만 그 책임조차 지지 않기 위해 각서까지 쓰라던 군부대... 그리고 그 원인은 인정한다면서 보상은 안 해주겠다는 이 나라의 판결... 이 나라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

 

 그때부터다. 복수를 위해 세상을 구하겠다는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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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에 이 글은 소설임을 미리 밝힌다. 나는 표현의 자유 뒤에 숨을 거다. 차량 후송을 거부했던 당직사관에게 그깟 차량 후송이 뭐가 그리 힘들었냐며 따질 용기는 내게 없다. 아무런 진료도 없이 처방만 했던 두 명의 군의관에게 멱살을 잡으면서 청진기 한번 대보는 게 뭐 그리 어려웠냐고 따질 용기도 없다. 날 판결했던 모든 판사에게 네놈들은 군대는 다녀왔냐고 물을 용기도 없다. 그렇기에 이 글은 소설이다. 이거 다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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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세상을 구하는 어느 히어로의 판타지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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