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에필로그
작성일 : 22-01-31 10:27     조회 : 176     추천 : 0     분량 : 12145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에필로그1

 

 재희를 처음 봤을 때, 분명 반했던 게 틀림없다.

 반질반질한 눈이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순간, 눈동자가 허공을 사이에 두고 부딪혔을 때. 신기함이 몰려왔다. 그 나이에 표현할만한 말은 그 뿐이었다.

 

 약혼녀의 장례식날, 션은 재희를 보았다.

 비스듬한 각도에서 불쑥 솟아오른 어깨와 등을 보았다. 서있기는 했지만 한껏 웅크린 모양이었다. 그 휘어지는 각도와 부들부들 떨리는 몸. 그토록 격렬히 우는 재희는 처음 보았다. 가까이 가려던 몸이 굳었다.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움켜쥔 주먹은 하얗게 질려 피 한방울 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

 고요했다.

 너무나 조용히 재희는 울고 있었다.

 

 한곳으로 물이 빠지기 시작한 호수는 마치 토네이도 같았다. 둥글게 휘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아이들을 놓치지 않은건 천만다행이었다.

 물을 머금어 묵직해진 아이들 몸뚱이를 가까스로 호수 밖으로 보냈다. 동시에 버티고 있던 손과 발에 힘이 풀렸다. 어라? 싶은 순간 물살에 휩쓸렸다. 설상가상으로 작은 뼛조각 하나가 이마 한쪽을 강타했다. 본능적으로 입이 벌어졌고, 코와 입으로 물이 와락 들어왔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건가. 그런데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려는 절박함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분명히 손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온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하게 션을 찾아낸 그 손은 션의 팔뚝을 잡아챘다. 바로 미끄러졌지만 다시 나타났다. 양손이, 머리가, 부글거리는 거품이, 눈앞에 왕왕거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재희가 보고싶다고.

 그리고 숨통이 잠시 트였다.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머리카락.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눈. 검은 눈동자. 뭐라뭐라 말하고 있는데 안들렸다. 눈이 감겼다.

 "션..!"

 다시 눈을 떴을때는 하늘이 소원을 이뤄주었다.

 펄떡이는 가슴팍을 쾅쾅 재희가 내리치고 있었다. 말이 쾅쾅이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콜록거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재희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너무 울어 부은 눈에서 왈칵왈칵 눈물이 자꾸만 쏟아졌다. 어쩐지 아까운 마음에 션은 손을 뻗어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한번 더 사랑스럽게 구겨졌다. 재희가 이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울면서도 큰소리 한번 안내며 자신이 원하는 걸 요구하던 재희. 등을 돌리고 숨죽인채 울던 재희.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울고 있는 재희.

 살 것 같다.

 온몸이 천근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평온했다.

 어느새 눈이 그쳤다.

 

 호수의 물은 예고리로 흘러들어갔다.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으로 나갔다. 댓글에 달린 반응은 다양했다. 의심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고, 진짜라고 믿는 사람, 신고해야된다는 사람, 지인이 그곳에 있다는 사람, 가보고 싶다는 사람, 그저 욕을 하는 사람... 어찌되었든 아주 많았다.

 헬기는 예고리를 천천히 돌았다. 깊진 않지만 어느곳이든 물이 찰랑거리는 마을은 이질감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사전에 모두 대피해둔 상태였다. 추후 발표자료에 따르면 예고리 주민들은 단체 선동이 매우 쉽게 심리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고. 그러니 대피시키는데는 어렵지 않았을거라 생각한다. 아마 TAKE.B는 미리 알고있었을 정보.

 대피한 사람들 사이에는 주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시가 테이크에 부탁한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애플망고를 우걱우걱 먹으며 배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봤을때, 션은 그가 얄밉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주원을 보며 레시가 울음을 터트린건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주원은 덕분에 먹던 망고를 그대로 뱉은채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달래야만 했다.

 션은 제 옆에 옷을 작게 붙들고 있는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옷을 좀 더 세게 쥔다. 이미 늘어날대로 늘어난 터라 옷은 재희의 손가락 모양이 되어있을 것 같다.

 "나갈까?"

 "네."

 예고리에서 나오니 겨울이어도 날이 제법 따뜻했다. 그 마을은 원래 그토록 시리고 차가웠을까.

 션과 재희는 햇빛이 들긴해도 그늘이 조금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마을에서 나와서는 호수에 있었던 살아있는 사람들 모두는 경찰조사를 받았다. 이미 언론화, 이슈화가 된 이상 필수적 절차였다. 션은 테이크소속, 재희는 그에 연관된 인물로 확인되어 조사시간이 조금은 단축된 편이었다. 계속 옆에 있었음에도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션은 젖은 머리가 말라가는 동안 재희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재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고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녀 또한 말을 건내고 안부를 묻는 정다운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도 있었다. 막상 시간이 나니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조금 막막했다.

 "왜 울었어?"

 "아.."

 의외의 질문인듯 재희가 눈을 피했다. 소매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아, 이게 아닌데. 첫단추를 잘못 꿰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물어보려고 했던건..."

 "슬프니까요."

 "..."

 "상상만으로도,"

 재희가 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 드니까요."

 "..."

 물어보려던 모든 말이 하얗게 번져 없어졌다. 나는 왜 재희의 반도 못할까. 이런 말이 재희한테서 먼저 나오길 바랐나.

 더 이상 물러서면 평생 후회할 것이 뻔했다.

 재희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소매를 쥐고 있었던 손이 의자 턱에 내려가는걸 보았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션은 어느새 재희의 손을 잡고 있었다. 놀란듯 재희가 다시 눈꺼풀을 위로 떴다. 깜빡깜빡. 션은 맞잡은 손을 잠시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상대방 손가락이 방심한 찰나 마디마디에 끼워넣었다. 손깍지를 한 손이 마치 하나처럼 얽혔다. 재희가 다시 눈을 깜빡, 깜빡거렸다.

 "네가 저택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했어. 왜냐고, 무서워서 묻지 못했어. 그리고 이제 알 것 같아. 그 둥지를 없애야 하니까. 아주 오래전, 내가 보지 못한 걸 너는 본거지?"

 "..."

 재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할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좋아해."

 "...."

 "너를 너무..좋아하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래. 앞으로도 그럴 것..같은데."

 잔뜩 용기내 말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션의 얼굴에 열기가 훅훅 올라왔다. 이토록 적나라하게 마음을 내보인적이 없었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었다. 기왕이면 잘보이고 싶었고, 멋있어 보이고 싶었다. 좀 더 나은 말이 있지 않았을까. 기교를 부려도 진심은 어차피 똑같았다. 하지만 그 진심조차도 입밖으로 나오니 허술해보일뿐이었다. 나이는 먹을만큼 먹어놓고 마치 어린아이같았다. 재희는 션보다 연상이었다. 지금은 다르지만 어릴 적엔 체격차이가 꽤 났다. 새삼 그녀를 처음 보고나서, 그 뒤로도 한참동안 그녀보다 작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땅굴을 파는 션은 이미 낸 용기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네가 내 세상이야."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고 션은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원이 알려주던 온갖 영화, 드라마를 섭렵해둘걸. 그가 말하는 연애스킬을 조금이라도 귀담아둘걸.

 이제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아마 새하얗게 질려있을 터였다.

 재희의 눈길이 무거워, 쳐다보지 못했다. 눈을 잠시 내리뜬 션에게 재희가 입을 열었다.

 "션."

 "으,응?"

 "저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당신이 먼저했네요.

 그렇게 말하곤 재희는 환하게, 정말 환하게 웃음지었다. 깍지 낀 손마디부터 전기같은게 찌릿찌릿 타고 올라왔다.

 션은 저도 모르게 몸을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잡아끌자 재희의 상체도 조금 기울어졌다. 기분좋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여전히 맑은 눈망울을 하고 있는 재희의 눈동자가 천천히 닫히는걸 보았다.

 션은 재희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다시 마주한 내 세상의 얼굴은, 여전히 눈이 부시고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두 눈을 맞추고 미소지었다.

 나의 히. 션은 세상 밖에서 드디어 히를 찾았다.

 

 

 에필로그2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전히 깔끔하고 세련된 건물, 그 안에 몇달만에 바뀌었을리 없는 사무실에서 나온 강재환이 션을 맞이했다.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저도 실시간으로 관망했습니다. 아주 짜릿했습니다. 물에서 나오는게 조금 늦었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나요?"

 "네. 괜찮습니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션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그가 잠시 주춤하자, 아차차 하며 말을 잇는다.

 "죄송합니다. 한국은 정이 많아서."

 정. 사전적 의미말고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션은 머릿속에 잠시 그 단어를 새겼다. 나중에 재희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손님을 세워두고있었네요. 어서 앉으세요."

 "네."

 션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주원이 없으니 잘 모르는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을 해결해줄 요소가 없었다. 나이가 든 사람들, 직급이 좀 더 높은 사람들.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션이 말을 붙이는게 예의에 맞겠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눈 앞의 남자에게 큰 호의가 생길리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 네 그러시죠."

 강재환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프로젝트가 성공으로 마무리 되었으니, 그에게도 인센티브가 있을 것이었다. 더불어 한국지사를 미국본부에 어필하기도 좋을 터였다.

 "페이크쪽 사이트는 폐쇄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회 IP, 서버 등을 사용하는 수법에 패턴이 있어서 조사가 수월하다고 들어서 조만간 해외에 있는 사이트가 모두 폐쇄조치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주동자로 주목하는 한선유는 재판 진행 중입니다. 본인은 섀도우그룹이 시킨 내용이라고만 주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룹자체에서 지시한 사항과 달리 원래는 해외로 보낼 아이들을 빼돌린건 독단적 행위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에 관해서는 이 자료를 보시면 됩니다."

 "오."

 강재환은 흥미로운 얼굴로 션이 건낸 자료를 쥐었다. 그가 내용을 살피려는 찰나 션이 말을 이었다.

 "조항1,2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었겠죠?"

 강재환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훈련하는 요원들은 조직의 투명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사항이 TAKE.B의 전부라고요."

 그 말에 상대방은 얼굴을 찡그렸다. 명백히 비아냥거리는 표정이었다.

 "그런 착각을 했다니.. 유감이네요."

 강재환은 다시 여유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럴 의도이긴 했으나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가 말했다.

 "결국 기업이 해야할 일은 이윤을 남기는 겁니다. 그 와중에 비즈니스가 필요한건 당연한 얘기고요. 자회사의 내부 인력만 가지고 더 큰 이윤을 챙길 수는 없습니다. 한계가 있죠. 섀도우그룹도 지금껏 손해를 본 건 없었습니다. 우리는 협력관계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계약은 계약일 뿐. 윤리적 행동을 벗어나면 우리입장에서도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그런가요?"

 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당신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수긍하고 추진했다는 뜻인가요?"

 "기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가 창의적인 사고 아닌가요? 서로의 빛과 그늘이 되어, 결국에 모두가 행복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배신했군요."

 "필요에 의한 행위입니다. 당사가 더 크게 날아오를 디딤돌이죠. 섀도우그룹은 망했지만 다른 길을 모색해봐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션도 봤지요? 그 참상을 말입니다. 수많은 시신들이 드러난 호수 바닥을 말입니다. 그들의 신분파악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소식에 전 잠도 못잤어요."

 거짓말. 어쨌든 말로는 절대 굽히지 않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눈앞에서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솟았다. 차디찬 물 속에서, 온몸을 감싸주는 것 하나없이 숨을 막히게 하던 물살. 의식을 잃기 전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 남자는 생명을 잃었을 수많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도 표하지 않고 있었다.

 "시민과 경찰, 법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할까요?"

 "뭐?"

 "그렇게 의도가 좋고, TAKE는 잘못이 없으며, FAKE만 문제가 있다면..이 방에 들어와서 당신이 말한 것 모두 다, 저번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처럼 퍼져도 상관없다는것 아닌가?"

 강재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션을 노려보면서 빠르게 주위를 살피는게, 역시 나름 조심성은 있어보였지만 이미 늦었다.

 "이거 찾나요?"

 션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냈다. 뚜껑 부분에 미약하지만 바알간 빛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녹음기. 입모양으로만 말하자 강재환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션은 가뿐히 피했다. 강재환이 소파에 코를 박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대를 대하는 건 세상 쉬웠다. 더군다나 강재환은 직급이 높을 뿐, 현직 요원의 상대로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생각보다 감정적이시네요."

 "후우."

 애써 감정을 추스르는 듯 강재환이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억지 웃음을 지으며 션을 향해 말했다.

 "그거, 주지?"

 "싫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권재희지?"

 션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표정에 행여나 금이 가지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 은혜를 원수로 갚아?"

 샤프를 누르듯 버튼을 두번 클릭하면 클라우드 서버로 녹음된 파일이 이동한다. 무작위 메일주소를 발신으로 각 대표 신문사까지 발송되는데 걸리는 시간 10분. 강재환이 알고 있을거라는 재희의 말이 맞았다. 보자마자 달려들줄은 몰랐지만.

 재희가 예고리에 들어올 수 있었던건 강재환의 입김 덕분이었다.

 선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잘해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예고리의 사람들은 TAKE와 FAKE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기타 사람들의 세가지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재희는 이 모든 부류에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션이 말했다.

 "제가 요구하고 싶은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예고리 소속 아이들을 TAKE.B 산하 교육기관에 들어가는데에 그들의 의견을 물을 것. 그들이 '밖'을 택하더라도 금전적 보상을 해줄 것. 둘째, 이번 프로젝트에서 저와 주원, 그리고 재희의 이름을 완벽하게 지울 것."

 듣고 있던 강재환이 말했다.

 "그렇게 하는게 쉬운 줄 알아?"

 "아니요. 쉽지 않은걸 아니, 지부장님이 해주셔야죠. 저는 TAKE.B의 선순환을 어느정도는 인정합니다. 저도 그 혜택을 받고 여기까지 온 케이스이기도 하고요. 이 정도면 당신의 명예를 크게 훼추시키지 않고, 제법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끄응. 강재환은 살짝 앓는 소리를 냈다. 션의 의견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강재환의 입장에서는 번거롭긴 해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션이 TAKE.B 전체를 쥐고 흔들거라 생각했을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거니와, 그렇다면 협상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번에 공을 세운 한국지부장에게 얼마나 힘이 있으려고.

 이 녹음기로는 오히려 TAKE.B쪽에서 강재환을 꼬리자르기 하기에 적합한 정도였다. 멍청한 남자가 아니기에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강재환이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할 말을 끝낸 션이 펜을 다시 수트 안쪽에 꽂아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가던 그가 잠시 멈춰서곤 뒤돌아 강재환을 바라보았다.

 "아,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요.."

 "뭐?"

 "저도 어릴 적 화재를 겪었습니다."

 강재환의 얼굴이 미묘해진다.

 "불은 기억을 왜곡시키죠. 뜨거운 열기. 그에 따라 일렁이는 눈앞의 풍경...다시 눈을 뜨면 마치 지어낸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화재 속에서 잃었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얼굴 정확히 기억하십니까?"

 "...."

 "그녀의 이름은요? 나이는요?"

 션은 입을 꾹 다문 강재환을 얼굴을 보며 문을 열었다.

 "당신이란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어떤 분노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생각해보는게 어떨지?"

 반쯤 연 문 사이로 빠져나가며 남자의 얼굴은 사라졌다. 이제 모자간이 서로를 알아보는건 둘의 문제이다.

 재희의 부탁을 들어준 션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에필로그3

 

 "우리는 너희같은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한단다."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사람의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려상이 대답하지 않자 한국말로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려상은 그 말도 끝까지 다 듣고나서야 영어로 말했다.

 "선택은 우리 몫인가요?"

 "그렇지. 이번에는 말이야."

 "이번?"

 "잘 생각해보려무나. 내일 여기로 오면 내가 같은 질문을 할텐데, 그때 대답해주면 된단다."

 긴 복도를 걸어가며 려상은 남자가 한 말을 천천히 복기했다. 쓸데없이 길다고 생각했는데, 길기도 하거니와 걸어가는 내내 자신이 내는 발걸음 말고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로로 길게 나있는 창문은 그늘이 생기는 공간보다 훨씬 많아서 환한 햇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였다.

 크게 다치거나 혼란스러워 하는 예고리의 아이들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곳이 병원인지, 그냥 사무실인지, 아니면 그냥 집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예고리의 병원은 작고 허름했으며 그가 아는 미래일자 책에 나오는 병원은 크고 웅장하나 건조하고 냉기가 도는 듯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이곳은 너무 따스했으나 누군가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실리적 용도로 쓰는 공간이 구석구석 있었다. 어른들이 많았지만 대체로 보이지 않았으며, 필요에 의해 아이들을 찾아오는 어른만 있을 뿐이었다.

 려상은 예고리에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있다는걸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제시와 민수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옷차림새와 모습. 그저 보기만해도 그냥 예고리 출신인걸 알았다. 알아졌다. 충분한 설명이 있었음에도 이제 곧 '호수의 품으로 돌아가야하냐고 물어본 녀석도 있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낯설었다. 태어나 자라온 그 마을에서, 정말 한번도 안보는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였다.

 며칠간 좋은 음식,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되었다. 부모님은 볼 수 없었다. 부모를 심하게 찾는 어린 아이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데려가는 사람들에게서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려상은 딱히 부모가 그립지 않았다.

 너를 대체할 다른 려상이 있어.

 그 말 때문일까? 려상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시와 민수는 려상과 같은 방에 있었다. 려상은 그게 누군가의 배려로 느껴졌다. 아니면 단지 호수에 셋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려상과 민수는 호수에 빠졌고, 제시는 총상을 입었다. 실제로는 타박상 정도였지만.

 세 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입을 다물었을때, 어른들이 말했다. 너희들에겐 안정이 필요해.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려상은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걸었다. 너무 늦으면 다른 아이의 상담시간이 늦어질 것이다. 상담선생님은 총 다섯. 아이들은 못해도 백명 가까이 되었으니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건 려상이었다. 민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가 려상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깜짝 놀라는게 느껴졌다. 민수는 어색하게 웃었고 려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직도 화났나.

 민수는 려상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적어도 이젠 좀 더 동등한 입장에서 편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걱정했다고, 우리가 아는 것과 세상이 달라서 혼란스럽지만 잘해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를 구하지 못했다. 남자들은 숙련된 자들이었고, 민수가 끼어들만한 틈 같은건 주지 않았다. 요행은 외부인의 집 딱 거기까지였다. 두 눈이 마주치는 찰나 려상은 정신을 잃었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몸을 벌벌 떨며 호수 앞에 있었다.

 제시가 호수 앞으로 넘어졌을때, 그녀가 다치지 않았다고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튀어나갈 뻔 했다. 려상은 재희와 제시가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모른다. 퍼뜩 깨닫고 돌린 시야 사이로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무력감에 분노가 솟았다. 려상을 뒤쫓는 내내 무섭고 떨렸다. 들키면 어떻게 될런지. 몸은 착실하게 그를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게 맞다는 확신이 없었다. 재희와 제시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들에겐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자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려상을 보고나서야 한가지가 확실해졌다. 여기서 그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기 이전에, 나서야 한다는 것.

 나란히 호수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그를 구하지 못하고, 구해졌다. 션의 큰 손이 자신을 휘어감고 물위로 힘껏 올려지는 순간을 기억한다. 숨이 막혀 돌아가지 않던 뇌에 산소가 공급되던 순간. 살았다는 느낌. 죽지 않음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그리고 나는 그를 쫒아 호수에 뛰어든걸 후회했나.

 민수는 확신하지 못해 괜히 뒷목을 긁적였다. 두 번이나 려상을 구하지 못한데다, 후회하는 낮빛이 있었다면 려상은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콜록거리며 숨을 토해내는 순간에는 려상보다는 민수 자신이 우선이었다. 민수는 자신 뿐 아니라 려상이 그때 어떤 얼굴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려상이 와서 민수를 툭 쳤다. 그게 려상인지도 민수는 몰라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

 "너는 상담 끝났어?"

 려상이 한마디 툭 던지더니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얇게 뻗어있는 눈썹이 꿈틀꿈틀했다. 응?

 민수가 말했다.

 "아까 끝났어."

 "그래..?"

 상담은 오전에 이미 끝났다. 려상은 늦게 들어간 편이었다. 그는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우물쭈물거렸다.

 "내일 다시 한다던데. 마지막."

 "응."

 "넌 뭐 그렇게 태평하냐.."

 려상의 얼굴에서 힘이 빠졌다. 잔뜩 긴장했던 눈썹이 풀어진다. 그 위로 희미한 미소가 얹힌다. 아, 화난게 아니구나.

 민수는 잠시동안 려상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냥..어떻게 보면 단순한 문제같아서."

 "?"

 "난 이미 정했거든. 그리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존중할게."

 려상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민수가 앉아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낡은 침대 스프링이 삐그덕거렸다. 이내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

 "넌 참..대단하다."

 이번에 말문이 막힌건 민수였다.

 려상은 항상 민수보다 앞서 있었고, 려상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게 눈에 보였다. 빠른 판단력으로 셋이 있으면 결단을 내리는건 언제나 제시와 민수가 아니라 려상이었다.

 갑작스런 반응에 민수가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려상이 말했다.

 "고마워."

 "아.."

 "네가 아니면 난 죽었을거야. 정신을 잃기 전에도 너를 봤어."

 "하지만 난 구하지 못했어. 우릴 구한건 션이야."

 "그는 어른이잖아."

 "뭐라구?"

 민수가 놀라 물었다.

 "내가 알던 세상이 정말 다른거라면..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려상은 어른을 그런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믿었고, 어른이 아이를 감싸주고 소중히 대하는 여타 미래일자 책 속의 내용은 언제나 상상 너머 이야기로 믿고 있었다.

 려상은 이제 용기를 내려고 하는가 보다.

 "물론이지."

 이제서야 민수도 려상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느껴졌다.

 두 아이는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웃는다. 아마 내일 있을 대답은 우리 둘 다 같을 것 같다고, 민수는 생각한다.

 

 

 "저는 나갈게요."

 단순한 말이었지만 제시에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앞에 있던 담당직원은 예상하지 못한듯, 약간 난감하게 웃으며 시설에 들어가면 받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했다.

 알고 있었다.

 이제 제시에겐 울타리가 될 만한 존재가 없었다. 오롯한 혼자.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이대로 시설로 들어가는건 마을에 있을때와 다를 것 없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달라지고 싶었다. 누구의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제시에겐 지금 가장 중요했다.

 제시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직원도 점차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제시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 것처럼.

 "시설에 들어가지 않으면 최소한의 지원만 있을 뿐이야. 그것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몇 개 없는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을때는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었다.

 머리 위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간단한 아침만 먹은터라 허기가 졌다. 보송보송한 따스함 아래 이제 제시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손에 든 짐이 무게를 부풀리는 것 같았다.

 "....."

 일단 가만히 서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질때즈음 시선에 휙휙 거슬리는게 들어왔다.

 "늦었다고 했잖아요.!"

 "아니, 나는.."

 "빨리!"

 허둥지둥 달려오는 두 남녀는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달려오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의 눈이 반달로 휜다. 제시는 어쩐지 눈물이 날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달려나간다.

 "재희언니!"

 "제시!"

 이제는 꽤 무거울텐데도 재희는 제시를 번쩍 안아든다. 엄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녀 앞에선 아직도 항상 자신은 어린아이인 것 같다.

 "내가 언니처럼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잘할 수 있을거야."

 재희가 제시를 다독였다. 그 간단한 말에 위로 받는다.

 마침 등 뒤로 투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민수와 려상이 각각 배낭하나씩을 매고 걸어나오는 중이었다.

 "엇?!"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한다.

 제시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너희 너무 늦었어!"

 세상엔 벽이 있다. 그 벽을 방금 우리는 넘어서 나왔다. 밖은 지금까지 부르던 '세상'이 아닐 것이다.

 잘해낼 수 있을까?

 아니더라도 이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똑똑히 바라보리라, 제시는 강하게 다짐하며 두 명의 친구에게 달려나간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1 에필로그 2022 / 1 / 31 177 0 12145   
20 3부 그 너머 (7) 2022 / 1 / 31 177 0 10526   
19 3부 그 너머 (6) 2022 / 1 / 31 160 0 10700   
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3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3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5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1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0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8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0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0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4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1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아이어른
세느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