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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3부 그 너머 (5)
작성일 : 22-01-31 10:20     조회 : 178     추천 : 0     분량 : 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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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에 소동이 일어난건 그때였다.

 커다란 진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귀를 뚫고 폭팔적인 굉음이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그저 입모양으로만 보일정도로 파격적인 충격이었다. 인위적 바람이 세게 불었고 지지하고 있는 바닥에서 밀려났다. 힘을 주지 않았으면 아마 몸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점멸했다. 귀 뒤가 멍하고 골이 흔들렸다. 션은 자신이 끌어안은 재희를 바라보았다. 그는 빠른 판단력을 가지고 고막의 충격을 막았다. 지극히 요원다운 행동이었다. 단,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재희였을 뿐이다.

 눈가에 달라붙은 잔먼지가 맵고 따가웠다.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도 가발이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재희가 무어라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마 고막에 충격이 간 모양이었다.

 튀어오른 돌부리와 벽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사람들은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가와 흔들리는 동공이 그들의 충격을 대신해주었다.

 재희가 가까이 와 션의 귀를 막았다. 손으로 조심스레 누르는 감촉이 피부 뒤로 느껴졌다. 다행이 곧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폭파음에 가려져 미미했으나 확실했다. 사람들은 더러 어리둥절했고 누군가 이 사태를 해결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얼굴이었다.

 션은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오래 전 같은 상황을 겪은 것만 같았다. 그 감각이 채 사라지기 전 시야 너머로 사람이 나타났다. 체격이며 인상 모두 전혀 닮지 않았지만 션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여지껏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던 생물학적 아버지를 말이다.

 광장 한가운데 있는 분수 바로 앞에 어느샌가 단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에 무감각한 눈을 가진 남자는 가만히 서있었고 옆에 휴대용 마이크를 든 사람이 그를 대변하듯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예고리 주민 여러분!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신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신성한 예호제에 이런 불경스러운 일이라니요. 비통하기 그지 없습니다..! 침입자는 예호제를 시작해 예고리를 파괴하려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마입니다! 우리 삶의 터전을 없애다니요. 방금 전 폭파도 그들이 꾸민 짓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우리의 터전을 지켜야합니다. 여러분! 누구보다 예고리를 잘 아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칠 때입니다..!!"

 과장스런 화술로 쩌렁쩌렁 외치는 통에 션은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저런 약장수같은 말을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듣는다고? 게다가 엄연히 본인들이 벌였을법한 폭파까지 션에게 덤탱이 씌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주위를 둘러본 그는 아연해졌다. 같은 방향을 쳐다본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피를 흘리고 쓰려졌던 사람도, 얼굴을 잔뜩 찡그린채 기침하는 사람도, 몸이 불편하건 아니던 그 모두가 남자의 확성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엔 모두 한가지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분노.

 이물감없는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가 무서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저 자의 말을 맹신할 수 있지?

 머릿속에 한가지 가설이 스쳐지나갔다. 약. 축제때 먹으라고 예고리에선 하루 한 알, 총 30알의 약을 주었다. 일종의 영양제라고 했지만 정확한 성분 파악따윈 당연히 불가능 했다. 약장수같은 소리하고 있다고 주원은 받자마자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약을 꼬박꼬박 먹었을까?

 어찌되었든 이게 남자의, 정확히 말하자면 마이크를 든 남자 옆에서 그를 지휘하고 있는 자의 의도였다. 사람들을 어수선하게 하는 것. 집중력을 높이고, 그 말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게 갈음하는 것.

 션은 어째서 남자를 보자마자 아버지를 떠올렸는지 깨달았다. 오래 전 그의 방식또한 저러했다. 어린 션의 손을 붙잡고 이게 남들 앞에 서서 그들을 이끄는 일이라고, 항시 말하던 당당한 태도가 겹친듯 자연스러웠다. 속눈썹 아래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표정을 션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어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집중한 적이 없기 때문일까. 아마도 저리 무감각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깔보고 멸시하는. 너희들이 무엇을 알고 있느냐는, 오만하고 내려다보는 자 특유의 잿빛 눈동자.

 확성기 너머로 션과 주원의 인상착의가 크게 울려퍼졌다. 특히 주원은 마을의 여자아이를 납치한 파렴치한이 되어있었는데, 그 시점에 사람들의 분노는 좀더 격해졌다. 멍하니 듣다보면 정말 주원이 못된놈처럼 보였다. 물론 션도 마찬가지였다.

 "션"

 팔을 잡아끄는 느낌에 션이 옆을 돌아봤다. 재희가 션을 불렀다. 그녀의 표정도 무미건조했다. 어느새 렌즈를 뺀건지, 검은색 눈동자가 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색은 깊고 말갔다.

 "이상해요."

 "...."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건지, 그녀가 덧붙였다.

 "이렇게 일을 벌일 인간들이 아니예요. 예호제는,!"

 "여러분 방금 기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재희가 말을 채 끝맺기 전에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납치범이 잡혔다고 합니다!"

 "!!"

 "수호자들이야..!!"

 검은 옷으로 얼굴까지 가린 사람이 시야에 나타났다. 얼굴로 구분되진 않았지반 방금전 산에서 본 이들이란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수호자'인가. 그들 중 두 명이 한 사람을 끌고 왔다. 션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주원이 아니었다.

 

 

 션은 주위를 시선으로 훑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잔영에 주원은 없었다.

 사전에 폭파에 대해 알려진 사항은 전혀 없었다. 션조차 반사적으로 몸을 사린 것 뿐이었다. 무기고에 대해 FAKE가 알고있었다는 사실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션의 어깨를 잡은 것은.

 그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이며 어깨를 비틀었다. 사선으로 빠져나가려 했던 행동은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상대방은 그의 수를 훤히 꿰듯 반대편 팔로 션을 잡아챘다. 그리고 두 눈이 마주쳤다.

 "...."

 "...."

 레시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에 아슬아슬한 각도로 칼날이 번쩍였다. 재희가 손잡이를 뒤집어 잡은 만년필 칼로 레시를 겨냥하고 있었다. 모두가 움직이지 않았고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아주 대단한 사람 나셨어."

 "헛소리 하지 마."

 재희가 차갑게 말했다. 션이 여지껏 들은 적 없는 냉소적인 태도였다.

 레시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이래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팔을 잡힌 손에 힘이 풀렸다.

 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가 조심히 일어났다. 그 순간에도 재희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이내 제시가 항복의 표시로 두 손바닥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더 살벌해지기 전에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는듯 보였지만 재희도 칼을 거뒀다.

 "무슨 목적이지?"

 무기고에 대해 FAKE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이소동을 일으킨거냐고 묻는다면,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션이 말했다.

 레시는 얇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주원을 찾아줘."

 "뭐라고..?"

 레시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 '그들'이 주원을 끌고 간 것 같아. 나도 알 수가 없어.. 도와줘."

 가만히 말을 듣고만 있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넌 '그들'과 같은 소속이잖아." 더할나위 없이 차가운 말투였다.

 "아니, 나는..!"

 억울한듯 레시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몸에 힘을 뺐다.

 침착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그다지 능숙하지 않아보였다. 그러면서 FAKE소속인건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깊게 고민해 본적은 없었다.

 " '그들'은 우리 안에서도 좀 더 철저하고 치밀한 그룹이야. 나도 그들에 대해서는 몰라. 지부장을 중심으로 뭔가 크게 바꿀거라곤 생각했지만.. 주원이 엮인건 예상 밖이었어."

 지부장?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지부장이 가장 높은 사람인건가. 아니라면..

 "그걸 어떻게 믿지?"

 재희의 태도는 일관됐다. 그녀도 레시가 션의 약혼자였던 걸 이미 알고있는 걸까. 날 선 태도도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었다. 레시는 이미 한번 션과 재희를 속였다. 비록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레시 또한 조직의 톱니바퀴 중 하나, 굳이 개인적으로 악의를 품고 한 행동이 아니라고 알고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는 상황은 절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 레시는 두 명의 냉소적인 시선을 받고 있었다. 세 사람은 침묵을 유지했다.

 레시는 낮게 탄식했다.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이 답답했는지 한숨을 내쉬고 긴 머리를 여러번 쓸어올렸다. 긴 한숨을 한번 더 내쉬고 그녀가 말했다.

 "재희. 내가 너랑 사이가 좋진 않지만 여기선 사심 좀 덜어줄래?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어."

 "네 사정을 내가 왜 배려해줘야하는지 설명해봐."

 "하!" 그녀의 눈이 매서워졌다.

 "설명이라니..너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 하는 소리야?"

 재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항상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어. 나 혼자서 그 대답을 찾아야했지. 레시 너는 '우리'한테 뭔가를 부탁할 자격이 없어. 적어도 네가 한 짓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확고한 말투에 레시는 당황한듯 했다.

 "그게 무슨 말.."

 "캐서린 율리스.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

 레시는 잠시 멈추어섰다가 경악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션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또 한번 숨을 삼켰다.

 "나는.."

 "주원은 션의 동료니까 찾을거야. 단,"

 재희가 일갈했다.

 "너랑은 상관없어."

 그녀는 말을 마치며 션을 잡아 끌었다. 소매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려있어, 션은 그저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유사시엔, 광장으로.]

 그건 Take.B의 명령이었다.

 '그런걸 대체 누가 정한건데?'

 훈련을 받고 들어간 어느날이었다. 샤워장 탈의실에서 주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길고 길었지만 결론으로 치면 명령엔 절대불복종이다, 라는 강의와 언제나처럼 힘든 훈련을 받고 온 날이었다. 일상이었고, 평소와 같았다. 옆에 있는 션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나마나 평소와 같은 별 감정없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절대불복종이라는게 어디있어.'

 '그렇게까진 말 안했어.'

 '그 말이 그 말이지. [귀 요원들은 Take.B 요원 수칙에 따라야 하며 필요시 상황에 따라 조직에서 요구하는 행동요건에 필히 부합해야 한다.]'

 주원은 훈련강사의 근엄한 표정을 따라하며 성대모사했다.

 '이 세상에 절대 진리는 없는게 진리야. 결국 필요에 따라 부려먹겠다는거 아니야. 어느 누구도 일방적인 선이나 일방적인 악이 될 순 없어.'

 '그건..당장 퇴사조치 당하겠네.'

 '에? 설마 나같은 인재를?'

 결국 투닥거리다 마무리 되었고, 주원과 션은 Take.B에서 나가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차고 나갈만한 패기도 부족했다.

 션에게는 부모라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원은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남을 시기하는 자신이 싫은만큼, 버텼다.

 

 

 "일방적이라.."

 주원은 작게 쿨럭거렸다. 그럴때마다 내장에서 뭔가가 솟구치는데, 배는 아프고 목구멍이 심하게 비렸다.

 옆에서 제시가 눈물범벅이 된채 애써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이 작은 아이조차도 제 슬픔을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 순간의 상황은 잊은채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선이나 악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되돌려 말하면 어느 누구도 선이나 악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눈동자. 복면을 쓰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눈동자가 서넛이나 있었다. 그들이 모두 주원을 공격했다. 공격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절대적 복종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라 부르던 이들이 잔정은 버리고 다시 다른편에 절대적 복종이라..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겨우 도망치긴 했지만 내상을 입었다. 한쪽 얼굴을 얻어 맞아서 이미 감각이 없었다. 아마 퉁퉁 부은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낡은 상자 안에 숨어 있었다.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자 안에서는 오래된 나무 냄새만 날 뿐이었다. 군데 군데 흠집이 있어 바깥의 햇빛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푸라기가 덮여있긴 했으나, 작정하고 바깥에서 유심히 본다면 상자 안에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만 했다. 그럼에도 상자 안은 주원이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아픔을 넘어서 이젠 몸이 나른해지고 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시간 동안 방치되면 죽거나 그에 상응하는 장애를 얻을 것이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시.. 잘 들어,"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그래도 주원이 말하자 제시가 눈물을 애써 참으며 제 소리를 죽이고 주원의 말에 귀기울였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 행동조차 역시 '아이답지' 않았다.

 그는 두서 없지만 전해야 할 말을 했다. 네가 받아온 훈련은 '바깥'세계에 있는 아이들이 평상적으로 받는 수업이 아니다. 아이들은 꿈과 희망.. 그러니까 너희들이 읽던 책 중에 '동화'라는 장르의 책에 가까워져야 한다. 어른의 말에 복종할 필요는 없으며, 세상엔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고 그걸 가리켜 '친구'라고 표현한다. 물론 어른과 아이가 친구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이와 아이가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매우 장점이지만 그건 자신의 국적을 숨기고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말하자면 끝도 없었지만 주원은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내뱉었다. 제시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까지 몰랐다. 하지만 영특한 아이니 잘 받아들여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게 맞아.."

 "..."

 주원은 말하면서도 웃음이 비질비질 새어나오는걸 막지 못했다. 네가 하고싶은걸 하라고. 너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그건 어릴 적 주원이 듣고 싶던 말이었다. 모든 어른은 친절했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이비종교 집단을 넘어서 아이들을 훈련시켜 기르는 FAKE. 그런 집단에 대항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요원을 모집할 명목하에 아이들을 후원하는 TAKE.B. 대체 무엇이 선인가. 애시당초 경계를 짓는게 맞기나 한건가.

 

 제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으로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주원은 그녀를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시간은 많았다. 제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어쩐지 평화롭게 느껴졌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주원이 하는 말. 수호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데.. 그 말은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

 "하지만 주원은 변절자나, 배신자가 아니예요. 주원도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것만은 확실해요."

 "그거면 됐어.."

 제시의 마른 얼굴에, 건조한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주원이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울지마. 제시가 작게 코를 훌쩍이고 소맷부리로 눈물을 닦았다. 조금이나마 웃는 모습이 무척 어른스러웠다.

 "내 말을.. 나가서 믿을만한 사람한테 전해줘. 션을 만난다면 더 좋고.. 그는 믿어도 돼. 너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면 도와줄거야.. 안되면 재희나 다른 친구들에게라도. 너네 언니는 안된다..?"

 제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울음을 꾹 참으며 주원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주원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역시 영특해.

 "도와줄거지?"

 손을 내밀어 제시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시가 고개를 들어 주원을 바라보았다.

 "도와..줄거지?"

 "...."

 그녀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바람빠진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시 한번 비릿한 맛이 목끝으로 올라왔지만 주원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내가 신호하면 뛰어나가. 상자의 존재가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지?"

 그녀라면 가능했다. 기척을 숨기고, 적진 않지만 적당히 어수선한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숨 한번 흐트리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 것이었다. 광장은 시끄러웠고 질서가 없었다. 결국엔 나도 광장근처로 오긴 했네... 쓸데없이 성실한 션이라면 오고도 남았을 터였다.

 제시의 눈을 바라보면 간절하게 '빌었다'. 주원은 여지껏 뭔가를 간절히 소망해본 적이 없었다. 제시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지금껏 해온 일에 대체 무슨 의미를 부여해야하는걸까. 온몸이 떨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세상이 멍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주원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망설이면 더 이상 기회는 없었다. 제시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숫자가 낮아질수록 그녀의 눈이 묘하게 침착해졌다. 아이치고는 너무나 성숙한 눈. 제시가 몸을 굽혔다. 반동으로 빠르게 치고 나가려는 거다. 이제 삼초가 남아 있었다. 3, 2, 1...!

 솔직히 움직이는 제시를 보고 주원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여지껏 뭘 했는가 였다. 작은 아이를 지키기위해 애를 썼지만, 사실 제시는 그럴 필요가 없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고요한 바람소리 한점을 여유두고 제시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 처럼 빠르게 뛰어올랐다. 준비하고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몸놀림이었다.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웠다. 아이의 유연한 몸과 민첩함이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었다. 머리를 한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제시가 많지 않은 광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그리고 완전히 안보이게 되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긴장이 풀린걸까. 졸음이 쏟아졌다. 비릿한 피 맛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그때, 광장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왔다. 주원의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누군가를 뒤에 두고서 나만 앞으로 뛰어가는 경험을 또 언제 했더라?

 제시는 짤막한 인생의 한 부분을 찾아보려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눈물을 흘리느라 눈가가 축축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더니 입 속은 건조했다. 내가 그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공기를 크게 삼키고나서야 숨을 멈췄다.

 인파 속으로 숨어드는 건 거울에 비친 글씨를 쓰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아버지는 쥐새끼같다고 했다. 이 빌어먹을 썩을 놈의 쥐새끼. 그 말은 제시에게 안도의 말이었다. 아버지가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만큼 이 특기가 고마운 적이 없었다.

 어른들 사이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제시의 양 옆에 서있는 이들은 서로가 제시의 부모라고 생각할 정도의 가까움으로 여겨질 터였다. 션이 이곳에 있을까? 누구든, 찾아야했다.

 그때 광장이 폭발했다.

 옳지 않은 표현이었지만 제시는 땅이 솟구치며 마치 광장이 폭발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붕 떠올랐다. 마치 가벼운 깃털이 된 것 같았다. 말도 안돼. 나 날고 있나?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으로 꺼졌다. 순간적으로 몸을 굴렸지만 팔뚝이 무척 아팠다.

 "윽, 콜록! 콜록!"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예고리 주민 여러분!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신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신성한 예호제에 이런 불경스러운 일이라니요. 비통하기 그지 없습니다..! 침입자는 예호제를 시작해 예고리를 파괴하려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침입자가 마을에 나타나서 이렇게 어수선했던 걸까? 아직 '수호자'가 아닌 제시는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분노에 차서 외치고 있는 낯선 이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술을 마시고 있을때의 아버지는 항상 저렇게 화가 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난 아버지는 가만히 있는 제시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무표정이면 표정이 건방지다며, 조금이라도 웃으면 자기를 비웃는것이라며. 그 어느것도 진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리 화가 난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 버릇이 들어버렸다.

 제시는 쓸린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없었다.

 미친 아버지는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불순한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제시를 보는 어른들의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넌 착한 아이야.' '넌 순수한 아이야.'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넌 내 생각보다 더 악랄해.'

 레시는 그녀를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제시는 놀라고 충격받은 동시에, 어쩌면 그게 진실일지 모른다는 불온한 예감에 몸이 떨렸다. 거짓말. 화가 났다. 거짓말. 자기가 더 악랄한 주제에.

 '...'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찰나의 감정을 담아 레시를 노려보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억울한 줄은 아나 보네. 야, 딱이다 완전.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우리가 '자매'인거 말이야. 제법 그럴듯 하지 않아?'

 제시는 그 뒤로도 문득문득 레시의 빈정거림을 상기했다. 그건 마치 이전에 읽었던 책, 주홍글씨처럼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지금도 그랬다.

 레시--!!

 짜증나는 잡념을 없애기는 커녕 레시가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제시는 그녀가 싫었다. 너무너무 싫었다. 주위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언니 행세를 하고, 집으로오면 나몰라라 하는 구석이 마음에 안들었다. 아버지도 레시 앞에서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 레시가 뭐길래. 궁금했지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을 가지는것 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레시 앞에서 빌빌대고 올때면 아버지는 화풀이 하듯 더 난폭하고 사나워졌다. 제시는 평소보다 더 잘 숨고, 도망쳐야만 했다.

 비록 가족은 아니지만 애가 위험에 처했는데, 명목상 가족이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나 싶었다. 세상엔 가족이 아니어도 친절한 사람이 많았다. 재희나 주원처럼 말이다.

 마침 레시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남자는 바닥에 넘어진듯 앉아있었고, 그 옆에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옆모습이 조금 앞으로 나왔을때, 제시는 그가 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션이 먼저 기척을 알아채고 몸을 수그리며 어깨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에 반응하는 레시의 몸놀림도 남달랐다. 반대편 팔로 션을 잡아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멀리서 봐도 레시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는걸 알 수 있었다. 표독스러운 그녀 특유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예뻐도 숨길 수 없는게 있다. 제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레시 옆으로 작게 날선 칼날이 번쩍였다. 그대로 정적.

 세 사람은 가만히 서 있다 레시가 항복의 의미로 손을 든 뒤 대화를 시작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순 없어. 레시가 있는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시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빨리 션을 찾았으니 다행인 일 아닌가.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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