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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3부 그 너머 (4)
작성일 : 22-01-31 10:18     조회 : 174     추천 : 0     분량 : 1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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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 그 단어에 도리어 릴리는 의심을 품는듯한 얼굴을 했다. 말끔하고 기계적인 얼굴에 금이 갔다. 짧은 침묵 후 그녀가 말했다.

 “모든 입주민은 평등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그들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포박할만한 정보가 없다면 의심하면 안됩니다 꼬마야.”

 마지막은 신경질이 담겨 있었다. 아 이 사람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그런 시늉만 하고 있는거야. 그 마저도 이젠 귀찮은거고.

 깨달음과 별개로 려상은 무척 당황했다. 오래 산 건 아니었지만 여지껏 이런 취급을(혹은 그와 유사한)받아본 적이 없었다. 네가 무엇을 가지고 있던 나와 상관이 없고 가치가 없다는 무언의 공기. 그것이 질량과 무게를 가지고 려상에게 들이닥쳤다.

 더 이상 릴리는 려상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대화의 단절. 려상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목끝에서부터 열이 올랐다. 사방이 하얀 공간 안에는 일단 려상과 릴리 뿐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지는걸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계속 생각했다. 션과 재희의 관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미래일자 책을 가지고 있는 재희. 또래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해준 재희. 재희를 아는 션. 호수의 주인이 누군지 묻는 션. 다시 묻는 주원. 명령이냐고 물어보는 션. 그게 명령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션. 당연한게 아니라 네 머리로 생각해보라고 했던 션. 션을 바라보던 재희의 모습. 재희의 집 앞에 앉아 있던 션. 가끔씩 먼 곳을 바라보던 재희. 눈이 닿는 곳에 션이 있을 때 그녀가 짓던 표정. 닫히는 문 너머로 려상 뒤를 바라보던 션의 온도를 가진 표정.

 재희에게 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재희와 션이 있는건 보고 싶지 않았다. 션은 려상을 위협했다. 그가 알고 있는 확고한 생각에 흠집을 냈다. 우습게도 그 흠집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상상력이 과하다. 그럼에도..

 려상이 한마디 했다. 속으로 담고 담금질하며 여러번 고민한 문장이었다.

 그가 입을 벙긋거려 그 말을 내뱉었을 때, 릴리의 시선이 정확히 려상을 향했다. 그린듯한 미소는 언제있었냐는듯 지운채 굳은 얼굴이었다.

 

 "려상 군, 괜찮은가?"

 남자가 그렇게 물었을 때 려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념에 빠져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잘 한일일까.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 목끝에 바쳤다. 말을 꺼낸 이후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뀐대다 려상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물음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를 무시하는 사람 또한 없어졌다. 자리를 옮기고, 새로운 말을 들으며 높으신 분을 만나게 된 이 순간 려상은 내내 감시받는 것처럼 불편했다. 자신의 말은 그저 말 뿐인것을. 그저 말이 아니라는 걸까?

 “아닙니다.”

 딱딱하게 긴장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진실로 그를 걱정한 것은 아닌듯 남자는 려상의 대답을 들은 후 제 말만 했다.

 “큰 재목이 된 걸 축하하네. 앞으로의 삶에 희망이 깃들기를.”

 잡은 손을 한번 더 흔들고는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어쩐지 털어내는 것 같다고 느끼며 려상은 허전해진 손을 쳐다보았다. 잘 한 일일까?

 "..래도,"

 "응?"

 머리가 징징 울리는 탓에 려상은 여과없이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들어야할 것 같은데요."

 려상은 최연소로 마을 밖으로 나갈 것이다. 호수의 주인의 선택을 받았으며, 그 공로는 션의 고발이었다. 하지만 믿지 않았잖아. 들은 척도 안했고.션이 마을을 해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모순된 생각인걸 알면서도 이해가 안갔다. 도대체 왜?

 남자는 흠, 하는 바람빠진 소리를 내며 몸을 의자뒤로 깊숙이 묻었다. 뒷머리가 눌리며 그의 늘어진 턱이 두개로 잡혔다. 입꼬리를 잠시 들썩이던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건 말이지..."

 그때였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건 제가 대답해드려야할듯 하네요."

 밖에서 듣고 있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말과 함께 눈이 마주쳤다.

 려상이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목소리를 잊고, 얼굴을 잊고 있었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았으니까. 피하자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각나고 깨달았다. 누군가 뒷통수를 크게 친 것 같은 얼얼함이 느껴졌다.

 어른들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려상의 부모가 그랬고 제시와 민수의 부모가 그랬다. 책은 좋았지만 절대로 발길을 돌린 적은 없었다. 재희가 가져온 동화책을 읽다가 알게 된 단어가 있다. 그걸 보는 순간 려상은 깨달았다.

 마녀.

 예고리 구석에서 과자집을 짓고 사람을 유혹하는 마녀가 려상의 눈앞에서 모두를 속인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해진 매서운 바람이 귓가를 거칠게 때렸다. 안정감있게 자신을 받치고 있는 주원의 품은 단단했지만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슉슉거리는 강한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데다 바람에 눈이 매워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결국 제시는 고개를 다시금 파묻는 수밖에 없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 꽉 안아주는 탓에 갓난아기가 된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지.

 처음엔 속도감에 차이가 너무 커서 소리를 꽥 하고 지를 뻔 했다. 헉 하며 숨을 내쉬는 사이 눈앞에 배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겨울바람은 속도에 대비해 더욱 차가워졌다.

 제시도 어디가서 속도로 져본적이 없었다. 그건 려상과 민수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뭉쳤다가도 재빠르게 흩어졌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거나 누군가를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것도, 일부러 유인하거나 자취를 없애는 법도 알고 있었다. 작은 체구는 걸림돌이라기보단 유리한 점이었다. 힘이 달려도 빨랐고 뭘해도 티가 덜났다. 지금까지 무척 봐주고 있었구나. 제시는 주원에게 안겨있는 동안 새삼 깨달았다.

 

 ‘그 사람들 수상해.’

 다시 모인 세 사람이 얘기를 나눌 때, 가장 먼저 큰 반감을 보인건 려상이었다. 그 사람들. 제시는 려상이 말하는 이들이 재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마치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션은 어쩐지 재희를 아는 사람처럼 보였고, 주원은 그런 션과 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제게 소중하고 믿을 만했다. 단순한 사고란걸 알면서도 나쁜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넌 너무 물러 제시.’

 제 의견을 말했을 때 려상은 일갈했다. 제시는 상처 받았다. 순순히 수긍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듯 딱 끊어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려상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제시에게는 그랬다.

 제 옆에 있는 민수의 걱정스런 시선이 느껴졌다. 그 세심한 관찰이 제게 닿는 동안에 그녀는 끝끝내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제시는 이럴 때 눈치 빠른 자신이 싫었다. 제시, 너도 어차피 똑같아. 남의 마음을 알고도 방치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스스로 자책했고 자리를 피했다. 그 이후로 려상을 만나지 못했다.

 

 “제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제시는 흠칫 놀랐고, 이내 주원이 자신을 불렀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주위를 에워싸던 찬바람이 멎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추위가 사라진게 아니었다. 단지 주원이 달리던 걸음을 멈춰선 것이었다.

 제시는 힘을 주어 잡고있던 어깨에 힘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할 생각도 못했다. 방해되는 시야 너머로 주원이 씨익 웃고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제시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물었다.

 “여기..어디예요?”

 “음.. 내 직장?”

 읏차, 소리를 내며 주원이 제시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제시는 자신이 무척 무거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알아챈 주원은 아가씨는 깃털처럼 가볍지만요,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낮이 잠든 곳..”

 “응?”

 제시는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낮이 잠든 곳’ 이라는 걸.

 사방이 고요로 가득했다. 가만히 서있자 제법 따뜻한 햇살이 길가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눈이 쌓인 길목에 발자국도 없었다. 잠들어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만한 풍경이었다.

 "낮이 잠든 곳이라.."

 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언니가 그랬어요. 실제로 와본 적은 없었지만.."

 주원은 흠, 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뒷목을 매만졌다. 이내 돌아선 주원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려 있었다. 무언가에 감동받은 듯. 혹은 기분이 좋은 듯.

 “하지만 그냥 술집이 많은 곳이죠?” 나름 허를 찌른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맞아. 낭만과 희망이 있는 사람이나마 그런 표현을 쓰겠지?”

 “네.”

 그녀도 동감하는 바였다.

 “제시도 만만치 않구나.”

 “네?”

 “아니야. 잡담은 그만하고 가볼까?”

 주원이 말했다. 둘은 골목에 있었고, 이내 더 낮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제시가 물었다.

 “연락할 곳이 있거든.”

 “어디요?”

 “....”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어보였다. 제시는 따라 웃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나중에 알려줄게. 거짓말하기 싫어서 그래.”

 “....”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어느덧 낡은 나무문 앞에 서 있었다. 걸어오는 동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아래에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가는 계단이 있는데..."

 "...."

 제시가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멋쩍은지 주원이 하하 웃음을 흘렸다. 잠시 주위를 갸웃거리던 그가 문 앞에 있던 작은 우편함을 옆으로 옮기고 문틈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열쇠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지."

 주원이 열쇠를 문에 넣고 돌려넣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아, 하며 제시가 감탄사를 내뱉는 사이 먼저 어둠으로 한 발짝 내딛은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이 어둠은 내가 지난날 겪어왔던 어둠과는 달라. 생각하며 제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커다란 손을 망설이듯, 하지만 냉큼 맞잡았다.

 적당한 크기의 바(bar)는 어딘지 모를 먼지냄새와 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주원은 그것이 요 근래 일주일간 영업을 하지 않아서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능숙하게 장애물을 피하며 구석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기계 하나를 꺼내왔다.

 "이래봬도 내가 전기.통신 전공이거든."

 '이래보이는'게 뭔지 몰라 제시는 눈만 굴렸다. 주원은 길게 늘어진 전선을 한곳에 이으며 기계를 작동시켰다.

 레코드판처럼 보이기도, 전화기처럼 보이기도 한 그것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자 주원은 툭툭 건드려보더니 옆에 걸린 낡은 헤드셋을 연결해 귀에 대고 이내 가늠하듯 특정 리듬을 담아 툭툭.툭툭툭.툭.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이건 분명히... 무섭게 집중한 주원의 분위기 때문에 제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어딘가 비밀스럽고 신기한 마음이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질만도 한데 주원은 기계에서 마지막 소리가 날때까지 오로지 그 행위에만 집중했다.

 제시는 주원이 방금까지 두드린 순번을 기억해보려 했다. 처음과 끝은 간단했지만 뒤로 갈수록 복잡하고 빨랐다. 그 집중한 눈빛을 어떻게 해석 한건지 제시를 돌아본 그가 말했다.

 "이건.."

 "알아요. 모스부호죠?"

 이번에야말로 허를 찌르는데 성광했다. 내심 주원이라면 아까처럼 별 반응없이 대꾸할 줄 알았던 제시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어떻게 아느냐는, 그리고 아는 게 그다지 대견해보이지 않는 시선에 제시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내년에 배울거예요.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개념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직접 통신하는 기계를 본건 저도 처음이예요..."

 비루한 밑천이 들통 나고 말았다. 민망함에 열이 오르는 사이 주원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모스부호를 내년에 배운다고?"

 "네.."

 "왜?"

 왜냐니.. 당연한거 아닌가. 제시는 주원도 배웠기 때문에 아는거라고 생각했다. 의심없던 사실에 돌을 던지니 혼란스러웠다.

 혹시 아는지 확인해보려고 물어본건지도 모르지.

 "지시를 듣거나 보고할 때 필요하니까요."

 제시가 대답했다.

 "뭐? 잠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발걸음을 좌우로 두어번 옮기더니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다시 쳐다본 얼굴에 내비치는 감정은 명확히 '당황'이었다.

 잠시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고 주원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있었다.

 괜히 제가 잘못한 기분이 들어 제시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생각으로,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폭력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저 고통 속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잘못을 비는 것 뿐이었다. 아픔이 싫어 한참을 빌었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원이 이유없이 폭력을 휘두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은 생각과 달리 딱딱하게 굳었다.

 "죄, 죄송.."

 제시가 기계적으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제시."

 어느새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눈을 맞춘 주원이 제시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정해 그녀는 잠시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난 그저...궁금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원의 얼굴이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 줄 수 있겠어?"

 제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워야 한다는 건 기본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건가? 학교에서 배우는 거야?"

 그녀는 아는대로 얘기했다.

 “지금까지는 학교(양성소)에서 배웠어요. 열 세살 부터는 학교(훈련장)에 가서 필수과목을 배우게 돼요.”

 “모스부호 통신 말고 그 밖에 뭘 배우지?”

 제시는 기억하고 있는 몇가지 과목을 이야기했다. 전술, 사격, 마약분류법 등 어째 점점 말을 할수록 주원의 얼굴이 험악해지는 것 같았다.

 혹시 말해선 안 될 사항을 말하고 있는 걸까? 수료 과목중 ‘기밀유지법’이라는 과목이 있는걸 생각해낸 제시의 얼굴도 곧 하얗게 질렸다.

 주원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짦은 침묵 후 주원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흐음, 하고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고개를 주옥거린 그가 그랬군 그랬어, 하며 몸을 일으켰다. 제시가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주원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었다. 자칫하면 아이의 작은 손을 으스러뜨릴것만 같았다.

 머리가 새하얘졌다가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우린 네가 필요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모였던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두 눈, 새파란 안광을 빛내던 두 눈만이 주원의 뇌리에 남았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주원이 딱 들어갈만한 나무상자에 그를 넣었다. 상자 안은 푹신한 담요와 예쁜꽃으로 향기가 물씬 났지만, 주원은 본능적인 거부감에 몸서리쳤다. 왜 침대가 아닌 상자에 누워야하는 것인지. 상자에 덮개는 왜 달려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남자는 막아섰다. 물어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은 어린 주원이 보기에도 무척 선명한 색을 띄었다.

 백번째 제물이라는 표현도, 그로인해 주원이 희생양이 될뻔한 사실도, 모두 나중에 들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고 퇴색되었으며, 이내 기억하기를 거부했다. 인과관계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눅눅하고 습했던 관속 풍경과 울며 목이 쉬어버린 자신 그리고 그 눈물마저 마르고 탈진했을때 들리던 시끄러운 주위 소리만이 남아있었다.

 심장이 불온하게 뛰었다. 상념을 털어내며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려는 찰나였다. 제시가 주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없었다.

 싸한 예감이 머리끝을 훑고 갔다. 조심히 고개를 숙이자 제시와 두 눈이 마주쳤다. 깨달음은 바로 밀려왔다. 주위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정적이었다. 혹은 그렇게 느끼게끔 만드는 정적이었다.

 주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망설임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놀라 울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품에 쏙 안기는 아이의 몸짓에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났다.

 방탄 조끼, 작은 잭나이프와 공포탄. 무기고에 가기 전이라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우리가 무기를 쓸 일은 없을 거야.'

 션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원의 생각은 달랐다.

 여차하면 그곳에 있는 무기를 써야했다. 예를 들어 지금같은 상황. 사용했다는 흔적을 지우는건 그 뒤의 일이었다. 죽음의 위기가 있다면 일단 피하고 봐야될 것 아닌가. 설령 모든게 만천하에 드러나도 정당방위정도는 인정이 되겠지.

 상대방이 무장하고 있지만 않으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 이곳은 구불구불하고, 건물구조가 가림막으로 쓸만하게끔 복잡했다. 상대방도 주원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아닐 터였다.

 주원은 속으로 3초를 세었다. 이건 누구한테 배웠던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모였다. 주원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웃었다. 요즘 운수가 사납네, 생각하며 그는 카운트가 끝나기 직전, 망설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발걸음이 불편했다. 구두가 발에 잘 맞지 않는듯 느껴졌다. 그것도 오른발. 하지만 절뚝거릴만큼은 아니었다. 내 발이 짝짝이였던가. 션은 쌩뚱맞은 고민을 해보았다.

 그의 오른쪽엔 재희가 반듯이 서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재희의 옆모습은 칼처럼 날카로워서, 마치 이쪽을 쳐다보는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았다.

 션은 검은색 써클렌즈를 꼈고 재희는 다갈색 렌즈를 꼈다. 서구적 이미지가 잔향처럼 남아있던 그녀의 얼굴이 눈동자색의 영향을 받아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갈색 단발머리가 걸을때마다 목 부근에서 흔들거렸다. 그 속에 있는 검은 곱슬머리가 더 짧다는 건 션만 알고 있었다.

 

 재희가 옷과 가발에 이어 총을 들고 왔을 때, 션은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걸로 나를 쏘려나. 엉뚱한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렸다. 다시보니 그가 제 등만한 총을 들고있는 폼이 신생아를 처음 안은 사람처럼 어색했다.

 "쏠 줄 몰라?"

 "..네."

 재희가 조금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션은 그런 재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가르쳐 줄까..?"

 재희가 션을 쳐다봤다. 크게 깜빡이는 두 눈이 어린날과 겹쳐졌다. 그래봤자 총이잖아. 션은 끝이 반짝이는 총구로 시선을 옮겼다. 결국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잖아.

 

 광장이 가까워지자 재희가 그에게 더 밀착했다. 그러고선 팔을 살짝 뻗어 팔짱을 꼈다.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음에도 션은 긴장으로 뒷목이 빳빳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션을 향해 다가온 것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항상 그랬다. 모두가 눈을 내리깔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재희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션은 그때 그녀의 얼굴을 함부로 콕콕 찔러볼 수 있던 무례한 어린아이였다.

 '너 신기하다.'

 그후로도 언제나 그가 재희를 찾았다. 어린 재희는 션과 다르게 제몫의 궂은 일도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찾을 때 항상 히는 달려왔다. 그런 충성이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제 몸만한 총기를 손에 쥐는 방법, 그것을 표적을 향해 고정하는 법. 방아쇠를 잡아당기고 총알이 날아가는 그 순간의 감촉. 놀라서 팔을 위로 들거나 총을 떨어뜨리지 않는 법. 총기 사용법에 대해 알려주는 동안 재희가 얼마나 미숙한지 션은 진심으로 놀랐다.

 엉성한 폼을 잡아주는 사이 그는 재희와 몸을 밀착했다. 그녀가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션도 긴장했지만 재희만큼은 아니었다. 정확히 그 반대의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션"

 재희가 그를 불렀다.

 "얼굴 좀 풀어요."

 그녀는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뭐라 반박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재희가 고개를 돌리며 바뀌는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사하게, 정말 기쁜듯 표정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너무 놀라 션의 입이 바보처럼 벌어졌다. 재희같지 않았다. 그녀가 가끔 보여주던 미소는 부드럽고 따스했다. 이건 차원이 달랐다. 가식적이지만 그마저 내포한 자연스러움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웃음. 티가 나지만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바보같이 입벌리지 말고."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운 재희가 빠르게 속삭였다. 광장에 있는 사람은 적어도 서른명 남짓 되었으나 축제를 겪어보지 않은 그는 이게 많은 수인지 적은 수인지 판단이 안섰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짐짓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불안한 얼굴을 한 재희가 션의 품으로 좀 더 파고 들었다. 아, 이건 연기야. 그런데도 혼란스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션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근처로 사람이 다가왔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남자는 러시아계로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너무 불안해요.“

 참지 못해 묻는듯 재희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두 손은 션의 팔뚝을 붙잡은 채였지만 얼굴만은 궁금증을 숨기지 못했다. 재희의 연기력에 션은 감탄할 뿐이었다.

 남자는 재희를 흘끗 쳐다보더니 얼굴을 빳빳하게 들었다. 약하고 무지한 자 앞에서 으레 힘을 주는 고압적인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조금 냉정을 되찾았다. 션이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으로 온데에는 목적이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이곳은 행동거지가 모두 드러나는 위험지대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모든 이의 반경을 파악하기에도 용이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Take.B의 집결지는 이곳이었다.

  정확한 좌표는 항시 외워두고 있었다.

 그 사이 러시아 남자는 재희에게 줄줄이 상황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최근에 들어온 수상한 남자 둘이 아무래도 변절자인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중 하나가 여자애 하나를 인질로 삼고 있다. 주민들에게는 그들을 찾는 즉시 알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으스대며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고, 오늘이 어차피 예호제이니 수호자들이 그들을 처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나와서 보고 있는거요.”

 억양이 센 발음으로 그가 말했다. 결국 안내방송이 나왔다. 예고리의 입장에서도 조금 다급해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서성이는 일반인들이 Take.B 요원 둘을 상대할 수 있을리 없었다. 그건 그들이 말하는 '수호자들'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터.

 대체 무슨 목적이지? 단 두사람 때문에 연중행사의 흐름을 바꾸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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