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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3부 그 너머 (3)
작성일 : 22-01-31 10:16     조회 : 192     추천 : 0     분량 : 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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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적 재희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세상은 단조로웠고 그 끝에 가장 빛나는 건 제 또래 도련님 분이었다. 저절로 눈이 가게 되는 것이었다. 깊게 생각해보거나 이유를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건 그냥 숨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민수는 려상을 찾으러가야겠다며 먼저 길을 나섰다. 션은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런 그를 오히려 재희가 막았다.

 “괜찮아요. 우리랑 떨어져 있는 편이 민수에게도 나을거예요.”

 “그래도 어린아이야.”

 “민수가 그냥 어린아이처럼 보이나요?”

 “...”

 재희는 말을 하면서도 씁쓸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민수는 재희가 자신을 치켜준다고 느꼈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굳건한 얼굴이었다.

 “션이 말해줬잖아요. 내 생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라고. 납득할 수 없다면, 누가 말해도 그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고.”

 션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수는 환하게 웃었다.

 “저도 제가 믿는 길을 갈 거예요. 려상에게도 그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수가 먼저 가고 재희와 션은 재희네 집으로 향했다.

 “괜찮은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수너머 갈 만한 곳은 그곳 뿐이었다.

 “괜찮죠. 저랑 당신이 무슨 사이라고.”

 별거 아닌 말이었다.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션은 말이 주는 상처를 새삼 느끼고 말았다. 기다란 자상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재희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대답할 수 없어 션은 침묵하다 결국 말했다.

 “아마도.”

 점점 속이 좁아지는 것 같다.

 

 눈이 내린 재희의 집은 마치 기다란 얼음성처럼 보였다. 길쭉하고 폭이 좁은 건물이다보니 하얗게 눈 내린 부분이 더 눈에 띄었다. 2층은 창문의 차창이 없어 아마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이 안보일 것 같았다.

 “아이싱쿠키 같아.”

 션이 말하자 재희가 웃었다. 어릴 적 먹던 아이싱쿠키를 떠올렸고, 입 밖으로 여과없이 나온 것인데 그 기억 속에는 재희도 있었다. 아이싱쿠키처럼 손이 가는 음식은 션에게도 특별한 다과였다. 배가 부르다면서 몰래 챙겨놓고 처음 재희에게 먹였을 때, 이런 예쁜걸 먹어도 되냐고 묻던 얼굴이 선했다. 같은 생각을 한걸까? 션은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전 아이싱쿠키 맛 없더라구요.”

 “뭐? 하지만 넌..”

 “그건 당신이 줘서 먹었을 뿐이예요.”

 재희가 멍때리는 션의 표정을 보고 하하하, 웃었다. 그녀를 따라 들어가며 션은 생각했다. 자신과 함께 있던 시간동안 재희는 얼마나 많은 걸 숨기고, 드러내지 않은 채 있었을까. 자신이 바뀌었듯, 재희도 바뀌었다. 아니, 사실 나는 재희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집 안은 예상보다 더 어두웠다. 빛이 드는 1층은 그렇다 치더라도 2층은 어두컴컴했다. 재희가 불을 켜자 안이 밝아졌다. 창에 달라붙은 눈은 어느 정도 얼어 있어서 창문을 열기도 어려울 듯 싶었다.

 “차창이 없는 건 밖에서 안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건가?”

 재희가 션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실제로 지금 사람이 이 안에 있다는걸 아무도 모르잖아요.“

 커텐이 만들어내는 인위적 차단과 달리 눈은 자연스러운 보호막 역할을 했다. 의도치 않은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에 적합했다.

 “일단, 저희는 여기서 준비하고 광장으로 가죠.”

 “준비?”

 션은 바로 광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당신은 이미 신분이 노출됐어요. 여기는 사진이나 영상을 남겨 모든 사람에게 전달할 정도로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위장은 필요할 거예요. 그리고 무기 같은 건 어차피 집에 있지 않나요?”

 “아니야. 집 안에 무기는 없어. 의심받을 상황도 고려해뒀기 때문에..”

 “그러면요?”

 “음...”

 션은 조직의 기밀사항을 재희에게 말해야할지 짧게 고민했다.

 "일단 나는 무기 말고 다른 준비를 해놨고.."

 션의 말꼬리가 늘어짐에 따라 재희는 눈썹을 위로 올렸다.

 “무기는 광장에 있어.”

 “...네?”

 이번엔 재희가 벙 찐 얼굴로 션을 바라보았다. 그 이상은 정말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션은 재희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았다. 그러고는 저절로 술술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 무기를 이용할 생각은 없어. 쓰지 못하게 한다면 모를까."

 이미 기밀은 누출된 셈이었다.

 "자세히 말해주세요."

 지면과 3D입체 디자인 설계도. 가본적은 없어도 양옆이 둥근 굴모양으로 시작되어 점차 투박해지고 넓어지는 통로는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중간중간 홈이 파여진 공간이 있고, 딱히 문이랄 것도 없이 여러 무기가 식량처럼 쌓여있는 곳. 커다란 광장 하나의 공간이지만 어디를 갈려고해도 복도 서너개는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결국엔 이어져있다. 시작점이 어디든 그곳에 물이 흘러들러가면..

 "션?"

 재희가 그를 불렀다. 션은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그건.."

 그녀가 끝까지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재희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려주세요."

 "에? 그래도 돼?"

 "네. 당신이 원한다면."

 재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항상 그랬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도, 불길이 치솟는 저택에 나를 두고 그대로 가버린 것 아닐까?

 "질문을 바꿀게요. 바깥에선 당신과 주원을 쫓고 있어요. 무기가 없다면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예요?"

 션은 재희의 시선에 어색함을 느끼며 덧붙였다.

 "무기는 결국 사람이 만드는거야. 광장은 넓고, 무기를 만들 시간만 있다면 가능해."

 "탁상공론이네요."

 "탁상공..?"

 마지막 말은 한국어였다. 션은 잘 따라하지 못한 말을 입에 담았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다. 여하튼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책상 위에서나 할법한 소리요."

 "...진짠데."

 션은 미심쩍은 그녀의 눈길에 이것저것 부연 설명을 했다. 우리는 그런 훈련을 받았다고. 로프와 나뭇가지만 있어도 만들 수 있는 무기는 꽤 많다. 새총이나 작대기 정도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살상력은 높아진다.. 얘기하면 할수록 스스로도 허술해보이는 탓에 션은 어정쩡하게 변명하는 투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얘기를 듣고난 재희의 반응은 션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훈련같은 걸..받은 건가요."

 "응?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몰랐어요."

 "그렇지? 말을 안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내 그녀는 입을 다물고,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왜지? 왜?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잘못한건 아니에요. 그저.."

 아무래도 마음 속 말이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재희의 말에 션은 소리치고 말았다.

 "도련님은 곱게 자랐는데..훈련이라니.."

 "뭐?"

 그의 반문에도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썹이 축 쳐지더니 나이든 부모처럼 션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러면요."

 "재희. 난 그때의 내가 아니야."

 "알아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평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재희의 목소리끝은 미미하게 갈라졌다. 아. 순간 어떤 깨달음이 션의 머리를 스쳤다.

 "너.. 설마 장난이야..?"

 "아니요?"

 재희의 말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맞는데?!"

 이미 얼굴을 한껏 뒤로 돌린 그녀의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확신한 션이 재희를 보기 위해 그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장난이..처음엔 아니었는데, 당신이 너무 진지하니까.."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웃음기 어린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경계를 허문 재희의 얼굴은 어릴 적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열일곱이 아니라 더 어릴 적이었다. 피딱지 진 얼굴로 글자를 공부하던 옆얼굴. 그 상처가 아물때까지 션은 매번 마음을 졸였다. 도련님, 글자란 건 정말 신기한 것 같습니다. 그때만해도 딱딱한 말투가 몸에 베어있던 재희였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상기되어 있어서, 발그스레 해진 볼가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눈을 빛내며 자꾸만 질문하는 모습이 좋아, 항상 조금씩 조금씩만 알려주던 걸 너는 알고 있을까.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점이 많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오만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이 알고 있는 모습도 있었다.

 선하게 휘어지는 눈매를 보며 션은 깨달았다. 재희를 보기만 해도 만족하던 시기는 지났다.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욕심이 생겼다. 언제까지고 이런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더 이상 떠나보내는, 그가 없는 허공을 맴돌 수 없다는 강렬한 소유욕. 재희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직 그때의 계급사회 속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건가.

 무엇보다 그 안에 재희의 ‘의지’는 없었다. 션은 헛헛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음의 결이 바뀌자 재희가 물었다.

 “왜 웃어요.”

 “너는?”

 “글쎄요.”

 그러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엔 장난끼가 서려있었다. 그건 무척...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션은 눈만 꿈뻑거리다 괜히 속이 간질간질해져 재희 몰래 심장께를 긁었다.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준비하죠. 그렇게 말한 재희가 성큼성큼 걸어가 옷장 앞에서 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혔다. 재희의 취향을 반영하듯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구석에 있는 옷더미를 쭉 끌어왔다. 무채색의 두툼한 겨울옷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션의 눈에 들어온 건 다른 사항이었다.

 "어? 왜 남자옷이..."

 "뒤돌아요."

 "뭐?"

 재희가 빠른 몸놀림으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션은 놀라서 바로 뒤돌아섰다.

 옷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땀이 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션이 두 눈을 꾹 감고 주먹을 꽉 쥔 찰나, 그녀가 말했다.

 "저도 열다섯까지는 남자로 살았거든요."

 션은 그녀를 뒤돌아봤다. 둔탁한 가죽신 위로 통이 큰 카고바지, 그리고 멜빵을 크로스로 맨 채 자켓까지 걸친 재희가 보였다. 전체적으로 품이 큰 옷에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어떤 부분을 강조해야 할지 잘 아는 옷매무새였다. 재희는 키도 큰 편이었다. 어깨로 시선이 가닿자, 그녀는 어깨를 툭툭 털더니 으쓱해보였다. 티나진 않지만 가녀렸던 어깨를 지우기 위해 뭔가를 넣었을거라 짐작했다.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남성의 모습이었다. 단지 그녀의 긴 머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재희는 자신의 머리칼에 와닿는 션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이내 그를 가로질러 가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쇳소리가 나고, 그것이 가위란 것을 깨닫고, 그 가위가 션을 지나 재희의 머리칼에 닿는 순간 션은 재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하는 거야?"

 "네?"

 재희도 적잖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알고 있었다. 옆에 놓인 모자를 쓰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머리는 턱없이 길었다. 기왕이면 아예 바짝 잘라야겠지. 예전처럼. 하지만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푸석거린다며 내내 묶고 있기는 했지만 션은 어딘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당황해서 말했다.

 "내, 내가 잘라줄게."

 "..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재희가 드물게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무턱대고 나온 말이긴 했으나 션은 미용에 꽤 재주가 있었다. 훈련소 시절 내내 자신의 머리를 자른 것도 그였다. 남의 손에 맡기는게 내키지 않아서 시작한 것인데 의외로 소질이 있었다. 꽤 오래 방치한 머리에 가위를 들고 숭텅숭텅 자르는 광경을 본 주원이 기겁한 뒤로는 그만두긴 했지만 말이다.

 남의 머리를 잘라본 적은 없다는 말은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재희의 머리카락 한 줌을 잡고 손에 들었다. 곱슬거렸고 보이는 것보다는 제법 부드러웠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긴장이 몰려왔다. 가위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자르는데 아픈 것도 아니고, 매번 저가 자르던 모양새처럼 짧게 치는게 목적이니 상관없을 것이다. 망쳐도.. 망쳐도 재희는 예쁘지 않을까? 션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션.”

 “으, 어?”

 어느새 재희가 션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손목의 떨림은 멈췄지만 가위를 든 손에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제가 할게요.”

 그녀는 마치 체념한듯 옅게 웃었다. 안 돼, 안 돼..! 션의 머리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그냥!”

 “?”

 “그냥 우리가.. 차라리 부부인 척 하는게 어떨까..??”

 정적이 흘렀다.

 재희는 눈만 꿈뻑꿈뻑거리다 아, 하며 말머리를 흐렸다.

 “이곳에선 결혼하려면 신고도 하고 이웃들한테 모두 말해야해서...”

 “그러면 연인이라던가...!”

 "....네?"

 허를 찔린 재희의 표정이 클로즈업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 말실수를 주워담지는 못하리라. 마음같아서는 제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말도 할 수 없고, 말이 나오지도 않아 션은 침묵했다. 재희의 입이 열리는 순간 마치 처형당하는 사람처럼 션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재희가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션을 보고 재희가 눈썹을 살짝 아래로 늘어뜨리며 미소지었다. 어쩐지 미안한 듯한. 당황한 듯한.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나빠 보이기도 한. 그리고 애써 웃음을 참는 듯한. 그 복잡한 얼굴을 션은 해석하지 못했다. 다만 재희가 자신을 배려해줬다는 사실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잘라야겠어요. 여차하면 남장을 하는게 나을수도 있어서.. 깔끔하게 자르고 가발을 쓰는 걸로 할게요.”

 그녀는 다시금 션의 손에서 가위를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션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재희의 지금 모습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션이 그려오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건 지금의 재희였다. 그런데 그 마음은 모순을 품고 있었다. 그런게 어디있어. 재희는 언제나 재희였는데.

 션이 갑자기 열의를 불태우며 우기자 재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언의 허락처럼 느껴졌다.

 결심한 션이 가위를 들었다. 싹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재희는 미동도 없었지만 션은 안절부절 못했다. 머리칼 뭉텅이 하나 하나에 뭔가가 같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빨리 해야되는데. 손에 땀이 나서 여러번 닦아냈다. 앞머리를 다듬을 때는 눈에서 땀이 날 것 같았다. 미간을 모으고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재희가 소리없이 눈을 떴다.

 “....”

 “....”

 션은 요령이 없어서 바짝 가까이에서 거의 한땀한땀 머리칼을 잘게 잘라내는 수준이었다. 이마가 맞닿으리만치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눈을 뜨니, 눈동자 속 동공이 비치는 세세한 풍경까지 다 보이게 가까웠다. 다행이 션은 놀라 가위질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신 그대로 굳어버렸다.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했다. 재희 역시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멀어져야 하는데. 기울여진 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다 된거예요?”

 “...응."

 재희가 물었다. 마법이 풀렸고 션은 뒤로 물러섰다. 제법 짧아진 머리는 곱슬머리의 매력을 살리고 있었다. 더벅머리처럼 귀여웠고 재희는 마치 선이 가는 소년처럼 보였다. 그 저택에 성인이 될때까지 살았다면, 재희가 항상 옆에 있었다면 마주할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제 머리를 가늠하듯 가만가만 만지고는 일어섰다.

 “조금 길지 않아요?”

 “아니야. 그 정도가 좋아."

 앞머리숱이 많아진 재희가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앞머리가 푸스스 소리를 내듯 흔들렸다. 품평을 기다리는 심정은 조마조마 했다. 재희는 거울을 흘끗 보고 잠시 서 있다 말했다.

 “감사합니다.”

 션이 할 수 있는건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제..

 "그러면 이제 제대로 준비해볼까요?"

 내심 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재희의 입에서 나오자 션은 깜짝 놀랐다. 구석에서 가발과 옷가지를 꺼내온 그녀가 션을 향해 잊지 않았다는 듯 웃어보였다.

 

 

 잘 한 일일까?

 려상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 테이블의 중앙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손이 닿기에 애매한 자리인데도 유독 맨들거렸다. 바로 위에 조명이 길게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물리적인 접촉 말고 빛으로도 테이블이 바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 한 일일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지독한 정적이 끝났다. 려상은 흠칫 놀랐지만 겉으로 전혀 티내지 않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만 움직이기엔 상대가 좋지 못한 탓이었다. 그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안으로 들어온 중년 남자는 려상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그래. 이번에 최연소로 나가는 아이가 자네로군."

 남자는 려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얼결에 려상은 그 손을 맞잡았다. 딱히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식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미지근한 손의 온기에 그는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항상 지금까지 바라던 순간이었다. 려상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재희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었다. 열다섯이 되기 전에 나가는 사람은 지금껏 전후무후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앞으로 려상은 철저히 혼자였다. 윤이 나는 테이블의 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조명도 아닌데, 거울도 아닌데. 그럴리 없다고 생각해도 정말 그랬다. 그 사실을 실감하자 려상의 기분은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몇시간 전, 려상은 ‘외부인의 집’을 방문했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앞섰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외부인의 집은 시작이었다. 가장 확실한 한가지를 붙잡고 그는 무작정 발걸음을 옮겨 건물 앞까지 왔다.

 려상은 타고나기를 내부인인지라 당연하게도 외부인의 집에 와본 적은 처음이었다. 궁금해한적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공간은 려상이 평소에 하는 모든 생각의 범위 바깥에 있었다. 하지만 마을 어귀에 위치한 외부인의 집 앞에서 려상은 그간 왜 자신이 그 사실을 궁금해하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재희도 이곳을 지나왔을 것이었다. 션도, 주원도. 이제는 정확히 구분짓기 어려울 정도로 기억이 희미한 여러 어른들이 외부인의 집을 지나 예고리로 왔다. 무척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눈 앞의 건물은 의외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려상의 예상보다 크지 않은 건 물론이고 담황색 벽듈은 작은 가정집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외부인의 집'을 처음 보자마자 떠올린 건 옆집 레이나 할머니네 집이었다.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털어낸 려상은 문을 두드렸다. 가먼히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려상은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진척에 바로 사람이 있어 눈이 바로 마주친 것. 그리고 의외로 넓은 내부 때문이었다. 외관의 아늑함을 배반하는 내부 구조였다. 사방이 하얬고 정중앙에 테이블이 하나 있을 뿐, 그 하얀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려상 앞에서 눈이 마주친 여자는 입가에 호를 그리며 웃었다.

 “예고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려상이 대답하지 않자,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여러 국가의 언어가 나왔다. 아무래도 같은 말일 여러 나라의 말이 계속되자 그는 냉큼 대답했다.

 “알아들었어요.!”

 “네. 그러시군요. 이곳은 ‘외부인의 집’입니다.“

 상냥하지만 고저없는 말투였다.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듯 했다. 자신의 이름을 릴리라고 소개한 그녀는 외부인의 집에 대해 설명했다. 때를 놓치는 바람에 주구장창 설명을 다 듣고 만 려상은 난감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에게 자신이 ‘내부인’임을 말했다. 하지만 릴리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네?”

 “려상, 당신이 이곳 예고리에서 태어나 십 이년간 살아온 내부인이란 걸 제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굳이 려상을 외부인 대하듯 한 이유는 뭔가. 그는 좀 황당해져 그녀를 쳐다보았다. 예의 미소를 유지한 채 릴리가 려상의 침묵에 답변했다.

 “행정상 절차입니다. 저 문을 넘어온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수순입니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두꺼운 나무문이 보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잠시 번뜩이는 릴리의 눈동자를 마주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려상은 잠시 주춤했다. 핵심을 찌르는 릴리의 질문에는 왜인지 날이 서있었다. 사무적이긴 해도 계속 대답을 해주고 안내를 해준다고 느낀 이전의 대화와 달리 이번엔 그녀가 려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감을 줬다.

 무슨 말부터 해야하지? 려상은 그저 의심의 매개체를 해소하고, 윗선에서 뭔가를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 이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고, 동시에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여기 오기 전 려상은 오만할 정도로 날카롭게 일갈했고, 그건 일종의 다짐이기도 했다. 네가 안하면 나 혼자라도 할거야.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는 민수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그때 느낀 우월감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이 모양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첫 단어를 찾아야했다.

 “입주민을 고발하려고요.”

 “왜죠?”

 릴리는 평이하게 응수했다. 려상도 오기가 생겼다.

 “의심스러우니까요.”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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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3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3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5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1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0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8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0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0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4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1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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