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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3부 그 너머 (2)
작성일 : 22-01-31 10:13     조회 : 183     추천 : 0     분량 : 1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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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원은 거의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내일이 퇴원이었다. 션이 오면 하루 당겨 오늘 퇴원을 해볼까 했던 주원은 문득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레시는 맨날 왔고 그때마다 그의 마음은 조금 더 갑갑해졌다.

 대놓고 하는 축객령에도 레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부드러운 언사와 돌려 말하기를 했던 주원이었지만 그녀는 뭐 하나 들은 것 없다는 듯 행동하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주원은 입원 뒤로 병실의 고루한 풍경과 함께 매일매일 레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몸이 안 좋으면 입원기간을 더 늘려야겠네.”

 “아냐. 멀쩡해!"

 순간 화들짝 놀란 그의 대답에 레시가 피식 웃었다. 밖이 추운지 발그레한 홍조가 그녀의 뺨에 깃들어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자 레시가 눈을 돌려 주원을 보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그를 향해 깜빡깜빡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주원은 순간 제가 입으로 생각을 뱉은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목소리는 레시의 것이었고 그녀는 딱히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건 주원이 하고 싶던 말이었다. 나한테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언제나 답답하면서도 가끔씩 눈을 떼지 않게 되는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딱히 인지한 적 없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저.. 주원의 입장으로는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를 한 것만 같았다.

 “밖에 눈이 와.”

 “그래서?”

 “크리스마스 같아.”

 창밖을 보는 그녀의 옆모습에 귓가가 새빨갰다. 저럴 때마다 주원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랐다. 새침하고 뻔뻔한 주제에 주원이 쳐다보기만 해도 레시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게, 너무 이상하면서도 고양감이 일었다. 주원은 그런 우월감이 제 안에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얼굴을 구겼다. 다행히 레시는 보지 못한듯 했다.

 “크리스마스 지난지가 언젠데...”

 주원은 대답하다가 주춤하며 말을 멈췄다. 그가 다시 말했다.

 “여긴 크리스마스 없잖아?”

 이곳은 종교랄만한 게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기도 비슷한 걸 하지만 그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벼운 행위였다. 신념을 가지고 믿는 교리나 사상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곳이 안전하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따르는 건 마을의 규칙과 평화였다. 그 이상엔 관심이 없어보였다.

 레시는 잠시 뭔가를 깨달은 듯, 하지만 크게 놀라지 않는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 약간의 체념이 맴돌았다. 그리고 설핏 미소 지은 것처럼 보이는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든건 그때였다.

 "그러게."

 "...."

 "'여긴' 크리스마스가 없지."

 밖에서 왔고, 바깥을 알고 있을지언정 그 일말의 증거가 될만한 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마을의 규칙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규칙을 어겼다. 그리고 레시는 그 주제를 끊어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좋아했어?"

 레시는 주원에게 눈 맞추며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내 그는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푸흐, 주원이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나는 크리스마스가 싫었어. 그런데도 좋았어."

 레시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받은 선물은 어떤 애가 잔뜩 화가나 구겨놓은 동화책이었어. 장난감이 있을줄 알았는데 책이라서 화가 난 거지. 이런 거 싫다고! 누가 사달라고 그랬냐고! 골목길 끝에서부터 외치는 소리가 찌렁찌렁하게 들려서, 난 그 아이의 부모가 얼마나 난감해하는지, 그 아이가 얼마나 분노에 차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어. 들리는 말로 그 동화책은 펼치면 그림이 튀어나오는 입체북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만 있었어. 무척 궁금했거든. 이윽고 두 사람의 시야에 내가 들어왔을 때, 내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어. 아이는 맨들맨들한 피부에 잔뜩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고 부모는 그를 보며 쩔쩔매는 중이었어. 두 사람을 나를 보며 아주 똑같은 표정을 지었어. 경멸과 일말의 동정. 난 동정이 싫어. 거기엔 경멸이 빠질 수가 없거든. 아, 그리고 자기네들이 나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는 우월감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레시의 눈은 너른 오전의 햇빛을 받아 생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코를 틀어막으며 뒤로 피했어. 집에 가자는 부모의 손을 뿌리치고 손에 들린 동화책을 나한테 집어 던졌어. 사실 나는 그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동화책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알았어. 나는 피하지 않았고 마침 구겨진 모서리가 이마를 찍느라 고개가 절로 숙여졌어. 도리어 짜증나다고 소리친 아이가 달려가자 부모는 당황하며 내 앞에 지폐 몇 장을 두고 아이를 따라나섰어. 나는 시선을 고정했어. 이마에선 피가 흘렀지만 눈앞에 놓인 건 생각보다 더 근사했던 거야. 그 입체북은 펼치면 아주 화려한 그림이 책 밖으로 튀어나왔어. 정신없이 그 책에 빠져들었지. 나는 글을 몰라서 읽을 줄도 몰랐는데 거의 세 시간 넘게, 손이 얼어서 곱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어. 그런데도 아쉬워서 그 책을 꼭 안고 잠이 들었어. 그 거지같은 책을 소중하게 품고 말이야."

 레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주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섣부른 위로를 하기 싫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봐, 이런 말을 해도 넌 나를 불쌍하게 보지 않잖아.”

 주원의 반응을 레시가 해석했다.

 “전혀 생각해주지 않잖아. 위로라던가, 안타깝다던가.”

 “....”

 “웃긴 건 그 책이 아직도 나한테 있다는 거야. 버릴 수가 없어. 어떻게 그러겠어. 너무 좋고, 그만큼 너무 싫은데.... 집에 두고 왔는데 갑자기 보고 싶네. 짜증나게.”

 “레시.”

 “그래서 네가 좋은가봐.”

 레시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한 번 더 강조했다.

 “난 네가 좋아. 소중해.”

 “..왜?”

 주원이 물었다. 탄식과도 같은 긁힘이 성대를 뚫고 나올 듯 했지만 가장 먼저 그것이 궁금했다.

 “몰라. 모르지만 그것만 알아.”

 “그런 게 가능해?”

 “응 나한텐 가능해.”

 네 그 무감각한 감정마저 사랑스럽거든. 덧붙인 그녀가 한쪽 눈을 감으며 윙크했다. 이내 접어진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역시나 주원은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솔직히 처음엔 신기했어. 너도 그랬잖아.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하는 거. 그런데 넌 날 밀치지 않았잖아. 싫어하는 척을 하는 게 이상하잖아 보통은.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뭔가를 가늠해보는 주제에 말이야.”

 허를 찔린 주원은 말이 없었다. 레시가 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있는 곳이 어딘지 대충은 감이 와. 나는 네가 찾는 사람 중 하나겠지. 우린 적이야. 하지만 너는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이니..”

 레시가 주원을 향해 물었다.

 “김주원, 내가 있는 곳으로 올래?”

 그 말은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주원은 그녀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깨달았다. 너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나야. 레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만하고 당돌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의미로 진실에 가까웠다.

 주원은 레시를 동정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이야기에는 그저 마음이 차갑고 냉정하게 식어갈 따름이었다. 자기 자신을 비롯해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랬다. 식상한 위로를 건넬 수는 있겠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각만큼은 뼛속까지 깊이 이해했다. 소름이 돋고 오한이 떨려왔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와 그보다 더 차가운 시선. 자신이 언제든 짓밟힐 수 있는 벌레가 된 듯한 감각. 하지만 티내지도 않았다. 그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움직인다 믿었으며 믿고 싶었다. 션을 비롯한 동료들에겐 그런게 보였다. Take.B가 가는 방향성에 깊이와 크기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느정도 동조했다. 나는? 그렇게 묻는 한 마디가 주원의 폐부를 찔러왔다.

 “레시, 난..”

 그때 닫혀있던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침입자는 들어와서도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척 급하게 달려온 모습이었다. 늘어진 머리를 들어 올리는 제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원은 저도 모르게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무슨 일이야?”

 주원이 물었다.

 “그, 그게..”

 주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레시를 발견하고 제시가 숨을 들이켰다. 항상 방문하는 그녀때문에 제시가 이곳에 잘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원은 알고 있었다. 너무 급한탓인지 막상 들어오긴 했지만 이제야 기억난 얼굴이었다. 예상대로 레시는 제시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레시가 뭐라 하려던 것을 주원이 막았다.

 “괜찮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그녀를 향해 주원이 침대 밖으로 나왔다. 레시는 잠시 혀를 찼지만 그를 막지는 않았다. 제시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주원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맹렬하게 불안감을 표출했다. 그게 주원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션..션이,”

 제시가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마을에 해를 입혔다면서...”

 지금 마을 사람들이 찾고 있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원은 성큼성큼 걸어가 겉옷을 꺼냈다. 외출용 신발을 신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시를 향해 그가 말했다.

 “네가 바란 게 이거였어?”

 “뭐? 아니야, 난..!”

 “됐어.”

 주원은 제시를 한손으로 끌어다 안아들었다. 그녀가 주원의 목을 꽉 잡아왔다.

 “한 순간이라도 널 믿으려던 내 잘못이지.”

 차갑게 일갈하고 고개를 돌려 주원은 나갔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답답했다. 레시의 얼굴은 너무 진실했다. 그게 주원을 힘들게 했다. 그는 어느새 뛰듯이 병실 바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제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

 바깥으로 나와서야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가슴아래가 얹힌 듯 막혀있는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부정적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 요즘 사춘기같네. 주원은 생각해보다 이내 머리를 털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제시, 어디로 가야해? 혹시 션에게 연락 받은 게 있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어린 얼굴이었다. 흠.. 주원은 제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서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 알자마자 달려와 준거지?”

 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이 씨익 웃었다.

 “사실 션은 나보다 유능해.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우린 그의 친구들이니까 그를 도와주러 가볼까?”

 “네..!”

 어찌되었든 션의 신분은 노출되었다. 찾는 중이라고 하니 아직 덜미가 잡힌 것은 아니겠지. 그와 같이 예고리에 입주한 자신에게 여파가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도 시뮬레이션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조직에서도, 그들 개인으로서도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시나리오 중 두 번째 케이스로 진입한 것만은 분명했다. 일단 그와 합류해야했다. 레시와 함께 있기를 포기한 듯 보이는 제시를 데리고 다녀야할지도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마을 지리나 환경에 주원보다 나은 그녀가 함께 있는건 이로운 일이었다. 미안해 내가 널 이용 좀 할게. 주원은 속으로 작은 사과를 삼키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교회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마을로 내려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션은 막연하게나마 이제 재희와 함께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션의 어떠한 부분을 단단하게 고정시켜주었고 션 또한 기꺼웠다. 단지 그것만으로 기분이 들떴다.

 "그러고 보니 서가는 어디서 구한거야?"

 션이 물었다.

 "재료만 밖에서 사오고 조립은 제가 했어요. 더 비싸긴 하지만 그런 물품을 취급하는 소매상이 있어요. 용건만 명확하고 타당하면 허가는 나더라구요."

 재희가 대답했다.

 "그걸 직접 만들었다고?"

 "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죠."

 그렇게 말하는 재희에겐 정말 별 일 아닌듯 했다. 션은 잠시 놀랐다가, 저택에서 재희가 하인들과 함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젊은이였다는 걸 기억해냈다.

 "..의외라는 눈이네요."

 "아, 아냐. 그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생각이 션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추위와 더위. 힘듦과 지침. 션이 이제껏 보지 않았던 재희의 모습이었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과거였기에 제 눈이 닿는 한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이상했다. 어째서? 재희는 원체 션에게 그런 존재였다. 보듬어주고 대접받는 느낌을 주는 사람. 마지막 만남 이후 그토록 재희를 찾아다닌건 제 어린시절의 모든 순간에 있던, 그 모습 그 자체가 아니었나.

 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가 말했다.

 “그거 편견이예요.”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저 힘세요.”

 그녀는 곧바로 후회한 듯 작게 인상썼다. 그래서 션은 생각 없이 바로 대답해버렸다.

 “응.”

 웃는지, 난감한지 모르겠는 재희의 얼굴은 션의 마음 속 어떠한 감정을 울리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덕분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정말 다르네요."

 "..뭐, 뭐가?"

 당황해서 말도 더듬었다. 션은 낭패감을 느끼며 후회했다. 찬바람이 이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재희가 그런 션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하게 웃는 재희의 얼굴이 그의 시야 곳곳에 박혔다. 뭔가가 그를 꿰뚫고 지나간 듯 했다. 하인이라는 입장 차 때문인지 재희는 션 앞에서 허물없이 크게 웃은 적이 없었다. 많이 어릴 때는 딱봐도 웃음을 참느라 노력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지만 조금 더 커서는 능숙해져 션이 마구 웃어도 옆에서 미소정도만 지으며 일관된 표정을 유지했다. 괜스레 오기가 생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션도 점차 커갔고, 주인된 자로써 품위를 유지하는 엄격한 교육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재희가 와하하, 웃는 소리를 제대로, 단 한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션은 눈을 감을 수도 깜빡일 수도 없었다. 재희의 웃음에는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불순물이 없는 미소였다. 그저 즐겁다는 듯, 기쁘다는 듯 웃던 재희의 휘어진 눈매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션은 손을 뻗어 재희의 뺨을 감쌌다. 한 손에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느새 그렇게 된 건지 션은 알지 못했다.

 "어...."

 재희가 눈을 굴리며 천천히 굳었다. 션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미, 미안!"

 머저리같은 행동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걸음을 뒤로 크게 물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재희가 션의 팔을 잡았다.

 "...."

 "거기 돌부리 있어요."

 아. 제 뒤를 돌아본 션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는 이제 체면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한층 차분해진 재희가 그를 바라보다 앞장섰다. 션은 재희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션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근데 아까 다르다는 게..무슨 의미야?"

 "아, 그거요."

 재희가 뒤돌아서면서 말했다.

 "당신이 제 눈치를 보는 점이요."

 그러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다시금 션을 사로잡았다. 어딘지 무척 후련한 얼굴이었다.

 

 이상징후를 발견한 건 마을 가까이까지 내려와서 였다.

 한 블록만 건너면 집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허전함이라고는 없는데다 다른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오감이 먼저 반응했고 그 뒤엔 몸이 움직였다. 그가 옆에 서있던 재희의 앞을 팔로 가로막으며 그녀를 제 뒤로 은근히 밀었다. 재희는 네? 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뒤로 밀려났다. 고개만 돌리니 저를 바라보는 재희와 눈이 마주쳤다.

 션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애매했다.

 “..우리 집 앞에 손님이 온 것 같은데,”

 그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올 손님은 없거든. 그것도 저렇게 많이.”

 대략 집중해보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꽤나 부산스러웠다. 적어도 열댓명, 아니면 스무명이 넘을 수도 있겠다. 주원이 남의 집 빵을 훔쳤다고 해도 저런 다수 인원이 그들의 집 앞에 서성이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마을에서 중요한 축제날의 시작일이었다. 광장에 모여 있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평소보다도 이 근처 통행인원이 적은게 타당했다.

 “보이는 거예요?”

 재희가 물었다.

 “아니.”

 그러면? 이라고 묻는 눈에 션이 대답했다.

 “느낌?”

 “아..느낌.”

 “거짓말 아닌데.”

 션은 울컥해서 말했다. Take.B에서 받은 모든 훈련을 일일히 거론하기엔 이미 자신이 너무 유치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오감과 나아가 육감이라 부르는 능력을 키우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거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준으로 쫓기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훈련은 대부분 그에 맞춰져 있었다. 새삼 아찔한 기억을 떠올린 션은 머리를 털어 잔상을 날려 보냈다.

 “네 알아요. 믿어요. 그리고..”

 대충 저도 알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후 다시 조용해진 재희가 빠른 속도로 호흡을 가다듬고 블록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시무시한 집중력이다. 션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바람이 살짝 흐트러지는 찰나, 션이 느낀 걸 재희도 분명히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희가 말하길, 축제시작일에 가장 붐비는 곳은 광장이었고 호수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있는 가외 주택가가 가장 사람의 왕래가 적다고 했다. 션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도 마찬가지였으나 예외적 상황인만큼 호수 너머의 주택가는 반대로 사람이 적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두 사람은 일단 그 방향으로 향했다.

 "인원수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광장에 모여야하는 최소인원이 있어요."

 "최소인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리는 어디든 그래요. 최대인원은 통제하지 않지만 최소인원은 정해져 있고 축제 기간에는 그게 더 심해서 꼭 맞춰야해요."

 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 조항이 있었던가? 마을 규정이랑 지침서는 모두 읽었는데."

 읽기만 했을까. 션과 주원은 두 파트로 나누어 그 내용을 서로에게 말해주면서 달달 외웠다. 자다가 누가 찌르며 일어나도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2년 지나기 전에는 안 알려줘요."

 "아.."

 외부인의 출입이 의외로 가볍다고 느낄만했다. 마을은 철저한 규칙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 되긴 했지만 두 사람은 다시 언덕을 너머 호수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멀직히 호수가 완만하게 내려다보이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

 션은 가벼운 물체에 부딪혔다. 아니 부딪혔다기엔 조금 부족했다. 미미한 접촉 후 물체는 떨어져나갔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것이 ‘물체’가 아니란 걸 알았다. 상대방이 놀란듯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제야 소리가 났다. 정말이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수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기시감. 션은 눈앞의 민수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민수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한참을 뛰어다닌 듯 했다. 션과 재희를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헉헉거렸다. 저런 생리적 현상까지도 참아내며 기척을 숨겼다는 사실이 경의로울 지경이었다.

 재희가 민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내 진정한 민수가 입을 열었다.

 “재희 누나..!"

 "무슨 일이야?"

 "마을 사람들이 션을 찾고 있어요!"

 민수는 말을 하며 션을 바라봤지만 막상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빗껴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션이 물었다.

 “‘호수의 주인’을 통해 지령이 내려왔어요. 션은 마을을 해하려 왔다고 하니까.. 보이는 즉시 알려야된다고요.”

 “그걸 나한테 순순히 털어놓는 저의는?”

 민수가 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뻣뻣하게 굳었다. 나쁜 의도로 그랬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날이 선 말투는 어쩔 수 없었다. 배신자로 몰렸다면 정체가 탄로났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병원에 있을 주원도 위험했다. 나아가 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최대치로 올라가고 말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됐다. 감정과 기억을 배제하고 모든 가능성을 실제로 염두해 둬야만 했다.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민수는 억울한듯 씩씩거렸다. 서러운 눈에는 금세 물기가 차올랐지만 울지는 않았다.

 “제 잘못이라고..생각해으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재희가 파르르 떠는 민수의 손을 꽉 붙잡으며 향해 힘있게 말했다.

 “괜찮아, 민수 넌 잘못한 거 없어. 말해줘서 고마워.”

 차분한 말투로 다독이자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안정을 되찾았다. 허리를 구부려 앉아있던 재희가 잠시 션을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냉랭한 표정이었고 까만 눈은 그를 나무라는 듯 했다. 션은 그 눈빛을 피하지는 못하고 굳어있었다.

 “사람들은?”

 재희가 묻자 민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그렇네요.” 확신하는 말투였다.

 "뭐가?"

 션이 되물었다.

 "마을에 배신자가 나타났다는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 소통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각자의 판단이든, 상부의 지시든. 의도된 바라는 거죠."

 그렇다면.. 션이 깨달은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 예고리는 누구도 믿지 않는 상태라는 겁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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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3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4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4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6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2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1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9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1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1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5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2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6 0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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