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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10)
작성일 : 22-01-31 10:10     조회 : 175     추천 : 0     분량 : 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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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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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인가봐. 장난스레 덧붙이는 말에 힘이 쭉 빠졌다. 션의 맞은편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아는 체를 한 레시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화려한 차림이었다. 베이지톤의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밑단의 주름이 많아 걸을 때마다 치마가 나풀거렸다. 그 위로 꽃자수와 레이스가 어수선하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장식하고 있었다. 챙이 넓은 긴 모자를 쓴 그녀가 그늘진 곳으로 들어오자 얼굴이 긴 음영이 생겨났다.

 션은 작게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재희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아 션은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치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모습이었다.

 그새 재희의 등 뒤까지 걸어온 레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 덥수룩하고 거친 머리를 보니.. 권재희네?”

 “레시.”

 “내 이름 부르지 말아줄래? 안녕 못하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날이 선 대화 속에서도 재희의 얼굴은 덤덤한데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되려 레시의 얼굴에 짜증이 얽혀 있었다.

 “죄송해요. 이만 가볼게요.”

 재희는 속삭이듯 션에게 말한 후 돌아섰다. 그리고 레시의 옆을 지나치며 한마디 했다.

 “오랜만이라 반갑긴 한데, 남의 대화 엿듣는 취미는 그만두는 게 좋을 거 같다.”

 “뭐라고.?”

 레시가 반박하기도 전에 재희는 건물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녀는 혀를 끌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선을 따라 흘려내리는 긴 챙이 여전히 레시의 표정을 가리고 있었지만 불만스러운 내색은 여실히 뿜어져 나왔다.

 션은 눈앞의 방해꾼에게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치장한 레시의 얼굴은 아마 그에 맞춘 화려한 화장을 했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별로 친하지 않은 낯선 이의 낯선 복장인데도.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의외네."

 션이 물어보려던 말을 내뱉으며 레시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손가락으로 모자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 느리게 흘러가며 션의 시야에 담겼다. 이 얼굴을 안다. 모른다. 션의 예상은 틀렸다. 눈에 튀는 의상과 달리 그녀는 맨얼굴에 가까웠다. 발그스름한 뺨의 분홍빛이 은은했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얼굴이 만들어낸 모양 같았다. 지루해. 션은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수 년 전 제 앞에 앉아있던 어린 약혼녀를 향해.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시는 침묵을 유지하는 션을 보고 다시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올라가고 입꼬리가 벌어지자 으레 알던 레시의 이미지가 약혼녀를 덮어버렸다. 아무래도 방금 전은 만들어낸 얼굴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션은 그녀가 누군지 한참이 지나도 몰랐을 터였다.

 "왜..."

 "?"

 왜 살아있는 거지?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말을 막았다. 분명 약혼녀는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마차가 뒹굴면서 돌부리에 크게 부딪쳤다. 션은 그때 바닥을 굴렀고 마차의 진행방향과는 반대라서 살 수 있었다. 마차가 커다란 나무와 충돌해 뒤집어지는 걸 션은 똑똑히 보았다.

 충격을 받은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피가 나는 손과 발이 축축했다. 힘을 주어 일어섰을 때 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의 느낌이 생생했다. 하지만 션은 눈을 돌리지 않고 마차 옆으로 갔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뒤따라오던 하인들이 그를 막아섰다.

 '도련님 보시면 안됩니다.'

 션은 제 행동을 구속한 이들을 내치지 않고 눈만 굴렸다. 시야 끝에 걸린 건 약혼녀가 신고 있던 리본달린 구두였다. 끈이 풀어지고 흙이 잔뜩 묻은 채 바닥에 쳐박혀 있었다. 그걸 보자 힘이 쭉 빠졌다. 손이 덜덜 떨렸다. 죽음이 그렇게 피부로 직접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션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안심어린 손길들이 그가 돌아서서 갈 수 있도록 힘을 부쳤다. 빨리 수습하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속이 메스꺼워 도무지 자리를 지키고 서있을 수 없었다.

 약혼녀를 다시 본 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반듯하게 누워있던 그녀의 모습은 흡사 잠든 사람 같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그녀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이미..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직접 마주한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상념을 깨듯 레시가 물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 전까진 나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그러는 당신은요?”

 “...”

 레시는 모자를 뒤로 젖히다가 자꾸 내려오자, 벗고서 머리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블론드 웨이브가 그녀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난 대답안하고 다시 물어보는 사람 별론데. 흠...그냥 어쩌다보니? 동생이랑 좀 친하게 지내는 거 같던데, 별로 보기가 싫더라고.”

 레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레시는 히였던 재희를 모른다. 열다섯 에녹은 약혼녀가 히에게 보내는 흥미어리고 부드러운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그에 심사가 뒤틀렸다. 션은 그것이 약혼녀에 대한 자신의 소유욕이라고 생각했었다.

 레시라는 이름도 가짜인게 아닐까. 제시의 친언니가 맞기는 한 걸까. 대체 여기엔 왜 있는걸까. 그때 그곳엔 왜 있었을까.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모든게 의심스러웠다. 죽음이 위장이었다면 그는 바깥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게 된다. 다시 한 번 이곳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 재희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서 접근한 건가. 아니면..

  “아, 혹시 친한 사이예요? 내가 너무 무례했어요?”

 전혀 거리낌 없다는 투로 그녀가 말했다. 션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며 말했다. 이럴 때는 정해진 메뉴얼에 따라 수십번 반복한 표정이 나오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몇 번 얘기 나눈 정도예요.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로..?”

 “주원이 입원했다고 들었어요. 병문안 왔는데 병실까지는 몰라서.”

 “그 차림새는..?”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으시네. 축제 준비의 일환이예요. 별로예요?”

 “아니요. 아름다우시네요.”

 “어머, 그런 입발린 소리도 할 줄 알았어요?”

 레시가 눈을 휘며 웃었다.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알고 있는, 아주 매력적인 미소였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알던 사람이었나. 약혼녀는 항시 감정을 눌러 담고 최소한으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귀족여인이었다. 전자가 연기라면 탁월한 실력이었다. 아마 시간이 흐르는 동안 더욱 견고하게 다져졌을 그녀의 얼굴은 몇 번 보지 않았더라도 이미지로 박힌 의심할 여지없이 레시 그 자체였다.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주원은, 배가 고팠는지 빵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 왜 다시 오냐는 눈동자가 션을 향했다가 뒤이어 들어오는 레시를 향해 움직이더니 먹던 빵을 꿀꺽 삼켜버렸다. 주원이 켁켁거리자 레시가 션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너, 왜, 여기! 켁..!"

 "쓰러졌다면서.. 어떻게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어느새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채 레시가 주원의 손을 그러쥐었다. 주원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뒤로 물릴 곳이 없어 미수에 그쳤다. 곧이어 원망의 눈길이 션을 향했다. 따지고보면 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주원의 심정은 대충 이해되었다. 최대한 미안하다는 뜻을 보냈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진 않은듯 했다.

 레시는 주원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린채였다. 그녀는 주원의 몸 이곳저곳을 빠르게 살폈다. 레시의 눈이 일순 차가운 빛을 띄었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지만 워낙 순식간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션의 시선을 느낄법도한데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레시의 행동은 특히 주원을 향해 과한 느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마치 진심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세월이 지났지만 어떻게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녀야말로 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설마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 아니겠지.

 레시는 병실을 나가기 직전까지도 주원에게 안정에 또 안정이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이미 지친듯 고개만 끄덕이던 주원은 내일도 온다는 그녀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그녀가 떠난 걸 확인한 후 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레시가 FAKE의 인간이야.”

 그녀는 FAKE의 인간이다. 의심할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신분을 바꿔가며 마을에 나타났음에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가 있는 사람. 준비되어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제시는 친동생이 맞긴 한 걸까? 아니라면, 그 무해해 보이던 아이도 FAKE의 조직원일까.

 션이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주원이 소리쳤다.

 “뭐라고?”

 션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레시가 FAKE의,”

 “진심이야?”

 주원이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되물었다. 션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진심이라니.. 이게 내 진심이랑 엮이는 문제던가?”

 주원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 그러네.. 지금 말이 헛나왔어.. 그러니까, 방금 여기서 나간 내가 아는 ‘레시’가 FAKE 조직원이라는 말이야?”

 “응.”

 “무슨 근거로.”

 “음. 육감으로?”

 주원이 얼굴을 대놓고 찌푸렸다. 평소 그가 자신을 놀려먹던 수법이었다. 막상 해보고 나니 왜 하는지 알법 했다. 하지만 주원과 달리 션은 산뜻하게 인정했다.

 “장난이야.”

 “...나 지금 아프거든요 필렌씨.”

 션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주원도 바람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어지러. 그가 곧추 세운 베개에 몸을 파묻듯 누일 때까지 기다린 션이 입을 열었다.

 “열다섯 살에,”

 “응응”

 “그 여자가 내 약혼녀였어.”

 “응응... 뭐? 푸흡..!”

 주원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기침이 터져 나오는 사이 그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간호사가 달려와 이미 당부한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았다며 머리를 움직이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다.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주원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션이 그를 말렸다.

 "조심해."

 "아니, 지금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어?"

 그는 어딘지 씩씩대는 말투로 션을 향해 눈을 번쩍 떴다. 그 사이 묘하게 오른 홍조가 눈에 들어왔다.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잖아~?!"

 션의 말꼬리를 잡아 끈 주원은 말도 안돼. 왜. 아니 어쩌다가? 등등을 연발하며 흥분했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터라 션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딱히 그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했다. 명분이 약혼녀였을 뿐 서로에게 무감했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슨 생각과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처음만난 사이에도 예의상 물을법한 지난 휴일의 일정이라던가. 시덥 잖은 어떤 얘기도 나눈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친숙할 정도였다.

 "난 일반이야. 마을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레시가 귀족가 장녀로 나와 결혼할거라 믿고 있었지."

 "...."

 "그래서 그녀가 FAKE라는거야. 참고로 그때는 레시라는 이름도 아니었으니까."

 주원은 제 머리를 뜯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재희는?"

 확신 어린 투로 말을 이었다.

 "둘도 원래 알던 사이야?"

 "얼굴 정도는 본 적이 있지만..."

 원래 알던 사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렇게 단언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주원은 재희가 션의 어린시절에 존재하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지, 제 집안에서 일하던 잡꾼이었단 건 몰랐다. 애시당초 남자에서 여자로 외견을 바꾼 재희를 레시는 모르는 듯 했다. 재희는 레시를 아는 것 같았지만 과거의 인연으로써는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어째서 그렇게 날이 선 태도로 서로를 대하는 지도 션은 알지 못했다.

 "아마 모를 거라고 생각해."

 “...”

 “그러니까 너도 이제 더 조심하라고.”

 아무리 진심처럼 보인다고 한들 말이지. 나오는 뒷말은 삼켰다. 주원은 레시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일부러 더욱 피하고 있었다. 과장된 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단지 경계하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경계에 확신을 심어주었으니... 알아서 잘 할 지언정 션은 형식적인 주의를 주원에게 던져야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션도 더 이상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3부 그 너머

 

 예호제가 시작했다.

 한해동안 키가 5센티나 컸다. 작년까지만 해도 민수는 려상보다 작았고 제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남자로써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용기 내 말한 내용이 부모님의 웃음-아마도 그를 바라보며 귀여운 마음에 나왔을-을 대가로 받았을때 민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유를 많이 먹어야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갈팡질팡하던 시기를 지나 갑자기 눈에 띄게 커졌다. 혹시 생각을 많이 하면 몸집이 자라나는 건지 그는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올해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는 이제 셋 중 가장 컸다. 중국어는 아직 좀 부족하지만 나머지 언어는 자신이 있었다. 특히나 러시아어는 려상과 제시보다도 자신이 훨씬 잘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보통은 열다섯이 되면 생일 순으로 마을 밖으로 나가게 되지만 특출난 경우에는 예외로 먼저 선발되고는 했다. 민수는 적어도 자신과 잘 지내는 아이들보다 먼저 나가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야 은근히 잘난 척을 하는 려상을 누를 수 있으리라.

 ‘누가 너보고 지금 죽으래.’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려상의 말이 맞았다. 왜 나는 죽으려 했을까. 죽어야하지만 죽기 싫어서 도망쳤다. 하지만 민수는 아직 어린 애송이였고-보통 어른들이 말하는- 쫒아오는 이는 어른이었다. 술이나 잔뜩 먹고 배가 나와 뒤뚱거리는 아저씨가 아니라 젊은 청년. 그 나이대 사람이 많지 않아 션은 저절로 눈에 띄는 존재였다.

 민수는 인정했지만 이미 자신이 패닉이었던 상황에서 거기까지 바라보고 침착하게 이야기 한 려상이 얄미웠다. 언제나 한발 앞선 여유로운 태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션 앞에서는 달랐다.

 어른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행여 눈물이라도 보일라치면- 사람들은 아이들을 지켜주려고 애썼다. 처음 시도는 그랬다. 민수, 려상, 제시가 모두 똑같은 한마음이었다. 특히나 눈물이 잘 나오지 않는 민수와 달리 제시는 눈물을 뽑아내는데 아주 수준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션의 앞에서, 다른 어른들 앞에서 하는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우리가 납득하는 범위를 넘어선 명령은 다시 생각해봐야한다고, 그는 정확히 말했다. 명령. 사실 민수는 그것이 명령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냥...그래야하는 범주의 것이었다. 명령이란 말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명령은 사람이 사람을 향해 강압적으로 인도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사회에 나가면 윗선의 ‘명령’을 듣는 일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수에게 명령이란 단어도, 그로 인한 행위나 감정도 까마득히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 단어를 듣게 될 거라고 예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명령..”

 결국 호수의 주인을 세 번 물어본 사람에게서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말해주지도 않았으며 어중간하게 지나간 이후 민수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원래 순서대로라면 집에 와 부모에게 사실을 고하고, 실제 ‘호수의 주인’ 중 하나를 만나러 가야했다. 그런식으로 그들을 만나는건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민수는 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이란 단어를 조심스럽게 몇 번씩 읖조렸을 뿐이었다. 호수의 주인도 축제 준비때문에 바쁘지 않을까, 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안 먹어?”

 려상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민수를 보며 말했다. 물론 민수는 발끈하며 먹으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응.. 그냥. 안 먹고 싶어서.”

 민수는 의지를 다졌다. 이건 나름의 죄책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사람당 30알로 배부되는 약을 안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루에 한 알. 아무리 많아도 세 알 이상은 안된다. 그건 지침이었고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지침을 지켰다. 게다가 세 알이나 먹으면 마지막 날에는 결국 먹을 것이 없어진다. 그런 상황이야말로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다.

 “흐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려상은 알겠다는 투로 민수를 바라보다 꿀꺽 약을 삼켰다. 민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울대를 바라보았다. 약에서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는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식욕이 돌았다. 아마 그 다음에 일어날 몽롱하고 기분좋은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려상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틀어막았다.

 "켁,"

 그의 손바닥엔 약간 녹아 형체가 물러진 알약이 있었다.

 "왜.."

 "나도 안 먹을래."

 민수는 발끈했다.

 "네가 왜,"

 "의심할게 많으니까."

 "뭐?"

 "너도 그런거 아니었어?"

 민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의심이라니. 뭐를? 그냥이면 그냥이었다. 물론 속사정은 달랐다. 나름의 사죄표시와 민수가 결심한 일을 제멋대로 단정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같이 하려는 려상에게 화가 났다.민수가 한마디 하려던 찰나였다.

 “그냥 이대로 놔둘 셈이었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자꾸 모른 척을 해?”

 민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려상이 인상을 찡그리며 미간을 문질렀다. 저런 행동을 할때 려상은 민수보다 몇 살이나 많아보였다. 나보다 체구도 키도 작으면서. 그 생각이 어리고 유치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막을 수가 없었다.

 려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제 끈적할 법한 약을 주먹에 꼭 쥔 채였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민수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는 어른이야.”

 려상이 맞받아쳤다.

 “그 사람 말을 믿어선 안 돼.”

 보통 의심을 던지는 수준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려상답지 않았다. 민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넌 대체 그렇게 물러서 어떻게 하려는 거야. 제대로 생각을 해봐. 위험한 인간이야. 애시당초 마을 밖에서 왔잖아.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판단해.”

 “그거야 예고리에 들어오는 순간 위험성은,”

 “어른들이 실수하지 말라는 법 있어?”

 민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틀리다니. 어른들은 몰라도 호수의 주인마저 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는 생각의 흐름대로 말했지만 그 다음을 잇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공백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려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말했다.

 "그 사람이 틀린 말을 한건 아니야. 그보다 중요한 깨달음을 주긴 했지."

 "깨달음?"

 "생각해보라고 했으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봤어. 그리고 우리는 한 번도 호수의 주인을 '의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

 "외부인간은 의심하는 게 당연해. 미심쩍은걸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 그런데 왜 호수의 주인이 실수로 마을에 사람을 들였을 거라는 의심은 하지 않는 거지?"

 "....“

 민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 려상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행여 누가 들을까 민수는 주위를 재빠르게 살폈다.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항시 아이들이 모일 때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야했기에 한적하고 구석진 곳에만 오긴 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정말 훤히 보인다."

 려상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너야말로 지금 변절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잖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난 호수의 주인을 의심한 적 없어. 그들이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려상은 이제 어딘지 번들거리는 눈으로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나를 향한 눈이 아니다.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보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입가에 그린 듯 맺힌 미소가 불온하게 느껴졌다. 려상은 민수를 제 동생보듯 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민수도 려상과 동질의 교육을 받아왔다. 그의 말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했다. 호수의 주인은 사람이지만,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간혹 열다섯이 넘어 청년이 된 후 호수의 주인으로 선발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기정된 사실은 아니었다.

 의심이라는 말을 입밖에 꺼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 잘못을 덮으려는 려상의 말이 논리를 가지고 민수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네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 힘을 주어 말하려고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행동은 의지를 배반했다. 당당한 태도로 려상은 이미 민수의 이런 행동 한치 앞까지 예상했을 것이다. 변변한 대꾸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며 어중간한 태도로 결국 려상의 뜻대로 따라갈 거란 것을.

 민수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자 려상은 얼굴을 조금 굳혔다.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조금 초조해보였다. 문득 골목을 돌아선 길 건너편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민수는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나 먼저 가봐야겠어."

 가야겠다고 말하고 나니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 려상의 입장에서도 득될 것이 없었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는 민수를 향해 려상이 무어라 말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골목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나 혼자라도 할거야."

 려상은 중국어로 단어를 짓씹듯 말했다. 성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말투였지만 민수의 귀에는 아주 똑똑히 들렸다.

 뭐를?

 그렇게 물어본다면 민수는 려상의 의지대로 휘둘릴 터였다. 궁금증과 불안감에 휩싸인채 그는 려상을 등졌다. 골목을 돌아나와 걷다, 마음이 쓰여 결국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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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에필로그 2022 / 1 / 31 177 0 12145   
20 3부 그 너머 (7) 2022 / 1 / 31 177 0 10526   
19 3부 그 너머 (6) 2022 / 1 / 31 160 0 10700   
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3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3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6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1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1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9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0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1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4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2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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