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9)
작성일 : 22-01-31 10:08     조회 : 181     추천 : 0     분량 : 10317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창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옮겨갔다. 불이 꺼져 있던 곳에서 누군가 소리쳤고 창문 근처로 달려왔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가 난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수초 사이에 션은 창문 너머로 다리를 훌쩍 넘겨 뛰었다.

 다리 끝에 힘을 몰아주는 동시에 손바닥을 피아노치듯 달걀모양으로 그러쥐고 부드럽게 착지했다. 유명 연작 히어로물에 나오는 영웅 같은 자세가 되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Take.B의 직원이라면 쉼쉬듯 가능한 기초적인 자세이자 주시행동이었다. 처음 이 동작을 훈련할 때는 과반수가 손가락을 접질리거나 부러지곤 했다.

 시선을 오래 끌어주길 바랬지만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션은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예고리의 주변이 온통 산이라는 건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의 집이 사실상 시내 구석으로 몰린 낡은 건물인 것도.

 관리하지 않는 누군가의 정원 옆부터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 되겠지만 허리께에 와 닿는 풀숲을 헤치고 가는 건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션은 제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쓴 웃음을 삼켰다. 주원이 만들어놓은 고무딱총이 훌륭한 도구가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처음엔 장난감이나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말로도 했다. 주원은 뾰루퉁 입을 죽 내밀고 이게 바로 태초의 무기라며 툴툴거렸다. 실제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감으로 어느 정도 어림짐작 후 거울을 이용해 세밀한 각도를 맞췄다. 큰 소동이 될 수 없단 걸 알았지만 시선을 잠시 돌리는 정도면 족했다.

  재희의 집은 생각보다 더 멀었다. 낮은 보폭에 무릎은 짓무른 풀색이 되었다. 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행여 재채기라도 할까 숨을 골랐다. 코로 숨을 쉬지 않는데다 소리 때문에 한껏 참느라 낮은 호흡이 거칠고 힘들었다.

 겨우 근처에 도달했을 때, 물론 그 집 앞에도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나오면서 하도 많이 본 탓일까, 션의 집 앞에 있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처럼 보였다.

 재희의 텃밭-아마 가꾸고 있지 않은-으로 추정되는 곳은 몸을 숨기기에 적당했고, 수많은 벌레들이 드글거리고 있었다. 땀이 흘러내리고 있는건지 벌레가 기어가는지 모를 감각이 등 뒤로, 팔 옆으로 느껴졌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정도 참는 건 예삿일이었지만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니 참기 버거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들의 시선을 한차례 어떻게 돌릴 것인가. 션은 딱총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써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엔 거울이 없었고, 시야를 굽이치는 각도로 나올만한 창문도 보이지 않았다. 까딱하다 사람이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왕이면 그런 일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돌린다쳐도, 문을 열려면 안에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 그들이 밖에 있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재희는 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는 사람인듯 했지만 야밤 중인 이 시간엔 어떨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션의 앞에서 항상 닫혀있던 문은 제대로 그를 환영해준 적도 없었다.

 재희의 집 앞에 서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키가 작고 덩치가 있는 사람, 키가 크고 마른 사람. 둘 다 남자인듯 했다. 그들이 조곤거렸다.

 “지루해.”

 “아직 첫날인데 벌써부터 지루해하면 쓰나. 게다가..”

 “이미 내 구역을 벗어나서 여기 있는 것부터가 농땡이었지.”

 키가 작은 남자가 옆으로 고갯짓 했다. 여기서 보이니까 농땡이는 아니지. 그 말에 키 큰 남자가 키득거렸다. 아무래도 몇 건물 정도를 한 사람이 단속하는 러프한 모양새인듯 했다.

 “곧 있으면 감찰단이 올거야, 어서 가있으라고.”

 “알겠어.”

 키가 작은 남자가 반은 투덜거리며 걸어갔다. 등을 내보이며 걸어가는 지금이 기회였다. 션은 몸을 일으키고 키가 큰 남자 뒤로 빠르게 다가갔다. 팔로 목을 거는 동시에 입을 막고 오금을 쳤다. 무너져 내리는 몸을 지탱하며 목 부근을 세게 치니 남자의 눈이 감겼다. 그대로 남자를 들쳐맨 뒤 건물 옆으로 몸을 숨겼다. 겉옷과 가면을 빼서 몸과 얼굴에 걸쳤다. 각기 얼굴에 맞게 제작된 것 같다는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세로로 비죽한 가면이 션의 얼굴과 맞지 않아 삐그덕 거렸지만 대충 눈과 이마정도만 맞춰 썼다. 후우. 느린 한숨이 그의 입가로 새어나왔다. 곤히 잠든 듯 기절한 남자는 괴로워 보이진 않아서, 그는 조금 안심했다.

 다시 문 앞으로 걸어나오자 키가 작은 남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가 제 바지 앞섶을 잡아채고는 크게 흔들었다. 션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키가 작은 남자는 낄낄거리더니 다시 등을 보이고 걸어갔다.

 문이 열려있기를 바랐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적당히 무심한 표정의 재희가 가면을 쓴 션을 올려다보았다. 곧 시선이 마주쳤다. 재희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더니 파르르 떨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션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가면 너머 눈동자만 마주해도 재희는 션을 알아본다. 그 사실이 살 떨리게 생생했다. 윙윙거리던 귓가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평화로운 동시에 격정적이었다. 션은 아직, 이 감정을 정의내리지 못한 채로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션이 가면을 벗는 동안 재희의 시선을 그를 따라 붙었다. 어색하게 웃어보였지만 재희는 웃지 않았다. 용건도 묻지 않았다. 그저 쳐다만 보았다.

 내가 신기한 건가. 처음엔 황당하고, 싫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고정되어 있는 사실이 어쩐지 그런식으로 해석되었다. 션이 재희의 앞에 서서 손바닥을 펴고 이리저리 흔들자, 그녀가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눈을 정신없이 깜빡이는데, 어릴 적 얼굴 그대로였다. 던전 깊은 곳에서 몽글거리며 올라오는 뭔가가 있었다. 나쁜 기분이 아닌데 션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왜..”

 “맨날 질문만 하지 말고.”

 새벽에 남에 집에 찾아온 것치곤 무척 뻔뻔한 말이었지만 션은 여유롭게 말했다. 반쯤은 충동적이었다. 재희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오래전 기분을 느꼈다. 그건 션조차도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재희는 스스럼없이 도련님이 대단하다며, 정말 아는 것도 많고 훌륭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시절 션의 주위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션 또한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는게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말은 옷을 조금 더 돋보이게 하는 장식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말 뿐 아니라 재희는 행동에서도 시선에서도 그것이 느껴졌다.

 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른들의 칭찬과는 농도와 색이 다른 재희의 반응은 션을 으쓱하게 만들었다. 그녀 앞에서는 좀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된다는 기분 좋은 부담감도 있었다.

 ‘현실’로 돌아온 이후, 션은 자라나면서 조금 점잖고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어두운 성격을 가지게 된 건 그간 가지고 있던 오만함의 대가였다. 그렇게 살아서는 바뀐 현실에 적응할 수 없었다. 남들 위에 있는게 당연하다는 우월의식을 죽이고자 그는 침묵을 택했다.

 가장 찬란하던 시절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션을 ‘에녹 도련님’으로 보았다. 션을 오만하게 만드는, 하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게 만드는, 그리고 에녹이 보던 히를 기억하게 만드는.

 “남에 집에 들어와 놓고 뻔뻔하시네요.”

 그새 평정심을 찾은 재희가 나직이 말했다. 그 옛날 재희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둘은 친구처럼 지냈으나 상하관계가 분명 존재했다. 예전과 다르다. 션은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으로 다시 재희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기분은 여전히 나쁘지 않았다.

 “미안. 사람을 찾고 있어.”

 그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인영이 보였다. 제시였다. 눈이 마주치자 쏙 사라졌다가 다시 고개만 내민다.

 션이 말했다.

 “김주원 여기 있어?”

 

 

 주원은 입을 우물우물거리며 감자를 먹고 있었다. 누가 올라오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먹고 있는 작태에 션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뒤따라온 재희도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우아 재희씨 이거 맛있,”

 고개를 든 주원과 션의 눈이 딱 마주쳤다. 주원은 먹다가 감자를 뿜었다. 연신 켁켁거리더니 물 물 하며 물을 찾는다. 어디선가 제시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손에 물잔을 쥐어줬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야지..”

 “아, 여기,어떻게..?”

 “남은 걱정하느라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감자나 먹고 있어?”

 “아하하...”

 머쓱한지 주원은 감자 부스러기가 묻은 제 입가를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변명을 늘어놓는 얼굴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태평한 녀석의 얼굴을 보니 얄밉기도 했다.

 가벼운 뇌진탕으로 정신을 잃었다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션은 작게 한숨을 쉬고 재희에게 말했다.

 “실례가 많았어. 우리는 이만 가볼게.”

 “지금?”

 되물은 건 주원이었다.

 “밖에 통행금지야. 그나저나..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첩보영화 찍으면서 왔지.”

 션이 제 무릎께와 들고 있던 가면을 흔들어보였다. 주원의 시선이 그 위를 향했다.

 “오호..”

 “내가 공주님 구하듯 널 구하러 여기까지 와야 했을까?”

 “오 기다렸습니다 왕자님.”

 “뭐래.”

 별 시덥 잖은 농담을 던지고 있으니 긴장이 풀렸다.

 “너도 와서 감자나 먹어. 자다 일어나니까 배고프더라구. 다들 와서 드세요.”

 “너네 집이냐..”

 집주인인 마냥 넉살좋은 주원의 태도에 재희와 제시도 감자를 집어들었다. 뭐하고 있는거지. 그런 생각이 들다가 아무렴 어떠랴 싶기도 했다. 션도 감자를 집어들어 한 입 물었다. 고소한데다 퍼석거리지도 않았다. 확실히 맛있었다.

 

 그런 션의 옆얼굴을 재희는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감자를 먹으며 우물거렸다. 맛있네. 누가 듣지도 않을 말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기했다. 제가 알던 도련님은 뭔가를 손으로 집어먹던 적이 없었다. 상상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가 손으로 뭔가를 집어먹는게 어색하기는 커녕 무척 자연스러웠다. 길고 쭉 뻗은 손가락만은 여전했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눈에 보였다. 재희는 새삼 시간이 지난다는걸 인지했고 문득 그 함축 된 시간이 궁금해졌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서 식사를 하던 도련님은 이제 없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그의 시간은 온전한 불행이었을까. 이제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게 아닐까. 아직는 확신할 수 없었다.

 

 주원은 이 분위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무감각한 재희의 얼굴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원인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았다.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알게 되었으니까. 션의 말만 들었을 때는 일방적인 감정의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아마 그를 추억으로 삼을 지언정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을거라고, 좀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저 얼굴은.. 주원은 괜히 남은 감자 하나를 제가 쏙 들고 가서 와구와구 먹었다.

 

 제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부모보다 나이가 적은. 그러니까 레시 또래의 어른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이상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이 놀던 민수, 려상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보였다. 어른은 어른이 아닌가. 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는 건가. 어쨌든 오늘 밤은 집에 가지 못하고, 레시는 욕이나 하겠지만 아버지는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밤은 항상 어둡고 외롭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빨리 날이 밝아야 나갈 수 있었고,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재희네 집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멀고 험난하기만 했는데, 이곳은 밤에도 아늑했다. 상상한 것과 다를게 없었다. 주원은 저도 한참 묻히고서는 제시의 입가에 묻은 감자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 느리게 먹는 제시에게 일부러 하나 더 감자를 쥐어주는 션을 보며 제시는 기분이 좋아졌다. 손 안의 감자는 아직도 따뜻했다. 그러고보면 션은 제 친구였다. 친구라고 말해줬다. 재희는 유일한 제시의 편이었다. 주원은 제시가 다치지 않게 지켜줬다. 오늘 밤은 그러니까, 무척 괜찮은 날이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해가 뜨기 직전, 가면 무리는 자리를 떠났다. 의자에 기대앉아 선잠을 자던 션은 그들이 점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따라갔어야 하나 싶은 생각을 했다.

 "그만둬."

 그때 션의 생각을 읽은 듯 주원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쳐다보자 주원은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너 체력 방전됐어. 그리고 일주일 간 매번 저럴텐데 오늘 그럴 필요는 없잖아."

 "난 멀쩡해."

 "예이 예이. 그러시겠죠."

 괜히 빈정거리는 투로 주원이 툴툴거렸다. 그의 뒷통수 너머로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나와 제멋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밤새 뒤척이더니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편히 자라고 했는데도 션이 쪽잠을 자는걸 미안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주원은 걱정하는듯 했지만 그는 정말 멀쩡했다. 정신이 이례없에 맑았다.

 "다 나았어?"

 "나 멀쩡해."

 주원이 션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그는 피식 웃고는 주원의 솟은 머리칼을 꾹꾹 눌러주었다. 잘 안눌리네. 힘을 주자 웃던 주원이 감정을 담았다며 질책했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하지만 주원은 멀쩡하지 않았다. 아침은 먹지 못한데다 밖으로 나오고 조금 걷기 시작하자 유달리 힘들어했다.

 집으로 가면 낫는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병원까지 갔다. 힘든 태가 역력한데도 안가겠다고 우기는 그에게 션이 업고가겠다고 협박하자 주원은 조용히 따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며칠간 입원하여 안정이 필요하다 처방했다. 집에 가겠다는 일념을 버리지 못한 그를 눌러 앉히고 밖으로 나왔다.

 낡은 병원 건물 앞으로 나오자 하루가 다 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채 10시를 넘기지 않고 있었다. 간이 침대가 나란히 붙어있는 병실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했고, 의사와 진료를 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데다 청결하지 못한 병원의 살풍경을 보면 주원이 있기 싫어하는 부분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1층 응급실이 아닌 입원실은 그보단 나았고 주원에게 안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 뿐 아니라 자잘한 찰과상 치료도 겸해 그의 퇴원은 사흘 뒤로 잡혔다.

 이제 뭘 해야 되나 생각하며 돌아섰을 때 재희와 마주쳤다. 그녀가 제 앞으로 걸어오는 동안 션은 멍청히 서있을 뿐이었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탓이었다.

 "할 얘기가 있어요."

 현실은 빠르게 다가왔다. 할 말을 마친 재희의 얼굴은 조금 굳어있었다.

 

 재희의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길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모양이 가지런해서 눈이 갔다. 그 아래로 진하고 까만 동공은 비가 온 뒤 밤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어둡지만 차갑진 않았다. 맑고 깨끗했다.

 내리깐 눈꺼풀이 위로 올라오고 이내 션을 향했다. 똑바로 마주보는 눈에 몰래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뜨끔했다.

 "제 말 제대로 들으셨나요?"

 "아..어."

 션이 버벅거리자 재희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풀어졌다. 화가 난 건가, 생각하자 입 속이 바짝 말랐다.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별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머뭇거린 것 뿐이다. 그러는 사이 재희가 조금쯤은 제 눈치를 보는게 신기했고, 그녀를 세세하게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주의를 기울였을 뿐이다.

 예고리에서 나가달라는 직접적인 축객령에 션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여기 온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혼자서 결론을 내린 그녀의 처사는 부당했지만 진지한 눈동자는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을 듯 했다. 어떻게 대응할지 신중해야 했다. 무엇보다 션은 재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왜 웃어요..?"

 재희가 단번에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션은 제가 웃고 있단 걸 몰랐던지라 놀라며 입가로 손을 올렸다. 입꼬리가 비웃음을 머금은듯 올라가 있었다. 싸움이라니. 션은 적어도 세상에 나오기 전, 누군가와 싸우는 위치에 있던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난 적은 있었지만 웬만해서 그는 명령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의 일방적인 말이 대화를 이어가는 물줄기였다. 물론 '션'이 되고 나서는 많이도 싸웠다. 그는 어쩐지 화를 부르는 타입인 듯 했고 상대방을 그걸 참지 못해 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무수한 시간을 겪으면서도 그는 '싸운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재희를 마주하면서 싸우기 싫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게 우스웠다. 그는 얼굴을 풀고 말했다.

 "아니..미안해. 하지만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어. 나도 사정이 있어서 여기 와있는지라."

 "여긴 위험해요."

 "너는 그런 위험한 곳에 있고 나는 가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전 걱정이 돼서..!"

 "걱정했었어?"

 "...."

 되묻는 말에 재희는 입술을 여린 살 안으로 말아감으며 시선을 피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이 거칠었다. 안그래도 잔머리가 많은 머리가 더 부스스해졌다.

 "난 너랑 그런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

 "...."

 "십 오년만이야. 그동안 난.."

 보다시피 그냥 살았어. 튀어나오는 말을 션은 집어삼켰다. 너의 지난 시간이 궁금하다. 아직 십대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꿈을 가졌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다시 한껏 더 성숙해지기까지 그 무수한 시간을 어떻게 채워왔는지.

 막상 재희와 마주하니 저택에 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재희는 자주 션을 걱정했다. 무릎이 까지고 매번 자잘한 생채기를 내오는 건 재희였음에도. 약이나 바르라는 흔해빠진 말조차 하지 않았다. 걱정받을 만한 그녀는 항상 션에게 물었다. 괜찮으냐고, 조심해달라고. 도가 넘는다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제가 재희에게 건네는 큰 배려라고 여겼다. 약혼녀가 죽었던 그날이 오기 전까지 션은 재희를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너의 안부를 걱정했어.”

 션의 너머 마차를 쳐다보던 재희의 가라앉은 눈빛을 기억한다. 션을 뿌리치고 가는 손아귀는 거침없었다. 막아서던 션의 손목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로자의 시신을 보고 토악질을 하다가 갑자기 무너지던 순간,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지던 몸은 부서지는 진흙 같았다.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션의 내부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이내 미친듯이 가슴이 뛰었다.

 약혼녀가 죽었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상복을 입고 장례를 준비하면서도 그의 정신은 온통 재희에게 빼앗겨 있었다. 기절하듯 쓰러진 재희가 깨어났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밤마다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낸다고 했다. 밥도 먹지 않는다. 하루종일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충격이 큰 듯 하더라... 입을 꾹 다물고, 울음 섞인 눈동자로 목적 없이 허공을 배회하는 재희의 시선을 생각하고 있자면 가슴에 돌멩이가 걸린듯 답답했다.

 장례식이 마무리되면, 그에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션은 초조했다. 그리고 일은 장례식이 채 마무리되기 전에 벌어졌다. 션은 제 손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이끌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의 재희를 마주하고, 그 길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하든, 나는 떠날 생각이 없어. 네가 여기 있는 한.”

 “.....”

 재희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국적도, 출신도 없어요. 그런 게 만들어질 여력도 없었죠. 저택에서 도련님이랑 살 때가 나았다고 생각한 적, 한두 번이 아니예요. 바깥세상엔 모두 자리가 있어요. 자신이 있을 자리가 태어날 때부터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없었죠. 심지어 저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었어요.”

 “재희,”

 션의 말을 끊고 재희는 빠르게 말했다.

 “여긴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해요. 저처럼 아무런 연고도 가지지 못했거나 버린 사람들이죠. 도련님은 여기와 어울리지 않아요.”

 재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눈가가 빨갰는데도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션이 다시 한 번 그녀의 말을 끊고자 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저랑 도련님은 다르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션이 양손으로 재희의 어깨를 잡으며 다그쳤다. 놀란 재희가 션을 바라보았다.

 “무슨 근거로 말하는건데? 그리고 왜 아직도 도련님이야. 너는 내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건 그때였다.

 “여기서 또 뵙네요?!”

 인연인가봐. 장난스레 덧붙이는 말에 힘이 쭉 빠졌다. 션의 맞은편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아는 체를 한 레시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화려한 차림이었다. 베이지톤의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밑단의 주름이 많아 걸을 때마다 치마가 나풀거렸다. 그 위로 꽃자수와 레이스가 어수선하지 않을 정도로만 옷을 장식하고 있었다. 챙이 넓은 긴 모자를 쓴 그녀가 그늘진 곳으로 들어오자 얼굴이 긴 음영이 생겨났다.

 션은 작게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재희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아 션은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마치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모습이었다.

 그새 재희의 등 뒤까지 걸어온 레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 덥수룩하고 거친 머리를 보니.. 권재희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1 에필로그 2022 / 1 / 31 177 0 12145   
20 3부 그 너머 (7) 2022 / 1 / 31 177 0 10526   
19 3부 그 너머 (6) 2022 / 1 / 31 160 0 10700   
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3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3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6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2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1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9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1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1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5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2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아이어른
세느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