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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8)
작성일 : 22-01-31 10:05     조회 : 170     추천 : 0     분량 : 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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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원은 아무래도 크게 당황한 적이 없는 편이었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음. 냉철함.'

 자신의 프로필에 그런 주요 특징이 붙어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강사들이 그걸 보고나서 자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여러 번 보았다. 능숙한 주원은 씩 웃어주었다. 사람들은 글자보다 보이는 것을 더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지만 살아갈수록 그건 그에게 가장 큰 강점이 되었다.

 입양된 자들의 광신도를 보고 있으면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항상 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그런 감정의 스펙트럼을 배워왔다.

 주원은 미친듯이 기쁘거나 반대로 슬프다는 감정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쁘면 기쁘고 슬프면 슬프다. 하지만 그 앞의 부사를 쓸 정도로 기분이 널을 뛰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되려 더 오버해서 반응하는 편이었다. 담담한 감정과는 반대로 그건 즐거운 일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욱 무뚝뚝했다. 주원은 붙임성이 좋았고 남들과 잘 어울렸다. 매번 재미난걸 찾아오는 그를 좋아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부정적 감정보다는 긍정적 감정에 스스로도 반응이 격했다. 그렇게 웃고 있노라면 감정 기복이 크지 않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뒷편에 자신을 냉혈하게 바라보는 어떤 존재, 자신이되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중재자. 나의 본질적인 점.

 연극의 무대 위에서 실컷 놀고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이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주원의 머릿속에서 빨간색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편하게 살았지. 아직 애새끼였지. 그는 느지막한 사춘기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사람은 막바지에 몰리면, 그게 자신의 생사의 갈림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주민들이 흉기를 들고다니는 마을일줄은 몰랐다. 살아서 갈수만 있다면 자신의 프로필을 당장 수정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주원은 마음먹었다.

 제 품안에서 얼어붙은 꼬마 아가씨를 제외하면 나름 영화같은 한 장면이었다. 주원이 허튼 짓을 하면 바로 죽여버리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지만 이토록 열렬한 시선을 받는 것도 나름 오랜만이었다.

 주원 또래로 보이는 여성은 제시와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정의로만 움직이기에 행동이 너무 과했다.

 주원은 시선만 흘끗 내렸다. 만년필 같이 생긴 무기는 뚜껑 뒤편으로 칼날이 솟아나오는 구조였다. 잘만들었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이니셜이 그의 동공을 찔렀다. 주원이 눈을 찌푸리자 일순 목에 가하던 힘이 느슨해진다. 어설프군. 다행이었다. 주원이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기..이러지말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제시가 울기 시작해서 주원은 또 다시 당황했다. 엉엉 우는게 아니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도로록 흘러내렸다. 아이의 우는 모습이 처량했다.

 어디라도 다쳤구나. 머리가 다친거면 어떡하지? 서럽게 우는 제시를 두고 쩔쩔매는 주원을 잠시 방관하던 여자가 아이를 안아들었다. 제시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

 "따라와요."

 말은 해놓고 그녀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저기 우리 통성명도 안했는데..? 장난끼 어린 말은 닿지 못했다. 일어서서 채 두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어...?"

 이마 끝부터 따뜻한 것이 뭉쳐내렸다. 우와 피가 이렇게 흐를 수도 있구나. 나 죽는 거 아니야? 멍청한 질문과 함께 몸이 흔들린다고 느끼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시야 너머로 돌아선 여자와 제시의 얼굴이 얼핏 보인 것 같기도 하다. 괜찮다는 말을 해줘야하는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원의 시야가 새카매졌다.

 

 주원이 눈을 떴을때 머리가 팽글팽글 돌고 있었다. 배멀미라도 한듯 침대에 붙어있는 몸이 통채로 꺼졌다 솟구치길 반복했다. 온갖 멀미의 'ㅁ'자도 이해못하던 그였기에 이런 경험은 생소했다.

 "으으.."

 작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시야로 동그란 두상에 들어왔다. 제시가 눈썹을 잔뜩 아래로 내리고선 주원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아니."

 반쯤은 농담이었으나 제시는 한층 더 침울해졌다. 주원이 괜찮다고 덧붙이려는데 제시는 등을 돌려 뛰어나갔다. 계단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흠.."

 머리에 단단한 뭔가가 있어 만져보니 붕대가 감겨있었다. 손끝과 얼굴도 보송했다. 더 이상 피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치료를 받은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주원이 누워있는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밤이나 새벽이 아닌걸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계단으로 올라왔다.

 주원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눈이 딱 마주쳤다. 첫만남에 칼을 들이댄 여자는 도통 파악안되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주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의사가 왔다갔었다 치더라도 자질구레하게 그의 상처를 보살피고, 이 침대에 눕혀놓은 낯선 집의 주인은 그녀일 것이었다. 걱정어린 시선을 받을거라 예상한건 아니었으나 저렇듯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가늠한던 아니었다.

 "피가 많이 나긴 했는데 뇌진탕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보이는 상처가 커서 더 다행이었다고 해요. 좀 어지러울 수 있긴 한데 차차 나아질거라고 하고.. 혹시 배고파요? 죽이 있는데 그거라도 먹을래요?"

 "저기.."

 "네."

 "우리 통성명도 안했..는데요."

 "아."

 주원의 상태를 줄줄 읊던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놀란 빛을 띄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그녀가 인사를 하는 통에 주원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다.

 고개를 숙이니 갑자기 어지럼이 밀려왔다. 당황으로 물든채 꼬꾸라지는 몸을 붙잡아 다시 눕힌건 앞에 있던 그녀였다.

 읏차, 인지 영차, 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그녀가 한숨을 돌렸다. 얼이 빠진 주원이 멀뚱히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권재희라고 해요."

 "넵 아 저는 김주원...한국인이었어요??"

 그녀, 재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순간 놀란 주원이 벌떡 일어서려다 다시 어지럼증으로 비틀댔기 때문이었다. 아까와 같이 앞으로 넘어지려다 가까스로 그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것도 꼴사납게 갈대처럼 휘청거리며, 팔까지 허우적대며 베개에 파묻히고 말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그를 받쳐들려던 재희가 상황을 파악하듯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애써 참는 모양새가 안쓰러울 정도로 웃음이 손잇새로 새어나왔다.

 "풉, 아..아니 죄송해, 푸흐...푸하하하!"

 아직 어질어질하던 주원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다시 생각하니 창피해져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호탕하게 웃는 재희의 모습은 기쁘게 했다는 충족감이 드는 얼굴이긴 했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제시도 재희를 신기하게 보다가 웃기 시작했다. 두 여자가 까르르거리니 귀가 간질간질했다. 주원의 입에서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적은 아닐지도 모른다.

 티내진 않아도 내심 예고리에 와서 모든 인간을 의심하던 주원은 재희를 보며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권재희는 김주원과 동갑이었다. 그녀는 이 년전 예고리로 온 유입이었고, 제법 큰 2층 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가 매일 잠들고 깨었을 침대에 자리잡고 있는게 어쩐지 머쓱해졌다.

 그녀의 언어-주원이 듣기로는 영어와 한국어가 있었다-는 표준어의 억양 높낮이 발음 그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영어는 영국식 특유의 발음이 도드라져, 좀 오만하다는 느낌까지 있었지만 태도나 행동이 단조롭고 각이 있어 불손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런 말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아나운서 같다는 말을 하면 싫어할까? 싫어하진 않는데 좋아하지도 않을 것 같다. 주원은 생각만 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국적을 몰랐다. 찾아보려고 했는데 정확히는 모른다고. 재희는 도움을 주신 어떤 분한테 받은 이름이었다.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이었다. 숱이 많고 푸석했지만 크게 이상해보이지는 않았다. 자세히 봤을때 그녀의 눈동자가 회갈색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먼 조상중 누군가는 선명한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부모 없는 고아라는 사실에 주원은 문득 강한 친밀감을 느꼈다. 세상에 없는 부모를 그리워하던 아니던 나쁜것이던 좋은 것이던 공통사가 있으면 동질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습게도 이 감정은 그것이 설사 나쁜 일이라도 안도와 닮아있고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까웠다.

 잘자란 집안 아들인 줄 알았던 션 필렌도 양자이긴 했다. 알게된 건 최근이라 별로 동질감은 들지 않았지만.

 "해가 져요..!"

 한참 얘기를 하던 도중-주원이 취조하듯 마구 질문을 던지면 재희가 주춤거리다 대답해주는 일방적인 대화이긴 했다-제시가 말했다. 두 어른의 눈길이 창밖을 향했다. 산봉우리 테두리를 따라 발간 선이 생기며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노을빛의 잔재로 물드는 재희의 옆얼굴로 시선이 갔다. 눈이 시리지도 않은건가. 무감각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작게 탄식했다.

 "....아."

  그러더니 주원을 바라본다. 덩달아 제시도 주원을 바라봤다.

 "이걸 말해주는 게 늦었네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어요."

 뭐라고요? 그걸 지금 얘기하냐고 황당해져 되물으려던 주원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해가 져버렸어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제시가 눈을 도로록 굴리더니 재희의 옆으로 파고 들었다. 안심하라는듯 그녀가 제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재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하지 않는 탓에 되려 주원이 당황했다. 그녀가 바라보던 노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저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 제가 너무 오래있었죠?”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그녀의 목소리가 제지했다.

 “최근 오셨다고 하셨죠. 축제가 시작하기 일주일 전부터는 해가 지면 이동이 불가해요.”

 왜요? 주원이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으나 이번엔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다정한듯 다정하지 않은 눈빛. 결이 반듯한 말투. 상대방의 반응에 크게 대응하지 않는 태도. 어디서 봤다 싶은 이질감이 들었다. 어차피 재희도 자신을 무안하게 바라보았으므로 주원도 그렇게 했다. 얼마 지나자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질감의 정체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주원은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보던 무감각한 눈동자, 예의바른 얼굴이지만 돌아서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표정과 인삿말을 기억해냈다. 션은 아예 기억도 못할테지만 주원은 션 필렌의 첫인상이 좋지 못해서 뇌리에 남았다.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이 재수없다고 툴툴댈 때 주원도 어느정도는 인정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어째서 저런 얼굴과 표정을 자아내는 걸까. 나를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으면서. 그렇게 사람위에 군림하듯이.

 왜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션과 지금의 션은 달랐고, 그때의 션과 지금 눈앞의 재희도 막상 겹쳐보자니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주원은 알아차렸다. 션이 그토록 찾던, 얼마 전 마주했다던 사람이 바로 재희란 것을.

 

 

 처음 바깥으로 나온 어릴 적 일이었다.

 "션."

 "네."

 "네 이름이 그립지는 않니?"

 션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보다 미심쩍은 마음이 더 컸다. 이제 와 내게 그런 걸 묻는 저의가 뭐지. 열다섯인 션은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숨겨야 될 타당성도 없었다.

 그 사실이 제크를 부추겼던 모양이다. 그 첫 질문을 시작으로 심심하면 한번씩, 집을 나와 떠나살기 전까지 양아버지는 그렇게 물었다.

 "별로요."

 "그럼 네 아버지는?"

 그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의 형상은 형상으로 남았다. 그렇게 만들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션이 언젠가 되고자 했던 모습을 지우려 먹물을 푸는 중이었다. 그 물을 헤집은게 양아버지라는 사실은 우스웠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제크는 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감한 눈이었다. 저 눈만은 어느 때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다른 점은 있었다. 아버지의 그런 시선은 션을 향한 적이 없었다. 옆이나 뒤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알고 있는 눈이었다.

 무슨 대답을 해도 제크는 실망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어떤 대답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양아버지의 생각범위 안일 터였다.

 "모르겠네요, 전.."

 "네 아버지를 세간에선 욕하고 깎아내지만 난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

 "무섭고 싫은 상황에서 피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야. 행동기제에도 실려 있는 학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아주 타당한 것이지."

 자리에서 일어선 제크를 션은 흘깃 쳐다봤다.

 "도망치는 것까지는 별게 아니야. 누구나 그러니까. 하지만 도피해서 자신만의 요새를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일이야."

 관자놀이가 쿵쿵 뛰었다. 션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모르겠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션의 대답은 여전히 양아버지의 가시거리 안에 존재했다.

 "션, 네 아버지는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일을 했어. 그것만은 기억해두렴."

 그 말에 따른 감정만은 겨우 삭혔다. 숨길 수 있었다.

 션. 션. 션 필렌.

 전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양아버지는 자신을 부른 적이 없었다. 모순된 감정. 제크의 사랑은 분명히 섞일 수 없는 어떤 경계선을 가지고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감정과 감상, 의견은 어느 때든 바꿀 수 있었지만 그 명명한 사실만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션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션은 민수의 팔을 놓았다. 민수의 팔이 힘없이 아래를 향했다. 그새 주름진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자 그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션이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던 게 있어."

 아이들의 시선이 션을 향했다. 그 반응이 정직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어. 조금 이상한 점은 별거 아니다 넘기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다들 모른다고 생각한거야. 나조차도.

 하지만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잖아. 모르고 싶었을 뿐. 믿고 싶지 않았을 뿐.

 더이상 무엇이든 묻지 않을게. 하지만 너희들이 납득하는 범위를 넘어선 명령은 다시 생각해봐야해. 대의와 명분은 중요하지 않아. 정말 필요하고, 나아가 너희들 자신을 위한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누구든 제대로 충분히 이해가 가게끔 설명해주는게 맞아."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었던 게 아니었다. 그러고 싶었을 뿐. 가끔 아버지 방 너머로 보이던 움직이던 그림들. 어떤 새소리나 악기소리와도 닮지 않았던 인공적인 소리들. 조금 이상했지만 깊이 알려하지 않았던 것들.

 만들어놓은 요새에서 아버지는 때로 밖을 그리워했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션은 의아하면서도 화가 났다. 대체 왜.

 의심이 확신으로 또렷해져 갈수록 그는 낙담했다. 소리 없는 메아리는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미친듯이 소리치고 싶을 때 그만큼 더 해서 참아냈다. 다들 미쳐가는 와중에 가만히 견뎌냈다. 제크가 자신을 양아들로 데려갔을 때 그는 한고비를 넘겼단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영악했다. 태생부터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가 허황된 요새를 만들었다면 션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의 내부에 요새를 만들었다. 철저히 숨겨져있고 아버지처럼 과오를 남기지 않을.

 저처럼 영악하기엔 순진무구한 아이들이었다. 민수처럼 겁에 질려하는 아이라면 한결 나았다. 지금 죽으라는 거냐며 다그치던 려상같은 아이야 말로 위험했다. 그의 머릿속엔 당연히 명령을 어겼으니 언젠간 죽어야한다는 명제가 모순 없이 박혀있었다.

 그건 때묻지 않은 복종이었다. 순백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모르겠니? 마무리 짓고 싶은 말은 목 안쪽으로 삼켰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 단정 짓고 되묻는 건 양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열다섯의 션은, 제크가 많은걸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션은 눈앞의 민수와 려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했다고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다시 호수로 갔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발갛게 물드는 노을이 마을을 이불처럼 덮어갔다. 해를 피할 수 없음에도 션은 조금 물러섰다. 그리곤 자신의 행동이 우스워 헛웃음 쳤다. 유난히 맑은 하늘은 저녁노을의 색도 제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게 꼭 일렁이는 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사실에 적잖은 패배감이 들었다.

 미미한 화재공포증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션은 자신의 상태를 꽤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웬만하면 불을 피했고, 장작불이나 모닥불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제대로 된 형체없이, 뜨겁게 너울거리는 불의 형상을 떠올리면 문득 숨이 막혔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저택은 지금쯤 흔적도 남아있지 않겠지. 어릴 적 그녀와 책을 펴고 놀던 정원도, 종이냄새가 가득하던 아버지의 서재도, 어른들 눈을 피해 한참이나 글을 가르치던 책상의 온기와 종이의 질감도, 그 저택의 모든 것이 검부스러기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지금도 설핏 와닿지 않았다.

 해가 지는 호수엔 사람이 거의, 아니 아무도 없었다. 주원이라면 이곳으로 돌아올거라 생각했다. 수면에 비치는 노을빛을 견디기 힘들어 션은 발걸음을 돌렸다. 호수가 아니라면 집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지만 집에도 주원은 없었다. 실내로 들어올즈음엔 완전히 해가 졌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집 안의 냉기에 션은 잠시 주춤했다. 주원이 말없이 늦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션과 주원은 사람을 쫓으며 갈라섰다. 위험요소는 아이들 말고도 여럿 있었다. 익숙함에 잊을 뻔 했지만 이 예고리 자체가 커다란 위험요소가 아니었던가.

 주원은 숙련된 요원이었다. 그가 간 방향은 마을의 중심부였고 시내였다. 오히려 션이 달려간 산길쪽이 위험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괜찮다고 다독였다. 집안으로 들어서려던 션은 가만히 서있었다. 집이 너무 어두웠다. 바깥도 어두웠다. 문득 바깥의 고요가 이상하리만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몸을 돌리고 문을 연 건 마음을 먹었다기보단 감각에 의존한 것이었다. 불안함의 기저를 몰랐지만 적어도 이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끼익. 문인지 발밑인지 모를 밑바닥에서 긁는 소리가 났다.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눈 앞을 막아서는 굵은 나무 막대기가 있었다. 션은 순발적으로 몸을 뒤로 물렀다. 놀랐지만 그보다는 나직한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다.

 "통행금지입니다."

 표정없는 남성이 기계적으로 말했다. 그 너머로 모든 집 사이마다 굳건히 버티고 서있는 각목처럼 생긴 방해물이 보였다.

 빌어먹을 나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집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은 남녀불문하고 여럿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얇게 얼굴을 덮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션은 2층 방 창문으로 바짝 붙어서 밖을 쳐다봤다. 집 앞에 둘, 옆옆집과 맞은 편 두 집은 두세대씩 맡는듯 한 명이었다. 아무래도 션이 나가려는 시도를 해서 둘로 늘어난 모양이었다. 남성은 친절한 설명 없이 통행금지라는 말만 두어번 더 반복한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건 당연한 이치고 션이 제대로 알고 있어야한다는 뜻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답답한 풍경인데 아무도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길에 서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밤하늘 가면만큼이나 기척이 없어 마을 전체가 고요에 휩싸인 듯 했다. 열한시. 션이 집으로 들어온지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있던 규칙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웠고 아무런 통보도 없었다. 주원이 실내에 있다면 그 또한 나오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션은 나가기로 결심했다. 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제시를 쫒아갔다. 션은 제시의 주소를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주소를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은 알았다.

 결국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일 뿐일지 몰랐다. 재희에게서 상황을 듣고 싶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션은 항상 혼자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릴 적에는 항상, 항상 히가 있었다. 두 사람은 평화로운 나날 속에 여러 가지 모험과 극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보고는 했다. 그녀와 재회한 후 션은 자꾸만 그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상상하던 모험의 세계와는 달랐지만 해결해야 될 것은 늘어만 갔다.

 2층 침대 위로 은은한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바깥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온전히 빛이 없는 세상은 이미 지났다고 션은 믿고 싶었다. 달빛은 맞은편 창문으로 넘어갔다. 션의 시선이 빛의 경로를 따라 창문 넘어 경사진 골목 끝, 막다른 곳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벽돌은 빛을 반사시키지 못했다. 반대로, 거울은 빛을 반사시켰다. 단순한 이치를 깨달은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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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5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1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1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8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0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1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4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1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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