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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7)
작성일 : 22-01-31 10:04     조회 : 179     추천 : 0     분량 : 1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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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정확히 말하면 려상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재희네 집으로 가보니 두 아이가 있었다.

 "...."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란 낯설기 짝이 없었다. 마을 어른들 모두가 입을 모아 려상은 대단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어른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고작 아홉 인생이었지만 큰 난관이 있을 거라 생각치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남자아이는 려상보다 키도 덩치도 조금 더 컸다. 여자아이는 눈밖에 안보였다. 끼워놓았다고 해도 될법한 밝은 갈색 눈동자가 려상을 주시했다. 그는 순간 몸을 굳혔다. 그건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구세주처럼 재희가 나타났다. 이 상황을 만든 게 재희였지만 려상은 순간 그 사실을 잊고서 그녀를 절박하게 바라보았다.

 재희가 여자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려상에게 다가왔다. 려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곁눈질로 보니 남자아이는 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눈이 왕방울만한 여자아이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게 쥔 손에 땀이 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공기도 려상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아이가 대단히 용감무쌍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란 건 금세 알았다. 려상 앞에서 여자아이는 숨을 들이키고, 빤히 보는 려상을 향해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안녕?"

 "아."

 그것이 제시, 민수와의 첫만남이었다.

 

 친구에 '또래'라는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려상은 제시, 민수를 통해 알았다. 제시와 민수도 마찬가지였다. 동년배인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 큰 어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엮이는 모양이었으나 아이들은 철저히 그 정의에 맞게 움직였다. 이유를 물어보는 재희에게 려상이 대답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친구'는 아이와 어른이 맺는 관계였다.

 초반의 어색함도 잠시, 그들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같은 나이대가 이렇게 친해지기 쉬운줄 려상은 처음 알았다. 모든게 새롭고, 무엇이든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처음에는 재희네 집을 반 아지트 삼아 놀기 바빴지만 이내 그녀에게 민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민수가 호수를 제안해서 세 사람은 호수에서 만나서 노는게 일과가 되었다.

 호수는 한적한 편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있었다. 세 명의 아이들이 뭉쳐 노는 걸 뭐라고 한다고 정해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느낌상 보여선 안될 것 같았다. 제시와 민수도 그 말엔 동의했다. 다행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기척을 숨기는데 능했다. 몸집이 커지기 전에 그런 기술을 습득하는게 당연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재희는 아이들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려상은 어느 순간부터 재희보다 키가 작은 자신이 한없이 안타깝고 화가 났다. 재희는 다정했지만 그건 아이를 대하는 어른 특유의 얼굴이었다. 재희는 려상에게 또래친구를 만들어줌으로써, 그 차이를 제대로 알게 도와준 셈이었다.

 려상은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어딘가 조급했다. 낯선 손님을 바라보던 재희의 얼굴이, 눈빛이 설명하기 어렵게 마음을 술렁였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가 찾아왔다.

 려상은 책장 앞에 떡하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션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제집인양 자세가 자연스럽기 그지 없는데다, 손끝 발끝에 늘어짐이 없다고 할까..어쩐지 귀품이 흘렀다. 하지만 그보다는..

 "..여기서 뭐하시는거예요?"

 션의 자태가 어떠하던간에 이곳은 려상과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재희누나가 허락한. 이곳은 누구나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설마 재희누나가 이 남자를.. 그렇다면 더더욱 충격이었다.

 "내가 데리고 왔어."

 제시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선 말했다. 뭐라고?

 "우리 친구야. 그래서 이곳에 와도 된다고 생각했어."

 "재희누나가 허락했단 말이야?!"

 뒤에서 뭔가가 바닥에 철푸덕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장을 봐온 재희가 비닐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린 상태였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길게 말 안하겠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왜지? 내가 아니어도 그렇게 말할건가?"

 문 너머로 귀를 찰싹 붙이자 웅웅거리긴 해도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들렸다. 나란히 옆에선 민수가 눈치를 줘도, 제시가 직접 려상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겨도 속수무책이었다. 들어야 된다. 둘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공기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재희는 션을 내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려상도 인정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신겁니까."

 "..재희. 말투가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네가 모시는 도련님이 아니야."

 "...."

 도련님?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오자 려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본 두 아이의 궁금증을 자극했는지, 제시와 민수도 조심스레 문에 귀를 붙였다.

 "그게 아니라 저는..!"

 "말 끊어서 미안한데,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노골적으로 피하는게 네 대답이야? 내가 아는 히는 그렇지 않았어."

 "..저도 이제는 히가 아닙니다."

 "..."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희 방에는 딱 한 번 들어가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자유롭게 사용해도 되지만 재희 방만은 달랐다.

 그 안의 낡은 나무의자들은 앉고 일어설 때마다 끼익끼익 거리곤 했다.

 "내가 착각한게 아니네. 여전히 너야."

 "고집스러운건 여전하시네요."

 "너야말로."

 션의 말끝이 묘하게 들떠있었다. 려상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션이 느릿느릿 말을 덧붙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문이 활짝 열리고, 귀끝이 허전해졌다. 기우뚱 넘어진 려상이 고개를 올려다보니 션이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증은 많이 풀리셨나?"

 얼굴로 열이 올라 귀가 홧홧해졌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진 느낌이었다.

 

 

 마을엔 일 년에 한 번, 겨울에 큰 축제가 열렸다.

 보고 이후 들어온 상부명령은 없었다. 기존대로 수행. 묵령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이론은 이해했으나 기분은 달랐다. 잠잠한 하늘만 올려다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축제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고리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듯 주위가 활기로 가득 찼다. 많은 사람이 통일성 있게 무언가를 이뤄가는, 조직이라는 내부의 긴장감이 사라진 풍경은 션은 느껴본 적 없던 것이었다. '예호제'라 불리는 축제는 한 달 내내 진행되는 대규모 축제였다. 특정 명절을 지내지 않는 마을 문화로 보면 나름 검소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감사제라고도 불리는 예호제는 한해를 감사히 마무리하고 다음해를 맞이하는 의미라고 했다.

 축제가 목전에 다가오자 선유는 서점을 잠시 닫기로 결정했다. 그건 주원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예정에 없던 휴가를 받았다.

 

 그 날 이후로 션의 주요 일과는 재희네 집 1층 아이들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아이들은 약속한 듯이 하루가 멀다하고 그곳으로 모였다. 각자 사정이 있을 때 한 명씩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날은 없었다. 스마트폰같은 통신수단이 없었기에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음날이면 슬그머니 얼굴을 비추었고, 다들 그런가보다 하는 분위기라 션도 넘어갔다.

 다른 모든건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이해가지 않는 사실도 있다. 그건 호수로 가는 시간이었다.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으레 규칙이 생기듯, 아이들이 재희네 집에 오는 시간이 각자 불규칙적이어도 모여있다 호수로 가는 건 다른 얘기였다.

 어느 날은 아침 일찍, 어느 날은 오후 늦게, 어느 날은 나갔다가 20분도 안돼서 돌아오기도, 어느 날은 두 시간넘게 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규칙적인 흐름이 생길만 하면 패턴은 또 바뀌었다. 그 또한 규칙 따윈 없었으므로 사실상 패턴은 아니었다.

 '계산된 불규칙'

 민수가 놓고 간 책은 낡고 헤져있었다. 심플하게 줄이 그어진 단어. 가만히 바라보다 책을 덮었다.

 삐져나왔던 모양새 그대로 맞춰놓고 나니 민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

 "혹시..보, 봤어요?"

 "뭐를?"

 "아.."

 미간을 좁히며, 난감해지는 얼굴. 저토록 지리멸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어려운 저 아이가.. 다른 뭔가를 숨긴다고?

 "아니예요. 제가 가방을 두고 가서.."

 "아, 이거구나. 안은 안 봤어 걱정 마."

 션이 빙긋 웃으며 가방을 가리켰다. 민수가 호다닥 달려와 가방을 낚아챘다. 약간 나와있던 교재를 보는 시선이 안도감으로 변하는걸, 션은 똑똑히 보았다.

 그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보통이라면 뭔가를 봤을 거라 생각해 놀라고 걱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수는 자신이 놓고 간 그대로 책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걸 깨닫고 안도한 것이다. 그렇게 세심한 차이까지 알아챈다는 건..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때 윗층에서 재희가 내려오다 눈이 딱 마주쳤다.

 "...."

 자주 보이지 않는터라 션은 항상 재희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런데도 막상 마주치면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시선에 얽혀들고, 잠시 숨쉬는 걸 잊어버린다. 그리고..

 "아직 안가셨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재희는 계단에서 다 내려오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딱딱한 말투. 일부러 휙 몸을 돌려 올라간다. 재희 말을 무시한 채 뒷정리를 하려는 찰나, 다시 재희가 후다닥 내려온다.

 "정리하지 마시구요."

 "싫어."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하고 있으니 옆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나란히 뒷정리를 하는 짧은 시간. 아무런 대화도 시선도 오가지 않지만 션은 이 시간이 오기를 항상 기다린다.

 

 

 "안녕?!"

 활기찬 목소리와 달리 인사를 받은 쪽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션의 그늘에 숨어있던 주원이 툭 튀어나온 탓도 있을테지만 아이들에 대한 접근방식부터 틀린 것 같았다.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션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껏 경계태새를 갖춘 아이들은 숨도 쉬지 않은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어랏.. 그 반응에 멋쩍어진 주원이 인사하던 손을 뒷목으로 향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얘네들 말 못하는거 아니지?"

 그러고선 션에게 작게 귓속말로 물었다. 그 와중에도 눈이 아이들을 향해 있었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계하기는 매한가지네. 중간에 선 션이 입을 열었다.

 "내 동ㄹ..친구야."

 "친구요?"

 먼저 반응한건 민수였다.

 "그래."

 "언제부터요?"

 상기된 얼굴로 그가 다그쳤다. 션이 주원을 처음 만난건 이십대 초입이었다. 정확한 나이가 기억나지 않아 가늠해보는 사이 주원이 냉큼 대답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와!" 제시가 소리쳤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주원을 보고 션이 혀를 내둘렀다. 어쩜 눈도 깜빡안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주원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거봐. 내가 뭐랬어."

 "정말 네 말이 맞았네." 제시가 신이나서 맞장구쳤다.

 "우리같은 어른들도 있었어. 우리도 그런 어른이 되는 거야."

 목소리가 커진 민수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바람이 민수의 앞머리를 흩날렸다. 제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려상은 어쩐지 조금 우울한 낯으로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하는 말에는 가끔 미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너희들이 모여서 노는건 당연한거야. 차마 그런 어른다운 말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웃는 주원의 미간에도 살짝 주름이 졌다.

 "혹시.."

 션이 입을 여는 찰나, 주원이 그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션은 말을 멈추고 주원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는거야. 그러니까.."

 다시 장난끼 섞인 표정으로 돌아간 주원의 얼굴에서 싸한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호수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줄래?“

 아이 셋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주춤, 려상이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게 신호탄이 되듯 거리를 벌린 아이들이 세갈래로 뛰기 시작했다.

 

 

 호수의 주인을 세 번 이상 물어보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서도 행동해서도 안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당연하게 들어온 이야기였다. 밥먹기 전엔 손을 씻어야한다, 자기 전엔 양치를 해야 한다. 집에 들어오면 부모님께 인사를 한다. 그런 기본 행동 범위에 들어가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

 하지만 제시는 가끔 궁금했다. 그 말은 왜 당연한 걸까. 어차피 제시는 호수의 주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계급이며 마을을 지켜주는 존재였다. 축제가 열릴 때면 볼 수 있었지만 그건 엄연히 말해 본다고 할 수 없었다. 열다섯이 되기 전에는 말만 들었고, 그 후에 알게 되는 것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가끔 호수의 주인이 되길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제시는 일찌감치 허황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어리다.'

 호수의 주인을 모른다는건 그런 의미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고가 멈췄다. 찰나의 고요 후에 려상이 발을 끄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여러 번 해본 일은 바로 이루어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린 것도 본능이었다. 친구였지만, 제시는 그들과 일상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모르는 척을 했고 자주 마주칠 일도 없었다.

 미친듯이 달리면서 제시는 생각했다. 호수의 주인을 물어본건 션이 두 번, 주원이 한번이었다. 그렇게 도합 세 번. 그래도 도망치는 게 맞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달라고 있는 중이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본능적인 공포로 다리를 더욱 넓게 벌리며 뛰었다. 긴 치마가 거치적거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툭툭 떨어지는 소리는 제시의 것보다 훨씬 묵직했다.

 션이 아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차라리 션이 쫒아오는 거라면 나았을 텐데. 언니 앞에서 친구라고 말해준 이는 션이 처음이었다. 려상과 민수는 물론이고, 재희조차도 레시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도 말은 차고 넘쳐서 제시는 그 덤덤한 말투와 무표정인데도 친근한 눈동자를 자꾸만 떠올렸다. 그러다보니 션만 보면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친언니가 아니예요. 레시는 내 친언니가 아니고 내 가족이 아니예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폐까지 차오른 숨이 가프고 빠르게 공기중으로 퍼져나갔다. 제시는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가 목전에 와 있었다. 빠르게 달려도 곧 잡힌다. 차가운 땀이 이마를 따라 흘러내렸다. 곧 호수를 둘러싼 수풀을 벗어난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그래도 낫지 않을까.

 미친듯이 달리는 고통은 쫒아오는 누군가가 있다는데 기인했다. 아직 어리다. 하지만 제시는 그보다 어릴 적 기억을 잊고자 노력했었다. 달리기는 그 노력의 순간을 무시하고 떠오르게 만든다.

 머리채를 잡아끄는 커다란 손아귀를 기억한다. 제시의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그 손안에 한움큼 떨어졌다. 두피가 뽑힐 것처럼 아파. 하지만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듯 무거웠다. 파란 안광이 머리를 짓눌렀다. 매번. 매번 그랬다.

 뒤에서 쫒아오는 건 주정뱅이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도망쳤을 뿐이니 머리채를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악!"

 뒤에서 팔에 닿는 촉감에 제시는 자지러졌다. 한계까지 다다른 몸이 퍽, 하고 꺾였다. 어엇. 그런 소리가 들렸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몸이 안전하게 착지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다시 하늘이 되는 동안 제시는 자신이 구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시의 팔다리 하나도 바깥으로 내놓지 않겠다는 듯 꼭 붙잡은 남자의 심장 너머로 뼈가 퉁퉁 부딪쳤다. 타닥 타닥. 나뭇가지가 불에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날카롭게 긁혔다.

 이윽고 몸이 멈추고 주위가 문득 고요로 가득찼다. 남자는 온통 붉히고 까진 얼굴로 제시의 얼굴이 다치지 않았는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엔 나뭇잎과 흙이 엉켜 있는데다 손끝에서는 옅은 피냄새가 났다. 멍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남자에게 뻗으려 했다. 그때였다.

 "그만."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동시에 손이 쑥 들어왔다. 뭔가를 힘있게 쥐고 있었는데, 길쭉한 펜을 마치 흉기처럼 뒤집어 든 모양새였다. 그 끝은 남자의 목 부근을 향해 있었다. 펜촉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붙이였다.

 제시가 천천히 고개를 위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남자도 눈동자만 손끝을 따라간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제시는 더 이상 눈앞의 남자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굳은 표정의 재희가 두 사람, 정확히 말하면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재빠르게 도망가고 있었다. 발끝만 잔상에 남도록 요리조리 피하는 발목을 바라보며 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니었다. 션은 드물게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신중한 것 같으면서도 한번씩 주원은 엉뚱하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곤 했다. 아이들 앞이라고 해도 작전 중이었다. 질문이 불러일으킨 파동은 예상보다 컸고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주원이 우측으로 뛰어가는 순간 누구를 쫒을지 생각하기도 전에 좌측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상황에,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몸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훈련을 받은 인간이라는 현실감이 든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발끝만 잔상에 남도록 요리조리 피하는 발목뿐이었다. 아이의 몸짓이 작고 움직이기 편하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무척 빨랐다.

 우거진 숲길을 달리면서도 나무를 헤치고 나아가야 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는 몸놀림. 일부러 이런 길을 고른건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질감을 지우기 어려웠다.

 세 아이는 본능적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도 딱히 무슨 생각으로 판단까지 하기 전에 움직였다는 사실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호수의 주인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 궁금증과 함께 마을에서 자란 겨우 열살 넘짓의 아이들이 저렇게 달릴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앞서 가는 민수는 션을 교란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부러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시에 방향을 꺾었으며 몸을 낮췄다가 튀어오르는 둥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행동도 보였다. 려상이나 제시에 비해 조금은 둔하지 않을까 싶던 편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민수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은 션이 조직의 인간이란 것이었다. 제법 똑똑했지만 아이의 몸짓에는 한계가 있었다.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다니. 그의 행동반경을 파악한 션은 더 이상 뒤를 쫒지 않았다. 옆으로 빠지면서 기척을 지우자 예상대로 허전해진 뒤를 바라본 민수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잠시 주춤했지만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등을 보인 민수 앞으로 이동한 션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얘기 좀 할까?"

 놀란듯한 민수가 션을 바라보았다. 션은 어쩐지 웃고 싶어졌다. 뒤를 쳐다보진 않았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채 바로 뒤에서 저를 치려던 려상을 막고, 그 손목까지 붙들어 움직임을 막았다. 방금전 까지가 어설픈 연기였던 민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려상도 입만 뻐끔거렸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라서, 션은 조금 미안해졌다.

 

 도망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어서 그를 붙잡아둘 수밖에 없었다. 민수의 팔을 붙든 션은 마치 유괴범이라도 된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수는 션을 무슨 귀신 보듯 보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기에 제지하자 이를 딱딱 붙이치며 눈을 굴렸다. 이미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무서워?"

 "..."

 그다지 서글한 인상일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었지만 한참이나 내려다봐야하는 아이가 저를 무서워하니 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잠깐.

 션은 생각에 제지를 걸었다. 그리고 질문을 다시 했다.

 "아니지. '내'가 무서운 게 아니잖아. 너희는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거지?

 거의 부서질 듯 딱딱 소리가 나던 민수가 우뚝 멈췄다. 민수가 그러든 말든 꾸준히 션을 노려보던 려상도 일순 얼굴이 풀어졌다.

 도망갔고, 쫒아오긴했지만 션이 민수와 려상을 물리적으로 헤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건 분명했다. 아이들도 그걸 알고있을 터. 기묘할정도로 과한 반응이었다.

 "비밀.."

 "어?"

 "비밀로 해주세요.!"

 "야!"

 민수가 션의 팔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션의 소매가 늘어질정도로 억센 힘이었다. 려상이 소리쳤고 션은 정신이 없었다.

 비밀? 어떤 걸? 묻는 것에 대답해주지도 않았으면서 비밀이라니.

 "잠깐..,"

 패닉에 빠진 민수를 진정시키려던 찰나였다.

 "정신차려! 애원하지마! 누가 너보고 지금 죽으래?"

 문장 하나하나가 귀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내듯 내리꽂혔다. 션이 바라보자 려상은 그제서야 낭패감어린 얼굴을 했다.

 "그게 지금 무슨..."

 나무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문득 바람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민수는 거의 울고 있다가 입을 다물었다. 흡흡 하는 거친 딸꾹질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

 "......"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몰아부친다는게 이런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주원이, 션이 몰아부쳤기 떄문에 아이들은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션 자신 또한 몰아부쳐진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미미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려상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얘진 손을 바라보며 더 이상 이 아이들을 자극할 수 없음을 션은 인정해야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포기하고 비굴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는지 전혀 모르는 채였지만.

 민수와 려상의 눈빛은 션을 적으로 보고 있었다. '죽음'을 뒤로 물리던 려상의 말. 겁먹은 민수를 반쯤 달래줄 의도라면 보통은 '아니'라고 표현하는게 맞다. 정해져 있는 사항에 대해 바꿀 수 없다는 듯한 말투.

 이 아이들이 행동하는건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명령이야?"

 절대적 복종인 것처럼 보인다.

 려상과 민수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깊고 공허한 네 개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션은 자신이 진실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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