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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6)
작성일 : 22-01-31 10:02     조회 : 178     추천 : 0     분량 : 10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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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새볔 동이 트기 직전 가게를 나왔다. 꽤 많은 술을 비워서 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하지만 정신은 어딘가 날카롭게 벼려진 느낌이었다. 달려가면 닿을 거리에 히가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발을 멈추고 못박힌 채 있었던 건지 션은 갑자기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검푸스름한 하늘 아래 지상은 고요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들썩이던 분위기는 언제 있었냐는듯 사라져 있었다. 다 알면서도 꿈을 꾼 기분이었다. 느낌만 그럴 뿐 이미 취해있을지도 몰랐다.

 션보다 주량이 센 주원은 조금 졸려보이기만 했다. 말술이라며 주원의 인정을 받았지만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깔끔할 뿐이지 션의 숙취는 지독했다. 아마 내일은 하루 종일 침대와 바닥을 뒹굴겠지. 자신이 술을 멀리하는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구불구불한 구석 골목을 들어온 반대로 다시 뒤집고 나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인영이 달려들었다. 막을 새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공격자세를 취했지만 늦었다. 주원이 어엇, 소리를 내면서도 제게 달려들던 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결이 가는 생머리가 뒤늦게 찰랑이며 가라앉았다.

 "주원!"

 주원은 여자의 이마를 죽 밀어내며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여자는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

 "레시."

 "아, 이번엔 성공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호락호락 할리 없지."

 가볍게 한걸음 물리며 거리를 벌린 주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행동은 그 답지 않았다. 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왜 자꾸 피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편할 텐데. 너도 좋고 나도 좋을텐데."

 "매력없다 레시."

 "그런 소리를 한 것도 네가 처음이야."

 허허허, 주원이 웃었다. 한두 번 대응한 게 아닌듯 했다. 그는 어느새 잠이 달아난 얼굴이었다.

 "다음 번엔 꼭.. 어? 누구..?"

 여자가 살짝 찡그린 얼굴을 풀더니 놀라서 물었다. 처음부터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대신 그냥 고갯짓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여긴 내 친구 션. 그리고 여긴 레시."

 에헤 친구가 있었구나.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린 레시와 션의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전 만남이었지만 워낙 강렬했고, 그 이후로도 주원에게만 못 박힌 시선으로 있던 터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션이 있는 줄도 몰랐다. 션도 남에게 크게 관심 갖는 타입은 아니었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높은 톤의 목소리와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가 새침한 인상을 주고 었었다. 하지만 션의 시선은 의외로 약간 쳐진 눈썹에 머물렀다. 그건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썩 내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션의 얼굴이 진지해지자 레시는 눈을 도로록 굴리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기시감이 들었다.

 "혹시.."

 술에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요?"

 그 순간 생각에 잠기려던 레시의 얼굴이 딱 풀려버렸다. 그녀가 입을 떡 하고 벌리자, 션은 그제서야 제가 한 말을 자각했다. Take.B의 요원으로 그런 말은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와하하하. 와 이런 구린 작업 멘트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

 주원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끅끅대고 있었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순식간에 취기가 오르는지 머리도 어질어질 했다. 무엇보다 창피했다. 션은 입을 열려다 등을 퍽퍽 두드리는 주원의 손에 답지 않게 휘청거렸다.

 "너무 무안하게 하지 마. 우리 피곤하니까 이만 간다."

 떠나는 그를 잡으려던 레시의 손길이 주춤했다. 어느새 웃음기가 가신 주원의 눈이 냉정한 빛을 띄었다. 그는 의외로 경계선이 뚜렷했다.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잊어버려서, 이런 상황에선 놀라고 만다.

 우뚝 선 레시가 작은 콩처럼 보일 때쯤 션이 물었다.

 "누구야?"

 "왜, 관심 있어?"

 다시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그가 얄밉게 물었다. 알면서 묻는 거지 저거? 금세 차오른 장난끼 넘치는 눈은 아까와 전혀 달랐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션이 대답했다.

 "아니."

 "그렇군."

 "너한테 빠져있는 거 같던데."

 "글쎄다아."

 말끝을 길게 빼는 주원한테서 진한 술냄새가 났다. 말쩡해보여도 두 사람은 몇 시간 내내 제대로 된 안주 없이 주거니 받거니 술만 마신 셈이었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진심인지 구별되지도 구별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일하는 바에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야. 네가 보기에도 치근대는 것 같지? 대놓고 저러니까 장난 같더라.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정말 마음에 든 걸 수도 있잖아. 혹시 첫날 멋지다고 했다던 사람이 저 사람?"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시는.. 음... 예쁘고 귀엽지."

 "아하?"

 "어느 마을에 있을 법한 예쁘고 밝은데다 성격까지 명랑한 아가씨."

 "..."

 "뭔가 만들어진 것 같지 않아?"

 주원이 손가락을 퉁겼다. 총모양으로 바뀐 검지 손가락이 션을 향했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럴싸하네."

 "그거야 그거. 역시 필렌씨는 말이 통하네요.."

 늘어지는 발음이 뭉개졌다. 그는 졸린 듯 크게 하품을 했다. 이제 거리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무리에서 벗어나 노란빛을 띄기 시작했다. 아침이라는 걸 이렇게 생생히 느껴본 적이 있었나?

 어렸을 적 션은 부지런했다. 하지만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적은 없었다. 무릇 도련님의 삶이란 그랬다. 이 땅은 이제 없어진 그의 고향을 닮았고, 이곳에서 맞이하는 새벽은 숱한 날들과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 날 션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였다. 원래라면 기억에 없을 법한 수준으로 작았다. 에녹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던 그때 그는 작은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처음 본 어떤 다정한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았고 보자마자 그것이 어머니라는 걸 알았다. 단 한번 보았더라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잊고 있었지?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이내 짜증이 났다.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린 션을 어머니가 안아 주었다. 눈빛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건 경이로운 일이었다. 눈물 맺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웃었다.

 '도련님.'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방금전보다 커진걸 알았다. 눈앞에 히가 있었다. 그는 션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히는 어딘가 이상했고 또 의외로 익숙했다.

 히는 자랑스럽게 책 한권을 건넸다. 어린이용 동화책이었다.

 그는 션에게서 글자를 익혔다. 기억이 났다. 무엇이든 똑부러지고 어른스럽던 히가 션을 선생님보듯 바라볼 때면 기분이 간질거렸다.

 '다 읽었어요. 근데 모르는게 있어서..'

 '뭔데?'

 '이건 뭐라고 읽어요?'

 책을 펼친 히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켰다. 션은 그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도련님?'

 '션(sean)'

 '아. 션이라고 읽는거구나.'

 잠시 글자를 바라보던 히가 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주위가 뜨거워졌다. 저택이 불타고 있었다. 어느새 이마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올곧이 션을 향했다. 그녀가 말했다.

 '전 재희예요.'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감각을 안다. 션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순간을 맞이했었다. 눈을 질끈 감을 수도, 뜰 수도 없었다. 얼마나 지난거지? 히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션은 눈을 번쩍 떴다. 몇 초가 지났다. 두 눈을 소처럼 끔뻑거리고 나서야 방금 전까지 꿈을 꾸었단 사실을 인지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몸을 일으켰지만 찌르는듯한 두통에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하아..."

 깊은 한숨 후 겨우 물 한잔을 마신 그는 다시 비적비적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온몸이 솜처럼 무겁고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간밤의 꿈은 뭐가 뭔지 모르게 뒤섞여 정신이 사나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웅크리고 누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었다.

 

 

 다음날 출근하니 서점에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아저씨!"

 서점 앞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제시가 반색하며 뛰어왔다.

 안그래도 오늘은 호수에 가볼 생각이었다. 며칠간 호수에 가지 않았다. 고된 숙취가 풀릴 즈음 아이들이 생각났다. 션과 세 아이의 만남은 암묵적 약속 같은 것이었다. 기다릴까 싶으면서도 과연 아이들이 기다렸을까 싶은 모순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상기된 얼굴로 제 앞에 서있는 제시를 보니 갑자기 미안해졌다. 기다리고 있었다는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놓고 서점엔 들어가지 못해 쭈그려 앉아있던 제시의 치마 끝자락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션은 몸을 굽혀 치마에 묻은 흙은 조심히 털어주며 말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어. 음.."

 제시가 쭈뼛거렸다. 이내 중얼거리듯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싫어하니까요."

 "누가?"

 "사람들이.."

 "왜?"

 정말 그렇게 물어볼거라고는 예상 못한 얼굴로 제시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느새 쭈그려 앉은 션은 제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션은 잠시 그 순한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 안해도 돼."

 션은 일어서면서 제시의 작은 머리통을 살짝 눌렸다. 그녀가 놀라는 기색이 손바닥 너머로 느껴졌다.

 근거없는 말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말했다. 누가 너를 싫어한다는 거야, 너의 착각이야. 그럴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는 다그침. 입에 발린 말은 죄다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고 단정 짓는 건 꽤 예민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분명한 계기가 있다. 타인이 배척하는 걸 느끼는 감각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제 호수 안와요?"

 "아니야. 연락 못해 미안해. 변명같지만 오늘부터 다시 가려고 해. 민수랑 려상은?"

 "아 오늘은, "

 제시가 말을 끝맺기 전에 서점 문이 벌컥 열렸다. 제시가 몸을 크게 떨었고 밖으로 나온 여자는 아이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너. 구석에 있으랬잖아."

 "그게.."

 "어? 션?"

 뒤늦게 션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위를 잘 돌아보지 않는건 아마 습관이었나 보다.

 "서점에서 일해요?"

 "네."

 레시는 의외라는 양 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션은 지난밤보다는 좀 더 형식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뭘 오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방금 알아챈 사실로 미묘한 기분이었다.

 레시와 제시.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를 빼고 두 사람은 그다지 닮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자매라고 인지했다. 레시를 처음 보고 기시감을 느낀건 제시 때문이었을까. 이내 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레시의 웃음기 담긴 얼굴엔 호의가 어려있었다. 주원을 좋아한다면 그와 친분이 있는 션에게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제시는 레시 옆에 조금 떨야져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지 이따금 눈만 굴려 레시와 션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자 제시는 레시의 눈치를 보면서도 아이답게 말간 웃음을 지었다. 레시와는 달랐다. 무엇이 다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애매한 어떤 것. 설명하자면 난감해지는 어떤 감정 앞에서 그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런데서 보니 반갑네. 그나저나 우리 제시랑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그냥 인사한 거야. 내가 서점 앞에 있으니까.."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거든?"

 레시는 제시를 사납게 쏘아 붙이고 션을 향했다.

 "둘이 원래 알던 사이예요?"

 어쩐지 날카로운 말투였다.

 "네. 친구예요."

 "..."

 레시는 그가 제시를 모르는 척 해주기를 바란 듯 싶었다. 하지만 션은 전혀 꿀릴 게 없었으므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도 않고 '친구'를 운운하는 션 앞에서 레시는 조소 섞인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낯설다. 하지만 그녀와 잘 어울렸다. '어울린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

 "네."

 "주원과는?"

 "친구죠."

 "저랑 말장난 하자는 건 아니죠?"

 "그렇게 보이십니까?"

 "야. 너 좋겠다? 이런 근사한 친구도 생겨서."

 레시는 화살을 돌려 제시에게 이죽거렸다.

 주원의 앞에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린 거였군. 제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참고있는 것처럼 눈가가 그렁그렁 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제시를 싫어했고, 션은 제시가 남에게 그만큼의 미움을 받을만한 아이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설령 더 오랜 세월을 지내고 가족이라고 할지언정 이건 아니었다.

 제시를 자신 쪽으로 끌어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덩어리진 말과 행동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아내며 내색하지 않았다.

 보통 션이 사람을 대할 때는 이런 사무적인 태도가 태반이었다. 술기운에 어느 정도 거리감을 좁혔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호의를 레시에게 보이는 것도, 그로 인해 꽤 선명한 적의를 내비치는 것도 상황상 좋지 못했다.

 누구도 레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아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가보겠다고 했다. 션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시가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 제시를 향해 션이 입모양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호수에서 보자.

 제시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고개를 다시 돌린 그녀는 좀 더 멀어진 제 언니를 찾아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그 뒷모습에 망설임이 없어 션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잔뜩 쉬어있던 히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 멀쩡한 얼굴로 자꾸만 잠기는 목소리가 의아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어딘가 걸걸한 말투로 말했다. 변성기인가봐요.

 히에게 변성기는 없었을 것이다. 여자인 걸 알았어도 몰랐어도 그때 즈음엔 갈림길에 서있었을 터였다. 진중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은, 새로운 책을 보며 얘기하면 한톤 높아지곤 하던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인지한 적 없음에도 션은 히에게서 변성기 이후 사라질 그 목소리를 아쉬워했다. 하지만 다시 원래의 목소리가 나올만하면 히는 다시 목이 쉰 소리를 달고 왔다. 이따금 그에게선 채 사라지지 못한 담배냄새가 났다. 당시에는 몰랐다. 지금은 생각한다. 그게 히의 선택이었을까.

 

 아이들을 이용해야겠다.

 션은 주원과 얘기를 나눈 뒤로 다시 재희의 집 앞으로 갔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다 열어보았지만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넋이 나가 며칠을 보내는동안, 자신이 맘먹기만 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멍청하긴. 션은 자책했다.

 처음엔 재희가 자신을 피하는 거라 생각했다. 괜한 오기가 생겨 몇 번 더 갔을 때, 대낮에도 불이 꺼진 집이 정말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이 마을을 떠난 건가?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속이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답답한데 출구가 없는 미로에 떨궈진 느낌이었다. 겨우 찾아냈는데. 이제 션이 찾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재희는 멀어질 터였다.

 그때 잡아뒀어야 했어. 잡아둬야...

 생각이 점점이 튀어가는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 있어요?"

 그녀의 소리가 아님에도, 션은 퍼뜩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급작스런 반응에 상대방도 놀란 듯 했다. 려상이었다. 한쪽 눈썹이 비죽이 올라간 그는 탐탁치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순간 긴장이 풀린 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나오자, 려상의 눈썹이 조금 더 솟았다.

 그 눈을 마주하고 션이 말했다.

 "재희 기다려."

 잘 아는 사이에 부르는듯한 말에 려상이 반응했다. 아이 앞에서 으스대는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션은 려상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의외로 호숫가를 떠나면 뭉쳐다니지 않는 듯 했다. 삼총사처럼 어디를 가든 항상 같이 다닐거라는 생각과 달리 제시도, 려상도 혼자였다. 그리고 그게 더 익숙해보였다.

 홀로 있으니 려상은 더욱 성숙해보였다. 진중한 눈동자는 여전히 션을 향하고 있었으나 입은 굳게 다물렸다. 미간을 살짝 모아 찡그리더니 션의 말을 되짚는다.

 "재희?"

 "응.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요?"

 그가 크게 되물었다.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션이 다시 한번 대답하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야."

 려상의 뒤에서 재희가 나타났다. 션은 천천히 내렸던 시선을 올렸다.

 목소리. 경황없어 많은 걸 보지 못한 첫만남과 달리 이번엔 재희의 목소리가 또렷이 박혔다. 중저음으로 자리잡았던 목소리는 예상과 달리 더 낮아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션이 좋아했던 그 어린 시절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재희는 지난번보다 침착한 얼굴로 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듯 보였지만 션을 따라붙는 시선이 신중했다. 아니라는 매정한 말과 달리 얼굴을 보니 기분히 한결 나아졌다.

 "안녕."

 "...."

 "재희."

 려상의 어깨에 얹은 재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려상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션은 시선을 맞받아치며 웃었다. 웃어? 재희의 얼굴이 마치 그렇게 묻는듯 했다. 하지만 션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고민하던 일들이 허무맹랑하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 있었다. 재희가 션을 어떤 감정으로 대하든 그의 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내일 다시 올게."

 션이 한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뒤로 물러나려는 몸짓을 취했으나 재희가 그대로 섰다. 아마 려상 때문인듯 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저를 따라오는 시선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션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립기도 했다. 재희는 저택에 고용된 하인으로써,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또래 친구로써, 항상 그렇게 션을 주시했었다. 그녀는 모를거라 생각하겠지만 습관처럼 굳어진 그 행동을 숨기는데는 재주가 없었다. 조직에서 훈련을 받으며 그런 시선에 더욱 민감해졌다. 시간이 무색하게 재희의 행동은 '히'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션은 미련없이 두 사람을 지나쳤다.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이용해야겠다.

 

 

 재희는 낯선손님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뭉개지는 것처럼 일렁였다. 분명 아는 사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는데. 려상은 제가 잘못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시야가 걷히자 재희는 어느새 려상을 보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예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는 참았다. 왠지 물어보면 재희가 멀어질 것만 같았다.

 

 이 년 전, 려상이 열살 때 재희가 예고리로 왔다. 그때만해도 마을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새로운 주민은 모두의 관심을 샀다. 재희는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보통 어른들은 려상 또래의 아이들만 보면 웃곤 했었기에 자신을 보는 순간 웃을 거라 생각했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녀의 얼굴에 아무런 감흥도 내비치지 않았을때, 려상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기분이 나빴다. 반면 어른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가 싫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당시의 려상은 아주 단순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먼저 다가온 건 재희였다.

 려상은 마을 어른들과 친했다. 무릇 모든 아이들이 그랬다. 아이들의 유일한 친구는 모두 어른이었다. 대신 또래 아이들은 몰랐다. 오다가다 지나치는 것 빼고 얼굴을 본 일도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려상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재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왜 친구들이랑 놀지 않는거야?"

 이상한 사람이라 이상한 질문은 하는가보다. 려상이 돌아보자 눈높이를 맞춘 재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놀라 뒤로 물러섰고 재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재희의 눈동자는 새까맸다. 려상보다도 까만 것 같았다. 그런데도 묘하게 푸른빛이 깃들어 있었다. 차분한 말투였다. 쭈그리고 앉아있어서 그런지 작게 보이는 체구였다. 분명 키도 크고 위압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려상은 혼란스러운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재희의 영어를 쓰는 태도가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려상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일본어 독일어 미얀마어 등 몇 가지를 더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 중 가장 편한 건 영어. 미국계 어른들과 친해서 그런 듯 싶었다. 려상의 부모님은 중국인이었지만 려상은 개의치 않았다. 열다섯이 되면 아이들은 자신의 언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자유롭게 익힐 뿐이었다.

 다만 주변의 시선은 달랐다. 려상이 영어를 쓰면 어른들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곤 했다. 금세 얼굴을 바꿨기 때문에 한참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중국어를 쓰면 낯선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모의 언어만 할 줄 아는 아이는 모자라다고 했다. 자신의 언어로 부모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도 환영받지 못했다. 인종에 상관없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게 아이들의 특징이었다. 아이란 무릇 그런 존재인 것을.

 재희는 영어를 쓰는 사람이었다. 구사할 줄 아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게 모국어인 사람이었다. 재희가 열다섯 살때 영어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른 어른들도 있었다. 그다지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말투, 행동, 목소리. 그 모든게 왜이리 특별하게 느껴졌을까. 어린 려상은 당시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친구들이랑 노는데요?"

 "누구?"

 려상은 발끈했다. 친구라면 열 명도 넘게 얘기할 수 있었다.

 "제임스 아저씨. 미주 아줌마, 콜리타 형, 왕수 할아버지랑.."

 "네 또래 친구 말이야."

 "또래면...같은 나이인 애들을 말하는 거예요?"

 "응."

 아주 당연하게 말하는 통에 말문이 막힌 건 려상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역시 이상한 사람이었어. 려상은 잠시나마 재희에게 동질감을 느낀 자신을 털어버리려 강하게 말했다.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어른에게는 아이라 하더라도 알려줄 의무가 있었다.

 "어떻게 같은 나이인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른이면서, 그런 것도 몰라요?"

 그는 재희가 반박하거나, 화를 내거나, 아니면 의외로 내가 깜빡했다며 사과를 할 줄 알았다. 그 세가지 중 어느 것이 나와도 려상은 당당했으므로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희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잠시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는 웃었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지만 눈도 휘었지만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재희는 려상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아들은 모양이라고 려상은 조금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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