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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5)
작성일 : 22-01-31 10:00     조회 : 168     추천 : 0     분량 : 1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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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 뒤로 며칠간 악몽이 이어졌다. 덕분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융털이 솟아난 듯 기민해지는 감각에 재희는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꿈속에서 그녀는 항상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옴짝달싹 못하지만 계속 되는 악몽은 현실과 다르다는 깨달음을 재차 일깨워주었다. 그 결과 두려움보다는 지치는 마음이 더 컸다. 항상 똑같은 풍경에 같은 상황. 그에 따른 같은 신체반응. 이제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불을 지르라 해도 무심히 수행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무뎌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간다 믿었는데 누군가 뒷목을 잡고 처음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았다.

 처음엔 도련님이 항상 나왔다. 어느 순간 그 형상은 흐릿해졌고 이젠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가 꿈에 출연했는데 얼굴이 안보였다.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났는데. 나를 죽이러 오라고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의 물꼬가 이어지고 있었다. 끊어내고자 관자놀이를 엄지로 세게 눌렀다. 간단한 오늘의 할일을 떠올리고 움직이기로 했다. 평소보다 늦은 기상이라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선 순간이었다.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만들어낸 소리는 아니었다. 예민해진 신경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카롭게 주시했다. 평소라면 몰랐을 터였다. 잠시 뒤 그것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란 걸 알았다. 침묵. 그리고 갑자기 문이 열리고 닫혔다. 1층에서 움직이는 무언가의 무게감이 갑자기 느껴지는 듯 했다.

 문이 열려있었나?

 아이들은 재희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세 아이는 쿵쾅거리며 집주인을 불렀다. 이번 방문객은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팔만 뻗어 협탁 위에 있던 만년필을 챙겨 쥐었다.

 레시가 드디어 재희의 정체를 알아챈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속이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그 확고한 신념만큼이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속는 건 진저리쳤다. 강박증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재희의 목적이나 속셈을 파악하는 이전에, 감정에 휩쓸려 용서할 수 없다고 쳐들어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니면 이미 상부에 보고를 했을지도. 아니면 제시가 레시에게..

 아니다. 아니야. 제시와 레시의 사이는 그다지 돈독하지 않다.

 찌르는듯 찾아왔던 두통의 여운 뒤에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팔딱팔딱 뛰었다. 어떤 걸 가정해도 지금 이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언제고 이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악몽이 계속 된다고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만년필을 쥔 손에 순식간에 땀이 배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무기가 뭘까?’

 열다섯 도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정원에서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 실물은 없었지만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손짓으로 그리며 신나했던 얼굴. 햇빛이 내리 쬐 그늘이 생기던 이목구비. 내가 이걸로 누군가를 죽인다면 도련님은 어떤 기분이 들까.

 불청객은 1층은 돌아다니다가 2층 계단 위로 발을 디뎠다. 재희는 작게 헛숨을 들이키고 2층 초입 구석에 몸을 숨겼다. 올라와서 돌아선 순간. 타이밍이 중요했다.

 키가 큰 남자가 2층에 들어선 순간, 몸을 돌리며 사각지대가 드러나기 직전에 재희는 반동을 이용해 남자의 목을 팔로 움켜쥐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재희의 발이 땅에 닫자 그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드러난 목덜미에 만년필을 찌르듯 눌렀다. 살갗 위로 피가 살짝 맺혔다. 남자는 숨도 내쉬지 않았다. 놀라 소리를 지르기보단 묘하게 침착한 태도에 재희의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칼날을 목깃으로 조금 더 파고들자 실 같던 빨간 피가 몽글몽글 솟았다.

 "책..!"

 남자가 소리쳤다. 시선을 돌리자 남자의 손에 들린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빌렸는데. 근데 놓고 가서..! 서점 직원인데..!"

 생명의 위험을 느낀 모양인지 남자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영어였고 딱딱한 편이지만 남자의 발음은 재희에게 퍽 익숙했다.

 힘을 풀지 않은 팔이 저렸다. 책을 든 남자의 손가락은 곧고 길었다. 자신의 팔 아래 있는 갈색 블론드의 머리칼.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남자가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힘이 빠졌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알아채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건 남자였다. 그는 목에 상처가 더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재희의 팔을 뿌리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돌아선 남자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재희는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에선 앳된 열다섯 모습이 남아있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었다.

 에녹 도련님. 탄식처럼 흘러나온 말은 말이 되면서 생각이 아닌 말이라고 깨달았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듯 남자가 재희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손목이 붙들리고 몸이 뒤로 밀렸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고 나서야 행동은 멈췄다.

 에녹의 발치에 부딪혀 데굴데굴 구르는 만년필의 칼이 햇빛아래 빛을 발했다. 검붉은 피는 그새 말라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피냄새가 났다.

 "히.“

 기억보다 훨씬 낮은 저음이 재희의 옛이름을 부른다. 나를 히라고 부르는, 저렇게 감정을 담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눈을 올리니 그 옛날 아름답다 칭하기도 감히 두려웠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기억하고 싶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과거가 밀려 들어온다. 재희는 두 눈을 감으며 깨달았다.

 그리워 미칠 뻔했다고. 기억난 이상 자신은 더더욱 약해질 거라고.

 

 

 흥분한 것과 벌어진 상처는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걸까?

 션은 제 목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식간에 목과 어깨부근이 뜨뜻해졌다.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열다섯 그가 놓치고 나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얼마나 많은 순간 생각했었다. 너무 길었다. 이제는 손이 잘리더라도 절대 놓지 않으리라.

 "히.. 히. 히.."

 할 말이 너무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션은 그저 강박적으로 히의 이름을 부르지 밖에 못했다. 흐느낌을 닮은 말이 한스러웠다. 꼴사납겠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까지는 간신히 참아냈다. Take.B에서 받던 훈련의 성과라고 생각하니 다행이었다.

 히는 션의 얼굴을 쳐다보며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굳은 얼굴에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게 똑똑히 보였다. 스물일곱의 그녀는 머리가 길었고, 키나 골격은 변함없었지만 마지막보다 훨씬 여리게 느껴졌다. 내가 큰 건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히의 손목에 션이 힘을 주었다. 피가 좀 더 새어나왔다. 히는 얼굴을 찡그렸고 션은 웃어주려 했지만 그러기 힘들었다.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선 안됐다.

 "..도련님!"

 손톱에 뭔가 크게 걸렸다. 손아귀가 허전해지고 나서야 히가 빠져나온걸 알았다. 안 돼. 션이 고개를 틀었을 때, 히가 션의 어깨와 뺨을 감싸쥐었다. 서늘한 감각에 놀라 션이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그녀가 소리쳤다.

 "피가 나잖아요! 정신 차리세요!"

 큰 소리를 내면서도 패닉에 빠진 션을 다독이듯 히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느릿하게 손을 거두고 션을 지나친 히가 구석 협탁으로 가서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그때까지도 방 한가운데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히가 션을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구급상자에서 약과 반창고를 꺼내는 그녀의 손목은 벌써 새파란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득 밀려오는 화가 있었지만 션은 그게 자신이 만들었다는 걸 알고 어이가 없어졌다.

 "따가워도 참으세요."

 히는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선 진중하게 션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그 얼굴이 자못 심각해서 따가운 것도 잊고 션은 히를 쳐다만 보았다. 어릴 때보다 좀 더 견고해진 이목구비가 생경했다. 머리가 길면 이런 느낌이구나. 벽에 밀쳤을 때 엉망이 된 머리칼이 비죽 솟아있었다. 션이 손을 들어 정리해주려 했지만 히가 시선만 돌려 쳐다보는 걸로 션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목에 불편한 반창고가 떨어지지 않게 붙고 나서야 치료는 끝이났다. 깊게 배이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병원을 가보라고 말한걸 끝으로 히는 침묵했다. 욱신거리는 목 부근의 통증이 느껴졌다. 침묵이 길어졌지만 션은 이 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멍하니 시선을 옮기다 아직 바닥에 떨어진 채 있는 만년필을 보고 말을 꺼냈다.

 "만년필 무기... 만들었었네."

 션은 피식 웃었지만 히는 웃지 않았다.

 "나도 만들었어."

 션이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따라오다 멈췄다.

 "책은 가져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션을 쳐다보지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이만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히."

 "전 이제 히가 아니예요, 에녹 도련님."

 "나도 '에녹 도련님'이 아니야."

 "...."

 긴장으로 공기가 팽팽해졌다. 문득 배인 상처에 따듯한 열기가 몰리고 통증이 심해졌다. 저도 모르게 션이 얼굴을 찌푸리자 히가 움찔하며 놀랐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 션은 그 사실만을 인지했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여기까진 대체 왜.."

 말을 하다 히는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션은 지금이 물러설 때라는 걸 알았다. 십년 만에 마주한 히의 얼굴을 조금 더 선명히 기억하려 애쓰며, 눈 감는 시간도 아까워 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의 시선이 그를 따라왔다.

 "너와 같아. 아마도."

 "...."

 "...다시 올게."

 "무슨,"

 "그리고 난 널 죽이러 찾아온 게 아니야."

 ‘나를 죽이러 오세요’

 행여나 그녀가 마지막 말을 기억할까봐 두려웠다. 처음엔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노조차도 히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마음에 이기지는 못했다. 만난다면 널 죽이러 온 게 아니라 내 이유때문에 왔다고 말하려 했다. 그게 가장 먼저였다. 히를 만나기 전, 그녀와의 재회를 시뮬레이션 하던 션은 매번 그 말을 처음에 두었다.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지만.

 "내가 살려고 온 거지."

 히가 뭐라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문을 열고 나왔지만 히는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

 

 

 "가자."

 주원이 호기롭게 외쳤다. 어딜 가자는 건지. 대뜸 나갈 준비를 다 한 그를 쳐다보며 션은 표정으로만 의아함을 대변했다.

 "너 요즘 얼굴 어떤 줄 알아?"

 "어떤데."

 "죽상."

 주원은 두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아래로 쭈욱 쓸며 울적한 표정을 만들었다. 솔직히 우스꽝스럽고 재미도 없어 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히, 재희와 재회한 이후로 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목에 하지 못한 말들이 툭툭 쏟아져 나왔다. 중요한 이야기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말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쉬워서 다시 돌아가 그 중 하나라도 말 붙여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까 하던 고민은 재희가 저신을 질려하기에 적당한 아주 덜떨어진 고민이었다.

 매일 매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집과 물리적 거리가 생기는 만큼 션의 마음속에선 용기가 한움큼씩 떨어져나왔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당황한 낯빛과 난감하다는 표정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반겨하지 않는 거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속이 갑갑했다.

 그렇게 집으로 오고 며칠이 지났다. 션은 다시 재희를 찾지 못했다. 이른 퇴근 이후 호수에도 가지 않았다. 마음과 다르게 발걸음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온다고 해놓고 가지 않았으니 그녀가 기다릴까 싶으면서도 전혀 기다리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션의 업무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종류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오늘, 한참 된 듯 한 멍한 시간 속에 불쑥 주원이 물었던 것이다.

 션은 거칠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잠시 쓸었다.

 "네가 '가자'고 한 말 앞에 서두가 있었던가?"

 "아니. 없었어."

 "그건 듣던 중 다행이네.. 근데 어딜 가자고?"

 "내가 일하는 곳."

 "왜?"

 "기분전환."

 일어나 일어나. 주원은 창밖이나 쳐다보고 있던 션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마지못해 일어나니 잘했다며 칭찬해준다.

 늦은 오후 주말이었다. 분명 해가 뜨기도 전 어둑한 시간에 잠이 오지 않아 나와 있었는데 어느덧 창밖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언제 주말이 된 건지 션은 기억해보려 했지만 어딘지 흐릿했다. 정신 놓고 다닌 게 분명하네. 아마 주원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말을 걸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유를 묻지 않는 점은 신중한 녀석다웠다.

 주원은 션을 모른다. 션도 주원을 모른다. 뿐만 아니라 Take.B의 요원들은 최소한의 정보를 제외하고 서로에 대한 정보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곳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가 세상을 옳게 돌려놓겠다는 정의감에 차 있는 건 아니었다. Take.B의 의도는 의도고, 각자 자신만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대다수는 FAKE와 연관이 있었다.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였다. Take.B는 요원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지만 서로간의 정보노출은 금했다. 주원은 개인적 원한이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추측이 불가한 걸지도.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흐렸다. 노을은 붉은 기운만 남기고 산등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을 느끼다 션이 물었다.

 "가만, 쉬는 날인데 직장에 가도 괜찮아?"

 주원이 돌아보며 웃었다.

 "이미 여기 자체가 직장이잖아."

 

 말로만 듣던 주원의 직장에 가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큰길을 걸어가다 의외로 좁은 골목을 굽이 들어가 복잡한 길로 나아갔다. 좀 더 넓은 곳으로 천천히 되지 않느냐는 말에 주원은 지름길이 아니라 정방향의 길이라고 했다. 주원이 매일 해가 지고 어두운 골목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같은 집에 살아도 전혀 다른 걸 보고 있었구나. 어쩌면 그건 다른 세상이려나.

 골목엔 제대로 보지 않으면 발에 채이는-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정확히 모른다-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꽤 많았다. 제 발로 차이면 다행인 수준이었고 피해가야 하는 것도 있었다. 밤눈에 밝은 두 요원은 제법 잘 피해서 걸어갔다. 주원이 션에게 조심하려는 말을 하려다 말고 피식 웃었다. 내가 호랑이걱정을 하고 말지. 독특한 표현이라고 션은 생각했다.

 한참을 꺾어 들어가고 난잡한 길을 지나 조금 트인 통로로 나왔을 때, 사위가 밝아졌다.

 "어때?"

 "...흠."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음에도 션의 얼굴에 모든 대답이 드러났을 것이다. 예상대로 주원은 웃고, 앞서 걸었다.

 통로는 방금까지 지나온 길에 비해 조금 넓었을 뿐, 크게 넓은 길은 아니었다. 하나의 골목이 새로이 형성된 느낌의 그 공간은 찌르는 듯한 울긋불긋한 불빛이 온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양측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젊은 사람들과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갈곳을 찾는 술에 취한 사람들. 이 너머 누군가는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들 시간이지만 공간은 이제야 기지개를 펴는 듯 했다.

 "역시 우리 성실남. Take.B에서도 공식적인 회식자리 이외에서 볼 수 없었던 션 필렌 특수요원 답네."

 "시끄러."

 "내가 좀 불량한 게 아니야. 이게 보통이라구."

 게다가 난 도박이나 약 같은 건 안하걸랑. 주원은 션의 불편해하는 얼굴을 재미있어했다. 환각에 가까운 밤의 거리. 밤하늘은 어느새 새까매져 있었다. 주위는 온통 밝았다. 그 극명한 대비가 주는 기분은 솔직히 색달랐다.

 주원의 직장인 '세헤라자데'는 지하에 있었다.

 화려한 간판을 지나쳐 주원은 뒷 편으로 돌아갔다. 직원들만 사용하는 모양인지 굴같이 생긴 지하입구는 들어가기 불편해보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편이었다. 지하 특유의 눅눅함도 거의 없었다. 갑자기 사라진 빛에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래로 내려갔다. 빨리 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주원이 워낙 거침없이 내려가 션은 그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작은 복도를 지나자 공간은 갑자기 크기를 넓혔다. 카운터 구석에서 이어진 바의 내부로 들어섰다.

 "주원, 잘왔어!"

 칵테일을 섞던 바텐더가 주원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다가 그 뒤로 불쑥 튀어나온 션을 보고 궁금한 얼굴을 했다. 주원이 그 얼굴을 먼저 알아채고 대답했다.

 "같이 사는 친구요. 세상 구경 좀 시켜주려고."

 바텐더가 와하하 웃으며 션을 향해 인사했다. 제 앞으로 자리를 안내해주기에 주원과 나란히 앉았다.

 화려한 색의 칵테일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회심작이라며 윙크를 날리는 바텐더는 능숙한 태도로 다른 손님까지 두루두루 살폈다. 술은 적당히 달고 시원했다. 한 잔은 금세 동이 났다. 주원이 손짓하자 바텐더가 위스키 한 병을 꺼내왔다.

 "맡겨둔 거야. 이건 내 회심작."

 그가 얼음을 잔에 넣었다. 챙그랑 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서 울렸고 음악은 심장을 튕기듯 쿵쿵거리는 음색을 더해갔다. 두 잔 정도 마시자 취기가 올라왔다. 들뜬 느낌이 든다는 걸 션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쾌락을 강제로 강요하는데, 거부는 못하고 주입당하는 느낌. 금새 사라질 그 미미한 불편함의 치가 싫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자 주원이 옆에서 말했다.

 "마을에 이런 분위기의 구역이 있다는 거 신기하지 않아?"

 "신기하네. 묘하게 여긴 좀 신식이고."

 티나지 않게 최근 물건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그렇지? 일반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고, 유입이 많은 것 같아. 여기 사장도 마찬가지고."

 일반은 이곳에서 나서 자란 사람. 유입은 외부에서 자발적으로 들어온 이를 뜻한다. 어려서 들어온 사람은 거의 일반이나 마찬가지다. 나고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되려면 최소 20년은 걸리는데, 예고리는 대략 15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었다.

 굳이 벽을 치고 들어와서도 바깥의 물건을 들여놓는 사람들의 심리를 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잊고자 들어왔으면 잊고 살던가. 아니면 나가던가.

 옆에 있던 주원이 잔을 들이밀었다. 한 번 부딪혀주니 챙그랑 하는 맑은 소리가 났다.

 "유흥가는 어느 동네에도 있어. 난 그 지긋지긋하고 벗어날 수 없는 본성에 대해 생각해보곤 해. 되게 흥미롭지 않아?"

 "..흥미롭네."

 "뭐야 싱겁긴."

 각자 테이블을 잡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얼굴은 불콰했다. 어디서든 보았고 어디서든 보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주 익숙하고 또 낯설었다. 션도 스무 해 넘게 저택에서 살았더라면. 가끔 친우들과 이런 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남은 잔을 비우며 물었다.

 "그럼 그건 개인의 의지야? 아니면 단체의 의지야?"

 주원이 엉? 하며 션을 돌아봤다.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한다.

 "굳이 말하자면 개인의 의지라는 가면을 쓴 단체의 의지?"

 "뭐야 그게."

 어물쩡한 대답에 션이 핀잔했다. 막상 뱉은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원은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굴러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거든. 눈사태처럼."

 "...."

 "내 생각이라고 하지만 멀리서 보면 이미 덩어리거든."

 주원이 두 손에 주먹을 쥐고 물레처럼 살살 굴렸다.

 "그러면 그게 본질적으로 내 생각인가? 난 아니라고 봐. 거기서 파생되는 개념이 본성이라는 거지. 개개인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 아니지 인간도 아니지. 인간이 모인 집단의 본성."

 일그러짐을 이야기하는 주원의 얼굴을 자뭇 진지했다. 저건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단지 이론을 머릿속으로 굴린다고 품을 수 있는 의문인가?

 정보의 교류는 금지. 지극히 사사로운 것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션은 항상 어딘가에 속해있었고, 그에 휘둘렸다. 세상의 안과 밖. 뒤집으면 밖이 안이되고 안이 밖이 되는 곳. 문득 자신의 본성은 어디 있는지 궁금해졌다.

 "난 일반이야."

 말이 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지극히 충동적이었고 말하고 나니 편해졌다. 일반. 션은 일반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반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교육과 치료를 병행하는 프로그램을 이수한다는 것도, 그 일환으로 바깥세상을 배웠다는 것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은 없었다. 알고 있는 이들은 이미 션을 일반으로 대했고 모르는 사람은 그가 말하기 전에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주원은 잠시 침묵했다가 아, 그래. 라고 말했다.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넘기는 것 같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였다.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말하게 된다면 주원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이 비밀로 남을 수 없는 건 한정된 경계 안의 울타리가 무너지면 그저 말하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취해서라고, 얼마 전에 그토록 찾던, 설마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감각까지 더해진 히를 만났기 때문일거라고. 션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주원은 인내심있게 기다려주었다. 션은 한참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삐가 풀린 말은 쉽게도 나왔다.

 "일반이었지. 뉴욕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열다섯 살 때까지 살았어. 나는 그 너머에 내가 다스리게 될 영토와 주민들이 있다고 믿었지. 영주의 아들이었거든."

 말하면서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스웠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살아온 그 시간들이. 말로 꺼내니 황당무계한 지금의 시간에서 바라보는 그때가.

 "보통 학교에 적응하는데 1년 좀 넘게. 그리고 담당 심리학자였던 제크 필렌씨한테 입양됐어. 지금 내 양아버지. 친아버지는 프로그램에 적응하지 못해서 정신병원으로 간걸로 알고 있어. 그 후로는 들은 소식이 없어서.."

 "세상이 갑자기 사라진 느낌이었겠네."

 주원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정확했다. 반항 어린 시선으로 보던 모든 건 션에게 있어 세상이 아니었다. 친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에 션은 스스로를 바꾸었다. 션은 어렸다. 미래로 잡혀 있던 지위와 권력은 하루아침에 거짓이라고 했고 그는 일개 피해자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신분도 없었기 때문에 Take.B에 모든 걸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살해버리거나 미치는 주위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나를 죽이러 오세요.'

 그 말이 션을 살렸다. 히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덧붙인 말은 없었지만 션은 자신이 가기 전까지 히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고 어른이 되어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션은 길고 긴 이야기를 꺼냈다. 주원은 가만가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하기도 하며 맞장구 쳐주었다. 어느새 위스키도 반 병이나 사라져 있었다.

 션은 말하면서 그 시절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곳은 거짓이었고 거짓이여야만 했는데도.

 "찾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

 "그렇구나. 찾은 거야?"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도 덩달아 주옥거리며 말했다.

 "이야. 션 필렌.. 맹숭인줄 알았더니 순정파였네."

 "맹숭이가 뭐냐..?"

 "음. 설명하긴 어려워. 너 같은 애들보고 그렇게 말해."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봐선 장난임이 분명했다. 션은 피식 웃고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긴장이 풀어진 분위기가 테이블을 감쌌다. 그저 말했을 뿐인데도 마음이 편해졌다.

 "자,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주신 션 씨에게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주원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난 고아야."

 "..."

 "일반은 아니고 유입. 어쩌면 상황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열 살까지 고아원에 있다가 입양됐어. 양부모가 나를 신자로 삼았어. 그 교리는 딱 백번째 신자를 열 살짜리 남자아이로 해야만 부흥한다고 하더라."

 웃기지? 주원은 션을 보며 말했다.

 "난 나름 성숙한 어린아이였거든. 물론 애들은 다들 자기가 컸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사람들이 너무 이상하고 나에게 강요하는 이야기도 믿지 못했어. 결국 파양 당했어. 그리고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다가 Take.B에 입사. 그때부터는 나름 순탄대로?"

 주원의 얼굴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어디서 들은 얘기를 그대로 옮기는 거라고 해도 무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힘들었다는 증거였다. 그의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입가에 미미하게 걸린 미소가 안타까웠다. 너무 많은 말이 빠져있었지만 그 생략이 오히려 무거웠다.

 무언가 위로 어린 말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막상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션은 손에 든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 말했다.

 "...네."

 "응?"

 "..거지같네."

 뭐? 주원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푸흡.! 푸하하하하하하. 하악. 으흐흐흐."

 "야 넌..!"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걸 느끼며 션은 주원을 말렸다.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주원은 배를 잡고 웃으며 꺽꺽 거리기까지 했다.

 "흐아. 후아. 아.. 배아파. 아 죽겠어.. 나 죽으면 너때문이야."

 "뭔소리야."

 "흐흐.. 진짜 거지같긴해. 와 정말 야.."

 더 놀리면 진심으로 정색하려고 했다.

 "고맙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주원이 웃던 입꼬리를 내렸다. 주원은 가끔 그랬다. 너무 정직한 얼굴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 입을 다물게 하곤 했다. 지금이 딱 그런 타이밍이었다.

 션이 잔을 들어올렸다. 주원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신기하게도 실리폰 같은 청아한 소리가 났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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