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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4)
작성일 : 22-01-31 09:56     조회 : 190     추천 : 0     분량 : 1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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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첫 보고 날이었다. 접선은 새벽 3시였다. 미리 준비해놓은 보고서를 둘둘 말아 12시쯤 집을 나섰다.

 보고는 일방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이루어진다. 지시는 처음과 끝에 통보받는다. 그들의 영역 안에 발을 들인 이상 판단은 모두 알아서 한다. Take.B의 조직원은 그렇게 훈련받았고 적합하다는 상부의 판단하에 작전에 투입되었다.

 예고리의 독특한 지형은 처음부터 Take.B의 걸림돌이었다.

 일단 외부에서 내부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가파른 산맥 사이 자리한 마을 가장자리는 온통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구는 단 하나. 입주민을 맞이하는 마을 어귀 뿐이었다. 공중에서 카메라를 이용한 지형 파악을 시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인공 헬기는 날리는 속속 마을 속으로 사라지고 회수조차 못했다. 적어도 마을 주변을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얘기였다.

 사람의 내면을 파고들어 그 기반으로 물리적 입지를 다지는 조직의 행태는 비교적 허술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바깥을 믿지 않는 광신도들의 반항과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신념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현대세계를 받아들이고 이용하는데에 큰 반항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견고한 마을은 빈틈없이 내부의 힘 자체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례적인 케이스야.'

 제크 필렌은 말했다. 혼잣말이었겠지만 그의 옆엔 션이 있었다.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이었다. 듣는 상대방을 염두해두면서도 딱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듯 말하는건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션은 예고리라는 마을이 초반 미국 중부에서 마릭이라는 이름의 작은 그룹으로 시작해 중국을 지나 한국까지 가 정착했다는 보고 자료를 읽던 참이었다.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이름도 규모도 형태도 다른데. 그냥 선을 긋고 싶었던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건 여기서 끝날 수도, 시작할 수도 있겠군.'

 마무리짓는 말투에 션은 그의 말이 끝났음을 알았다. 어느정도 납득했다는 것도. 정작 그 말을 들은 션은 아무것도 확정짓지 못했다. 시작과 끝은 이어져 있다지만 그 말은 어쩌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싶어서.

 

 션이 보고할 내용은 마을 내부의 지형를 좀 더 세부적으로 파악한 지형도였다. 이미 어느정도 공유가 된 정보였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건가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상부의 요청사항은 그러했다.

 그래도 호수는 달랐다. 알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호수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는 앞으로 계획에 있어 꽤 유용할 터였다.

 의외로 천하태평하던 주원은 인물도를 가져와 션의 보고서에 다채로움을 입혔다. 사람 사는 마을이니까 어쩔수 없다며, 션의 도면도에 겹쳐 씌우는 인간관계 그물망은 꽤 그럴 듯 했다. 가족 단위로 모여사는 마켓 근처와 젊은 사람들이 응집한 호수 너머. 션과 주원이 사는 근방은 홀로 사는 중장년층이 많았다. 아 어쩐지. 션은 납득했지만 주원은 그 사실을 얘기하며 괜히 툴툴거렸다.

 어쨌든 클럽에 취직한 건 이러한 빅픽쳐라는 주원의 말은 결과적으로 일리는 있었다. 그것만이라고 믿지는 않았으나 션은 일단 긍정했다.

 

 하품을 뻐끔거리며 주원은 아예 눈물을 줄줄 흘렸다. 션이 건넨 티슈를 눈가에 대고 흑흑 야간근무 반대!를 외쳤지만 션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빛이 없는 밤거리는 주변의 숲 덕분에 스산함이 한층 높았다. 하늘엔 탁한 달빛이 어슴푸레 길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넌 잘도 이런 때에 출근을 하는구나."

 "이정도야 뭐..아, 설마 무서운거?"

 눈을 반짝 뜨며 실실 웃기 시작하는 주원의 이마를 밀자 그는 으으으으? 하며 더욱 능구렁이 같은 소리를 냈다. 무서운게 아니라 너 징그러워. 낮게 핀잔을 주자 뭐가 좋은지 주원이 낄낄댔다. 그때 어둠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가 팔을 하늘 위로 들었다.

 우우우, 공기를 진동시키는 소리와 함께 검은 하늘에서 새카만 물체가 빠르게 낙하했다. 그리고 션이 치켜든 팔뚝에 털썩 안착했다. 션은 팔을 완만하게 움직이며 착지를 도왔다.

 미리 준비해둔 보호구 위로 성인 남성만한 발톱이 빽빽이 박아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묵직함이 반가웠다. 상대방도 반가운지 구구구, 목을 울리며 울었다. 깜빡이는 까만 눈동자가 션을 알아보는듯 했다.

 "으 볼때마다 징그러."

 "뭐가. 더 멋있어졌네 릭."

 릭이 날개를 펼치자 주원은 저만치 달아났다.

 매를 길들이는건 꽤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럴때만큼은 무척이나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단기술이 발달해도 이게 최선인 상황도 있는 것이다. 릭은 전서구와 교배시킨 잡종으로 통신수단으로는 최적의 생물이었다. 성격이 워낙 사나워 애를 먹었지만 막상 길들이기에 성공하면 그간 고생한 보람을 맘껏 누리게 해주는 녀석이었다.

 "자 부탁한다."

 질색하는 얼굴로 릭의 발목에 보고서를 둘둘 말아 묶은 주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션이 릭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날개를 펼치고 힘을 주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람이 날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주원의 시선은 금세 멀어진 릭을 쫒고 있었다.

 "그러면 이런 곳이 안생겼을거라고?"

 "아니. 하늘에 생겼을거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가 손을 탈탈 털었다.

 "첫 보고서 좀 허접한데 위에서 뭐라고 하려나."

 "어차피 피드백 못들으니까 괜찮아."

 "오올"

 긴장이 한차례 지나간 새벽밤 공기는 좀 전보다 따뜻했다. 주원이 너스레를 떨며 션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션은 피식 한번 웃고 그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마주치게 탁 치는걸로 답했다.

 

 

 "미래일자 책은 없네."

 햇살아래서 책 마지막장을 보던 민수가 중얼거렸다. 깜빡. 수면에 맞닿은 빛이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션은 고개를 돌려 민수의 새까만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책을 읽어내렸다.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는건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봤자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아서 이건 뭐고 저건 뭐냐고 션을 자꾸만 불러댔다. 호수는 잔잔했지만 바위 앞 션과 아이들은 점점 고요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션은 아이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잔잔한 일렁임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냉큼 물어 대체 그게 무슨 말이나고 다그쳤을 것이다. 그랬을때 아이들이 보여줄 반응은 예상가능한 수순이었다. 션은 세 아이를 만난 첫날 이후 '호수의 주인'이라는 말은 들을래야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듣고 말하는 건지. 애들의 장난인지 아닌지.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라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션도, 평화롭게 떠들고 토라지고 웃곤 하는 아이들 앞에서는 덩달아 느슨해지고는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 질문을 골랐다. 행동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과거일자 책만 있어서 아쉬워?"

 책에서 눈을 떼고 자신을 바라보는 민수의 얼굴에는 뭘 당연한걸 묻느냐는 핀잔이 섞여있었다. 의심없는 표정이었다.

 "서점에 있는지 다음에 한번 더 찾아볼게. 미래일자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거야?"

 "예고리엔 도서관은 없어요." 려상이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 그럴 만한 건물은 없었으니까. 아이의 냉랭한 말투는 뭔가를 끊어내고 있었다. 션이 되묻기 전에 민수가 냉큼 말을 이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은 따로 있으니까."

 "따로?"

 려상은 불퉁한 얼굴로 민수를 노려봤다. 션이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는 당황한 기색으로 짐짓 고민하다 결국 털어놓았다.

 "..재희누나네요."

 "재희?"

 그 집에는 책이 아주 많다고 했다. 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가면 미래일자가 적힌 번쩍번쩍한 책이 있다고. 재희는 아이들에게 비밀이라는 조건을 걸고 그 책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미래일자라고 한다면 이 마을을 이루고있는 연도를 기준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깥의 물건을 가지고 온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했다. 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책을 들여온 걸까. 본인이 읽는 것으로 모자라 아이들에게 보여준 연유는 무엇일까. 혹 FAKE와 관련된 인물은 아닐까.

 묻고 답하는 동안 민수와 제시는 자신들이 아는 것을 물어봐준다는 기쁨으로 잔뜩 떠들어댔지만 려상은 내내 근심가득한 얼굴이었다. 내친김에 그 집의 위치까지 넌지시 물어보려던 션은 려상을 보고 한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아무래도 '비밀'이라는 개념을 무겁게 받아들인건 그 뿐인 것 같았다.

 션은 두 아이 몰래 려상에게만 나직히 말했다.

 "말하지 않을게."

 "...."

 "비밀로 할게."

 "...."

 "애들이 네 맘을 몰라줘도 네가 이해해줘."

 두어번 더 말한 후에야 려상은 고개를 꾸벅거리며 끄덕였다.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가 사르르 풀어졌다. 션은 속으로만 웃으며 려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은 찬란하다. 너무 맑고 순수해 속이 뻐근해져왔다.

 

 

 생각보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은 중후했고 또한 묵직했다. 션은 주위 풍경과 동떨어진 2층 건물을 살풋 올려다보았다.

 예고리는 간판도 그렇지만 집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건 호수 너머 주택가로 이동한 이후였다. 션이 거주하는 부근은 그래도 네모반듯한 현대식건물-높이는 낮았지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호수 너머 풍경은 사뭇 달랐다.

 정신사납다, 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그곳에 모여있는 주택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낮은 담장 너머 정원이 보이다 갑자기 솟은 건물이 나오고 길이 아닌 곳에서 골목이 튀어나왔다. 집에 사는 사람이 예측되지 않았다. 세 아이의 집도 이 근방이라고 들었는데, 션은 거리의 풍경을 보자마자 찾아내지 못할거라 거의 확신했다.

 92-11번 건물은 그 사이에 있었다. 선유가 그려준 약도는 솔직히 말해 별 도움이 안됐다. 션은 감사하다며 받아들었지만 그림책 수준이어서, 보자마자 의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폭이 좁고 길쭉한 건물이었다. 하필 좌우로 기와집과 정원 딸린 서양식 단독주택이 있어서 그런지 눈에 더 띄었다. 낡은 건물이여서 그런건지, 자신의 색안경인건지 모르겠지만 좀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러다 무너지면 피해를 보는건 기와집일까 단독주택일까.

 "그래도 막상 못그려준건 아니었네.."

 약도를 들어 건물 옆에 대어보니 영 아니라고 하긴 또 미묘했다. 션은 건물 앞을 훑었다. 흔한 팻말도 초인종도 없었다.

 서점-bookstore-의 단골이 주문했던 책을 놓고갔다. 아침 청소를 하던 선유가 먼지 쌓인 책 한권을 들고나왔다. 꼭 필요하다고 했는데 어쩌나. 중얼거리는 말에 션은 별 생각 없이 심부름을 자처했다. 마침 부탁하려던 참이었는지 선유는 기뻐했다. 곧 퇴근 시간이라 책만 전달해주면 된다고 덧붙이며 단골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권재희.."

 션은 작게 읊조리다 다시 한 번 크게 말했다. 권재희씨! 안에 계십니까?

 아이들이 말하던 '재희누나'는 아마 권재희라는 사람일 것이다. 서점에서도 책을 주문했구나. 유추하기 어려운 사실도 아니었다. 예고리에 있는 이상 바깥에서 뭔가를 유입해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바깥의 책을 예고리로 들이는 사람. 아이들에게 건내주는 사람. 권재희는 예고리에 감화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이곳에 있다는건 어떠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Take.B는 예고리에 FAKE의 간부들이 숨어있다고 판단했다. 그 간부 중 한 사람이 권재희라면?

 여전히 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션은 잠시 서 있다 손잡이를 돌렸다.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허어. 허탈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나는 책을 전해주러 온 것일 뿐이다. 혹 집주인이 선량한 예고리의 주민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션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은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보일러도 틀지 않은듯 했다. 문 앞에 바로 붙어있다고 하기엔 좁은 복도를 지나 돌아선 순간이었다.

 "...."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하며 션은 무던히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집이라는 탈을 쓴 도서관이었다. 카페였다. 제시, 민수, 려상이 이곳에서 책을 보고 놀았다면 과연 비교해봤을때 칙칙해 보이기까지 할 서점으로 오지 않을 법 했다.

 큰 소리가 나지 않게끔 바닥에 깔린 두툼한 카펫은 드러누워도 될만큼 보드랍고 먼지 하나 없었다. 여기도 매일 청소를 하는 걸까?

 풀숲 너머 호수가 보이는 작은 창가를 제외하고 사면에 책장이 두겹씩 붙어있는 모양새였다. 각 책장은 밀면 옆으로 밀리는 구조였고, 작은 힘으로도 양옆으로 밀리며 뒤에 있는 책장이 드러나고 사라졌다.

 잠깐. 이런 기술이 '존재'하는 시간대던가?

 겹쳐진 책장 사이에 책 말고 뭐라도 있는지 둘러보던 션은 우뚝 멈춰섰다. 서점에 있는 책장은 두꺼운 오리나무를 재료로 썼다. 자연적 비틀림이 있는 책장을 선유는 사랑했다. 이런 공장용 모델을 선호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 집에 있는 책장도 네모반듯하진 않다.

 션은 주로 손이 많이 맞닿아 맨질맨질 해진 부근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법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집 안은 조용했다. 권재희. 손에 쥔 책을 다시 고쳐들었다. 빛이 미미하게 새어나오고 있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계단에서부터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2층엔 분명히 사람이 있었다. 온기가 있는 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사람 없나요?"

 션이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아무도 안계십니까?"

 책이 가득쌓인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허리와 무릎이 뒤로 꺾이며 뒤에서 목이 조여왔다. 아마 팔뚝인듯 션의 목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빈 공간에 날카로운 뭔가가 닿았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눈알만 굴려 쳐다보니 만년필을 쥔 손에 푸른 핏줄이 서 있었다. 만년필이라니. 촉이 아닌 반대편에서 솟아나와 있는건 칼날이었다. 도구를 무기로 쓰는 인간. 방심했다. 션은 자신의 앞주머니에 조용히 있는 도구를 떠올렸다. 아마 이것과 동일한 기능일 그것을. 대체 왜? 긴박함 속에 어떤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판단은 빨랐다. 상념에 잠기는 대신 션은 만년필 끝에 새겨진 글자를 간신히 읽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문자는 아니고 이니셜이었다. H. 일단 고도의 훈련을 받은 션이 놓친 기척이었고 우위는 상대방에게 있었다. 정확히 동맥을 지나는 곳에 날이 벼려진 칼날은 1초도 안되는 시간안에 션을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션은 항복의 의미로 손을 천천히 올렸다. 칼날이 목을 파고들었다. 뜨뜻한 피가 몰리는게 느껴졌다. 션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책..!"

 상대방이 잠시 멈칫하는게 느껴졌다. 뒤에서 보기에 책으로 시선이 가도록 천천히 들었다. 다행이 칼날은 그 자리에 있었다. 목 아래로 열기가 모였다. 관자놀이에 땀이 흘러내렸다. 보지 않아도 한층 분위기가 나아진걸 알았다. 상대방이 빌렸던 책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빌렸는데. 근데 놓고가서..! 서점 직원인데..!"

 말이 뚝뚝 끊겼다. 머저리 같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션은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죽을 순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핑 돌았다. 정신차리자 션 필렌. 에녹. 제발.

 순간 상대방의 힘이 빠지는걸 놓치지 않았다. 뒤로 몸을 물리며 돌아섰다. 션보다 키도 체구도 작은 이였다. 아마 여성. 정체가 무엇이든 일단 거리라도 벌려야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선 순간 그는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

 상대방도 션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녀의 눈도 션을 바라보는 순간 굳었다.

 "...에녹 도련님."

 션은 그 말에 반응하듯 히의 손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상대방은 속수무책으로 션에게 밀렸다. 등허리가 책장에 부딪히고 그녀가 들고있던 만년필이 바닥을 굴렀다. 둘의 시선이 바짝 가까워졌다.

 "히."

 권재희가 히였다.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목이 강하게 매여왔다.

 

 

 재희는 눈을 번쩍 떴다.

 방금 전까지 귀가 깨질듯 주위가 시끄러웠다는 감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주위는 적막에 쌓여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숨이 공기로 한번 스며들었을 뿐, 이미 한참 전부터 정적이 주인으로 자리매김한 공간 특유의 분위기였다. 거기까지 인지한 재희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날아가 버릴 필요도 없이 눈에 선한 광경에 그녀의 미간이 움츠려 들었다 다시 풀렸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푹 젖을 정도로 깨지 못한 것도, 이제 막 새벽이 오기 전 가장 조용한 시간에 눈을 뜬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재희는 이불 밖으로 나갈 용기를 끌어오는데 한참을 썼다. 창문 밖에서 바람이 일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이불 속으로 숨었다.

 꿈 속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일렁이는 불빛은 하얗고 빨갛게 타올랐고 살을 데일 듯 뜨거운 기운마저 생생했다. 불은 재희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건물을 태우고 사람을 태우고 모든 것을 태울 뿐이었다. 알고 있는 결말인데도 눈을 피하는 것만은 불가능했다. 발은 땅에 뿌리를 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주는 게 전부인 듯, 재앙은 재희 앞에 존재만 드리웠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발끝부터 가시 같은 것이 무수히 튀어올랐다. 뜨겁고 아팠다. 눈이 멀 것 같아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꿈 속에서 안녕을 취하지 못하고, 억겁의 시간마냥 타오르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눈이 타버릴 거야. 뇌 속이 녹아내리는 감각을 느끼며 문득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눈을 뜨며 꿈은 끝났다.

 여명이 밝아오며 공기가 조심스럽게 부유하고 있었다. 간밤의 꿈의 기운이 가시자 오들오들 떨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오래전 다락방에서 벼락을 보던 때는 이미 까마득한데도. 굳은 몸을 침대에서 꺼낸 재희는 기지개를 폈다. 웨이브 진 머리칼이 등허리 부근에 흘러내렸다. 예고리에 들어올 때 짧은 단발이었고 머리끝에만 넣었던 펌이었다. 재희는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 상한 머리끝을 조금 쓸어 넘기다 이내 쓱쓱 올려 느슨하게 묶었다. 긴 머리는 항상 어색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반대로 어울린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다. 재희는 방 안의 찬 공기에 가디건을 팔에 껴입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이곳에서 맞는 세번째 겨울이었다.

 

 1층은 거의 항상 추웠다.

 건물은 집이었고, 집 안에 사람이라고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보통 의식주가 이루어지는 2층엔 온기가 중요했으나 1층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핏 삭막해보이는 1층의 분위기를 재희는 좋아했다. 따스함이 감도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갈 때 빠르게 식는 공기와 스산한 기운이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그곳은 무생물의 공간이었고 그들의 온도와 꼭 맞았다. 가끔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온도가 없으면 어떨까 그녀는 생각했다. 따스한 심장도 몸을 움직일 에너지도 없다면. 그래도 살아 숨쉬는 책처럼 자신도 살아있다고 말하는 상태가 가능하다면.

 생리적인 현상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는 1층 바닥에 내려섰다. 원치 않아도 저절로 닭살이 돋았다. 추위가 좋아도 그에 배반하는 신체 반응이 살갑지 않았다. 그대로 차가움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이들이 오는 날이었다. 그녀는 보일러를 틀었다. 앞으로 1시간 정도면 여기도 따뜻해지리라.

 

 "미래일자 책 얘기를 해버렸어요."

 려상은 음울한 얼굴로 말했다. 죽을죄를 졌다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비밀이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시와 민수는 쭈뼛거리긴 했으나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굳이 제게 와서 솔직하게 말하는 려상을 책망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누구한테?"

 사실 들켜도 벗어날 방도는 있었다. 어른이 되어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많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바깥을 알리지 않는 건 어른들의 의무였지만 마찬가지로 그걸 다 알면서 써먹는 것도 어른이었다. 결국 신념과 신뢰로 이루어져 있는 건 없었다. 다만 어떤 촘촘한 연결 관계가 있을 뿐.

 재희는 제시를 힐끔 쳐다보았다. 큰 걱정 없는 그녀의 표정에서 재희는 일단 안심했다. 한 가지 우려했던 사항은 다행이 아닌 듯 싶었다. 재희는 제시 때문에 아이들에게 접근했다. 이런 방식으로 저도 모르게 친해지고 잘 따를 줄은 몰랐지만. 눈이 마주치자 제시가 냉큼 말했다.

 "호수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이요! 말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책도 읽어줬고.. 서점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서점? 마을에는 서점이 딱 한 곳 있었다. 이름도 그냥 서점이었다. 그녀는 오랜 단골이었고, 달에 한두 번 대량으로 책을 구입해왔다. 집 안에 있는 책의 8할이 '서점'의 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방식은 가장 중요한 책들을 숨기는데 도움이 되었다.

 서점 주인인 선유를 떠올리고 재희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남자라는 것이었다. 서점에 새로운 직원이 왔나보다. 그 선유가 말이지.

 의도는 쉬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보란 듯 직원이 생겼다면, 그는 선유의 측근이라기보단 정말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비밀을 폭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이들을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결국 아이들은 반쯤 우는 소리를 내며 재희에게 파고들었다. 이 아이들이 한껏 아이 같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재희는 그렇게 되기를 항상 소망했다.

 아이들의 체온은 무척 따뜻했고 재희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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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에필로그 2022 / 1 / 31 177 0 12145   
20 3부 그 너머 (7) 2022 / 1 / 31 177 0 10526   
19 3부 그 너머 (6) 2022 / 1 / 31 160 0 10700   
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3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3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6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1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1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9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1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1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4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2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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