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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3)
작성일 : 22-01-31 09:54     조회 : 170     추천 : 0     분량 : 1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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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이렇게 커다란 프로젝트는 사실 션도 주원도 처음이었다.

 둘은 처음 연수기간에 같은 기수로 수업을 같이 받았다. 주원은 센스가 좋았고 머리굴리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능했고 관계의 적정선을 알았다. 션은 어찌보면 FM이었으나 모든 것에 중상위권 수준으로 해내는 인재도 드물기 마련이었다. 특히 운동신경은 수준급이라 처음엔 동기들도 션이 적어도 체육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 두 사람은 상부에서 보기에 적절한 파트너였다. 물론 연수기간 내내 둘의 실제 관계는 전혀 달랐다. 적당히 인사만 주고받고 각자 흥미분야가 다르다보니 노는 부류도 달랐다. 하지만 조직에서 그런 자잘한 정보는 중요치 않았다. 연수기간 후 투입된 프로젝트 5개중 3개에서 션과 주원은 같은 팀으로 배정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가 이득이 될 수 있는 존재란걸 파악했다. 감정이 아닌 이성적 논리가 제대로 먹혀든 셈이었다.

 실상 부딪힐 기회를 주었기에 친해진 거였지만 션은 주원을 강압적 관계형성의 결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주원은 은근히 사람을 가렸다. 션이 정말 싫은 녀석이었다면 주원도 적당한 수준으로 친목만 도모했을 것이다. 이래저래 7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두 달 정도의 프로젝트와 이번 프로젝트는 차원이 달랐다. 스무명 내지 오십명 정도로 이루어진 종교단체나 협회인원과도 달랐다. 마을의 단위는 산 하나였다. 총 인원수는 700명 정도라고 예고리 내부 소식지에 실려 있었지만,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 정보는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Take.B에선 이 주에 한번 소통을 위해 접선하기로 했다. 얼마나 이곳에 있을지 기약된 사항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절로 긴장이 되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집에 먼저 와 있던 주원이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션은 힘이 빠져버렸다. 이럴 때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조직이 아니었다면 절대 친해질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거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쳐다봤다. 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자 반응해주는게 기뻤는지 주원은 목소리를 키웠다.

 "첫날부터 운이 좋은건지, 완전 적성에 딱 맞더라고."

 "흐응. 잘됐네."

 "반응 그게 뭐냐. 오늘 배운 거 한번 만들어 주랴?"

 "아니. 난 너와 달리 성실한 아침 출근이라."

 션은 냉장고에서 당근과 양파, 감자를 꺼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내일 또 온다고?"

 무심히 물어보자 주원이 방실방실 웃었다. 첫 출근부터 한 젊은 여성이 그에게 관심을 표했다는 이야기였다. 일하기 싫다고 징징댈때는 언제고 묘하게 들뜬 얼굴로 돌아올때부터 주원은 말에 물꼬가 트기를 기대하는 투였다. 너무 생각한대로 반응해오니 션도 어이가 없어졌다. 이렇게 단순한 녀석이 Take.B의 탑클래스 요원이라는게 가끔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그런말은 없었지만.. 그러지 않을까?"

 "그래서 너는 마음에 든다는거야?"

 션이 야채를 모로 통통통 썰어서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물에 넣었다. 카레가루를 풀자 진한 향이 부엌을 감쌌다.

 어느새 거실 소파에서 부엌 식탁까지 온 주원이 대답했다.

 "한번 보고 어떻게 알아 그걸."

 그런 주제에 얼굴은 상기된 편이었다. 그는 션이 건네주는 행주를 들고 식탁을 닦았다.

 "네 취향이구나?"

 "글쎄."

 "그런게 아니면 널보고 엄청 멋지다고 한 금발미녀인가보지."

 "...!금발은 아니야..!"

 허를 찔린듯한 주원의 표정을 무시하며 익기 시작한 야채 사이로 카레를 조심히 넣었다. 션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하니 주원은 얼굴을 구겼다. 당했다 당했어. 라고 중얼거리더니 식기를 꺼내 식탁위에 세팅했다. 달그닥거리는 소리를 유난히 크게 냈다.

 주원은 키가 크고 남자다운 편이지만, 아무래도 동양인이라 서양인들 사이에서 귀엽다는 평이 많았다. 얼굴이 동안이라는 말은 싫어하지 않았지만 유독 여자들이 귀여워하는 통에 난감해하는 얼굴을 본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했을테지. 저렇게 신나한다는건 정말 취향이거나 서양인임에도 불구, 그를 귀여워하지 않는 경우가 분명했다. 단순하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는 간파당할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어느덧 카레가 완성됐다. 밥을 담고 카레까지 담뿍 퍼담자 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식탁위로 올리고 작은 버터 조각까지 하나씩 얹었다.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버터를 보고 있었는데 주원이 말했다.

 "넌 어쩜 그렇게 사람이 숨기고 싶어하는걸 콕 집어내는거야, 기분 나쁘게."

 말과는 다르게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투였다. 오히려 흥미진진해하는 느낌. 주원이 크게 밥을 오물거리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화나 심리전에 주원은 지는 법이 없었다. 말로는 그래도 속으론 ‘오 신선하네’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조금 오버지만 션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주원이 의도했다고 해도 신빙성이 있었다. 주원은 사람을 좋아했다. 이래저래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 사람의 여러 평가를 받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는건지도. 당시 주원의 자존심이 상했을거란 생각을 수정하며 션은 카레를 먹었다. 자신이 만든거지만 맛이 참 좋았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무일도 없었다. 매일 아침 서점으로 출근해다가 정시에 퇴근했다. 퇴근길에 장을 봐서 그것으로 저녁을 해먹었다. 션은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터라 적성에 맞았다. 매일 매일 시간에 맞춰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일터로 향하는건 단조롭지만 그만큼 평화로웠다.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며 주원은 새벽에 퇴근했고, 션이 퇴근할즈음엔 그가 출근해 두 사람의 일상패턴은 반대로 흘러갔다.

 첫 급여을 받은 날 그는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돈을 받아도 되는건지 의아했다. 그런 표정을 알아본 선유가 나직히 웃었다. 그간 션이 한 일이라고는 카운터를 보며 정말 몇 안되는 손님의 계산을 처리한 일과 몇 주에 한번씩 온다는 수레의 짐을 나른 것 뿐이었다. 게다가 이번 달은 물량이 늦어져 책더미도 한 번 밖에 오지 않았다.

 서점은 외부를 비록한 내부 책장 하나하나까지 매일 깨끗이 청소했으나 션의 일은 아니었다. 선유는 그것만큼은 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말이 청소지, 처음에 본 그 깔끔함은 허투루 나온 산물이 아니었다. 선유는 매일 출근하는건 아니었다. 나오지 않는 날은 원래 서점 문을 닫았다고. 나오는 날은 하루의 대부분을 청소를 하며 보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까지 꼼꼼히 털고 닦는 모습은 고생을 사서한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하지만 책을 꺼내 책장을 닦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션은 이내 그녀가 청소를 하는 동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사람은 금방 익숙해진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션은 그동안 자신이 힘껏 달려오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쓸데없는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션은 자라느라,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히를 찾느라. 그 실마리를 Take.B에서 찾느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히를 만난다면? 그 뒤는? 비록 프로젝트이지만 급브레이크를 밟은듯한 상황에 놓여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지 않은 미래는 그저 암흑이었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션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거다. 다른데 머리가 쥐날정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거다. 창밖은 언제나 그렇듯 햇살 가득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감탄하던 처음을 지나 매일매일 복사한듯 펼쳐지는 모양새에 션의 사고는 자꾸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다가,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왜 서점 이름이 서점인 건가요?"

 조사 하나를 두고 단어를 나열하는 장난처럼. 서점'은'서점 [Bookstore 'is' Bookstore]

 말을 하고 나서야 한참 때늦은, 뜬금없는 질문이란 걸 알았다. 예상대로 선유는 의아한 얼굴로 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하하하. 이상해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에? 뭐가 죄송해요. 왜 안물어보나 했네. 서점 처음 온 사람들은 다들 물어보거든요. 그래서 션이 좀 신기했어요. 언제 물어보나 하다가 나도 까먹었잖아."

 괜히 머쓱해져 션이 살짝 미소지었다.

 "와..웃으니까 딴 사람같네."

 "네?"

 "능수능란? 알아들었어요?"

 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유가 말했다.

 "되게 능숙해보여요. 잘생기기도 했고. 아, 이거 칭찬이예요."

 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일부러 웃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굳이 웃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션은 몸짓 손짓 미소 하나하나까지 교육받았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귀족 후계자로써 몸가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보통 자라온 아이들에 비해 너무 튄다는 것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의 미소는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웠지만 그만큼 가식적으로 보였다. 누군가의 우위에 서있는 강압적인 호의. 션은 그런 태도만큼은 버리고 싶었다. 이미 밴 행동은 다른 태도로 바꾸는게 편했다. 그는 어느순간 보통 사람보다는 좀 더 단정한, 어떻게 보면 더 깍듯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딱딱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도 이제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이게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조차 잊고 있었는데. '그런' 태도는 이미 내 안에서 지워진게 아니었나. 최근의 평화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비슷한 환경때문일지도.

 션이 골몰하고 있자 선유가 그의 눈치를 봤다. 바람둥이 같은게 아니라고, 끼가 있어보인다는 것도 아니고-션은 끼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잘생겼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결국 션이 난감해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서야 선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고급스러워 보여요."

 "...."

 "귀족같아."

 "..감사합니다."

 "아 맞다 우리 서점 얘기 하고 있었지. 내가 이래."

 선유가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이름 짓는데 소질이 없어서 그랬어요. 나 진짜 이름을 못지어. 그래서 몇날 몇일 고민하다가 장사는 시작해야겠고. 그냥 깔끔하게 서점이라고 지었어요. 지은 것도 아닌가? 아하하하."

 마을이 이렇게 넓은데도 서점은 선유의 서점 하나 뿐이라고 들었다. 그러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근데 하나 지어준 이름이 있긴해요."

 "?"

 "저쪽 생활관 지나 사는 아가씨. 우리 서점 VIP니까 나중에 오면 물어봐요."

 이름은 안알려주냐는 물음에 선유는 그저 웃었다. 출근하고 벌써 몇시간이나 지난 것 같았지만 퇴근시간은 여전히 한참 남아있었다.

 

 

 마을엔 호수가 있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마을이 만들어진걸까. 마을이 만들어진 이후에 호수가 생겼을까. 일부러 만든 걸로 보이진 않았다. 한가로이 낚시나 물장구를 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션도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바위는 모난데 없이 반들반들 했다. 여러 사람이 이 곳에 앉아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던 것을 짐작케 했다.

 원래 션의 근무시간은 오전 9시에서 4시로, 그다지 길다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션에겐 그것이 길었으므로 뭔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내야 했다. 마을이 꽤 넓었는데도 막상 일터가 생기니 그 근처만 중심으로 일상이 돌아갔다. 짐작한 터였지만 익숙함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첫번째 보고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주원은 천하태평했지만 션은 그러지 못했다. 마을의 대략적인 지형이나 구조물이라도 파악하는게 급선무였다.

 급여를 줄이고 오전 근무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먼저 말을 꺼냈을 때 의외로 선유는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그러라고 했다. 제가 무슨 상사냐고, 왜그렇게 딱딱하냐는 말에는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그녀는 션의 고용주였고 션은 그녀의 고용인이었다. 상사가 아니면 대체 뭐라는거지? 어쨌든 그 이후로 션은 오전근무만 하기로 결정이 났다. 계약서까지 다시 집어들어 상호협의 하려던 션의 시도는 선유의 타박으로 인해 미수로 그쳤다.

 처음 며칠은 상가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션이 매일 장을 보러 다니는 마켓을 지나 좀 더 가면 넓다란 광장이 있었다. 광장엔 높게 솟은 시계탑이 하나 있었는데 아래 종이 달린 것으로 보아 뭔가를 알릴때 쓰는 것 같긴 했다. 시계탑 우측으로 가게들이 즐비해 있었다. 해가 높이 뜨는 낮 시간의 상가는 여유로웠다. 드문 드문 사람이 보였지만 왜인지 무리로 걸어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돌아다니다보니 꽤 여러 인종이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간판도 제각각이었다. 한글, 영어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로 붙어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아마 가게 주인이 어느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듯 했다. 친절한 설명 하나 없이 늘어선 글자들을 몇 번 해석해보려다 포기했다. 불편할 법도 한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빵 냄새가 나면 베이커리고, 밥 냄새가 나면 식당이었다. 가판이나 유리 너머로 보이는 물건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하긴 했으므로 남들도 그렇게 아나보다,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상가의 정반대편인 광장의 좌측을 넘어서면 나오는 탁 트인 곳이 전부 호수였다.

 호수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었다.

 처음엔 마을이 끝난줄 알았다.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멀리까지 보이길래 션은 두 눈을 꿈뻑거렸다. 이내 호수가 끝나는 가장자리의 전경이 들어왔다. 아무도 없다고 인지한 것과 달리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워낙 평화로운 마을이긴 했지만 호수 부근은 한겹 더 했다. 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션의 폐부로 맑은 공기가 스며들었다. 차가우면서도 춥지는 않은 청량한 바람이었다.

 그 날 이후로 별 생각없이 걷다보며 꼭 호수까지 와 있었다. 벌써 나흘 째였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다가 해가 지고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예부터 호수에는 마물이 살고 있다고 했던가.

 그는 별 생뚱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 말을 마음 속 어느 한구석에서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잔한 호수는 사념이 얽힌 저주의 호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정화해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션은 살면서 두번째로 호수를 본 참이었고, 애석하게도 그가 처음 접한 호수는 마물이 살고있는 음침한 공간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호수는 잔잔하고 그를 둘러싼 자연은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호수는 그 밑이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건, 무엇이든 있을 수 있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아래 무엇이 있을 줄 알고.

 션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어차피 프로젝트가 끝나면, 호수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조금 일찍 장을 봐서 고기요리라도 만들어볼까 싶었다. 마침 주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진지하게 주원과 앞으로의 일정을 얘기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

 션이 돌아설 줄 몰랐다는 듯 어색하게 몸이 굳은 아이 셋이 눈 앞에 있었다. 덩달아 션도 몸을 멈추었다. 그대로 발을 뻗었으면 무릎으로 아이들을 칠 뻔했다. 그만큼 가까웠는데 몰랐다는 사실이 션은 더 당황스러웠다.

 세 아이 중 맨 앞에 있던 남자아이가 두 아이를 손으로 물렀다. 아이의 얼굴이 날카롭다고 느낀 찰나 풀어졌다.

 "안녕..?"

 아마 열 살 정도가 채 되지 않는, 자기들끼리 돌아다니기엔 조금 작은 아이들이었다. 션은 아이들을 마주한 적이 극히 드물었다. 환경도 환경이었지만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감정표현이 다채롭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각도 확실했다. 그러니 아이들을 다루는데 서툴거라는 예지도 정확했다.

 막상 인사를 건넸지만 아이 셋은 반응이 애매했다. 제법 덩치와 키가 있는 남자애는 눈을 부릅떴지만 양 옆에 있는 여자애와 남자애는 눈알만 도록도록 굴렸다. 작전모의라도 할 모양새였지만 션이 앞에 있으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듯 했다.

 원래 애들이 이런가?

 션은 잠시 골몰하다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시선을 맞추자 가운데 아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갔다. 두 아이는 박자를 못맞췄다가 놀라서 뛰기 시작했다. 션은 반사적으로 가운데 아이의 목깃을 살짝 잡아 끌고 두 아이를 품에 가뒀다. 제법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했는지 세 아이들은 놀라서 입만 크게 벌렸다.

 "흠...나 나쁜 사람 아니다?"

 정말 진부한 대사라고 생각하면서 션은 아이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제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하지만 신기하게도 크게 울음을 터뜨려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는 아이들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션을 바라보았다.

 "저기..미안. 울지 말고, 얘기를 좀 해볼래?"

 션은 다시 아이들 앞에 무릎을 끓고 차분하게 물었다. 남자애는 한국인인 것 같았다. 여자애는 영미권, 다른 남자애는 다른 아시아계열로 보였다. 아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아이들이 무슨 언어로 대화를 주고 받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먼저 입을 연건 여자애였다. 분홍색 리본을 곱슬머리에 얹어놓은 그녀의 작은 머리통이 마구 흔들렸다.

 "매일 호수에 있길래에..힝."

 언어는 한국어였다.

 "울지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입에선 영어가 나왔다. 션이 놀란 얼굴을 하자 옆에 있던 아시아계 남자애가 중국어로 뭐라뭐라 했다. 가운데 아이의 얼굴이 뚱하게 변했다.

 "호수의 주인은 아니죠?"

 중국말을 하던 아이가 이번엔 영어로 션에게 물었다. 대답하지 않자 한국어로 다시 묻는다.

 이제 아이들은 션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말은 안해도 대놓고 션 앞에서 눈짓을 하는 것이, 대답은 듣지 않고도 그렇다 믿는 투였다.

 아이들은 외관과 다른 자유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놀란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동화 속 이야기를 믿을 것 같진 않았다.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션이 말했다.

 "호수의 주인이 뭐지?"

 "..."

 "호수의 주인이 따로 있나?"

 션이 재차 물었지만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서야 그는 첫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호수의 주인'이라는 명제를 알고 있지 않는 한 아이들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이 진중한 여섯개의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션은 물러서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광장 너머 서점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게 한명 한명의 눈을 쳐다보자 아이들의 굳어있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너희는? 그제야 대답이 나왔다.

 여자애는 제시, 가운데 남자애는 민수라고 했고 호수의 주인을 먼저 입에 담은 아이는 려상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민수가 션에게 말했다.

 "그 '서점'에서 일한단 말이야?"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맙소사. 하며 감탄한다.

 "거긴 문 닫았잖아요?!“

 "정말 책을 팔아요?"

 "말도 안 돼."

 아이들은 각자의 이유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골몰했다. 서점의 손님이 없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 이런 이미지일 줄이야. 매일 바닥을 쓸고 닦는 선유가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제대로 된 책을 팔고 읽을 수 있는 서점이지. 한글 수업도 하고 있어."

 어쩐지 서점 홍보대사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션이 서점을 대변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변명으로 들리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특히 민수의 표정이 아주 노골적이었다. 제시가 민수의 팔을 툭 칠때가 되어서야 겨우 얼굴을 풀었다.

 "책 싫어해?"

 아이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여기 매일 오니?"

 "네."

 려상이 대답했다. 션은 이 아이가 가장 의젓하다고 판단했다. 중국말 영어 한국어를 동시에 알아듣고 말하는데도-아마 다른 두 아이도 마찬가지 일테지만-도무지 국적을 알 수 없어서 눈이 가는 아이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 온지 얼마 안됐어. 이 호수에 온지는 더더욱 얼마 안됐고."

 션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오라고 해봤자 서점으로 애들이 올것 같지도 않았고, 어딘가 강매하는 잡상인 같은 뉘앙스를 버리기 어려웠기에.

 "내일부터 책을 가져올게. 내일도 이 시간에 너희들을 만날 수 있을까?"

 세 아이는 모두 놀랐지만, 제시의 눈동자는 크게 뜨여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긴 속눈썹 아래로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민수와 려상도 나름 숨기려했지만 발그스레진 얼굴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서점은 싫어해도 책은 좋아한다던 아이들다웠다. 션은 내심 웃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간 션은 바지런히 책을 호수에 날랐다. 처음 책을 빌려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선유는 반색하며 쟁여주었다. 그 행동에 막상 자신이 아니라 아이들한테 주려고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가 좋을까. 뭐가 재밌을까. 중얼거리며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는 선유는 이제껏 본 그녀 중 가장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결국 션은 선유가 심도있게 골라준 몇가지 책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이 중요한건데,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졌고 동화책과는 요원해졌다.

 다행인 점은 적당히 두껍고 재미없을 수 있는 그 책들이 아이들의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이었다.

 세 아이는 항상 션보다 늦게 호수에 왔는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그에게 가져오는 여파에 대해 간과했다.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없이 길어졌다. 잔잔한 호수는 그 전이나 후나 여전했다. 하지만 션은 어딘지 지루하고 지난하며 이내 뭔가 다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즉 심심했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니 좀이 쑤셨다. 바위에 걸터앉아, 선유가 준 책 표지만 요리조리 보다가 결국 펼쳐본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게 뭐라고. 션은 자신을 해치지 않는 활자들을 파라락 파라락 넘기며 두서없이 보았다. 열 다섯이 될때까지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책을 다 본건 아니었지만 3분의 2 이상은 읽었다 해도 무방했다. 그건 오래되고 고루하고 그의 폐쇄성을 증빙하는 책들이었지만 한데 뭉쳐있지 않고 골고루 읽는다면 좋은 작품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애매해졌다. 성인이 되고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어느 책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책을 기피하게 된건 그 작용이 컸다. 션은 그 서재에 있던 책 중 단 한권도 읽고 싶지 않았다.

 이미 뿌리박힌 사상과 기억은 본성에 한 흠을 새긴다고 Take.B에선 강조했다. 본성이 바뀔 수 있나요? 션이 물었다. 강사는 잠시 눈썹을 수그리고 묘하게 웃었다. 아니요. 그 말은 얼마나 모순적이었던가. 그리고 션은 그 말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처음부터 그렇게 키워진 그는 때때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아득한 유년시절을 지금 옆에 있는 동료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보냈다. 제크 필렌의 아들로써, 평범해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일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과거는 숨겨야할 오점이 되었다.

 "싫은건지 좋은건지.."

 "뭐가요?"

 예고리에 들어온 순간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조했을 때 튀어나온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숨을 홉삼키며 고개만 홱 돌리니 언제부터인지 세 아이가 와 있었다. 션의 얼굴이 꽤 위협적이였는지 아이들도 놀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와 두꺼운 책..!"

 "마법서 마법서!"

 "...."

 귀퉁이가 낡고 적당히 묵직한 책 외견에 아이들의 시선이 못박혔다. 애들 주제에 기척이 너무 없다. 아니면 내가 생각에 너무 골몰해 있었나? 아직도 놀란 가슴을 티나지 않게 진정시킨 션이 말했다.

 "너무 어려운 책은 아니야? 동화같은걸 가져올수가 없어서.."

 "동화는 아가들이나 읽는거예요. 저흰 아기 아니예요." 제시가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근데 이건 마법서고?"

 션이 되받아치자 제시가 얼굴을 붉혔다.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려상이 책을 들춰보며 말했다. "글자가 많아서 좋아요. 말은 어려운거 같지만."

 "이정돈 다 읽어요...! 아마."

 큰 소리를 내다가 션이 쳐다보자 말소리가 작아지는 민수는 입을 삐죽였다.

 고요했던 풍경은 아이들이 와서 재잘거리는 소리에 활기를 북돋았다. 두서없이 읽어내리며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서로 떠드는 아이들을 션은 평화롭게 바라보았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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