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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2)
작성일 : 22-01-31 09:52     조회 : 186     추천 : 0     분량 : 1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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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인의 집'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 해가 진 마을의 입구는 거대한 짐승의 아귀처럼 보였다. 불빛은 확연히 약한 빛으로 일렁였고 꺼질듯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션은 마을 입구를 보는 순간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직에서 예측해둔 마을의 규모는 대략 700명 정도였다. 션은 그보다 많은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산등성이를 따라 시선을 올리던 그를 막은 건 밧줄을 풀어준 남자였다. 남자의 눈은 경계심으로 날이 섰다. 션은 군말 없이 등을 돌리고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곁눈질 하는 주원과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외부인의 집'에 들어섰다.

 담황색 벽돌로 이루어진 그 집은 겉에서 보기엔 작고 아담해보였지만 막상 내부로 들어가니 사방이 하얀색이었다. 시멘트벽의 울통붕퉁한 면이 보이는데도 먼지 한 톨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중앙에 사무용 책상이 있었고 마치 안내데스크인마냥 반듯하게 앉아있는 여성이 미소 띈 얼굴로 션과 주원을 맞이했다.

 션은 잠시 이곳이 마을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 했다. 여성이 '예고리에 오신걸 환영한다'고 말했을 때야 마을의 이름을 알았다. 예고리? 무슨 뜻이지? 주원을 쳐다보았으나 그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림처럼 호를 그린 여성의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사무적이었다. 션이 지나온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들어온 누구에게라도 지어줄 미소였다. 여성은 자신을 '릴리'라고 소개한 후 말을 이었다. 주원을 향해서는 한국말로, 션을 향해서는 영어를 하면서 가이드처럼 '외부인의 집'에 대해 설명했다.

 같은 일행이어도 외부인의 집에서는 같은 공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예상된 수순대로 션과 주원의 행동반경은 절대 겹치지 않을 위치로 멀어졌다. 그리고 사흘 후 마지막 날에 마을의 높은 사람-그녀는 '제1마스터'라는 표현을 썼다-의 허가를 받은 후 서약서를 쓰는 걸로 예고리에 입주가 가능했다.

 "서약서 내용을 먼저 볼 수 있을까요?"

 "불가합니다."

 릴리는 고저 없는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사흘 뒤에 보실 텐데요.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아무 이유 없이 안내만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주원과 간단한 인사 후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사흘은 꽤 길었다. 션은 어떨지 몰라도 주원은 혼자 있는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차피 뭔가를 물어보거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니 그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요구하는 것도 없이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션은 미약한 불안감을 느꼈다. 사흘이라는 건 입주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종의 시험기간이 아닌 건가? 대체 먹고 자고 쉬는 일련의 행위에서 어떤 걸 도출한다는 거지?

 복도에 설치된 작은CCTV는 확인가능 했지만 방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하지 못했다. 안심이 되기보단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어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하루 반나절이 지날 쯤엔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오히려 그렇게 의도되는 바일지도 모르지. 주원도 심심치 않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였다. 션은 주원의 센스를 인정하는 편이었으므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든 자신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의식적으로 모든 것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나니 어김없이 수면위로 올라오는 문장은 한가지였다. 이곳에 히가 있을까. 션의 기억 속 히는 열일곱이었다. 히의 키는 큰 편이었지만 그 이후로 션도 한참을 더 컸기 때문에 이제는 나란히 서면 어깨나 가슴께까지밖에 안 올지도 모른다.

 무조건 알아볼 거라는 확신은 스물두 살 이후로 모호해졌다. 열다섯 이후로 그는 너무 많고 다채로운 사람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인종이 섞이고 문화가 섞인 사람들의 얼굴은 국경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었다. 때로 적대어린 눈길이나 사람을 등지는 표정은 남녀노소를 불문한 통일감으로 일렁였다. 복사라도 한 듯 비슷한 곳에 주름을 새기고 같은 빛깔로 번들거리는 동공은 공포와 비슷했다. 신선한 충격도 여러 번 겪으니 무뎌지긴 했다. 다만 션은 그만큼 자신의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이 들어갈 자리가 부족해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게 또 우스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마을은 동서양 다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딱히 땅의 위치 때문에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션은 마을 입구에서 느낀 사람들의 기척을 떠올렸다. 많은 경험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큰 동물의 입 속 암흑 같은 마을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같은 얼굴로 바라본다면 그 기세만으로도 뭔가를 죽일 수 있으리라.

 션은 나무로 만들어진 낮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히의 다락방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렇게 몇 번 상상해보다 잠을 청했다.

 

  사흘 후 주원과 만났을 때 그는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눈꼬리에 눈물은 그렁그렁 맺히는데 닦아내도 금세 하품이 나와 눈가를 적셨다.

 반가워하는지 아닌지 모를 하품 섞인 인사를 받고 션은 고개를 까딱했다. 짐을 챙겨 1층으로 내려온 참이었고 릴리가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션은 굳이 주원과 친밀한 사이라고 보여져서 좋을 건 없다고 판단했다.

 나란히 선 두 사람 앞에 릴리는 서약서를 내밀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서류를 보고 다시 쳐다보자 빙긋 웃는 모습까지 완벽했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 다 입주 통과하셨습니다. 서약서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바로 예고리 거주가 가능합니다."

 대체 뭘 판단하고 시험한 건지 모르겠지만 션은 일단 넘기기로 하고 서약서를 바라보았다. 빠르게 읽어 내리다가 흘낏 릴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면을 본채 관심없는 듯 서있었으나 어느 순간 미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션은 다시 서약서 항목을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예고리 입주는 있었지만 퇴거는 불가했다. 발을 들인 이상 이전의 삶으론 돌아갈 수 없다. 알고 있는 사실과 현실은 다 잊어야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바깥을 전혀 모르기에, 언급하거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군중을 선동해서는 안되며, 그런 일이 생길시에는 외부인의 집에서 일련의 행정처리에 따른 처분을 받아들인다. 유사시엔 제1마스터의 지시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협박이나 마찬가지인 서약서 내용에 션은 침묵을 유지했다. 정말 나가지 못하는가에 대한 공포라기보단 더 이상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강하게 풍겨 불편했다. 이 사무적인 외부인의 집에서 릴리의 유일한 재미는 지금 이 상황인 듯 싶었다. 션이 미간을 좁힐수록 그녀의 동공은 다채로운 빛을 띄었다. 그는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일부러 힘을 준 터라 건조한 필기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다시 쳐다본 릴리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무미건조해서, 션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짓고 말았다.

 

 

 예고리의 아침은 빠르고 분주하다.

 새벽 새가 울기도 전에 일어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7시 반만 넘어도 거리는 북적북적했다. 그런 풍경을 보며 주원은 새삼 실감이 난다고 했다. 폰이 없어서 그런가? 티브이가 없어서 그런가? 그는 혼자 자문하고 대답하며 예고리 주민 신문을 들쳐보곤 했으나 여전히 눈엔 잠이 가득했다.

 반대로 션은 빠르게 마을의 일상에 적응했다. 몸과 마음이 싱싱해지는 느낌이었다. 첫인상과 달리 그는 예고리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이른 아침의 차갑고 시끌벅적한 공기는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 어릴 적 그가 꿈꿨던 삶의 공기와 다르지 않았다. 저택은 넓고 평화로웠지만 한 귀퉁이만 돌면 이런 단면이 존재했다. 아침을 깨우는 하인들의 발 빠른 소리와 움직임을 훔쳐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엔 항상 졸린지 피곤한 건지 구분 안되는 눈으로, 하지만 어른 못지 않게 분주히 움직이던 히가 있었다. 눈도 몇 번 마주쳤다 생각했는데 실상 히는 몰랐다. 괜스레 아쉬웠지만 티내지 않았다. 그는 어렸다. 그녀도 어렸다.

 멍하니 사람들 틈에 부대끼고 있노라면 잊고 있던 시절의 기억이 그런 식으로 활개쳤다. 바깥의 현실이 아득해졌다. 이대로도 좋다는 생각은 일단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고, 그는 다시 막 잠들기 시작하는 주원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전 무조건! 아침 일찍은 안돼요. 무립니다."

 직업소개소 상담절차를 받으며 주원은 대놓고 선포했다. 굽신 거려도 모자랄 판에 당당한 태도에 상담원은 어벙한 얼굴을 했다.

 직업소개소는 주민들에게 개방된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살아가려면 일은 필요한 법이었다. 션은 막연히 농사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체계적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마을에서는 이정도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 직업으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 새로운 입주민인 그들이 들어와 상담을 받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드물게 하지만 끊이지 않게 드나들었다. 션과 주원은 풍채 좋은 중년 남자에게 직업 상담을 받았다. 에릭이라고 소개한 그는 중동이나 남미계열의 사람인 듯 했으나 묻지는 못했다. 서약서에도 써있는 내용으로 이곳에선 출신지나 특정 국가의 이름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있었다.

 "오후 출근...말이죠?"

 남자는 조금 난감한 듯 말문을 늘였으나 주원은 막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죠 있죠? 하며 닦달했다. 새벽에도 일할 수 있다니까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래도 제가 좀 인재랍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기에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션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없다고 한다면 집에서 잠이나 자며 백수로 지내겠다 션에게 통보할지도 몰랐다. 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곤 난감하게 웃었다. 남자의 얼굴에도 션과 같은 생각의 덩어리가 보이는듯 했다. 일종의 동지애가 피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친구 분은 따로 생각해두신 직업 있으신가요?"

 에릭의 질문이 션을 향했다. 션은 막상 주원만 바라보다 제게 질문이 던져지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말 그대로 농사만 생각했던 터라 따로 생각해둔 건 없었다. 주원처럼 이것만은 안돼! 라는 것도 없었다. 막연히 시키면 그냥 아무거나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임시적인 삶일 뿐이다. 자아실현이니 인생계획이니 멀리 볼 필요도 없었다. 일처리가 끝나면 다시 조금 쉬다 다른 업무에 투입될 뿐이었다.

 침묵이 이어지면 적당히 던져주겠거니 넘기고 있었는데 에릭은 끈질기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야겠군. 션은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여과 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글..."

 "네?"

 "글이나 책에 관련된 일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션은 말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나오는 말과 달리 거부감 섞인 표정에 에릭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고 싶은 거 맞습니까?"

 "네."

 내가 할 수 있을까, 과연. 요 며칠 히를 떠올렸더니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일종의 오기도 있었다. 션은 그날 이후로 종이와 책이 모여 있는 공간. 그러니까 도서관이나 서점 같은 곳. 서재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공간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었다. 종이는 불에 타기 쉬운 자재 중 하나였고, 그날 저택에 불이 났을 때, 훗날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발화 원인은 책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는 그에게 으리으리함과 일종의 위엄, 동시에 자신이 장차 그런 위압감을 주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암묵적 프라이드가 내재된 곳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들은 읽는 내내 곤욕이었지만 히와 함께하는 시간 속 대화들은 모두 그 서재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린아이 특유의 허세를 바라보며 그토록 진심으로 기뻐해준 것도 히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허접한 행동이었는지 알지만 그때의 션은 그랬다. 들뜬 가슴이 부풀어 올라 날아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 대단한 사람이야. 누구나 인정해주는 대단한 사람.

 필렌 가의 양자가 된 이후로 그는 몸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몸을 움직이고 힘들게 하는 순간만큼은 잡생각이 사라졌다.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가쁜 숨을 몰아쉴 때면 발을 디디고 서서 션 필렌으로 움직이는 이곳이 현실이라고 자신을 채찍질 했다. 너무 지치면 저택이나 작위나, 기타 여하 모든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었다. 그것이 션에게 중요했다.

 주원은 션이 글이나 책으로 연상되는 정적인 활동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소리 내지 않아도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션은 주원을 보지 않고 에릭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도 주원의 요구보다는 손쉽다고 생각했는지 몇 가지 서류를 뒤적거리던 그가 말했다.

 "마을 오거리 쪽에 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서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신간보다는 구간이 많이 있는 일종의 헌책방인데요, 책을 들여오는 사람들이 이 주에 한 번. 외서 같은 경우 번역도 진행하고 있고, 한글 수업도 진행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오는 책의 분량이 좀 늘어서 일손이 모자라다는 요청이 들어와 있네요. 이곳으로 가보시겠습니까?"

 션은 고개를 끄덕였고, 에릭은 그 길로 추천서 한 장을 써주었다. 주원은 아직 한참 에릭과 실랑이를 벌일 것 같아 션은 인사를 하고 먼저 직업소개소를 나섰다.

 

 

 마을 구석에 쳐 박아 놓은 듯-물리적으로도 어딘가 살짝 찌그러져 보였다-간신히 땅을 딛고 서있는 건물은 보호색이라도 띈 것처럼 옆의 숲과 형제마냥 엉켜있었다. 순간 길이 끝나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찰나 건물은 눈에 들어왔다. 그럴리 없지만 갑자기 생겨났다고 해도 믿을만한 등장이었다. 이곳을 서점이라고 불러도 될지 션은 의심스러웠다. 그보다는 창고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션은 왜인지 자신의 옷매무새를 한번 정돈하고서 서점 앞에 섰다. 낡았지만 먼지 없이 깔끔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서점-Bookstore'

 무슨 무슨 서점도 아니고 그냥 서점이었다. 무미건조한 글자에 션이 허를 찼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상대방도 놀란 눈을 하고 션을 쳐다보았다. 키가 작고 체구도 작은 중년 여성이었다. 아마 동양인. 아니...한국인. 동그스름한 얼굴에 입 꼬리는 올라간 편. 부드럽게 쳐진 눈썹이 인상을 순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머어머어머.. 여자가 혼잣말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을 때가 되어서야 한걸음 물러서며 션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대로 된 발음인지 잘 모르겠다. 1년 동안 속기로 공부한 한글은 발음도 어렵고 말도 어렵고 읽고 쓰는 건 더 어려웠다. 그래도 일상대화는 가능한 수준까지는 습득했다. 주원과 한팀이 되어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도 한글공부를 한 덕분이었다. 사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외국어를 배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Take.B의 방식이 그랬다. 2차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타국의 간첩으로 심어둘 때 쓰는 언어습득기술이었다. 말그대로 스파르타. '못한다'는 선택지에 없었다. 다만 한국어는 어려워서 모두가 기피하는 언어였을 뿐이었다.

 션은 약간 미심쩍어하며 말했지만 여자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오호호호 안녕하세요. 웃음이 많네. 여자가 션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그 몸짓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워 션은 당황했다. 남의 손길에 항상 날을 세운 그가 저도 모르는 새 서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바깥은 무너질 것처럼 생겼는데 안은 멀쩡했다. 아니 그보다는 좀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문 앞 계산대 바로 너머로 시작되는 책장은 머리를 훌쩍 넘는 높이였고, 두 사람 정도가 지나다닐 수 있게 복도는 트여 있었다. 예상보다 넓은 공간감각에 션은 눈을 크게 떴다. 문득 책내음이 폐부 깊숙히 들어왔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익숙했다. 아버지의 서재에선 항상 이런 냄새가 가득했다. 오래된듯 하지만 굵고 튼튼한 목재 서가. 그 안에 차곡차곡 자리매김한 책들. 크고 작은 크기와 여러 나라의 문자가 어지러이 시야를 채웠다. 첫 방문객이 보기에도 제대로 정리해놓은 것 같지 않았다.

 내부를 눈으로 훑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까지 돌려가며 바라본 그의 앞에서 여자는 방긋방긋 웃었다. 뭐라도 말해야할 것 같아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멋지네요."

 영어였지만 여자는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얼굴을 했고 션에게 마주 대답해주었다.

 "고마워요. 이 매력을 몰라주는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한선유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 션 필렌입니다. 직업소개소에서 얘기 듣고 왔습니다."

 방금 전까지도 기쁜 낯빛을 숨기지 않던 여자, 선유가 더욱 활짝 웃었다.

 지나치게 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말하는 흔한 사정에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일인 것 마냥 눈물까지 흘려줄 사람. 남을 의심하는 일도 하지 않겠지.

 이곳은 바깥과의 단절을 선호한 공간이었다. 믿음은 진실이 되고 현실이 되었다. 너무 선량하고 깨끗한 믿음은 되려 깨졌을 때 그 이면이 무섭도록 까맸다. 눈앞의 착한 여성이 도끼를 들고 나를 찍어 내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감안한 션은 선유를 마주보고 미소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제대로 된 발음인지 모르겠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내일부터 편히 출근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션은 서점을 나왔다. 직업소개소에 들르려다 집으로 돌아가니 주원이 소파에 드러누워 과자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직업은 구했어?"

 "음. 근처 바(bar). 바텐더 일은 해본적 없다고 했는데, 늦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고 하더라."

 "너 에릭이랑 싸운 건 아니지?"

 "에이….약간?"

 션이 얼굴을 찡그리자 주원이 키득거렸다. 장난이야 장난. 말하며 그가 손에 한가득 들고 있던 꾸러미 중 하나를 던졌다. 쿠키였다.

 "근처에 베이커리가 하나 있더라고. 빵냄새가 솔솔 나길래. 우리 당장 먹을 식사도 없잖아? 좀 사왔어."

 "근데 주식보다는 디저트류가 훨씬 많아보이는건 내 탓인가?"

 인간은 당분을 먹고 산다는 주원의 일장연설을 무시하고 션은 나가서 따로 장을 봐왔다. 결국 쿠키와 케잌에 질린 주원도 션이 사온 빵과 간단히 만든 수프냄새에 배를 채우러 부엌으로 기어들어왔다. 주원은 전혀, 라고 할만큼 건강이나 식단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남자랑 팀을 꾸리게 되고 친하게 지내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션은 자신이 누군가를 챙겨주거나 자발적으로 뭔가를 제공하는 입장이 될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거의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시중을 받는 것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독립해 따로 사는 동안 션은 여러가지를 익혔다. 혼자서 밥을 '만들어' 먹는 법. 옷을 세탁해 직접 입는 법. 집안이 더러워지면 청소를 하고 그 청소도구까지 정리하는 법. 모든 건 서서히, 아주 느리게 나아졌다. 주원의 보모 아닌 보모 역할을 하는건 사실 무척 우스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든 감자수프는 일단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맛이 괜찮은지 엄지를 치켜드는 주원에게 한그릇 더 퍼주고 션은 통보했다.

 "설거지는 네가 해라."

 

 전자기기 없는 마을의 시간은 마치 멈춘 듯 고요했다.

 션은 알람시계의 투박한 음을 듣기도 전에, 새벽에 우는 새소리와 침대 위로 내리쬐는 햇살에 잠에서 깨었다. 전날 일찍 잠든 탓도 있었지만 유달리 일찍 일어난듯 했다.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렇게 살면, 다른건 몰라도 정신건강에는 좋을듯 하다.

 Take.B 간부들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션은 몸을 쭉 폈다. 간단한 아침 운동까지 하고 들어왔으나 주원은 이불을 돌돌 말아 쥔 채로 숨소리도 없이 죽은듯 자고 있었다. 주원은 잠귀가 밝은 편도 아니기에 션은 거침없이 소리를 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어제 사온 계란후라이와 베이컨을 구워서 먹고, 문 앞 우편함에 들어있는 조간신문-아마 무료로 제공되는 모양이었다-을 펼쳐들었다. 놀라운 사건사고도 없었거니와 션과 주원이 새로 입주한 소식이 신문에 실린걸 보니 어지간히 특별한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로써 마을주민의 수가 675명이 되었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션은 신문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아침식사는 식탁 냉장고 열면 있으니 꺼내먹어.'

 쪽지를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나와 션은 자신의 '건전한' 직장으로 향했다.

 막상 서점에 도착할 때즈음 너무 일찍 나온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9시까지 오라는 말을 들었으나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모든 아침일과를 끝내고도 시간이 남았기에 천천히 걸어온 참이었다. 8시 10분. 선유가 없다면 꼼짝없이 문 밖에 서서 기다려야할 터였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문이 활짝 열린 서점 앞으로 선유가 서서 창문을 닦고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은 이유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반가워하며 인사했다. 어제 이야기로, 한글이 어려우면 영어로 말해도 된다고 했으나 션이 배워야한다고 부탁해 일상대화 정도는 한국어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모르겠으면 다시 물어보겠다고. 선유는 그 말을 잊지 않고 그에게 모국어로 말을 걸었다. 그는 어정쩡하게 서서 그녀가 창문 닦는 걸 도와주려 했으나 단칼에 거부당했다.

 "이건 내 일이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선유의 말에선 배려도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그를 직원이나 동료가 아닌 손님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션이 먼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도 차분하다고 느꼈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책장을 둘러싼 내부가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청소를 끝낸 선유가 서점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

 "일단 책정리를 부탁하고 싶은데.. 마침 재고 들어오는 날이라 10시쯤 책이 올거예요. 카운터를 맡으면 좋은데 우리 서점이 좀 구식이라 일일이 수기로 등록하고.. 처음하기엔 버거울 수 있거든요."

 "네."

 "정리하는건 어렵지 않을거예요. 일단 알파벳 순서로 된 이 표기랑.."

  션은 간단한 루틴 업무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으니 책구경이나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빈손이 뭐해 무엇이라도 시켜달라고 했다가 조만간 한글공부 하는 아이들이 올테니 같이 준비하자고, 지금은 구경이나 하라고 했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머쓱해져 가만히 서 있다 서가 사이로 들어갔다. 놀고 있다는 표현은 어색했지만 실상 션의 24시간은 업무와 일처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편히 쉬다가도 뭔가를 주시해야 하고 파악해야하며 보고하고 바꿔야했다. 몇 년간 계속된 생활은 곧 습관이 되었다. 노는 손이 어색하다는 표현이 딱 맞게 그는 빈 손바닥을 바라보다 서재로 시선을 옮겼다.

 의미없이 책장 사이에 있는 책등을 쓸어보았다. 예상과 달리 모두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아도, 고개를 숙여 맨 아래장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정리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오래전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하던건 히였다. 서재에서 퀘퀘한 공기가 가신다고 아버지는 기뻐했다. 그게 션이 매번 책을 가져가서, 물건이 바람을 통한 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히가 밤낮으로 책을 쓸고 닦은 터였다. 션이 알려주는 시간에 몰래 서재로 들어가 청소를 하고 나오던 히 덕분이었다.

 책을 꺼내볼 생각은 못하고 션은 책등만 구경했다. 뭔가를 읽고 싶지 않았다. 그리움인지 애절함인지, 혹은 그저 짜증인지 모를 덩어리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과거의 향내에 취해있더라도 눈을 뜨면 그건 먼지묵은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 과거 속엔 지금 션이 잡아서 정부에 넘기는 사기꾼도 있었고 모두 한패가 되어 그를 속여 넘기는 능글맞은 혀도 있었다. 그의 빛나는 미래를 누구나 약속했다. 그도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이렇게 다른 세계에서 성인을 맞이할 줄 몰랐다.

 문득 손끝을 스친 책등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방인'

 저도 모르게 션은 피식 웃었다. 책을 꺼내 펼쳐봤지만 읽지는 않았다. 펼쳐본지 오래된듯한 책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퍼석거렸다. 어느정도 드르륵, 하는 매끄러운 소리로 넘어갈 때쯤 션은 책을 덮고 다른 책을 꺼내들었다. 한참을 반복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10시였다.

 시간을 꽤 정확하게 맞춰서 책이 왔다. 바깥으로 나가서 보니 어디서 끌고 왔는지 모를 수레에 책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책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는 션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바깥공기는 차가운데 금세 몸에 열이 올랐다. 들어온 책의 80퍼센트가 헌책이고 나머지가 새것이었다. 새 책의 상태도 딱히 새것이라고 하긴 애매했다. 손때를 타지 않아 덜 낡았다 뿐이지 빛바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별 생각없이 책을 옮기다 근래 발간된 책은 이곳으로 올 수 없겠다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그나마 가장 깨끗하고 오래되지 않아보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발행년도를 보았다.

 "최신간이에요."

 선유가 뒤에 서있을줄은 몰랐기에 션은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언제 온 거지? 빙그레 웃는 그녀의 시선이 션을 향했다. 션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책을 휙 한번 뒤집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없이 책을 켜켜이 쌓아 한움큼 들고 가는 그의 등 뒤로 그녀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발행일자에는 수십 년도 더 지난 날짜가 쓰여있었다. 아마도 조작했겠지. 시대상을 가늠하기 위함이었지만 션을 보는 선유의 시선은 불온했다. 감추기 위해 짓는 웃음에는 온기가 없었다. 션은 그로인해 꽤 많은걸 파악했다. 여기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구나. 꽤 절박하구나. 근데 대체 무엇이.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빠르게 식었다.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끼며 션은 더욱 바지런히 움직였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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