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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2부 벽 (1)
작성일 : 22-01-31 09:50     조회 : 174     추천 : 0     분량 : 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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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녀'라는 말이 껄끄럽게 입안을 굴렀다. 입으로 꺼내도 꺼내지 않아도 그 말은 항상 낯설었다.

 히는 어떻게 자랐을까.

 이게 훨씬 낫지. 션은 안도감을 느끼며 매번 말을 바꿨다.

 사실 히는 언제나 히였다. 션은 그를 성별로 나눈 적이 없었고 그 사실은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가 남자였어도 여자였어도 상관이 없었으리라. 히는 히니까.

 

 "어때, 한국에 와 본 소감은?"

 제 고향에 온걸 감격스러워 하는 주원이 션을 향해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시스톰 코미디언 같았다. 네 얼굴이 한국사람이 아닌걸. 션이 말하자 그는 뭐가 좋은지 깔깔거렸다. 내가 또 한 리액션 부자지. 주원은 어느새 눈에 맺힌 눈물방울까지 요란스럽게 훑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션은 고개를 올려 높고 차가운 빌딩을 쳐다보았다. 거리는 좁은듯 넓었고 차와 사람이 빽빽했다. 광고판에 표시되는 건축물같은 딱딱한 글자를 제외하곤 뉴욕과 크게 다른지 모르겠다는게 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물론 오고가는 사람들이 다르다는데서 오는 분위기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있기에 이곳이 이국이란걸 파악할 수 있는 셈이었다.

 길거리에 서있는 정장차림의 그들을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그게 이상해서 주원을 쳐다보니 눈치빠른 그가 말했다.

 "양복 빼입은 키 큰 남자 둘은 좀 특이할 수도 있지. 더군다나 넌 외국인이잖아."

 "그게 어쨌다는거지?"

 션의 물음에 주원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사고관과 가치관이 중요한건가봐. 문화충격..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조차 영어로 내뱉는 주원이 그로썬 신기할 따름이었다. 주원은 열일곱살부터 장장 15년을 뉴욕에서 살았다.

 가치관과 문화라니. 션은 나고 자라 눈에 담고 익혀온 그 모든 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건 틀렸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지만, 션 또한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마음이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션의 안에 잔재하는 것은 부정되고 비워져야만 했다. 션은 지금의 자신이 어떤지 생각했다. 내가 아직도 계급 운운하며 도련님 행세를 했다간 당장이라도 정신병원에 처박히겠지.

 "익숙해져."

 말을 고르던 주원은 결국 한마디로 갈무리했다. 션은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네가 좋다며 주원이 떠들어댔지만 무시했다.

 

 지부로 이동하는 동안 길이 꽉 막혔다. 주원이 드물게 그의 모국어로 말하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잠시 고민하다 'It's a bad timing' 이라고 했다.

 이미 십년이 지났다. 교통체증이 아니라 여기 온게 부디 나쁜 타이밍이 아니기를.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죄다 무표정인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은채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려니 우습게도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실감이 났다.

 이 나라 어딘가에 히가 있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있다면, 그녀가 웃고 있기를 바라며 션은 밀려오는 졸음 속에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마지막 기억은 온전치 못하다. 아마도 충격때문이라고 의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스트레스'라는 단어도 처음 들었다. 듣자하니 왠만한 질병에는 스트레스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대부분 통용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일렁이는 불빛과 팔목을 꽉 쥐고있던 손. 온몸이 축축한데도 무시무시하게 추웠던 그 기온. 자신을 바라보던 히의 눈빛. 입술에 와닿던 까슬하고 조금 부드럽던 감촉. 새까만 눈동자.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던 그와는 전혀 다른 가슴. 그 가슴 아래 쿵쿵 뛰던 심장의 고동까지.

 그대로 기절한 후 션은 살아남았다. 상황은 뒤섞이고 왜곡되었다. 션이 기억하는 '현실'과 그들이 아는 '현실'이 달랐기에 처음엔 의사소통에도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그가 알던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모두가 진실이라 말하는-세계를 마주하기까지는 꼬박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정신심리치료 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발휘한 것도 션이었다. 그나마 소수로 남아있는 아이들 중 고등교육이란걸 받은게 그뿐이었다. 원래라면 션과는 평생 상종도 하지 않을 낮은 계급의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에선 이 세상엔 계급이 없다고 했고, 아이들은 의아함 또는 무지로 얼굴이 멍청해졌다. 얼굴을 찌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 것 또한 션 뿐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담당인 닥터 제크는 그 말을 항상 서두로 시작했다. 오랜 수업의 결과로 그 말은 결국 네가 싫어도 모든걸 인정해야한다는 함축된 의미였다.

 그래도 시간의 힘은 꽤 대단했다. 이미 몸은 훌쩍 커있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워나가는 입장에서 션은 자신이 어느정도 감사할 위치에 있단걸 알게 되었다. 머리가 다 커버린 어른들은 수업을 받다 상태가 악화되어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경우가 허다했다. 말그대로 미친 거잖아? 정신병자들. 아무 생각없이 옆에서 중얼거리는 놈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가 션도 그곳으로 갈 뻔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말에 다들 오묘한 표정을 지었고 션을 다독였다. 아직 덜자랐다는 말이 행운임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그립지는 않았다.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션은 그에게서 어떠한 찜찜함을 지워내기 어려웠다. 이송되어 처음 눈 뜬 병원에서, 모든 환경이 낯선 그에게 차분히 설명해주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 감정의 이유를 찾아냈다. 그러고 나니 존경의 감정 또한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고 깨달아버렸다.

 오래전 어느 날 히는 션의 아버지에게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때도 그 후로도. 어린 션은 그 순간 상황을 파악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히의 몸은 통증을 생생히 느끼고 있었겠지. 상황을 인지한 후에는 아버지를 말렸다. 옷자락을 제대로 쥐지도 못해 손가락만 꼬물거리며 그만 하시라는 말만 반복했다. 실상 그건 웅얼거림에 지나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울음이 터지려는 찰나 매질이 멈췄고 아버지는 션을 돌아보았다.

 그 눈이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냉기가 어린 시선에 심장이 꽉 조인듯 했다. 하지만 눈을 피하면 안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는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히가 남았다.

 간헐적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제어되지 않는 팔다리에 미약한 경련이 반복됐다. 저 상태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음. 히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에서 뭔가가 돌았다. 끼익, 하는 괴기한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히는 션을 보고 있었고 션은 그를 보며 미안하다 사죄하고 있었다. 내가 미안할 일은 없다. 냉정하게 션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션은 그때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아본 적도 없었다. 그는 사과를 받는 입장에 있었다. 항상 그랬으나 션의 입에선 사죄의 말이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히는 몇 마디를 중얼거렸고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히는 기절했다. 철푸덕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부터 바닥에 쳐박았다. 피가나고 있었지만 언제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낑낑대며 품에 안은 그의 몸에서 나온 피와 흙먼지가 션의 옷 여기저기에 묻었다. 공포심으로 심장이 옥죄어 왔다.

 

  인상을 잔뜩 쓰며 눈을 떴을 때, 차체는 우연의 일치처럼 스스륵 하며 멈췄다. 션이 먼저 내렸고 뒤이어 주원이 나왔다. 약속이라도 한듯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한국 지부는 뭐랄까, 뉴욕 본사를 10분의 1정도로 축소시켜놓은 모양새였다. 전형적이었고 상상력이 눈꼽만큼도 필요없었다. 8층부터 15층까지만 전면 유리가 반질거리는 것도, 알파벳 철자로 표기해놓은 'Take.B' 의 은색문구와 회전문을 통과해 우측에 출입구가 있는 것도, 그 입구를 지나 좌측 창가 바로 옆에 레드태크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아기자기 하구만."

 한국인이지만 한국지부는 처음인 주원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션의 감상도 동일했다. 미니어쳐에 들어온 기분. 밤낮의 시차가 다른 이국땅에 낯섦이 배제되자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몇몇 직원이 가벼운 목례로 인사했다. 아는 얼굴은 없었으나 그들은 션과 주원을 아는 듯 했다.

 한국 지부장인 강재환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30대중반? 40대초반?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하는 건 항상 어려웠다. 옆에 있는 주원을 기준으로 봐도 아리쏭했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션 필렌 씨, 김주원 씨. 반가워요, 한국 지부장 강재환입니다."

 션과 주원이 지부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느라 힘드셨겠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션이 말했다. 옆에서 주원이 너스레를 떨려던 입을 다물고 난감하게 웃었다.

 "두 분이 아주 유능하다고 들었습니다. 기대가 크군요."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이 역시 정해진 수순이었다. 션은 단 몇마디로도 피곤함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최대한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 노력해도 그랬다. 허위허식에 가까운 말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나온 이후로 션의 주위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와 비슷한 여러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는 물에 잠긴듯 항상 불편했다. 부족한 산소량에 허우적거리다 겨우 적응했지만 그게 편하다는 건 아니었다.

 "워낙 철두절미한 친구라. 좀 딱딱해도 이해해주세요."

 주원이 수습에 나섰다. 지부장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웃었다. 오히려 신뢰가 가는걸요? 아이구 다행입니다. 허허허. 두 사람은 편한 친구처럼 보였다. 매번 보면서도 션은 그의 친화력에 내심 감탄했다.

 지부장이 말했다.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같았다. 노련한 얼굴은 결국 하고자 하던 말에 대한 굳은 의지만 남아있었다. 하여간. 이 바닥은 가식투성이었다. 그러니 하하호호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던건 그 자신 뿐이었다.

 "내용은 혹시 듣고 오셨나요?"

 "간략한 사항만 들었습니다. 워낙 정보가 적다보니 저희도 와서 판단하는게 낫다고 여겼습니다." 주원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바로 출발해주셔야할 것 같습니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중국 변두리 시골과 홍콩, 베트남 근처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남과 북이 갈라져있는 상황을, 좀 이점으로 보고 있는듯 합니다."

 "왜 그러죠?"

 "대외적으로 국가가 나서던 8, 90년대 만큼은 아니지만 간첩활동을 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역이용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게 쉽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다문화가정도 늘고 있는 추세라. 빈부격차도 점점 커지고 있고요. 노령화와 청년실업 뿐 아니라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 추세가 일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걸 기반으로 예측의 판단을 나누어서 거점을 잡은 듯 합니다. 삼면이 바다라는 것도 그들에겐 여러모로 좋은 지리적 환경이겠죠."

 대한민국이 제 2차 세계대전 후반에 주목받은 위치였던건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이 작은 나라에 시선이 쏠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션은 히가 이곳에 있을 가능성을 끊임없이 가늠했지만 역시 확실한건 알 수 없었다.

 지부장은 션과 주원도 아는 조직 내부원칙을 리뷰하듯 이야기하고는 몇가지 주의사항을 읊었다. 시간을 보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여유롭던게 거짓말인듯 빠른 몸짓이었다. 죄송합니다. 의례적으로 덧붙였지만 션으로써는 되려 편했다. 본론에 바로 들어선다는 것. 거짓이 들어설 시간이 없는 빠름은 그가 원하는 바였다.

 지도상 위치는 특정 건물도 없고 아는 지리도 아닌지라 설명해줘도 그런가보다 했다. 산이 둘러싸인 낮은 구릉은 마을을 형성하기에 적절해보였다. 이런 지대가 있다면 이미 개발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중얼거리는 주원이 션에게 의견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내는건 일종의 편견을 만들어낸다. 그는 자신의 생각도 무심코 믿지 않는 쪽을 택했다. 조직은 치밀했다. 분명 개발되지 못할만한 악조건이겠지. 그래서 더욱 그들에겐 최고의 조건이었겠지. 하지만 그 생각 또한 아집과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션의 세계도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그 너머도 자신의 세상일거라 보지도 않고 안일하게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호텔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은 그쪽에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는걸로 하지요.”

 지부장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인자하고 뭐든 포용할만한 웃음이었다. 저 얼굴엔 얼마나 많은 가식이 들어있는걸까. 가늠해보려다 션은 피곤해져 그만두었다.

 

 아침일찍 차를 타고 출발했다. 한참을 달리니 어느새 주위가 산이었다. 도로가 넓지 않은데 양 옆에 자연 풍경이 펼쳐져 있으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주원이 좌우를 번갈아보다 말했다.

 "나 어릴 적에 이런 곳에 살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래?"

 "응. 내 안에 뉴욕의 화려한 풍경만 있는 줄 알았더니..아니었나봐. 언제였지? 진짜 어릴 적에 시골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나?"

 물어보면 그가 대답해줄 수 있을만한 문제인듯 거듭 질문한다. 션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너는 없어?"

 다시 창가로 팔을 드리우고 턱을 괴려던 그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주원이 다시 한번 묻는다.

 "시골에 살았던 적."

 션의 무표정한 반응에 주원이 미소지었다. 눈썹을 살짝 아래로 내린 표정에서 그가 여러번 시도한 감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없어."

 "그렇군."

 이제 그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션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걸 눈치 빠른 주원이 모를 리 없었다.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꽁지를 뺀다는 것도. 그저 웃거나 모호하게 넘어간다는 것도. 제법 이렇게 핵심을 찔러오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션은 벽을 치고 그를 내쳤다. 그게 동료를 상처입힌다는 걸 알아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너 알아서 해라는 느낌으로 션에게 거리를 두었지만 주원은 끊임없이 치고 들어온다는점이 다르긴 했다. 그것도 언젠간 포기하겠지. 흘낏 쳐다본 주원의 뒷통수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창밖을 보며 나직이 휘파람을 부는 것도 태평한 그의 성격다웠다. 행여나 자신이 그의 눈치를 보는 걸까, 션은 생각해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도착입니다."

 전혀 도착지 같지 않은 산길 한복판에 세워진 차는 익숙한 이질감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는 도착했다는 신호를 받기 전에는 도착이고 시작인지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차가 멈춰 서도 차체의 문제겠거니 멍 때리고 있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차에서 내리니 트렁크가 열렸다. 옷가지를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갈아입었다. 적당히 때가 탄 낡고 평범한 차림새였다. 기본적으로 몸에 달라붙는 옷이 아니어서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에 입긴 조금 추웠고 소맷부리가 반질반질한건 의도한건지 몰라도 오래 입은 옷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소지품은 이쪽으로."

 "아. 이제 세상과 안녕이로구나."

 주원은 아쉬운 기색을 팍팍 풍기며 입고온 양복과 메탈시계, 휴대폰 같은 소지품을 고이 개서 넣었다. 이거 지문 걸려있으니까 해킹하면 안됩니다? 제 나름대로 귀엽게 툴툴거렸으나 안내인은 싸늘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션은 미련 없이 소지품을 넘겼다. 적당히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은 가볍게 그를 떠났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이제 그것은 션의 물건이 아닌거나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그것도 익숙해질 터였다. 선은 그런 점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다가 다시 오는 Take.B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온전한 제것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집착하지 않은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방침이. 열다섯 그 날 이후 션은 집착하지 않았다. 뭔가에 제 영혼 조각을 떼어다놓는 그 단순하고 아름답지만 처절한 방식은 잃었을 때 주체할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데려다준 안내인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건 통보였고 무슨 말을 하든 대답은 언제나 하나 뿐이었다.

 "Take Back no.27 project start."

 "Take back"

 "Take back"

 시작이었다.

 해가 지는가 싶더니 금세 사위가 어두워졌다. 30여분 정도를 걸어가니 길은 없어졌지만 션과 주원이 가야할 곳은 이 너머에 있었으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제법 튼튼한 나무줄기를 헤치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순간 앞이 앞인지 뒤가 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션은 셔츠 안쪽에 작게 달린 주머니 속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납작한 자석같은 모양인 나침반 하나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간소화시킨 작은 종이 한장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수고를 들여야하는 건가 싶어."

 "의심이 가장 큰 적이잖아."

 지침대로 뚱하게 대답하는 션을 보고 주원은 피식 웃었다.

 "재미없는 놈. 레파토리 좀 바꿔라."

 "바꿀 필요가 있나?"

 "그렇긴 해."

 깔끔하게 인정하는 주원을 보고 이번엔 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주원이 몇 발자국 다가와 션을 앞질렀다. 션이 말했다.

 "너의 그런 점이 참 좋아."

 주원이 몸을 크게 움찔했다.

 "....난 네 그런점이 아무래도 적응이 안 돼."

 "뭐가 어때서."

 "아니아니아니. 그렇게 무감각한 얼굴로 '네가 좋아'라니. 온도 격차가 너무 심하잖아?"

 "내가 안웃었나?"

 분명 올라갔던 입꼬리를 매만지며 션이 물었다.

 "웃었지."

 넌 잘 웃는 편이지, 의외로. 주원이 덧붙였다.

 대꾸하려다 션은 멈추었다.

 "먹어."

 나직히 속삭이듯 말을 흘렸다. 맥락없는 말에 반문하는 대신 주원은 눈만 살짝 떴다가 재빠르게 종이를 삼켰다. 션도 마찬가지였다.

 혀에 눌러붙듯 감기는 식용종이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퍽!

 잉크맛이 채 올라오기 전 등 뒤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대로 션은 정신을 잃었다.

 

 

 잿빛 삶이라고 생각했다.

 밝은 색감을 잃어버린 삶이 표피위에 겨우 달라붙어 있는 듯 했다. 웅얼웅얼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면 션은 그 자신을 바꿔야만 했다. 네가 알던 곳은 '실제'가 아니라고. 너는 '속고'있었다고. 반복되는 말이 그로썬 더 의심스럽지만 말로 할 순 없었다. 무엇 때문에 온 세상이 그를 속이려 거짓 판을 이렇게 크게 벌린단 말인가.

 양아버지가 되겠다 자처한건 제크 필렌이었다. 이미 Take.B에 깊게 몸담고 있던 자로, 그는 피해자였던 아이들을 이미 수도 없이 만난 후였다. 어째서? 안쓰럽고 보듬어 주고 싶다는 말도 션은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말하는 제크 필렌의 눈동자가 호기롭게 빛나는 것을 션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기묘한 기시감을 주었다. 그건 받아본 적은 없었으나 던진 적 있던 션 자신의 시선이었다.

 넌 참 흥미로워. 늪과도 같은 눈동자를 향한 상대방의 표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션은 인간은 동등하지 않다고 배워왔고 그건 생각보다 효력이 길었다. 아직도 불쑥 불쑥 그런 생각이 튀어나올 때면 미치광이라 불리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며 기분이 삽시간에 불쾌해졌다.

 나의 시선을 받은 너도 그랬을까. 션은 종종 궁금했다.

  제크 필렌의 커다랗고 두툼한, 제법 따뜻해서 놀라운 손을 붙잡고-열다섯인 그를 모두가 아이처럼 대하던 때였다- 새 집에 들어갔을 때 그를 반겨준건 양어머니 멜리사였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션을 맞이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낯간지러운 말을 션에게 쏟아부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멜리사가 제게 하는 말이 어색하고 낯설어 션은 몸둘 바를 몰랐다. 이내 그건 눈물이 되어 션의 볼 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멜리사는 놀란 얼굴로 션을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품이 그를 감싸 안았고, 그는 이런 감각이 처음이었지만 무척 그리워했다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남들이 아이취급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관찰대상처럼 흥미롭게 지켜보는 양아버지와 자신을 친자식처럼 사랑해주는 양어머니 사이에서 션은 불안한 사춘기를 지났다. 멜리사와 함께 있을 때면 그는 적당한 온도로 기분을 이완시키는 욕조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제크도 션을 좋아했다. 그건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라기 보단 꽤 담대한 호의에 가까웠다. 멜리사 옆에 있으면 그 경계가 아주 또렷해서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잿빛 세상은 작고 작은 몇 가지 소소한 것들로 색을 입혀 나갔다.

 감기에 걸려 몸져 누운 션을 간호하던 멜리사. 다 나은뒤 어렵게 구해왔다던 건강식을 챙겨먹냐고 매번 묻던 제크. 대학 입학식, 그리고 졸업식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멜리사. 가족사진을 찍을 때 살포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던 제크. 인화된 사진을 여러 번 꺼내보던 자신.

 멜리사는 로자를 닮았다. 부엌 일을 하던 사용인이었지만 남는 기억이 하나 있었고, 더군다나 그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터라 션은 그 이름을 잊지 못했다.

 히에겐 로자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대학 졸업 후 Take.B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양부모는 무척이나 놀랐다. 제크는 단 한번도 그에게 비스무리한 어떤 말도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그 말을 하던 션을 바라보는 눈빛이 유레카를 외치는 듯한 이채가 돌았다. 결국 나는 당신에게 그런 존재인가 싶으면서도 양아버지를 기쁘게 했다는 생각에 션은 스스로가 기뻐한다는 사실이 이상했고 다시 한 번 떠올리는 사람은 히였다.

 결국 원점이다. 션은 가장자리를 헤매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 중심엔 히가 있었다.

 션은 히가 궁금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 또래라서 인지. 유난히 깔끔한 모양새로 얼굴에 자리잡고 있던 커다란 눈망울 때문인지, 그 눈이 션을 똑바로 향하고 있어서 였던지. 처음 봤을 때 션보다 한참 큰 주제에 비쩍 말라 굽어있던 등 때문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적당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션은 히를 만나야 했다. 그것만이 대답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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