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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기다림
작가 : joinB
작품등록일 : 2020.9.21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푸른 하늘과 땅과 바람은 여전했다.
널 잃었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이른 걸음을 걸어가버릴 수밖에 없던 나는 아직도 여전했다.
널 떠났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항상 다른 이름으로 가로막았다.
널 위한 것이라고 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만 나는 너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했다.
세상과 멀어진 지금, 멀어지려 하는 지금, 이제야 깨닫는다.
그게, 상처라는 걸.
너를 외롭게 했다는 것을...

나도 너도 기다린다.
사랑에 빠졌던 그 날의 사랑으로부터...

 
100. 당신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작성일 : 22-01-27 13:50     조회 : 194     추천 : 0     분량 : 1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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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유아는 깊이 잠들었다. 여긴 꿈속이었다. 홀로, 아무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길 위에 서 있었다. 안개 자욱한 숲길 하나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마치 누가 걸어가라 하지 않았으나, 걸어야만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어...?”

 

 성이었다. 유아는 환하게 웃었다. 성도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왔고, 이윽고 팔 한번 뻗으면 되는 거리에서 두 사람은 멈춰 섰다.

 

 “잠깐만.”

 

 성이 말했다. 그리고 유아는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잘 지냈어요?”

 

 성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여기, 있었어요?”

 “당신, 기다리려고.”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요.”

 “당신이 올 때까지 난 여기 있을 거니까, 천천히 와요. 넘어질라.”

 “당신한테 가는 모든 순간이 그랬어. 그 순간이 난, 가장 급했거든.”

 “장해. 잘 살아주어.”

 

 유아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성의 쓸쓸한 미소에 시선을 떨궜다.

 

 “당신 먼저 가던 길 가요. 곧 따라갈 거니까.”

 “아니. 난 기다릴 거요.”

 “당신은 이렇게 그대로 기다리는 동안, 난 너무 늙었어요.”

 “여전히 아름답소. 눈이 부실 참이오.”

 “그럼, 여기서 기다려요.”

 “응.”

 “곧, 다시 올게요.”

 “응.”

 

 성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졌다. 유아의 모습도 조금씩 멀어졌다. 애써 걸어왔던 그 길이 다시 멀어졌다. 성의 모습이 바늘구멍 만하게, 먼지 한 톨 만하게 될 때까지도 유아는 성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대비전 천장.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들의 얼굴과 그가 입은 붉은 옷자락, 황금의 용이 보였다.

 

 “어마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 주상...”

 “어마마마... 소자 숨이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런 말 하면 못써요.”

 “다행입니다. 이리 돌아오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

 “소자를 혼자 두고 가지마소서.”

 “선왕께서 기다리는데...”

 “아바마마를 만나셨습니까?”

 

 유아는 미소를 지었다.

 

 “아바마마께서 도우셨습니다.”

 “끝까지, 참, 제멋대로입니다. 그분은.”

 

 유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라도 봤던 얼굴을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그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마지막 선물이려나. 유아는 미소를 지었고, 아들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쓰다듬었다.

 

 “이렇게 끝까지, 가슴을 아프게 하십니다, 그려.”

 “소자의 곁에 오래 계셔야 합니다.”

 “하늘의 뜻이 있겠지요.”

 “소자가 하늘에 빌고 또 빌어보겠습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이미 긴 시간, 협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분이 있어서.”

 

 ‘제 짧은 목숨 거두셨으니, 아내 목숨은 제 남은 시간으로 더 붙여 살려주십사 부탁합니다.’

 

 “주상. 어미와 산보나 하십시다.”

 “예? 허나...”

 “말짱 합니다. 그저 긴 잠에 들었을 뿐이에요. 가십시다!”

 

 유아는 아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생각만큼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마음은 열 살, 운종가를 쫓아다니던 그때 그대로인데, 팔이며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그녀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어마마마. 어의의 말로는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다 합니다. 날이 생각보다 차니, 들어가시지요. 몸이 다 회복되시면 그때 소자와 산보를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방구석에만 있었더니 숨이 막혀서 못살겠어요.”

 

 유아는 기어코 꾸역꾸역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후원. 어제 내린 눈으로 눈이 덮여 날은 더욱 추웠다. 차디찬 공기를 한껏 들이 마셔보았다. 힘껏 들이마셨는데도, 조금 부족했다. 폐 깊숙이까지 찬 기운이 닿지 않자, 여러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제야 폐 저 끝까지 시원한 공기가 닿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아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기력이 쇠해진 어머니가 이 추운 날 쓰러질까 조바심이 났다. 그럼에도 유아는 부축하는 아들의 손까지 뿌리치고 정자위로 올라섰다. 찬 공기를 마시고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주상. 이리 올라오세요.”

 “어머니, 전날 눈이 내려 날이 더 찹니다. 이렇게 입김이 한 가득이지 않습니까? 소자가 정말 염려되어 드리는 말입니다.”

 “알겠으니, 조금만 어미에게 시간을 주세요.”

 

 유아는 아들에게 올라오라 손짓했다. 그러자 아들은 못 이기는 척, 정자에 올라갔다. 모자가 나란히 정자에 걸쳐 서서 후원을 둘러보았다.

 

 “하얀 꽃이 피는 풍경도 퍽 쓸 만하군요.”

 “그렇습니다.”

 “늙은 어미가 답답하신 게지요?”

 “아닙니다. 그저 염려가 되어...”

 “선왕께서 살아계셨으면, 이런 나를 보고 ‘아이고, 제 버릇 어디 갈꼬? 운종가 쏘다니던 양반이 오죽할까?’ 그러셨을 겁니다.”

 “근래, 아바마마의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많이 그리우십니까?”

 “늙어 그럽니다. 홀로 주름 진 것이 억울해서. 저 혼자만 아직 팽팽하지 뭡니까? 치사하게.”

 “여전히 고우십니다. 어머니의 미모가 어디 갑니까?”

 “빈말은 어찌 배웠을꼬. 그것도 적어놓으셨습니까? 능청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소자가 빈말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유아는 아들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이내 다시 꺼져버렸다. 저 먼 곳에 누군가에 시선이 홀린 듯 아련한 눈빛이었다.

 

 “딱 이맘때였습니다. 지금 주상의 나이.”

 “예.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신 날이 곧 다가옵니다.”

 “날이 참 맑았는데. 겨울답지 않게 참 따스한 겨울이었습니다. 그분은, 겨울을 싫어하셨죠. 추위도 질겁하셨고요. 꽃피는 봄을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참 추위를 잘 타셨지요.”

 “아니요. 그분은 추위에 강하셨습니다. 난 알지요.”

 “예?”

 “정훈세자께서 추위에 돌아가셨거든. 허조대왕께선 꼭 겨울이면 진노를 하셨다합니다. 마치 그런 날을 기다린 듯. 해서, 정훈세자께선 매일을 대전 찬 바닥에, 얇은 적삼만 입은 채로 며칠을 덜덜 떠셨다지요. 선왕껜 아주 괴로운 날들이었을 겁니다. 괴롭다 말해야 하는 것도 잊을 만큼.”

 “괴롭다 말하는 것을 잊다니요?”

 “춘추(*나이) 어리실 적 겪은 일이, 매우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나는 혜빈에게 들었으나, 선왕께선 기억이 없으셨습니다. 아마도 영영 기억하고 싶지 않으셨나보지요.”

 “그럼...?”

 “기억은 없으나, 몸과 마음이 기억한 것이지요. 찬 겨울 바람소리도, 찬 기운도 참으로 괴로웠다 하는 악몽.”

 “헌데, 추위에 강한 것은 어찌 아십니까?”

 

 유아는 피식 웃었다. 그 야릇한 이야기를 아무리 늙었다 해도 주책없게 어찌 다 설명하겠는가? 그 날의 깊은(?) 역사를.

 

 “쉿! 남녀가 쌓은 역사를 아시려면 다치십니다.”

 

 아들은 눈썹을 들썩이며 피식 웃었다. 유아는 걸음을 옮겼다.

 

 “자! 이제 가십시다.”

 “예. 어마마마.”

 

 그리고 다음 날, 유아는 결국 몸져 누워버렸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이 떠난 20년 동안 그녀는 하루에 한 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울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이 마흔 중반임에도 환갑을 넘긴 사람의 몸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의는 유아의 숨이 오늘 안으로 멈출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아들은 추운 날의 산책을 필사적으로 막지 못해 괴로워했다.

 

 “주상...”

 “어마마마... 송구합니다.”

 “주상의 탓이 아닙니다. 내가 몸을 혹사했어요.”

 “송구합니다.”

 “이리 성정이 약해지셔서야. 어미가 주상을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어마마마... 허나-”

 “갈 때가 된 겁니다. 불꽃이 마지막으로 불타올랐던 순간이었던 겁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자는 어찌합니까?”

 “주상에겐 중전이 있고, 대소신료들이 있고 또, 백성이 있습니다.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싫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상선.”

 

 유아는 뒤에 서서 눈물을 훔치던 봉수를 불렀다. 흰 머리와 흰 눈썹이 소복이 내린 눈과 같았다. 허리는 자동으로 꼬부라져 있었다.

 

 “가까이 오라.”

 “예. 대비마마...”

 “선왕보다는 우리 주상 보필하기가 수월하지요?”

 “그럼요. 마마.”

 “그래도 긴장은 놓지 말아야합니다. 선왕을 보필할 때보다 더 정신을 차리고, 사리분별을 하여 끝까지, 충신으로 남아주세요. 부탁이니.”

 “그럼요. 제가 또, 약속 하나는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까? 제가 누굽니까? 저, 차봉숩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봉수는 끝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뛰쳐나갔다. 유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또 저런다.”

 

 봉수는 벽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머릿속엔 유아의 품에서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던 성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니, 울음이 멈춰질 리가 없었다. 숨이 찰 만큼 엉엉 울었다. 성의 염을 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울지 않았다. 그동안 쌓였던 울음이 이제야 터진 것이었거나, 자신보다 더 울어야했던 유아가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연실아...”

 

 유아의 부름에도 연실은 답하지 않았다. 애써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김상궁.”

 

 노비라 성도 없던 그녀에게 호적을 주고, 성을 준 유아의 부름에 연실은 대답 대신 곁으로 가 앉았다. 유아는 연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죽은 내 어머니 대신 어미가 되어주어 고마웠다. 오라버니들 눈치 보는 내게 언니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방패가 되어주어 고마웠다. 이렇게 함께 해주어 고마웠다.”

 

 연실은 덤덤하게 답했다.

 

 “고마웠다가 아니라, 고맙다 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고마우실 일이 산더미입니다. 낯간지럽게.”

 

 연실의 말에 유아는 다시 피식 웃었다. 자칫 눈물이 날 뻔 했는데, 연실 덕분에 청승맞지 않을 수 있었다. 주인의 마지막을 고운 모습으로 남기고픈 마음이었다.

 

 “그래. 앞으로도 산더미구나. 그 빚은 내 아들이 다 갚아 줄 것이다. 오래 오래 살아서, 다 받아먹고 오거라.”

 “그럼요. 제가 또 먹는 것 하나는 조선팔도 으뜸 아닙니까?”

 “내 아들도 잘 지켜줘, 연실아...”

 “그러지 마세요. 싫어요.”

 “연실아...”

 “어쩜 끝까지 제멋대로야. 미워 죽겠어, 그냥...”

 

 끝내 참았던 눈물이 고여 버렸다. 터져 나오는 눈물에 코가 앵앵거렸다.

 

 “담장 넘는 거라고 생각해.”

 “이젠, 나 매질 할 아버지도, 계모도 없다 이거야?”

 “응.”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잖아요.”

 “그 사람이 기다려.”

 “그럼 가세요. 넘어지지 말고, 사람 조심하고, 아무나 손잡지 말고, 아무거나 먹지 말고... 정신 팔지 말고... 꼭... 잘 가고.”

 “응.”

 “난, 몸이 둔해서...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스스로 잘 챙기고 있어요. 그럴 수 있지요?”

 “그럼.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쁘게 잘 키워놨더니 말이야... 흑... 이렇게 예쁜 것을...”

 “나, 대비야.”

 “치...”

 “오래 오래 있다가 와. 신씨 아재랑 더 알콩달콩 살다가 그러고 와. 난 그 사람이랑 있으면 돼.”

 “이래서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까?”

 

 유아는 연실의 손을 꼭 잡았다.

 

 “예쁘게, 행복하게, 곁에 있어서줘서, 고마워... 언니...”

 

 유아의 말에 연실은 고개를 떨궜다. 잡은 손 위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하염없이 떨어졌다. 유아의 호흡이 가빠왔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아들을 바라보았다.

 

 “주상. 내 아들이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내 품에 와주어 고맙습니다...”

 “어마마마... 가지 마세요...”

 “조금은 무서울 겁니다. 아버지도, 나도 없는 하늘아래 힘들 거예요. 아파도 응석 받아줄 부모가 없어 외로울 거고. 수백 사람이 오가는 궐이 너무 넓어지는 것 같아서, 숨이 차기도 할 거고. 그래도 아들아. 내 아기야... 그것도 다 한때란다. 넌 왕이잖니? 그 때가 지나, 궐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면, 수천만의 백성이 널 걱정하고 있을 거야. 궐이 너무 좁아서, 차마 너의 어깨를 토닥여 줄 수가 없어서, 그들은 그걸 걱정하고 있을 거야. 선왕도, 나도, 한때는 작은 연민이 있던 백성이었으니까. 그러니... 조금만 아파하렴, 아가.”

 “어머니... 난 싫어요... 혼자 있는 거, 무서워요, 어머니.”

 “아가... 미안해... 미안해, 아가.”

 

 유아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연실은 멀어져가는 유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은 점점 감기는 유아의 눈을 보았다.

 

 “어머니!”

 

 어의가 급히 곁으로 와서 유아의 숨을 확인했다. 맥박도, 숨도 이미 떠나고 없었다. 모두들 참았던 고통을 토해내듯 울부짖었다. 마치, 그렇게 울기 위해 살아왔던 듯이 세상 가장 슬프게 울었다.

 

 “잘 가요. 아가씨.”

 “어머니이!!!”

 

 유아의 아들은 유아를 끌어안았다. 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유아를 기다렸고, 끝내 그 걸음을 걷고 말았다. 성은 짧은 기다림 끝에 유아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유아는 행복했다. 행복하게 떠났다.

 유아의 죽음은 화원을 지키던 만영에게도 전해졌다. 오두막 마루를 닦던 만영은 그 소식에 무엇인가 계시를 받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대문을 열고 나서니, 만영의 노비들이 모두들 화원의 김매기를 하고 있었다.

 

 “자! 다들 주목!”

 

 만영의 말에 수십의 노비들이 만영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거의 다 되어가지?”

 “예. 어르신.”

 “오늘까지 마무리하고, 여기로 오가는 길 모두 없애. 사람들 아무도 얼씬도 못하게. 다른 길 만들고.”

 “어르신. 그라믄 시간이 솔찬히 걸릴텐디요?”

 “수당도 많이 받고, 좋지 뭐.”

 “지들이야 좋지만서도. 어르신은 우째, 이 허허벌판을 이렇고롬 지키신대요? 지들이 보기엔, 뭐 지킬 껀덕지도 읍서뵈는디?”

 “알면, 다친다. 그리들 알고, 서두르자.”

 

 만영이 그토록 화원을 지키는 이유를 아는 또 한 사람. 백씨의 아들이었다. 백씨의 아들은 다음 날 길을 새로 내는 작업을 하는 동안 만영을 찾았다.

 

 “저 왔습니다.”

 “어, 왔어?”

 “길도 새로 내시게요?”

 “양반이고, 상놈이고, 땅 맛을 알아버려서 큰일이야. 여긴 지켜야지. 두 분 마마께서 또 오시려면.”

 “이모님도 환생을 믿으세요?”

 “너,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땅은 너에게 남긴 게 아니야. 훗날의 두 분을 위해 우린, 지키라는 임무를 받은 것뿐이야. 세상이 말세가 되어도, 욕심내선 안 돼. 명심해.”

 “예.”

 “허투루 듣지 말고. 나 죽거든, 여기 곁에 묻어. 내가 지킬 거니까.”

 “이모.”

 “나도 이제 내일모레 칠순이야. 젊은 네가 지켜야지.”

 “이모님은 대체 여길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건데요? 만석꾼 되는데, 두 분 전하께서 큰 융통이라도 주셨어요?”

 “주셨지. 내 평생 갚지 못할 큰 도움을.”

 “설마, 마음이니 뭐니 그런 소리 하실 건 아니시죠?”

 “백씨는 어쩌다 이런 놈을 낳았을꼬? 걱정이 크다. 커!”

 

 만영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떴다. 백씨 아들은 만영의 뒤를 졸졸 따랐다.

 

 “제가 뭐요? 어때서? 이모님!”

 

 봄이 왔다.

 다시 궐의 담벼락엔 노란 시호 꽃이 피어났다. 화원엔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물들었다. 찾아오는 이 없는 화원엔 지나가는 노루도 오고, 나비도 오고, 벌도 왔다.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운종가는 여전히 북적였다. 노랗고 빨간 머리의 외국인들이 더욱 많아졌다. 온 세상이 이 거리에 모인 듯했다. 화원에서부터 날아온 나비가 백씨네 책방에 들렀다. 희끗한 머리가 군데군데 보이는 백씨네 아들이 책 사이 먼지를 털고 있었다. 나비가 날개를 팔랑팔랑 거리며 책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들어갈 틈을 찾았는지, 책방 비밀 공간 입구의 작은 공간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책이 가득 쌓인 곳 사이로 황금 보자기가 문 틈 사이 새어나오는 빛에 빛났다. 꿀이라고 착각 한 것일까? 나비는 황금 보자기 위로 나폴나폴 날아와 앉았다.

 

 “나의 화원으로 오시오. 내가 그대를 기다리오. 허공을 보는 이 와중에도, 고개를 갸웃하고 피식 웃어 보이는 그대의 얼굴이 떠오르오. 어째서 나는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생이 위태로운 지. 사랑이라는 요사스러운 것을 하지 말아야겠소. 매 순간이 아찔한 그대를 보느라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을 때가 많으니. 허니, 알길 바라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앞으로도 그대를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할 것을. 나와 그대의 사랑을 역사로 만들어 보겠소.”

 

 나비는 잠시 앉아 쉬다 다시 날아가 사라졌다.

 

 “여기, 사랑을 남기오.”

 

 

 

 외전. 내가 먼저 손 내밀 그 날에

 

 20세기 중반, 암울한 시대의 조선. 오늘도 경성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누군가 땅의 아픔을 훑고 파낸 그 길을 따라, 푸른 전철이 종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한복 입은 이들이 가득하던 거리는 어느새 양인들의 옷으로 물들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짝 달라붙은 스커트 치마에 위아래 색을 맞춘 분홍빛의 여성이 거리를 걸어갔다. 최근 산 분홍 모자를 뽐내며, 그렇게 걸어갔다. 한껏 멋을 낸 여성의 발걸음은 가벼워보였고, 다소 잰걸음이었다. 어딘가 급한 용무가 있어 보였다.

 

 백씨네 책방. 그곳은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곳 경성 골목의 터줏대감이었다. 분홍 구두의 걸음은 이 책방 입구에서 멈췄다. 허름한 책방으로 들어선 여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소 많은 양의 책들이었으나, 정갈하게 잘 정리된 것이 포근한 느낌의 책방이었다.

 

 “한참 낮잠을 자고 있어야 할 양반이, 어딜 갔어?”

 

 신여성은 책방 입구, 주인의 빈 자리를 보았다.

 

 “백선생~. 백선생?”

 

 아무리 불러도 그 백선생이라는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신여성의 눈에 주인의 책상 아래로 툭 삐져나온 보자기 자락이 눈에 띄었다.

 

 “응?”

 

 신여성이 손을 뻗으려 할 때, 먼저 손을 뻗어 보자기를 집으려 다른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흠칫 놀라 올려다보자, 광채가 훤한 미남자가 신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건, 주인이십니까?”

 

 미남자가 물었다. 신여성이 고개를 절래 흔들자 미남자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도.”

 “백선생의 것이겠죠.”

 

 신여성은 미남자의 미소가 달갑진 않았다. 모던보이를 자청하는, 어느 잘 사는 집안의 날라리겠지 싶었다. 순진한 여성들이나 홀리고 다니는 기생 오라비같은 느낌도 들었다. 신여성은 보자기를 집어 들었는데, 안에 있는 것이 책 같았다. 신여성은 그저 책방 주인이 돌아왔으면 했다. 먼지를 탁탁 털어 책상 위에 올려놓자, 어디선가 책방 주인이 나타났다. 한 쉰 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백여 년 전 같은 자리에 있던 누군가와 참 많이 닮기도 한 그였다.

 

 “아이고, 아가씨 오셨습니까?”

 “응.”

 

 백선생은 신여성과 미남자를 번갈아보았다. 신여성은 백선생의 눈빛을 보고 단호히 말했다.

 

 “아, 손님 이신가봐.”

 

 백선생은 알겠다는 듯 미남자에게 친절한 미소를 건넸다.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찾아드리리다.”

 “아니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렸을 뿐입니다. 이상하게 눈길이 가서.”

 

 그 눈길이 이 책방인지, 그 안의 여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미남자는 그 자리를 떠났다. 신여성은 이상하게 자신의 등 뒤를 스쳐 지나간 그 남자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잠시, 신여성의 호기심은 보자기로 향했다. 황금빛이었을 것 같았던 보자기는 빛이 바래 있었다.

 

 “그리고 이거. 바닥에 떨어져있던데?”

 “아, 여기 있었네!”

 “그게 무엇인지? 오래된 물건 같은데. 서책입니까?”

 “쉿! 알려 들지 마십시오. 아주 중요한 가보이니.”

 “가보?”

 “예.”

 “내 눈에 띈 김에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되나?”

 “가보라니까요.”

 “선새~엥~”

 “이럴 때만 선생. 됐습니다.”

 “선생~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네?”

 “이럴 때만 존대시지요?”

 “내- 제가 언제 반말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저는 백선생을 존경하는 애제자 아닙니까?”

 “제가 인정해야 제자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보여줘. 응?”

 

 그 타이밍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덕분에 백선생은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보자기는 자신의 품에 꼭 안은 채였다.

 

 “아이고, 무슨 책을 찾으시는지?”

 “시집 있소?”

 “아! 시집이요? 여기 있지요. 제 안목으로 추천을 해드리자면-”

 

 그동안 신여성은 간만에 책방을 쭉 훑어보았다. 참으로 오래된 집. 기둥부터 책꽂이까지 시멘트 발라 튼튼하게 지어진 여느 양옥들과는 차원이 다른, 옛 풍경이 가득한 이곳이 참 좋았다. 손님은 책을 사서 나갔고, 신여성은 흩어진 책을 정리하고 있는 백선생에게 물었다.

 

 “백선생. 이 가게가 얼마나 되었다고 했죠?”

 “한, 백년은 족히 넘었죠?”

 “백 년? 그렇게나 됐어요?”

 “그럼요. 할아버지 때부터 나까지 쭉 3대째니까.”

 “그렇구나.”

 

 백선생은 여전히 보자기를 품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궁금하시지요?”

 “응?”

 “아주 잠시만입니다.”

 

 신여성은 좋아 펄쩍 뛰었다.

 

 “정말?”

 “딱 한 번 만입니다. 이 책방만큼 오래된 가보입니다. 훗날 해방이 되면, 아주 좋은 날, 나라에 기증할 물건이거든요.”

 “그 귀한 가보를 왜?”

 “진짜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요. 선대부터 내려오는 유언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찌 찾겠어요. 벌써 백 년인데, 죽었겠지. 다시 태어났다면 모를까.”

 

 신여성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백선생이 천천히 빛바랜 보자기를 풀었다. 스르르 풀린 보자기 사이로 낡은 서책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책 표지엔 강인하고 또렷한 글씨체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當身(당신)에게’

 

 신여성은 자신도 모르게 이 오랜 서책에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낡은 서책의 표지에 손끝이 살짝 닿기도 전에, 신여성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하...”

 

 그저 숨이 막힐 만큼 아플 뿐.

 

 ***

 

 ‘당신에게. 급하구려. 내 생이, 나의 선택이 괴로운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만이 생각난다오. 만약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생엔 내가 먼저 그대를 알아보겠소. 그 생엔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겠소. 그렇게라도 우리의 연이 닿을 수만 있다면, 당신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생을 온전히 당신에게 바칠 것이오. 그러니 기다려주겠소? 다음 생에 내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때까지. 현생에 당신이 그랬듯, 다음 생은 내가 그럴 수 있길.’

 

 ***

 

 신여성은 괜히 울적한 마음으로 경성 거리를 걸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간판의 불빛과 가로등과 화려한 빛들로 밤의 거리는 여전히 북적였다. 날은 참 좋았는데, 해가 지기 시작하니 조금 쌀쌀해지는 것도 같았다.

 

 번화가를 지나 북촌 집으로 향하는 길. 다리를 건너는데, 이상하게 등 뒤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돌다리 위에서 신여성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구두 소리보다 한 박자 늦은 구두소리가 들렸다.

 

 ‘너, 딱 걸렸다. 이 변태!-’

 

 “어?”

 

 신여성이 뒤로 휙 돌아보았을 때, 책방에서 마주했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미남자는 신여성에게 들키곤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따라오십니까?”

 

 신여성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 톡 쏘았다. 그러나 미남자는 그 질문마저 좋다는 듯 미소를 여전히 머금고 답했다.

 

 “언제 돌아봐줄까 하여.”

 “그쪽도 이 방향이 댁이십니까?”

 “아니오.”

 “아니, 대체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학자.”

 “하... 배움이 깊은 분이, 참으로 무례하십니다.”

 “아,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난 그저, 언제쯤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시기를 따지느라.”

 “무슨 말이야... 알아들으셨으리라 믿고, 안녕히.”

 

 신여성은 다시 휙 돌아 돌다리의 반을 마저 걸었다. 미남자는 여전히 신여성의 뒤를 떠나지 못했고, 다리의 끝과 끝에 서 있을 그때, 미남자는 마침내 용기를 내었다.

 

 “잠깐만!”

 

 신여성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운명을 믿소?”

 

 ‘이건 또 무슨 조선 고리짝 같은 질문인가.’

 

 “아니요.”

 “난 믿소.”

 “네. 그럼.”

 

 신여성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가려했다.

 

 “해서, 용기를 좀 내어 볼까 하는데.”

 “또, 무엇입니까?”

 “그대의 이름.”

 “제 이름이요?”

 “나는 이 성이라 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싫다면요?”

 “매일을 돌아봐주고, 손내밀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본인이 이상한 건 아십니까?”

 “나도 내가 멀쩡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더군요. 당신을 본 후부터.”

 

 신여성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다가오는 남성은 처음입니다.”

 “나도 이렇게 다가가고픈 여성은 처음입니다.”

 

 미남자, 이 성은 신여성을 향해 시익 웃어보였다. 다소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섞인 미소였다. 그 미소가 싫지 않았다.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제 이름은, 김유아입니다.”

 “유아...”

 “그럼.”

 “또, 만날 수 있겠습니까?”

 

 신여성, 김유아는 성에게 미소로 답했다.

 

 “그쪽이 믿는 운명이라면.”

 

 유아는 걸음을 옮겼다. 유아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유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성도 걸음을 옮겼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 시인, 백석-

 

 ***

 

 유아는 오늘도 백씨네 책방에 들렀다. 그러나 오늘은 책방 문이 닫혀있었다. 감기에 골골거려도 책방 문 여는 것을 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아는 백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어린 날 호기심이 많던 그녀에게, 암울한 세상 보고픈 것이 많던 그녀에게 백선생은 스승이자, 친구이자, 창이었다. 백선생의 아내가 유아를 맞이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어? 백선생은 어디계십니까?”

 “바깥양반이야, 책방 나가셨지요.”

 “책방?”

 “뭘, 새삼스레 그러십니까?”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구나.’

 

 “그러게요. 이른 시간이라 집에 있을 줄 알고...”

 “참나. 아가씨도 싱겁게. 책방 가보셔요.”

 “응.”

 

 유아는 집 대문을 나서다 문득 멈춰 서서는 다시 백선생의 아내에게 물었다.

 

 “혹시, 요즘 백선생께서 이상하거나, 평소와 다른 말씀을 하진 않으셨나요?”

 “무슨 말이요?”

 “아, 아닙니다. 그럼.”

 “아!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긴 했네요.”

 “무슨?”

 “운명이 어쩌고. 업보가 어쩌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운명? 업보?”

 “집안 가보가 하나 있는데, 그게 마음에 꽤 걸리는 모양이에요. 아주 귀한 것이라.”

 “가보? 그 서책?”

 “보셨어요? 나도 못 본 것인데. 바깥양반 대대로 그 주인을 찾느라 망할 책방도 처분 않고 사는 거잖아요. 가뜩이나 세상 뒤숭숭하고, 매번 검열이니 뭐니 몸서리나는데. 정리를 하라고 해도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유아는 얼마 전, 백선생이 가보를 보여주기 전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짜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요. 선대부터 내려오는 유언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찌 찾겠어요. 벌써 백 년인데, 죽었겠지. 다시 태어났다면 모를까.”

 

 ‘그럼... 주인을 찾은 것인가...?’

 

 유아는 급히 백선생의 집을 빠져나왔다. 경성바닥을 죄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백선생을 찾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백선생... 어디 있는 거야?’

 

 “헉... 헉... 억!”

 

 뒤를 보지 않고 걷다가 유아는 그만 누군가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운명, 맞네요. 우리.”

 “네?”

 

 유아의 앞엔 또다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미남자, 성이 서 있었다.

 

 “어?”

 “또 보네요.”

 “우연 맞아요?”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무슨 말이죠?”

 “여기가 제 직장 근처라.”

 “제가 당신 직장을 어떻게 알아요.”

 “그렇죠?”

 “우연이죠.”

 “운명이기도 하고요.”

 “운명...”

 

 성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는 유아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 표정. 익숙하네요.”

 “그런가요? 어째서죠?”

 “그러게요. 왜지?”

 

 성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저도 익숙하네요. 그 표정.”

 “그런가요? 우린 어째서 서로 심각한 얼굴을 기억하는 걸까요?”

 “과거 어느 날엔가 본 적이 있나보죠. 서로에게 그 모습을 자주 보였거나.”

 “그런 기념으로, 데이트 신청해도 되나요?”

 “제가 바쁜데. 누굴 급히 찾아야 해서.”

 “이 넓은 경성에서요?”

 “그러게요.”

 “혹시 찾는 사람이, 내가 찾는 사람과 같나요?”

 “그쪽도 누굴 찾고 있었어요?”

 “네.”

 “누구?”

 “책방 주인. 백선생.”

 “어째서? 한 번 봤잖아요.”

 “그렇죠. 한 번 봤는데, 이상하게 그 남자는 날 너무 잘 아는 것 같더라고요.”

 

 10여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였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백선생이 순간 어색해지는 유아였다. 백선생은 진짜 정체가 무엇일까? 아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가보를 왜 자신에게 순순히 보여준 것일까?

 

 “그자. 있는 곳을 알아요. 오라고 해서.”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럼요. 당신도 오라고 했으니까.”

 

 유아는 모든 상황들이 점점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백선생이 이상한건지, 아님 눈앞에 이 사내가 자신을 속이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수상하기는 성도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책방 주인이 자신에게 책 한권 보내더니, 그 책을 들고 이곳으로 오라며 전보를 부친 것이. 그렇다고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함께 백선생이 오라고 한 곳을 향해 걸었다. 성은 이상하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이 여자에게 털어놓고 싶어졌다.

 

 “내가 원래 이성적인 사람으로 유명하거든요. 그런데, 그때부터였어요. 당신을 그 책방에서 본 이후부터. 그게 깨져버렸어요.”

 “왜죠?”

 “나도 모르겠어요. 이상하죠. 우린 첫 만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유를 묻는데, 딱히 답은 없다는 게.”

 “그러네. 답이 없네. 근데, 풍경하나는 끝내주네요.”

 

 산을 넘었다고 봐야했다. 산 중턱에 힘겹게 다다르니, 넓은 꽃밭이 나타났다. 숲속 끝 숨겨진 유토피아가 이곳이려나 싶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 경성 한 귀퉁이에 이런 곳이 숨어 있다니! 놀랍네요.”

 

 유아도 그런 마음이었다. 정말 놀라울 만큼 예쁘고 넓은 꽃밭이었다. 이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 다른 세상으로 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유아는 꽃밭 한 가운데 허름하게 지어진 작은 오두막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그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텅 빈 집 안으로 들어오자, 어디선가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백선생.”

 

 성이 먼저 백선생을 불렀다. 그리고 그 부름에 백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선생!”

 “대체 무엇입니까? 어찌 날 이곳에 불렀습니까? 그것도 이분과 함께. 마치 같이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이.”

 

 백선생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늦게 알아차려 송구합니다. 두 분 전하.”

 “저, 전하?”

 “아니, 선생. 전하라니.”

 

 백선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야 돌려드립니다. 돌고 돌아, 백여 년이 흐른 지금에야 돌려드려 송구합니다.”

 

 유아는 저 쓸쓸한 미소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백선생이 말했다.

 

 “사람의 생과 사는 돌고 도는 법이지요. 백여 년 전, 그 책을 쓰신 귀한 분께서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부디 그 책의 주인을 찾아 달라. 허나, 제 조부께선 거절하셨습니다. 간절히 아끼고 아낀 그분에게 직접 전해드리라, 간언했지요. 헌데, 잘못이었습니다. 그 귀한 분은 전하려 하기도 전, 그 책을 되찾아가기도 전, 운명을 달리하셨기에.”

 

 유아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다.

 

 “백선생. 무서워요. 그러지 말아요.”

 

 그럼에도 백선생은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제 조부는 아무래도 불자셨으니, 믿으셨던가봅니다. 인연의 끝은 없다. 그저 돌고 도는 삶에 이어질 뿐. 돌고 도는 그 길에, 언젠가 마주하리라. 제 아버지는 믿지 않으셨고 또한, 저도 믿지 않았는데. 며칠 전에 깨달았습니다. 제 조부가 옳다고.”

 

 성이 백선생에게 물었다.

 

 “그럼. 선생은 우리가 과거 함께 만난 인연이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제 조부의 미천한 실력으로 귀한 어진 하나가 남았지요. 용안마저 그대로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용안이라... 일단 왕이었다는 것이고, 그럼 선생이 나에게 전한 이 서책이 과거 그분의 것입니까? 전해주지 못했다던?”

 “이제 전해주실 수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제 소임도 이제 끝이군요.”

 

 유아는 혼란스러웠다. 이 말을 믿는 것 같은 성도 이상해보였다.

 

 “저는 이만-”

 

 성은 집을 나서려는 유아의 팔을 잡았다.

 

 “운명을 믿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운명이라고 했지, 이런 미친 소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난 아닌데.”

 

 유아는 점점 숨이 가빠왔다. 이상하게 다시 슬퍼질 것 같았다.

 

 “당신도 느끼잖아요. 이 느낌. 감정.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들. 이 서책 하나가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래도 갈 건가요?”

 

 ***

 

 꽃이 피고 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왔고, 꽃밭은 시들어 흰 눈꽃으로 뒤덮였다. 뽀드득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사람이 보였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유아였다.

 

 “혹시 그 얘기 알아요?”

 

 그리고 유아의 뒤를 성이 따르고 있었다.

 

 “첫눈이 오는 날,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그럴 리가.”

 “진짜!”

 “치.”

 “어어? 안 믿네?”

 “해마다 오는 첫눈에 소원을 들어주면, 하늘의 그 신은 참 바쁘겠네.”

 “그러니까, 간절해야죠.”

 

 유아가 뒤뚱거리자 성이 유아를 부축했다.

 

 “이렇게 눈이 펑펑 오는데, 굳이 이 추운 날 여길 왜 오잔거야.”

 “그래서, 싫단 거예요? 내가 있는데? 나랑 있는데?”

 

 성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당신이랑 있는데 싫을 리가. 너무 좋아요. 좋아서 아주 죽겠어.”

 “딴 여자한테 그런 눈빛 주기만 해봐, 그냥.”

 “근데, 여긴 왜 온 거예요?”

 “백선생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화원의 방에 선물을 숨겨뒀대요.”

 “백선생에게 여전히 난 찬밥이네요.”

 “당신이랑 나랑 같아요? 난 애제잔데.”

 “난 왕인데?”

 “아주 옛날이고요. 전생.”

 

 마침내 오두막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마루 위에 편지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아는 환하게 웃으며 재빨리 상자로 달려갔다. 유아가 먼저 집은 것은 상자였다.

 

 “어머! 무게가 좀 있네. 무엇이려나~아? 불란서(*프랑스)에서 귀한 것이라도 구하셨나?”

 

 마루에 걸터앉은 성은 편지를 펼쳐보았다.

 

 ‘혼례를 감축 드립니다. 유아 아가씨는 워낙 왈가닥이라 시집살이를 버텨낼 수나 있으려나 염려가 큽니다. 성이 도련님은 부디 그 귀한 눈빛, 아가씨에게만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안이 워낙 훤하시어, 제 염려가 크다는 것만 알아주시길. 조선을 떠나올 때 집안 정리를 하다 가보 하나를 더 발견했지 뭡니까? 그것 또한 저희 집안의 것이 아니기에 주인에게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하나 더, 불란서에서도 쇼콜라는 비싸긴 하지만, 이곳에서의 사업수완이 꽤 쏠쏠해 남은 여비로 조금 보냅니다. 사랑의 묘약이라 불리는 것이니, 부디 아끼지 말고 능히 이용해 사랑하십시오. 두 분. 그럼, 이번 생도 부디 안녕히.’

 

 “이 사람도 참. 우리 혼례는 기가 막히게 알고 선물을 보냈나 봅니다. 또-”

 

 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아가 상자를 열어버렸다. 활짝 피었던 유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게 뭐야?”

 

 성은 유아의 표정에, 백선생의 선물에 피식 웃었다.

 

 “사람 참, 한결같아. 그치요?”

 “그러네. 참, 한결같네. 그 멀리 가서도. 돈도 잘 번다면서.”

 

 작은 비단 주머니가 덩그러니 있었다. 성이 실망한 유아 대신 주머니를 열어 꺼내니, 그 안에서는 무늬도 없는 흰색의 가락지 한 쌍이 툭 나왔다.

 

 “가락지라니. 예물이라기엔...”

 

 이번엔 성이 실망했다. 유아는 성의 손에 있는 반지를 살펴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어쩜 이리도 소박할까?”

 “내가 다이아몬드로 박아 줄 테니, 염려 마요.”

 “난 이것도 좋은데? 이상하게 끌리네요. 이 밋밋하고 투박한 것이. 애들 소꿉장난 같기도 하고. 근데, 우리 손엔 좀 작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크기가 성인의 손가락엔 작았다. 성은 눈썹을 가딱했다. 이상하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것도 과거에서 온 우리 물건인가본데.”

 “그래요?”

 “우린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했어요. 이 반지를 나눠 낄 만큼.”

 “다음엔 더 일찍 만나요. 아주 나중의 일이겠지만.”

 “그럽시다. 부인.”

 

 그리고 유아가 아래 상자를 꺼내 열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가득했다. 성이 먼저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사랑의 묘약이라 한다죠?”

 “사랑의 묘약? 좋네요.”

 “자. 먹어 볼까?”

 

 유아는 자신에게 줄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감고 입을 아~ 벌렸다. 그러나 성은 자신의 입으로 쏙 넣어버렸다.

 

 “여보!”

 “흐흠.”

 “뭐라고요?”

 “흐흐흐흠.”

 “어쩜 혼자 쏙 먹어버리냐. 무정한사람. 흥!”

 

 그러자 성은 유아의 손에서 초콜릿 상자를 뺏어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성은 시익 미소를 짓고는 유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유아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혼자 다 먹겠다고? 사랑의 묘약-”

 

 초콜릿의 맛은 진했고, 달콤함은 짙었다. 가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풍미였다. 유아의 입술을 탐하는 성의 묘약도 달콤하고 진했다. 유아와 성의 입 안을 초콜릿이 가득 메웠다. 순식간에 녹아 사라진 초콜릿에 두 사람은 홀리고 말았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사랑해요.”

 “응?”

 “사랑해. 유아아.”

 “나도. 사랑해요.”

 “백 년 전도, 지금도, 항상.”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알면서도 지키기 위해 택해야 했던 이별의 죄를, 긴 기다림으로 갚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죄는 다시 만났음에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만나, 그 가락지를 끼워주지 못하는 순간에 만나, 우린 이제야 사랑을 택했다. 사랑하여 아픈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았음에 아팠다는 것을, 이생에라도 깨달아 참 다행이다. 사랑하여, 사랑하겠다고 하여, 사랑할 수 있어 좋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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