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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기다림
작가 : joinB
작품등록일 : 2020.9.21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푸른 하늘과 땅과 바람은 여전했다.
널 잃었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이른 걸음을 걸어가버릴 수밖에 없던 나는 아직도 여전했다.
널 떠났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항상 다른 이름으로 가로막았다.
널 위한 것이라고 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만 나는 너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했다.
세상과 멀어진 지금, 멀어지려 하는 지금, 이제야 깨닫는다.
그게, 상처라는 걸.
너를 외롭게 했다는 것을...

나도 너도 기다린다.
사랑에 빠졌던 그 날의 사랑으로부터...

 
91. 시호꽃의 꽃말은...
작성일 : 22-01-27 13:46     조회 : 192     추천 : 0     분량 : 9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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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역적 김구준을 잡아들이라! 종묘사직을 지키라!”

 

 김구준은 발악하듯 성의 군대인 왕실 금군들과 맞섰다. 치열했다. 저렇게 치열해도 되나 싶을 만큼 마치, 죽으려는 듯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주위에 군사들이 하나 둘 칼에 찔려 쓰러져감에도 그의 광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의 눈에 튀어버린 피가 얼굴에 흘러내렸다. 그것이 마치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보였다. 먼발치에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그의 발악에 혀를 끌끌 찼다.

 

 “저렇게 왕이 되고 싶을까?”

 “주상전하께서 외척들한테 베푼 은혜가 얼만데, 배은망덕한. 확! 죽어버려라!”

 

 구준과 우겸은 끝내 마주하지 않았다. 우겸은 결코 칼을 빼들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고, 자신이 없었다. 오랜 시간 정치적인 앙숙이었으나, 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 한 벗이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지금의 관계마저 이룰 수 없었을 것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김구준과 장수급의 군사 다섯뿐이었다. 구준의 팔과 다리, 허리엔 이미 큰 자상이 남았다. 피가 그의 군복을 물들였다. 우겸과 구준의 거리는 서른 발자국 정도나 되었으려나. 구준은 왼쪽 입 꼬리를 올려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말 위에 있던 우겸은 구준의 미소를 보며 어떤 표정도 지어보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것은 어느 순간이든, 어떤 이유이든 어려운 법이었기에. 우겸은 나지막하게 금군대장에게 일렀다.

 

 “사로잡아라. 주상전하의 어명이다.”

 “예, 대감.”

 

 죽이지 말라. 성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칼을 빼든 신하에게 내릴만한 명령은 아니었으나, 그가 왜 칼을 빼들었는가를 알았기에 결코 죽이라 명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로잡아라!”

 

 금군대장의 명에 금군들은 그들을 둥그렇게 싸고 포위망을 좁혔다. 창이 조금씩 조여 올수록 남은 다섯의 군사가 칼을 내려놓았다. 결국 김구준은 항복했다. 포박된 구준이 끌려가는 와중, 우겸이 말을 그의 옆에 붙여 따라갔다.

 

 “난 죽을 각오로 싸웠는데, 결국 죽지는 못했군.”

 “일말의 충심인가?”

 “그런가?”

 

 구준의 항복 소식에 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봉수를 따로 불렀다.

 

 “말한 것은 차질 없이 준비되었겠지?”

 “예. 전하.”

 

 ***

 

 중궁전. 유아는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어린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꺼냈다. 동정하나, 어깨선하며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들었던 것이었다. 뱃속에 꿈틀거리던 아이의 태동을 느끼며 세상의 행복한 마음을 모두 담아 만들었던 배냇저고리였다. 조선에서 가장 좋은 옷감으로, 손때라도 덜 타게 하려 손을 씻고 또 씻으며 만든 터라 아주 새하얗게 잘 보관되었다. 장롱 앞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배냇저고리를 쳐다보는 유아의 뒷모습을 본 연실은 눈물을 훔쳤다. 유아는 천천히 아이의 숨결을 느끼듯 배냇저고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은은한 달빛 같았다.

 

 “마마. 박귀인 들었나이다.”

 “들라하라.”

 

 유아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배냇저고리를 손에 든 채 자리로 돌아왔다. 연실이 유아의 책상 위에 올려둔 배냇저고리를 보며 물었다.

 

 “마마. 그건 어찌...?”

 

 유아는 연실에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박귀인이 들어왔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박귀인이 들어오는데 왜 콧잔등이 시큰했을까요?’

 

 유아의 눈이 촉촉해졌다.

 

 “중전마마. 부르셨나이까?”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모습이 참으로 예뻐 보였답니다. 빛이, 났어요’

 

 “관상감에 일러, 길일을 받아두었네. 자네가 전하를 잘 보필해주리라 믿네.”

 “예?”

 

 ‘말도 하기 싫었어요, 사실. 당신을, 나를,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이건, 태어날 아이를 위해 내가 만든 배냇저고리일세. 난 이제 필요 없으니, 자네가 원손에게 잘 입혀주시게.”

 

 박귀인은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마치 씨받이가 된 느낌이 이런 것일까?

 

 “당분간은 혜빈도, 대비도 만나지 마시게. 나 또한 자네를 부르지 않을 것일세. 마음이 편안해야 좋으니까.”

 “예, 중전마마.”

 

 관상감에서 보내왔다는 그 길일은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과 내일을 넘기는 새벽. 유아는 그 시간을 포기해야 했다. 앞으로 더욱 많이 포기해야할지도 모를 새벽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사람이든 먹을 것이든, 옷이든 다 구해줄 것이니.”

 “예, 마마. 황공하옵니다.”

 “자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 미안하네.”

 “아, 아니옵니다!”

 

 그 순간 유아는 영혼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뒷골을 붕 하고 잡아당겨 혼을 앗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이런 마음으로 포기란 걸, 해야 하는 거구나’

 

 박귀인은 유아의 소중한 배냇저고리를 안고 중궁전을 나섰다. 그런데 만나지 말라 신신당부했던 혜빈, 홍윤희가 떡 하니 박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빈마마!”

 “귀신이라도 본 듯 하구나?”‘

 “여긴 어찌...?”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느냐?”

 “아니옵니다.”

 “그건 무엇이냐?”

 

 윤희는 박귀인의 품에 있던 배냇저고리를 가리켰다.

 

 “중전마마께서 손수 지은 것이라 주셨습니다.”

 “중전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쯧쯧쯧... 그걸 제 새끼에게 입히질 못했으니.”

 

 박귀인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난 이만 중전께 용무가 있어서.”

 “예, 혜빈마마.”

 

 윤희는 도도하게 계단을 올라 중궁전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혜빈마마께오서 드셨나이다.”

 

 유아와 혜빈이 마주보고 앉았다.

 

 “영,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그렇습니까? 송구합니다.”

 “오늘이 합궁일이라지요? 박귀인과.”

 “예.”

 “잘하셨습니다. 손수 배냇저고리도 짓고.”

 “예...”

 “내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비 때문에.”

 “대비마마는 어찌?”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며칠 밤새 후원에서 미친 사람처럼 흰 소복차림으로 돌아다녔다지 않습니까? 깔깔 웃어대면서.”

 “예?”

 “아무래도, 정신이...”

 

 윤희는 자신의 귀 옆으로 검지를 휘휘 돌리며, 정신 나감을 표현했다.

 

 “별궁에 모셔서 시료라도 받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궁인들이 귀신을 봤다고들 난리에요.”

 “글쎄요. 큰일이라면 저에게 보고를 했겠지만,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대비마마를 찾아뵙고-”

 “죽이려들걸?”

 “저를요?”

 

 윤희는 유아의 배를 가리켰다.

 

 “벌써 셋이나 죽였는걸.”

 

 유아는 당혹감과 공포가 순식간에 밀려와 굳어버렸다.

 

 “사람을 보내 별궁으로 잠시 요양을 보냅시다.”

 

 유아는 윤희의 말대로 대비, 김성희를 별궁으로 보내라 명령했다. 성도 동의한 바였다. 그러기 전, 유아는 윤희에게 한 마디 물었었다.

 

 “그 중 한 아이에게라도 마마께선 죄책감이 없으세요?”

 

 윤희는 답하지 않았다. 결백하다는 듯,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만 남긴 채 휙 나가버렸다. 유아는 성에게로 향했다. 매우 다급해보였다. 성은 강연준비 중이었다.

 

 “부인.”

 “같이 가줘요.”

 “어딜? 내가 지금 경연을 해야 해서-”

 “빨리.”

 

 유아는 그 말을 하고는 휙 나가버렸다. 성은 유아에게 홀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따랐다.

 

 “부인! 천천히 가시오.”

 

 유아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왕실 마굿간이었다.

 

 “중전마마!”

 

 말을 관리하던 관리는 화들짝 놀랐다.

 

 “말을 좀 빌림세.”

 “예? 어차피-”

 “중전! 말을 왜?”

 

 성까지 나타나자 관리들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랴!”

 

 유아는 말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성이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수행들이 따르려던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 뒤를 다행히 운검, 어 수만이 제 속도로 뒤따랐다.

 

 “부탁함세!”

 

 봉수는 그렇게 세 사람을 배웅해버렸다. 연실이 봉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저리 보내도 될까?”

 “어디로 가시는 지 아시오?”

 “몰라.”

 “누이!”

 “내가 저 말괄량이를 키웠지만, 아직까지도 저 속을 모르겠어.”

 “타슈!”

 “뭘?”

 “뒤에 타라고.”

 “내가 말을? 말 죽어.”

 “그렇군. 그럼 기다리시던가.”

 “뒤따르려고? 벌써 안 보여. 안 보인다니까!!!”

 

 연실은 결국 뒤따르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말 뒤꽁무니만 바라볼 뿐이었다. 유아는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중전의 모습 그대로 말을 타고 거리를 달리니, 지나가던 백성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 뒤를 용포를 입은 왕이 뒤따르니 더 놀랐다. 유아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퍼져갔다. 어느새 속도가 같아진 두 사람. 수는 그 뒤를 알아서 맞춰 달렸다. 열심히 달린 봉수도 뒤늦게 합류해 수와 속도를 맞췄다. 도착한 곳은 익숙한 산 중턱이었다.

 

 “여길 오고 싶었소?”

 “아뇨. 와야 했어요.”

 “왜?”

 

 유아가 앞장서서 비밀의 화원 입구를 열었다.

 

 “그냥.”

 

 꽃이 가득한 화원이 드넓게 펼쳐졌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들이 가득하군.”

 

 성이 시호꽃을 꺾어 유아에게 건넸다. 유아는 꽃을 건네받았다.

 

 ‘당신이 나에게 준 것이 젊은 날의 슬픔이 아니라 행운이었으면 좋겠어요’

 

 “간만에 오니 좋군.”

 “계약해요.”

 “뭘?”

 “마음이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걸 꼭-”

 “해야 해요.”

 “좋소. 하지.”

 “어긴다면, 당신은 평생 여길 오지 못하는 거예요.”

 “내 아버지가 나에게 준 이곳을?”

 “분명, 약속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행운이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이었으면 좋겠어요.’

 

 유아의 앞엔 시호꽃이 가득했다. 노란 꽃들이 활짝 피어 유아와 썩 잘 어울렸다. 성은 그 모습에 취한 듯 아득한 눈빛으로 유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이 모습을 평생 보고 싶어서라도, 꼭 지켜야겠군.”

 “내가 늙으면, 이런 모습은 없어요.”

 “아니, 당신은 언제나 이 모습일거야.”

 “당신도 언제나 그 모습일 수 있어요?”

 “그럼.”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랬어요.’

 

 ***

 

 “김구준을 유배하고, 위리 안치하라.”

 

 그에겐 머나먼 유배형과 단 몇 평의 하늘과 땅을 허락하는 벌이 내려졌다. 그의 세상은 몇 걸음이면 끝날 집 담장 안 한 바퀴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평상이 전부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구준은 절을 하고 유배지로 떠났다. 하지만 그의 유배는 조선이 아니었다. 그는 곧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성이 그에게 준 새로운 삶을 위해. 구준이 떠나는 날 성희에게 서신이 왔다.

 

 “대비마마.”

 “꺼져!!”

 

 별궁으로 쫓겨난 성희는 모든 것을 화로 풀었다. 그러나 구준에게서 온 서신을 받은 성희는 그날 이후 미치지 않았다. 며칠 후, 구준의 부고가 들려왔다. 자결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두 번째 삶은 없었다.

 

 “그게 무슨...”

 

 성은 허탈했다.

 

 “정말 자결을 했단 말이냐.”

 “예. 곧 시신이 도성에 당도할 것입니다.”

 “대역 죄인이다. 장례도 치를 수 없는데, 시신을 어째서 도성으로 가져와?”

 “유언입니다.”

 

 성은 구준이 성에게 보낸 유언장을 건네받았다.

 

 -주상전하. 소인 대역죄인 김구준이옵니다. 그동안 소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이리 불충하게 갚아 송구하옵니다. 마지막 가는 길 소원이 있다면, 소인의 시신을 대비께 보내주시길 간청하나이다.-

 

 “별궁에 연통을 넣으라. 시신을 그리로 인도하고, 가족에게 인도해 늦은 밤 간단히 장례를 치르라 하라.”

 

 성의 배려로 구준의 장례는 간단히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별궁으로 옮겨졌다.

 

 “대비마마.”

 

 별궁의 넓은 뜰 한 가운데 놓인 허름한 나무 관. 그 안에 구준이 있었다. 성희는 처소에서 나와 멀리서 관을 지켜만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덤덤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보내.”

 “예?”

 “알겠으니까, 보내라고.”

 

 뭘 알겠다는 것인지, 왜 짜증을 내는 것인지 궁인들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있는 힘껏 꽉 쥔 성희의 주먹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

 

 시호꽃의 꽃말은 행운 혹은 젊은 날의 슬픔이라고 했다.

 

 “더는 머무시면 안됩니다.”

 

 유아는 대전에 있었다. 곧 이곳은 유아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 될 예정이었다. 성은 다른 여인을 품어야했고, 유아는 그것을 애써 외면해야했다.

 

 “가마가 당도했나이다.”

 

 성은 유아에게 밖으로 나가있으라 부탁했다.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예?”

 

 봉수는 당황했다.

 

 “돌아갈 것이니, 염려 마시게.”

 

 유아는 대전에서 나왔다. 힘들어보이지도 않았다. 미련이 남아보이지도, 힘이 쭉 빠져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고 더 우아하게 걸음을 걸어갔다.

 

 “마마.”

 “후원으로 가자.”

 “예.”

 

 후원엔 예쁜 꽃들이 많았다. 유아는 꽃을 좋아했다. 성은 그런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꽃이 모인 후원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 곳에 숨고 싶었다. 그러면, 괴로울 것 같은 새벽의 그 순간도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의 이슬이 얼굴 위로 떨어지며 찬 기운을 내뿜는 시간. 유아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후원의 예쁜 꽃들과 함께했다.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시간이었다.

 

 “날이 차구나.”

 

 새벽이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은 자신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찬 공기에 온 세상이 참으로 푸르렀다. 막상 나오니 넓은 궐에 갈 곳이 없었다. 방황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유아가 궐 어딘가를 거닐고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다. 봉수가 물었다.

 

 “전하. 어디로 모실까요?”

 “...”

 

 8년이 흘렀다. 그 사이 박귀인은 아이를 낳았고, 다행히 아들이었다. 유아가 만든 배냇저고리를 입었고,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이조판서 박철은 영의정이 되었다가, 병으로 일찍 죽었다. 힘을 잃어버린 박귀인은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 중궁전에 사람 머리뼈를 심고 주술을 하다 결국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되었다. 아이는 유아의 품에서 자랐고, 원손이 되었으며, 5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아이는 8살이 되었고, 유아를 엄마로 알고 자라고 있었다.

 

 “어마마마.”

 

 중궁전의 문이 열리고, 부쩍 철이 든 여덟 살의 세자가 유아를 찾아왔다.

 

 “세자. 오늘은 공부를 일찍 끝내셨나봅니다.”

 “예. 진도가 빠르다 하셨습니다.”

 “스승님들께 감사하다 전해야겠군요.”

 “헌데, 대왕대비께오서는 제 아침문후를 왜 받지 않으시옵니까?”

 “옥체가 미령하시어 그럽니다.”

 “예.”

 

 세자라고 모를까. 하지만 의젓하게 유아의 새하얀 거짓말을 받아들였다.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자도 곧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예. 어머니.”

 “아들. 수업도 일찍 끝났는데, 말이라도 타러 갈까요?”

 “정말요?!”

 

 세자는 말 타는 것을 즐겼다. 유아는 세자를 앞자리에 태우고 말을 내달렸다.

 

 “신납니다!”

 “오늘은 특별한 곳으로 가 볼까요?”

 “어디요?”

 “비밀입니다.”

 

 유아가 도착한 곳은 비밀의 화원이었다.

 

 “우와~!”

 

 눈이 휘둥그레진 세자가 처음 비밀의 화원을 온 것이었다.

 

 “조선팔도 이곳을 올 수 있는 사람은 전하와 나 뿐이랍니다. 이제 세자도 이곳을 올 수 있고요.”

 “정말요?!”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궐로 돌아온 두 사람의 앞에 윤희가 나타났다.

 

 “세자.”

 “할마마마.”

 “어디를 갔다가 오시는 겁니까?”

 

 세자는 유아의 등 뒤에 숨었다.

 

 “제가 세자를 데리고 바깥 구경을 좀 하고 오느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서책 읽는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까?”

 

 그때, 윤희의 뒤에서 박귀인이 슬며시 나타났다.

 

 “세자.”

 “귀인마마.”

 “귀인마마라니! 어머니라 해야지요.”

 

 윤희는 호통을 쳤다. 그럴수록 세자는 더욱 유아의 품에서 떠나지 않으려했다.

 

 “박귀인이 무슨 일인가?”

 “중전이 그리 감싸고돌면, 장차 세자의 미래가-”

 “그건, 어미인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세자는 누구보다 강건하고 잘 자라고 있습니다. 제 아들이니, 혼을 내시려거든 세자가 없는 자리에서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아직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할 나이인지라.”

 

 유아는 세자를 보호했다.

 

 “세자. 전하께서 지금쯤 서고에 계실 겁니다.”

 “예, 어마마마.”

 

 세자가 자리를 떠나고, 세 명의 왕실 여인만 남은 자리. 유아는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8년의 시간동안 강해졌다 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를 보며, 모성애가 강해진 덕이었고, 왕실 권력전쟁에 익숙해진 것도 있었다.

 

 “혜빈마마. 아직까지 세자에게 박귀인이 어미라 하십니까?”

 “그야, 낳은 이는 박귀인이니-”

 “제 아이입니다. 이 나라의 국본이 중궁의 자식이 아니고 후궁의 자식이라 하면, 장차 세자가 어찌 되겠습니까? 광해군의 전철을 밟게 하고자 하십니까?”

 “뭐라?”

 “박귀인은 더욱 근신하고, 당분간은 처소에서 나오지 말고 내훈을 모두 받아 적으라.”

 “예?!”

 

 유아는 혜빈에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중궁전으로 돌아오는 길. 유아는 성과 마주했다.

 

 “전하. 서고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성은 굳은 얼굴로 유아를 바라보았다.

 

 “전하.”

 “오늘 나만 쏙 빼놓고 화원을 가셨다고요?”

 

 성의 뒤엔 숨어있던 세자가 나타났다.

 

 “어머니...”

 “비밀이라하지 않았습니까, 세자?”

 “송구합니다.”

 

 성은 제대로 삐쳐있었다.

 

 “전하~”

 “어찌! 실망입니다. 변하셨어요. 이젠 내가 아니라 아들이 먼저신가 봅니다. 아예 화원을 세자에게 몽땅 주시렵니까?”

 “전하.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어찌 그러십니까? 우선 서고로 가시지요.”

 “됐습니다. 세자와 가시구려.”

 

 성은 유아를 지나쳐 휙 걸어가 버렸다. 유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 이번엔 또 어찌 달랜다?”

 

 연실은 고개를 내저었다.

 

 “백선생께 서책 몇 권 구해오라 연통할까요?”

 “그것으로는 안 된다.”

 “어쩌시려고?”

 

 곰곰이 생각하던 유아는 연실에게 귓속말을 했다.

 

 “청씨 아재가 값을 꽤나 치려 할 텐데요?”

 “그 정도는 쉽잖아. 서둘러!”

 

 연실은 무거운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어딘가로 달려갔다. 연실이 날린 하얀 비둘기는 다리에 긴급한 연락을 매달고 재빠르게 날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청의 가게. 청은 비둘기를 불러들였다.

 

 “간만이구나. 이 녀석. 살이 통통하구나.”

 

 청은 비둘기 다리의 쪽지를 떼어 냈다.

 

 “에잉?! 이건 왜?”

 

 성은 잔뜩 삐친 채 처소에서 밀린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쌓아놓은 둑을 더 높여? 이유도 없이? 중전이 만든 구휼관이 잘 돌아가고 있어? 그래, 내 일은 뒷전이고 밖으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잘 될 수밖에. 허!”

 “저, 전하?”

 “에잇! 못해먹겠다!”

 

 성은 상소문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기분이 아니니 모두 물리라!”

 “전하...”

 

 그때였다. 유아가 연실에게 급히 작은 주머니를 건네받고는 대전으로 달려왔다.

 

 “헉... 헉!... 고하시게.”

 “예. 중전마마.”

 

 성은 발라당 누워버렸다.

 

 “전하. 중전마마께오서 납시었나이다.”

 

 성은 문 쪽을 노려보았다. 비수가 휙 날아간 것 같았다.

 

 “전하.”

 “드시라하라.”

 

 문이 열리고 유아가 눈짓으로 모두에게 자리를 비워달라 청했다.

 

 “전하...”

 

 ‘당신이 준 행운은 다행히 나에게 무사히 도착했지요’

 

 “기억나십니까?”

 “무엇을?”

 “이거.”

 

 유아는 작은 주머니에서 투박한 은반지를 꺼내보였다.

 

 “제가 혼례를 할 때도 이 반지를 받지 못해, 내내 마음에 걸렸지 뭡니까?”

 “이게 뭐요?”

 “설마... 잊으신 겁니까?”

 “은반지가 뭐?”

 

 유아의 미소가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반지는 제가 전하께 드렸잖습니까? 헌데, 잃어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성은 그제야 팟- 하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묵직한 기억을 떠올렸다.

 

 “어찌 잊겠소.”

 “잘 보관하고 계시지요?”

 “그, 그게... 그러니까-”

 “값비싼 옥반지보다 전 이 반지가 더 값졌지요. 우리의 마음이 담긴 것이니까요.”

 “미안하오.”

 “제가 송구합니다. 허나, 우리의 아이에게 그곳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우리가 이 세상에 없으면 그 다음은 세자의 차례가 아닙니까?”

 “잃어버렸소.”

 “예?!”

 

 반지가 유아의 손에서 텅 하고 떨어졌다.

 

 “잃어, 버렸다고요?”

 “미안하오.”

 “변하셨습니다. 정말... 젊은 궁녀에게 마음을 주신 게 맞나보군요.”

 “중전! 그게 무슨! 누가 그런 헛소리를. 아니오~ 절대! 절대 아니오.”

 “그렇군요... 제가 늙었지요. 옛 추억을 이야기하기엔.”

 “중전~”

 “그리고 전하께선 참으로 좋은 분입니다. 이렇게 저와의 약속은 잊지 않으시고, 매번 저를 아껴주시니.”

 “아, 아니오. 그게 아니라니까.”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이젠 쓸모없는 것이니.”

 

 유아는 성을 위로하려다 되레 상처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요. 당신의 마음은 여전하다는 걸.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요.’

 

 “부인!”

 

 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아를 붙잡았다.

 

 “입 맞춰도 되오?”

 

 유아는 피식 웃었다.

 

 “안 됩니다.”

 “내가 잘못했소.”

 “아니오.”

 “에잇!”

 

 성은 유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갈 생각 마시오. 분명 내가 화가 났어야 했는데, 왜 이리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오. 그 반지는...”

 “이것입니다. 이 반지요.”

 “어?”

 “반짝반짝 광을 내어달라 부탁했죠.”

 

 여덟 살의 아들이 있는 나에게, 더는 젊지 않은 나에게 슬픔은 이제 없으리라. 행운만이 행복만이 가득한 삶이라, 나는 내가 매일 가꾸는 꽃들의 꽃말을 모두 그리 바꾸고 있었다. 그러리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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