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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기다림
작가 : joinB
작품등록일 : 2020.9.21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푸른 하늘과 땅과 바람은 여전했다.
널 잃었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이른 걸음을 걸어가버릴 수밖에 없던 나는 아직도 여전했다.
널 떠났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항상 다른 이름으로 가로막았다.
널 위한 것이라고 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만 나는 너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했다.
세상과 멀어진 지금, 멀어지려 하는 지금, 이제야 깨닫는다.
그게, 상처라는 걸.
너를 외롭게 했다는 것을...

나도 너도 기다린다.
사랑에 빠졌던 그 날의 사랑으로부터...

 
74. 돌고 돌아 겨우 만났는데
작성일 : 22-01-27 13:39     조회 : 181     추천 : 0     분량 : 1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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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혜빈의 처소. 혜빈, 홍윤희는 홍미령을 불러 신신당부했다.

 

 “귀인. 중전의 곁에 꼭 붙어있거라.”

 “예? 어째서요?”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해. 그리고 좀 배워. 국모가 되려면 어찌되어야 하는지.”

 “제가 국모가 될 수 있나요?”

 

 윤희는 답하지 않았다.

 

 “꼭 붙어서 관찰해. 뭘 하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싫은데...”

 “어허!”

 “네...”

 

 다음날 아침. 유아는 일찍 잠에서 깼다.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아침부터 콜록거렸다. 간질거리는 목구멍 때문에 자리끼 물을 찾았지만, 밤새 물을 마셔서인지 물이 없었다. 유아는 잠긴 목소리로 밖의 궁인을 불렀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활기찬 목소리로 답하고 유아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궁녀가 아닌, 미령이었다.

 

 “귀인?”

 

 유아는 뜻밖의 인물이 아침부터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니 어리둥절했다.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아에게 미령이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기침하셨습니까?”

 “홍귀인이 왜?”

 “아침문후를 드리러 왔지요.”

 

 평소에 하지 않던 짓. 유아는 더 경계했다. 그러나 인자하게 맞이했다.

 

 “반갑네. 미안한데, 옆방에서 잠시 쉬고 있으면 안 되겠나? 내가 정신을 좀 차리고야 아침문후를 받을 수 있겠는데.”

 “아! 예,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고맙네.”

 

 미령이 방에서 나가고 세숫물을 가져온 연실과 마주쳤다.

 

 “귀인마마?”

 “김상궁.”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침문후를 드리러 왔네. 마마께서 잠시 옆방으로 가 대기하라 하셔서.”

 “예. 그러시지요. 안내 해드려라.”

 

 나인에게 안내를 맡긴 연실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아에게 갔다.

 

 “아니, 해도 똑바로 떴던데, 무슨 일이랍니까?”

 “홍귀인을 보았느냐?”

 “뭔 일이래요?”

 “나도 알 수가 없구나.”

 “수상합니다.”

 “마찬가지다.”

 “몸은 괜찮으세요?”

 “조금...”

 “거 봐요! 춥다니까. 말 드럽게 안 들어먹어.”

 “어허. 좀!”

 “때릴까 말까 하다가 그건 참았네요.”

 “나 목말라.”

 “그렇지 않아도 가져왔어요. 밤새 물을 어찌나 드시던지.”

 

 유아는 연실에게서 물 사발을 받고는 벌컥 벌컥 들이켰다.

 

 “캬~! 살겠다.”

 “품위 없긴 매한가지네요.”

 

 시원함의 기쁨도 잠시, 유아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별일 아닐 겁니다. 그걸 또 염려하고 계십니까?”

 “도승지라도 만나야겠어. 도승지는 알지 않을까?”

 “하긴. 혜빈과 맞선 이후로 도승지가 정신을 차렸는지. 충신도 그런 충신이 없답디다.”

 “잠시 보자고 연통 넣어.”

 “예. 바로 알릴게요. 지금 부를까요?”

 “아니야. 조회 끝나고 봐도 되겠지.”

 “밖에 명옥이 있느냐?”

 

 연실의 부름에, 명옥이라는 이름의 나인이 쪼르르 방으로 들어왔다.

 

 “예, 마마님.”

 “도승지께서 입궐하셨나 알아보고, 입궐하셨으면 중전마마께서 아주 잠깐 뵙잔다고 전해.”

 “예, 마마님.”

 

 유아가 만류를 해도, 이미 명옥이라는 궁녀는 자리를 떠난 뒤였다. 명옥이라는 궁녀는 발이 빨랐다. 도승지가 있는 집무실에 도착한 명옥은 바로 영목을 찾아냈다.

 

 “도승지영감. 중궁전에서 보냈습니다.”

 “무슨 일인가?”

 “중전마마께오서 잠시 시간이 되시면 보잔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

 “예.”

 “바로 가겠네.”

 “예. 영감.”

 

 무슨 일인지 옆방에서 대기 중인 미령은 즐거워보였다. 방 안을 두루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중궁전 뭐, 별거 없네. 흔한 청자 하나 없고. 백자도 없고. 꾸미는데 취미가 없나?”

 

 그리고 영목이 금방 중궁전에 도착했다.

 

 “마마. 도승지영감께오서 드셨습니다.”

 “드시라해라.”

 

 도승지라는 말에 미령의 귀가 쫑긋했다.

 

 “오라버니?”

 

 그리고 윤희가 시키는 대로 창문에 귀를 대고 엿들으려 바둥거렸다. 영목은 유아와 단 둘이 마주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로 찾으셨습니까?”

 “도승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하명하소서.”

 “혹시... 요즘 전하께서 수중에 작은 병을 가지고 계시나요?”

 “병이요?”

 “네. 혹시, 본 적 있나요? 방에서나 아님 어디서든?”

 “아니요. 본 적 없습니다.”

 “따로 말씀하신 것도?”

 “헌데, 그런 건 어찌 물어보시는 것이 온지?”

 “별일... 이긴 한데...”

 “아... 혹시 들으신 겁니까?”

 “전하께서 다 아셨다 들었습니다. 성소용의 일도. 정훈세자의 일도. 해서, 혹시나 하여...”

 “하여 여쭙습니다. 성소용을 마마께오서 죽게 하신 것은 아니지요?”

 “내가 죽이다니요? 다 알고 계시다면서요?”

 “정말... 수정전(*대비전)입니까?”

 

 유아는 다시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뱃속에서 힘없이 죽어간 아이, 성소용, 아버지까지. 그들의 죽음이 유아의 뇌리에 박혀 두통을 만들어냈다. 고통스러움을 들킬까 유아는 영목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말문을 열었다.

 

 “네... 지금가지 조사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직접 협박도 들었으니까요.”

 “마마께 직접이요?”

 “구중궁궐입니다. 제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전하께 이런 말까지는 전하지 마세요. 내가 전하지말라는 말도 하지 마시고. 그저, 흔들리시지 않도록 잘 보좌만 해주세요. 지금처럼만.”

 “마마...”

 “벗이잖습니까? 전하께 얼마 남지 않은...”

 “이제라도 화해를 하심이 어떠십니까?”

 “화해라니요. 용서지요. 제가 전하께 박은 못이 너무 많습니다.”

 

 영목은 유아가 안쓰러웠다. 오랜만에 마주한 유아는 많이 야위어있었다. 바람만 살랑 불어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 느꼈다. 그리고 누이동생이 떠올랐다.

 

 “부부는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생사고락을 함께 나눠야 하는 법입니다. 그것이 왕과 왕비라 하여 다르겠습니까? 마마의 짐을 전하께 나누소서. 그것이 전하께 득이 되는 것이옵니다. 감히 예상하건데, 제가 아는 저의 벗은 아내가 홀로 짐을 이고 쓰러져가는 것을 보는 걸 더 싫어합니다. 죽을 만큼.”

 “고맙습니다. 귀한 시간을 오래 뺏을 순 없지요. 이만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영목은 그렇게 중궁전을 나왔다. 한편, 영목이 나가고 그 뒤를 미령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마마?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혜빈께서 당분간 옆에 꼭 붙어있으라 하셨습니다.”

 “마마! 아직도 그러십니까?”

 “제가 뭘요. 혹여 압니까? 전하께서 여기는 오실지.”

 

 영목은 철없이 구는 미령을 노려보았다.

 

 “중전마마의 곁에서 해나 끼치지 마세요. 잘 보고 배우세요. 그리고 보필하세요. 정성을 다해서. 그게 우리 남매가 살 길입니다.”

 “치!...”

 

 미령은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영목에게 서운해 토라졌다. 그리고 툴툴거리며 다시 중궁전으로 들어갔다.

 

 “마마!”

 

 미령은 언제 삐쳤는지도 모를 만큼 다시 해맑게 유아의 앞에 앉았다.

 

 “홍귀인.”

 “오라버니께서 오셨던데요?”

 “내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무엇을요?”

 “그냥... 요즘 육의전 상인들이 채우겸 영감에게 해코지를 한다지 뭔가?”

 “왜요?”

 

 유아는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단장하고, 산보하는 것도 중하지만. 전하께서 요즘 무엇에 관심이 많으신 지를 알아보는 것도 좋네. 자네가 전하의 마음을 위로해야 하는 중한 역할을 맡고 있으니, 그것을 알면 더욱 도움이 될 게야.”

 “그런 걸 왜 저에게 알려주십니까?”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니. 자네가 위로를 해주었으면 해서.”

 “마마께서 못하신다고요?”

 

 유아는 괜히 쓸쓸한 표정을 들킬까 싶어 화제를 돌렸다.

 

 “요즘 귀인은 뭘 하고 지내는가? 새로운 취미는 찾으셨나?”

 

 미령은 유아의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취미도 이야기 하고, 소설책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수라에 차에, 점심,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함께하니 미령은 유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느새 정이 든 것이었다.

 

 “마마께선 참으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십니다.”

 “그런가? 내가 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참 말이 많았는데.”

 “정말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차분하신 걸요?”

 “이곳 생활이 날 바꿔놓았지. 그리고 전하의 곁에 있으려면, 그럴 수밖에.”

 “전하께선 그런 여인을 좋아하십니까?”

 “아니. 자네처럼, 활발한 여인을 좋아하시네. 밝고 명랑한.”

 

 미령은 갸웃했다.

 

 “왜 계속 저에게 전하의 곁에 있으라 하십니까? 전 연적이잖아요.”

 “연적? 하하하하하!”

 

 사랑의 라이벌. 연적이라는 말에 유아는 웃음이 터졌다.

 

 “맞네. 하하하하하!”

 “그게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전하의 총애를 다 가져가면 어쩌려고요?”

 “그럼 다행이지. 전하께서 마음 편히 지낼 곳이 하나 생기는 것 아니겠나?”

 “참 이상하십니다. 전하를 더는 연모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니.”

 “헌데, 왜요?”

 “그러게...”

 

 유아는 결국 쓸쓸한 미소를 보이고 말았다. 미령은 그 미소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멈췄다.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화살이려나? 미령은 멈칫하고 유아를 쳐다보았다. 저 미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눈앞에 이 여인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더는 없겠구나 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랑. 꼭 그런 것 같았다. 우러러 보지만, 자신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

 

 “저... 잘못했어요.”

 “뭐?”

 “까불었어요. 일부러.”

 “귀인?”

 

 미령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줄도 모르고, 버릇없이 굴었어요. 용서해주세요.”

 “귀인. 바로 앉게. 어서.”

 “앞으론 배울게요. 마마의 곁에서 진짜, 제대로 배울게요. 이제 알았어요. 오라버니가 마마의 곁에서 배우라는 게 뭔지.”

 

 유아는 미령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다 이해해. 성소용이 그렇게 된 이후로 궐에 벗이 없다 여겼는데, 다행이야. 또 벗이 생겨서.”

 

 그렇게 유아와 미령은 마음을 나누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 미령은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성이 있는 왕실 서고로 향했다. 들어가지 말라는 상선, 차봉수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들어가 성의 앞에 섰다. 상당히 다급해보였다.

 

 “전하! 할 말이 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성은 미령의 말을 듣기 위해 주위를 물렸다.

 

 “말하라.”

 “중전마마께 가세요.”

 “뭐라?”

 “그 분의 곁을 지켜주세요. 아니, 위로해주세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귀인?”

 “전 알아요... 웬만한 궁인은 다 안다고요. 중전마마께서 무슨 곤욕을 치르며 전하의 옆을 지키고 있는지를. 헌데, 왜 전하만 모르세요? 왜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더 아프게 하세요?”

 “귀인!”

 “성소용. 성소용은... 마마께서 필사적으로 지키셨다고요. 그런데... 결국 죽고 말았어요.”

 “필사적이었다고?”

 “심지어 성소용이 먹는 물 하나까지 죄다. 그리고 중전마마께선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무슨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유산을 하셨어요.”

 “유산?”

 “참 못난 사내십니다. 전하께선. 정말 못됐어!”

 “뭐?”

 “당장 중전마마께 달려가세요. 중전마마께선 제가 전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옆을 부탁한다고까지 하셨다고요. 그만큼, 전하를 연모한다고요. 자신이 망가져도 연모하는 사람만 행복하면 다 괜찮다 할 만큼.”

 

 성은 주저했다. 그때 미령이 성의 팔을 잡아 당겼다.

 

 “빨리 움직이세요. 이러다 늦는다고요! 빨리, 후원으로 가세요!”

 

 성은 미령의 성화에 거의 쫓겨나듯 서고에서 나왔다. 쭈뼛거리는 성을 본 봉수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후원으로 가시옵니까, 전하?”

 “어?”

 

 수도 웃음을 참으려 눈까지 질끈 감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코로 피식 거리는 웃음이 결국 새어나오고 말았다. 성이 수를 보자, 수는 금세 정색하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가자.”

 

 한편, 유아의 몸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다. 겨울의 찬 공기를 마시며 벌써 한 시간을 걷고 있으니, 연실은 주인을 위해 강수를 두기로 결심했다.

 

 “유산도 해산만큼 산모의 몸을 지치게 합니다. 회복도 필요하고, 몸을 차게 하는 것은 더욱 경계해야하니, 어서 처소로 가시지요.”

 

 연실의 말에 멀찌감치 앞장서서 걷던 유아의 걸음이 뚝 멈춰버렸다.

 

 “넌, 꼭 그러더라?”

 

 연실은 뒤에 따르던 궁녀에게 손짓했고, 궁녀는 털이 달려 두터운 장옷을 건넸다. 연실은 유아의 어깨에 두꺼운 장옷을 걸쳤다.

 

 “가시지요.”

 

 유아는 연실의 이끌림에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멀리 서 있던 궁인들이 길을 비켜서다말고 한 쪽을 바라보고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냐?”

 

 유아가 물어도 궁인들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차마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무언가를 본 것인가? 유아와 연실은 궁인들이 일제히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엔 붉은 도포의 그림자가 있었다. 노을이 지고 있는 가운데, 붉은 도포의 그는 더욱 후광이 나는 것 같았다.

 

 “전하...”

 

 연실은 유아를 부축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지는 노을을 후광삼아 걸어오는 왕, 성이었다. 노을을 등져 얼굴이 어둡게 보여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유아는 자칫 빛이 나는 그의 모습에 서운하고, 밉고, 화가 난 감정이 모두 녹아내릴 뻔하였다.

 

 “중전.”

 

 보폭이 넓은 성은 성큼성큼 걸어와 유아의 앞에 멈춰 섰다. 유아는 다소 푸르러지기 시작한 입술을 앙 다물고 성을 올려다보았다. 다가오는 동안은 여전히 바닥의 그의 걸음만 볼 뿐이었다. 그 걸음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표정으로 오는 걸까? 무슨 말을 하려 다가오는 걸까? 또 다시 자신을 탓할까를 염려하면서 말이다.

 

 “안색이 좋지 못하구려.”

 

 그 어떤 예상을 빗나가는 표정이었다. 그 어떤 감정도 없는 표정. 걱정도, 미안함도, 다정함도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 유아는 눈빛이 흔들렸다. 더 이상 성의 얼굴은 빛나지 않았다. 유아는 성의 무미건조한 눈빛에 일말의 기대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렇습니까?”

 “산보를 하고 계셨소?”

 “예. 답답해서.”

 “안색이 좋지 못하니, 어서 처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어의를 들라해야겠군.”

 “아닙니다. 날이 차니, 전하께오서는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유아는 토라진 것이었다. 성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가 저토록 무뚝뚝한 얼굴로 화가 나 있을 땐, 당최 어찌 해야 할지 난감한 그였다. 저 화를 어찌 풀어주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유아는 성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유아가 성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은 다급해졌다.

 

 “내가 이곳에 왜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유아는 성의 말에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이 순간에, 아내가 화가 난 것도 모르는 것 같아 서운했던 것이 이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참고 또 참았다. 이곳에서 살며 10년을 참았듯 그렇게 참으려 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성은 유아의 눈빛에 잠시 움찔했다. 두 사람이 이렇듯 살얼음판 위를 걷는데, 곁에 있는 궁인들은 하물며 어떠하겠는가? 슬금슬금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있으면 하시지요.”

 “좀 걷겠소?”

 

 유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성을 한번 쳐다보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왕을 저토록 싸늘하게 쳐다볼 수 있는 특권은 현 세상에 딱 두 사람, 대비와 유아일 것이었다. 성은 궁인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며 등 뒤로 손짓하고는 화난 유아의 뒤를 따랐다. 궁인들은 멀어져 가는 성을 한번 보고, 자신들끼리 눈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뻔한 결말로 향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혼만 나면 다행이다 싶은 뭐 그런.

 

 “천천히 걸어갑시다.”

 “하실 말씀 있으시거든, 어서 하세요.”

 “뭐가 그리도 급하시오.”

 “제가 급해 이러는 것 같습니까?”

 “아니...”

 “춥습니다. 말씀하세요, 이제.”

 

 연못을 빙 돌아 중간 지점에 도착한 유아가 휙 돌아 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서요.”

 “보는 눈도 있는데,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그냥 어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는 눈이 있다하시면 제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감히.”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오?”

 “항상 이런 식이십니다. 10년입니다. 아니, 20년 가까이를 전하께선 매번!...”

 “내가 뭘 어찌했다고...”

 “그리 가여운 눈빛 마십시오. 하나도 안 예쁩니다.”

 

 유아는 아예 성을 등지고는 화를 삭이려 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서운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항상 외로웠습니다. 나는 열 살에 정인이 생겼는데, 주위에 그렇게 매일같이 사람이 우글우글 대는데도 외로웠습니다. 제겐 지아비는 있으나, 연인은 없었습니다. 제게, 연모를 주던 사내는 없어졌습니다. 처음엔 그런 욕심도 과하다 여겼습니다. 전하께 시집을 오겠다 결심한 그 순간부터, 참으로 가엽고 가여운 저 분에게, 그저 어깨 한 번, 무릎 한 번, 기대고 뉘일, 그 정도만 해도 참 좋겠다 하는 그런. 유일한 삶의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지금은?”

 “지금은... 신첩이 욕심을 내도될는지요? 이젠, 욕심을 조금 내어도 되지 않습니까?”

 “미안하오.”

 

 미안하다는 성의 말에 유아는 울컥하는 덩어리가 목구멍 위로 튀어나와 버렸다. 눈앞은 어찌나 흐린 지, 눈시울은 어찌나 뜨거운 지, 눈물은 어찌 그리 굵게도 떨어지는지. 흐른 눈물은 찬바람에 금방 식어버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눈물이 가슴으로 툭 떨어졌다. 마치, 목구멍으로 솟아오는 그 덩어리를 조금이라도 식히려는 듯이. 성은 조금씩 유아의 가까이로 걸어갔다.

 

 “많이 서운하였다는 걸, 헤아리지 못하였소. 수없이 많은 백성의 마음은 그토록 헤아리려 하면서 정작, 내 곁에 가장 가까운 내 부인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였소.”

 

 유아는 울음을 끝내보려 눈을 질끈 감았지만, 슬픔은 더욱 솟구쳐 올랐다. 그 동안의 인내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입궁한 이후로 이토록 울어 본 적은 없었듯 싶었다.

 

 “뚝! 사람들이 보잖소.”

 “흑...”

 

 성은 어찌할 줄을 몰랐고, 자신의 손을 어찌해야 할지, 걸어가던 걸음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수풀에 숨어 이를 몰래 지켜보던 궁인들을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어깨라도 토닥거려 주셔야지요.”

 “꼭 안아주셔야지요. 여인이 울지 않습니까.”

 “거, 참. 답답하네. 대체 상선께선 무슨 정보를 주신 겝니까?”

 “나는 최선을 다 했네. 연실이 자네가 전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나?”

 “공석에선 이름 부르지 말라지 않았습니까? 엄연히 중궁전 지밀상궁입니다!”

 “쉿! 마마님!...”

 

 이 와중에도 봉수와 연실은 티격태격 이었다.

 성은 들썩이는 유아의 어깨를 보고 알아차렸다. 자신이 지금 어찌해야하는지. 들썩이는 어깨를 자신의 큰 손으로 감싸 안았고, 차가워진 유아의 몸을 따사로이 안아 녹였다. 유아의 등 뒤로 꼭 안아주었다.

 

 “그래도 잊은 적은 단 한시도 없소. 아니, 잊는다면 내가 미쳤겠지. 그대가 나의 정인이라는 걸.”

 

 정인. 그 오래 전의 약속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맹세했었던 날이 있었다. 꽃들이 가득한 둘만의 비밀의 장소에서 어렸던 두 사람은 약속했다.

 

 “이토록 무정한 내가, 과연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 언젠가 그대의 품에 안겨있을 우리의 아이에게, 내 아버지처럼 좋은 아비가 될 수 있을까?”

 

 유아는 더욱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아이를 품에 가득 안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질투와 욕망이 앗아간 축복이었다.

 

 “이젠 그럴 수 없다 해도 괜찮으나, 두렵소. 나의 정인이 고작 그런 일로 나를 멀리할까 하여.”

 

 성은 유아를 돌려 세웠다. 그리고 눈물로 얼굴 진 얼굴을 조심스레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니, 약속 하나 더 해주시오. 나를 멀리하지 않겠다고.”

 “전하...”

 “나로 인해 당신이 겪은 그 고통들을 난 왜 이제 알았을까? 땅을 치고 후회했소. 나는 어찌 매번 당신에게 고맙고 미안한 일만 벌이는지 모르겠군.”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유아의 말에 성이 피식 웃었다.

 

 “이 와중에도 난 혼나는구려.”

 “제 인내가 강해진 것입니다.”

 “그만 뚝! 심장이 뚝뚝 녹아내리는 것 같소. 막 쓰리오.”

 “옥체 미령하신 것입니까?”

 

 성이 가슴을 부여잡고 아픈 시늉을 하자, 유아는 눈물을 뚝 그쳤다. 아직도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아의 눈빛에 성은 흐뭇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그동안 대체, 이 여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후회스럽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유아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오.”

 “다 아시려면, 또 매일 밤을 지세우셔야 하겠지요?”

 “이리 꼭 겨 안는데도, 나는 계속 혼이 나는 군.”

 “놓아주십시오.”

 “싫소.”

 “정녕, 옥체 상하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유아의 말에 성은 얼른 떨어졌다. 유아는 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리 재빠른 분이신 줄 몰랐네요.”

 “오호~ 우린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소. 좋은 징조요.”

 

 유아는 가재 눈을 뜨고 보았다.

 

 “그리 보지 않으면 안 되겠소? 보는 눈들도 있는데.”

 “여긴, 전하와 저. 단 둘입니다.”

 “모르지. 나야 이 나라 지존이니, 운검들이 주위에서 지키고 있을지도...”

 “점점, 불리한 말씀만 하시니.”

 “그럼, 불리한 김에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아니요.”

 “그리 금방 답하지 말고. 찬찬히 들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요.”

 “부인~”

 “아니요!”

 

 유아가 버럭 하는 바람에 성은 물론, 지켜보던 궁인들도 움찔했다.

 

 “까, 깜짝이야. 그 목소리도 반갑군.”

 

 유아는 그저 아련한 눈빛을 하고는 성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그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미안해요. 당신의 품에 꼭 당신을 닮은 아이를 안겨드리고 싶었는데.’

 

 “날이 찹니다. 옥체 상하실까 염려되니, 이만 처소로 가시지요.”

 

 유아가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성은 유아의 팔을 잡아 당겨 세웠다.

 

 “내가 하고픈 말은 아직 시작도 안했소.”

 

 유아는 놀란 눈을 하고는 성을 바라보았다.

 

 “사랑해.”

 “네?”

 

 성은 유아를 끌어 당겼다.

 

 “여전히 성미가 급하군.”

 “아니-”

 “유아아.”

 “눈앞이 아른거립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그러게요. 아직 인내가 부족한가봅니다.”

 

 성은 시익 웃고는 유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서는 속삭였다.

 

 “내 아주 독한 약으로 처방 해줄까 하는데, 어떻소?”

 “어떤 처방이요?”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아주 귀한 처방.”

 “이젠 서방님의 얼굴도 아른거립니다.”

 “어허. 어서 처방을 해야겠군.”

 

 성은 유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

 

 성은 속삭였다.

 

 “처방은 이제 시작이오.”

 

 성은 유아의 반대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 코, 눈, 그리고 입술에도 입을 맞추었다. 유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떻소?”

 “음. 글쎄요. 조금?”

 “상태가 아주 심각한가보오.”

 “아직도 어지럽고, 아른거립니다.”

 “이런.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겠소.”

 “강력한 처방-?”

 

 성은 유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진하게, 더욱 진하게. 처방은 아주 강력했다. 아른거리고 어질한 느낌은 금방 사라질 만큼. 멀리서 지켜보던 궁인들은 저마다 시선을 피했고, 궁녀들은 신이 났다. 진한 입맞춤이 끝나 성은 유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처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탓인지, 너무 강력한 처방 때문이었는지, 유아의 눈앞이 더욱 아른거렸다. 유아가 어지러움으로 비틀거리자 성이 급히 유아를 부축했다.

 

 “부인!”

 “하하하... 처방이 너무 강했나 봅니다.”

 

 유아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유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숨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소.”

 “날이 너무-”

 “부인!”

 

 ‘하늘이시여. 우리가 이토록 돌고 돌아 만나게 되었는데... 잃어버린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고통을 가엾게 여기셔서. 아직 다 이루지 못한 저희의 연모를 가엾게 여기셔서. 이 남자의 곁에 오래 있게 해주세요. 저는 아직...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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