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남도 휴전선 가까웠던 어느 농촌에서 일하던 전 농장원 전근석씨의 이야기.
여기는 철원평야...!! 하지만 북한 지역이 아닌 남한지역이다. 과거 휴전선 바로 아래 지역... 거기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서 하루종일 농삿일을 하다가 이내 해질녘이 되어간다...
"자~ 일 끝났으면 약속한 지원물자 받아가시오!~"
남조선 사람인 지도원이 하루 일이 다 끝났다고 호루라기를 분다.
그리고, 약속한 남조선에서 온 물자를 품삯조로 나눠준다.
남조선 입쌀 4킬로짜리 하나, 참치나 정어리 통조림 2개씩, 거기다 포장된 진공육이란 고기도 한 덩어리씩 준다. 약간씩 지급되는 현찰은 나중에 우리 명의로 만들어진 계죄로 보내준단다.
통일 이후, 우리는 농장원에서 농업노동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벼나 옥수수 농사 대신, 부가가치가 높은 무공해 채소나 약초 재배로 가꾸는 농작물도 바뀌었다. 특히 여기는 북한지역은 식생이 차 재배에 좋다고, 질 좋은 차로 주요작물을 바꾸기로 하였다. 황해도가 아닌 함경도 강원도 산간지역은 인삼으로 주요재배 작물을 바꾸었다고 한다.
통일 전, 중국과의 접경지대는 가을만 되면 [이민 농업종사자]라는 것이 있어서, 중국에 압록강을 넘어 가서 거기서 한두 달 가을걷이 기한 동안에 숙식을 하면서 노동을 하고 대신 완전히 겨울이 될 때 품삯으로 곡식을 가득 지고 조선에 돌아오는 제도가 있었다.
"북조선 로동자들아~ 중국 추수기한에 여기 들어와 한두 달 동안 열심히 일해주고, 그 대신 그 기한 동안 하얀 입쌀밥과 돼지고기 반찬 실컷 먹여주고 일 끝나 돌아갈 때엔 [너네 능력으로 가져갈만큼 흰 입쌀을 짊어지고 돌아가라]"
는 것이 통일 직전까지의 중국인 지주 및 농삿꾼들이었다.
중국 농촌엔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고, 또 있대도 추수철엔 사람일손이 고양이 손도 빌릴 정도로 부족해 우리 북조선 농장원들을 유휴 노동력으로 이런 때 아주 많이 썼었다. 나도 살긴 황해도에서 살았지만, 통일 이전 시대엔 가끔 중국까지 건너가서 거기서 추수철 농삿일을 거들어주고 몇 가마나 되는 하얀 입쌀을 짊어주고 돌아온 적도 많았다.
그때는 국경 연선에서는 우리 공화국 사람들이 중국 지역의 농사를 도맡아 짓다시피 해서, 중국 농부들도 아주 만족해하였다. 모자라는 일손을 우리 북조선 인력들이 떼워주어서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남조선 군대가 북진하여 불원간에 통일이 되어버리자??~
이제는 중국은 완전한 외국화되어 국경연선 주민들도 거길 함부로 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 대신, 남조선 지역이 과거에 중국이 맡던 일을 대신 하게 되어버렸다.
우리들 황해도나 강원도에 살던 북조선 농장원들은 모내기철이나 추수철 뿐이긴 하지만, 남조선에 농장별로 내려와 남측 농사를 돕고 간다. 그 대신, 남조선 농장 측에선 쌀과 부식물, 그리고 약간의 현찰을 수고비조로 내놓는다.
우리 북조선 농장원들은 이럴 때 부수입도 올리고, 남조선 구경도 이럴 때 말고는 할 기회가 없으므로 버스나 트럭에 실려 남조선 지역 농장 봉사활동을 나가는 것이다.
아직은 구 휴전선 지역에 아주 가까운 40킬로 이내의 지역에서만 농사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장차는 얼마가 걸릴진 몰라도 점점 남하해나간다고 한다.
남조선 지역에 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남측 농삿일을 도우러 나오면, 개명천지를 구경할 수 있고 약간이니마 돈이나 식량 등도 나오므로 우리같은 구 휴전선 접경 주민들은 요새 가끔씩 생기는 이런 일을 오히려 반긴다!!~
하루 농촌행사를 마치고 지원물자를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버스 안... 피곤하긴 했지만 점심때 새참으로 나온 돼지불고기도 맛있었고 순 하얀 입쌀로 빚은 쌀막걸리는 정말 별미로 기분 좋게 취해, 버스 안에서 좌석에 기댄채 노래를 흥얼대면서 우릴 태운 버스는 다시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북조선 지역으로 넘어간다.
다음 주에도 남조선 지역 농촌봉사 활동이 있다는데, 또 지원해서 여기 남조선 지역 구경을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