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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아카데미의 망나니
작가 : 최현우
작품등록일 : 2022.1.19

파멸이 예정된 게임 속 망나니 왕자에게 빙의했다.
전직 사기꾼의 화술과 계략으로 살아남아라!

 
01. 생텀행 급행열차 -2-
작성일 : 22-01-19 23:26     조회 : 198     추천 : 0     분량 : 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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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황하지 말자.

 어떤 상황에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애가 내 목에 칼을 겨눈 상황이라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번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해볼까?

 두 달 전 커다란 사기 범죄를 저지르고 비밀 아지트에 숨어 살다 발각당한 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던 중 15층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곧장 콘크리트 바닥에 직격했으니 그 상황에서 살아남았을 리도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신을 되찾은 나는 지금 빅토리아풍 증기기관차의 객실에 있었다.

 승객들의 인종이 다양해서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한국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차 안의 승객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한 여자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 더운 날씨도 아닌데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하자.’

 

 가장 급한 문제는 눈앞의 화난 여자애였다.

 당장 내가 그녀의 칼에 찔릴 위기였으니까.

 남자라면 칼 정도는 팔로 막고 제압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무슨 견자단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견자단도 이미 목에 칼이 겨눠진 상황에서는 별수 없을걸?

 그러니 가능하다면 칼부림 말고 대화로 상황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초면인 그녀가 왜 내게 화가 났는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건가!”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는 모르지만 흉기를 든 사람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았다.

 

 “미, 미….”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사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 미친년아! 내가 그런다고 쫄 것 같아?”

 

 주변에서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보다, 그 말을 내뱉은 나 자신이 더 놀라고 말았다.

 왜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말을 하고 말았다.

 화를 내던 여자애는 더 격하게 분노하며 내게 고함을 질렀다.

 

 “검을 뽑아라! 당장 네놈을 토막 내주마!”

 

 나를 토막 내겠다는 그녀의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10대 소녀의 외모에 백전노장 같은 아우라가 있었다.

 나는 그녀와 칼싸움하고 싶은 생각도, 칼도 없었다.

 그저 바닥에 주스가 고인 빈 컵을 들고 있을 뿐.

 이런 상황에 컵은 왜 들고 있던 거야?

 

 ‘앗? 설마 그렇게 된 건가?’

 

 얼굴이 흠뻑 젖어서 내게 화를 내는 여자애.

 내 손에는 바닥에 주스가 고인 빈 컵.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설마 내가 저 애 얼굴에 주스를 끼얹은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여자애가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이었다.

 느닷없이 얼굴에 주스를 끼얹고, 사과는커녕 쌍욕을 했으니.

 하지만 전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라서 나는 억울했다.

 

 ‘이 상황을 나보고 어떻게 수습하라고?’

 

 칼 든 여자애는 정말로 날 토막 칠 기세였다.

 도망친다 해도 달리는 열차 위는 달아날 곳도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때, 한 노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자. 황녀님. 그만 진정하시지요.”

 

 “말리지 말게! 전사의 명예가 걸린 일일세.”

 

 “하지만 이분은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무기도 들지 않았고요. 애초에 대등한 전사 간의 관계가 아닌데 명예를 건 결투는 불필요하죠.”

 

 “하지만!”

 

 “명예가 걸린 일도 아닌데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굳이 피를 보려 하심은 그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닙니까? 이 일은 전사 간의 결투가 아니라 국가 간의 논쟁으로 다뤄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우와. 말 잘한다.

 노인은 어딘가에서 혓바닥으로 한 자리하는 양반임이 분명했다.

 나와 동류의 사짜 냄새가 났다.

 나를 토막 내려던 여자애는 화가 나서 부들거렸지만,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나를 찔러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나중에 두고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주제에 혓바닥이 기네!”

 

 왜 자꾸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거야?

 몸에 귀신이라도 씐 것 같았다.

 여자애는 분노로 이빨을 갈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곧 화난 걸음으로 몸을 돌려 돌아갔다.

 살았다!

 노인의 도움으로 일단 목숨은 건졌다.

 비록 노인의 말에 몇 가지 찜찜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내가 칼에 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지?’

 

 직업상 해외에 갈 일이 많았던 내게도 익숙하지 않은 세계였다.

 전 세계의 어느 현대문명과도 일치하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때 조금 전 노인이 다가와 말을 내게 걸었다.

 

 “귀인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감사? 내가 감사받을 만한 일을 했던가?”

 

 내 입에서는 또 제멋대로 무례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식으로 군다면 오래 살진 못하겠네.

 나는 제멋대로 튀어나온 말 때문에 노인이 노발대발할까 걱정했다.

 하지만 노인은 연륜에 걸맞은 너그러움을 뽐내며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늙은이, 죽기 전에 로마니아 제국이 전 세계를 통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귀인께서 그 꿈을 이뤄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뜻 모를 소릴 하며 내 손을 잡아 쥔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났다.

 남의 얼굴에 주스를 끼얹고 쌍욕을 하고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마지막엔 감사 인사까지 받은 나는 머릿속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했다.

 내가 얼이 빠져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한 여자가 나를 불쑥 찾아왔다.

 

 “왕자님!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영국 시대극에서나 나올법한 검은 바탕에 흰 레이스가 달린 하녀복을 입은 갈색 피부의 여자는 다짜고짜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한 말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여자에게 되물었다.

 

 “뭐? 누구? 나?”

 

 “그럼 제가 왕자님이라 부를 사람이 누구겠어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아세요?”

 

 “나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누누이 말하지만, 이 퉁명스러운 말투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혓바닥에 의한 것이다.

 나는 원래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게 말을 거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야 타인의 신뢰를 얻어서 그들에게 사기를 칠 수 있으니까.

 

 ‘이 여자는 또 뭐람?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계속되는 이상 현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는지, 여자는 걱정스레 물었다.

 

 “갑자기 칼을 겨눠서 많이 놀라셨죠? 화장실에서 세수라도 하고 오실래요?”

 

 “찬물에 세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한 사람한테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죄송합니다. 이름 모를 여성분.

 제가 원래 남을 비꼬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단지 혓바닥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그런 식으로 쏘아붙이고 싶은 욕망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냥 속으로 생각할 계획이었지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마치 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덕성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분이었다.

 

 ‘일단 저 여자 말대로 머리나 좀 식히자. 그 후에 사과하러 가든지 말든지….’

 

 나는 열차의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에 물을 받고 얼굴을 담갔다.

 냉수에 머리가 차가워지자 멍해지려던 정신이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좋아. 당황할 것 없어. 무슨 일이든지 차근차근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해결책이 나오기 마련…’

 

 얼굴 닦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하다가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얼굴이 흠뻑 젖은 10대 소년이 피로한 눈으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으악!”

 

 나는 고함을 지르며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내 비명에 놀라 조금 전의 여자가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지만 나는 그녀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 자신을 관찰했다.

 

 미국의 영화배우 티모시 살라메를 닮은 눈매에, 짙은 갈색 반곱슬 머리카락의 소년.

 거울 속의 소년이 바로 나였다.

 그 사실을 직감한순간, 내 눈앞에 반투명한 허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

 《로이 킬버그》

 특성 : 【무례한】

 ???(잠김)

 ???(잠김)

 ???(잠김)

 =============

 

 ‘이건…?’

 

 현실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내게는 굉장히 익숙한 화면이었다.

 그것은 게임 클래시 킹즈의 상태창이었다.

 게임 속 캐릭터의 묘사와 일치하는 외모의 소년이 되어 버린 나.

 게임 속의 서술과 일치하는 주변의 풍경.

 믿기 힘들지만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와 버린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내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자, 곁에 서 있던 여자는 걱정스레 물었다.

 

 “왕자님. 정말 괜찮으세요?”

 

 나를 왕자님이라 부르는 이 여자.

 내가 로이 킬버그라는 소년이 되었다면 이 여자는 로이의 하녀인 샬롯이겠지.

 100%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의 외모가 게임상의 묘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게임상에서 그녀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

 【샬롯】

 갈색 피부에 눈초리가 쳐져서 순박해 보이는 인상의 소녀.

 ===============================

 

 실물로 현신한 샬롯의 모습과 게임상의 묘사가 일치하는 부분은 갈색 피부밖에 없었다.

 눈초리가 쳐져서 순박해 보이기는커녕 우수에 찬 눈에 눈물점이 더해지며 뇌쇄적인 파괴력을 자아냈다.

 로이는 샬롯을 친누나처럼 여겼다는 설정이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녀를 가족처럼 대할 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내 무례한 혓바닥은 여전히 제멋대로 움직였다.

 

 “샬롯. 내 얼굴을 닦을 만한 것 가져왔어?”

 

 “예? 아, 아뇨. 비명이 들리기에 곧장 뛰어 들어온 거라…”

 

 “빨리 가서 가져와. 내가 감기 걸리기 전에.”

 

 “아, 네! 왕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샬롯.

 혓바닥이 제멋대로 내뱉는 말들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기 얼굴을 닦을 수건 정도는 자기가 챙겼어야지!

 얼마나 응석받이로 자란 거야? 로이 이 자식!

 나는 로이 킬버그라는 캐릭터의 너무도 한심한 어리광에 속으로 한탄했다.

 

 ‘그나저나, 지금 내가 게임 속에 있다는 말이지?’

 

 샬롯이 수건을 가져오는 동안, 나는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에 집중했다.

 상태창에서 내가 유심히 본 것은 【무례한】이라는 특성이었다.

 내가 거기에 집중하자, 상태창은 자동으로 특성에 대한 정보를 띄웠다.

 

 ===============================

 【무례한】

 부유하고 방탕한 부모님의 자유 방임주의적 육아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신은 전형적인 안하무인의 망나니로 자라났습니다.

 당신은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논쟁을 주먹 다툼으로 악화시키는 재주가 있으며, 천부적으로 사방에 당신의 적을 만드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욕하고 피하고 무리에서 배척할수록 당신 안에 잠들어 있는 음습한 욕망은 미소를 짓습니다.

 ===============================

 

 망했다.

 【식인종】이나 【미치광이】같은 최악의 특성은 아니지만 【무례한】도 손꼽히는 함정 특성 중 하나였다.

 다른 캐릭터들과 친하게 지내도 모자랄 판에, 숨만 쉬어도 사방에 적을 만드는 특성이라니.

 

 ‘아, 이 특성 때문에 그 여자애한테 쌍욕을 박은 거였나?’

 

 그 여자애.

 게임상의 묘사를 떠올려 보면 그녀는 분명 로마니아 제국의 황녀 율리우스 칼리일 것이다.

 게임 속 유일의 초강대국 로마니아.

 하필이면 시작하자마자 세계관 최강자의 딸에게 시비를 걸다니.

 앞으로의 생활이 너무 험난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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