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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아카데미의 망나니
작가 : 최현우
작품등록일 : 2022.1.19

파멸이 예정된 게임 속 망나니 왕자에게 빙의했다.
전직 사기꾼의 화술과 계략으로 살아남아라!

 
01. 생텀행 급행열차 -1-
작성일 : 22-01-19 23:25     조회 : 220     추천 : 0     분량 : 5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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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이 드넓게 펼쳐진 들판 한가운데.

 굴뚝에서 회색의 연기를 내뿜으며 증기기관차 한 대가 선로를 달리고 있었다.

 타국에서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수송을 위해 마련한 크로스 가드역으로 향하는 생텀행 급행열차였다.

 매년 생텀에 입학하는 수많은 신입생을 위해 생텀에서는 이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생텀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 어떤 배려로도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

 

 “하아···.”

 

 생텀행 급행열차의 특등실 한켠에서 로이는 멍하니 열차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오랜 기차여행에 지친 로이는 차창 밖의 수많은 산봉우리 중에 가장 가슴처럼 보이는 걸 고르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정말 끔찍하게 지루한 기차여행이었다.

 

 “가슴···.”

 

 “뭐라고 하셨어요?”

 

 로이가 지루해서 아무렇게나 중얼거린 말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샬롯이 고개를 돌렸다.

 로이의 시선은 샬롯의 얼굴로 향했다가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에 머물렀다.

 허리를 조이는 하녀복 덕분에 안 그래도 큰 그녀의 가슴이 더욱 돋보였다.

 

 “하···.”

 

 가슴을 목전에 두고도 로이는 또 한숨을 쉬었다.

 샬롯은 로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를 돌봐온 하녀였다.

 샬롯은 또래보다 육감적인 몸매를 타고났지만 로이는 그녀를 친누나처럼 여기고 있었다.

 로이가 강하게 부탁하면 마지못해 가슴을 만지게 해주겠지만 애초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게 문제였다.

 갈색 피부에 눈초리가 쳐져서 순해 보이는 샬롯의 얼굴도 로이의 취향은 아니었다.

 로이는 기가 드센 여자가 좋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로이 킬버그.

 변방의 작은 국가 튜토리아의 왕자인 그는 범세계적 교육 기관 생텀에 입학하기 위해 긴 여행길에 올랐다.

 생전 처음 영지를 떠나며 설렌 것도 잠시.

 지금 로이는 유례없는 따분함에 진저리치는 중이었다.

 로이는 손가락으로 샬롯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치근거렸다.

 

 “샬롯. 나 심심해.”

 

 “저도요.”

 

 “‘저도요’가 아니라 내가 재미있어할 만한 걸 생각해 내야지! 내가 심심하다잖아.”

 

 “저는 광대가 아닌걸요.”

 

 “알고 있는 농담이라도 없어?”

 

 “저는 젖소 농담밖에 몰라요.”

 

 “젖소 농담은 내가 알려 준 거잖아.”

 

 지루해서 샬롯에게 심통을 부리던 로이는 갑자기 샬롯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샬롯은 익숙한 듯 객실 탁자에 놓아둔 초콜릿의 포장을 벗겨 로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로이가 입을 크게 벌리는 건 자기 입안에 맛있는 간식을 넣어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입안에서 달콤한 초콜릿이 녹는 동안 로이는 샬롯에게 계속 치근덕거렸다.

 

 “샬롯. 끝말잇기 하자.”

 

 “저는 글을 몰라요. 왕자님.”

 

 “또 그 소리야. 글자 읽는 법을 배울 생각은 없어?”

 

 “온종일 왕자님을 뒷바라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걸요.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하녀 샬롯의 하루는 로이 같은 왕족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바빴다.

 그리고 샬롯의 바쁜 일과 중 대부분은 로이의 수발을 들거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킬버그 국왕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로이가 자신를 보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샬롯에게 왜 글자를 배우지 않느냐며 나무랄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샬롯도 로이가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줄 거라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초콜릿을 녹여 먹느라 입안이 텁텁해진 로이는 이번에는 키스하듯 입을 내밀었다.

 그러자 샬롯은 익숙하다는 듯이 컵에 담긴 주스에 빨대를 꽂아 로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이것이 로이가 고안해낸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샬롯 시스템’이었다.

 킬버그 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또다시 자기 한심한 팔푼이 아들에게 실망하겠지만 로이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에 익숙했다.

 로이가 주스를 양껏 마신 뒤 샬롯은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초콜릿을 먹고 주스를 마셔도 로이가 심심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루함에 안절부절못하던 로이에게 샬롯은 제안했다.

 

 “그렇게 심심하시면 생텀에 도착하기 전에 교칙이라도 외워두시지 그러세요?”

 

 샬롯은 그녀가 들고 있던 로이의 학생수첩을 흔들어 보였다.

 생텀의 학생수첩은 절대로 타인에게 양도해서는 안 되며 분실하지 않도록 항상 신경 써야 한다는 교칙이 있었다.

 하지만 규칙이나 규범에 관심이 없는 로이에게는 그저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고 옷맵시를 망치는 쓸모없는 수첩에 불과했다.

 샬롯이 든 학생수첩을 발견한 로이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싫어. 귀찮아. 샬롯이 대신 외워줘.”

 

 “저는 글을 모른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외워서 뭐 하게요? 교칙을 지키셔야 하는 분은 왕자님인데.”

 

 샬롯의 설득으로 로이는 마지못해 샬롯에게서 자신의 학생수첩을 돌려받았다.

 붉은 가죽 양장본 학생수첩의 겉표지에는 고급스러운 금장으로 생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학생수첩에는 각자 학생 개인의 신상 명세가 적혀 있었다.

 국가에 따라서는 신분증이나 여권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절대로 타인에게 양도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학생수첩 안에는 생텀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안내도 적혀 있었지만 로이는 고작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다.

 야한 내용이라도 적혀 있었다면 모를까?

 학생수첩을 읽느니 낮잠을 자는 편이 나았다.

 로이는 학생수첩을 다시 샬롯에게 떠넘겼다.

 그때 객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샬롯. 누가 싸우는 소리 안 들려?”

 

 로이의 물음에 샬롯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열차 소음 때문에 자세한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였다.

 지루하던 차에 호기심 생긴 로이는 객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니까!”

 

 “그럼 대체 어떤 의미였지?”

 

 로이와 비슷한 또래의 두 소녀가 객실 통로에서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말다툼이야 흔한 일이지만 둘 중 한 소녀의 생김새가 로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정하게 땋아 내린 금발 사이로 길고 뾰족한 귀가 삐죽 튀어나온 소녀.

 엘프였다.

 인류가 다른 종족과 자유로이 교류하게 된 지도 벌써 오래전이지만 변방의 약소국 출신인 로이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엘프와 만난 순간이었다.

 그동안 ‘엘프는 전부 미인이라더라’라거나 ‘천사 같은 미모에 눈을 돌릴 수 없다더라.’라는 소문만 듣던 로이는 과연 그런 소문이 날만하다고 생각했다.

 

 ‘엘프는 원래 전부 아름다운가? 아니면 쟤가 엘프 중에서도 특출나게 예쁜 건가?’

 

 차가우면서도 도도하고 지적인 얼굴.

 그녀는 로이의 이상형이었다.

 엘프를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지만 로이는 이미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보통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은 조야해서 잘 쓰지 않지만, 자기감정을 경솔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도 로이 같은 망나니의 특권이었다.

 로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샬롯에게 물었다.

 

 “샬롯. 만약 내가 싸움에서 쟤 편을 들어 주면, 쟤가 나랑 사귀어 줄까?”

 

 “예?”

 

 샬롯은 당황한 말투로 되물었지만 로이는 샬롯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태어날 때부터 항상 제멋대로 살았던 것처럼 로이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을 즉흥적으로 실행했다.

 로이는 곧장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주스 컵을 집어 들고 객실을 나섰다.

 평소에는 주스 컵을 들기도 귀찮아서 샬롯이 대신 먹여 주던 로이였다.

 

 “그만해!”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간 로이는 곧장 엘프와 말다툼하던 소녀의 얼굴에 주스를 쏟아부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샬롯도 로이를 말릴 틈이 없었다.

 

 “헉!”

 

 샬롯은 저도 모르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두 소녀의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경악해서 말문이 막혔다.

 느닷없이 끼어든 로이의 주스 세례에 엘프 소녀도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열차 안에는 일순 정적이 흘렀다.

 

 ‘어라?’

 

 자기 행동에 열차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하자 로이도 조금 당황했다.

 그는 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놀란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남의 얼굴에 주스를 끼얹는 일 따위 망나니 왕자인 로이에게는 그저 일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로이를 돌보던 샬롯은 넋이 나가서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기세였다.

 남에게 무관심한 로이는 몰랐지만 살롯은 알고 있었다.

 로이가 엘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얼굴에 주스를 끼얹은 소녀.

 그녀는 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로마니아’ 제국의 황녀였다.

 율리우스 칼리.

 긴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녀의 머리에는 제국의 근엄한 권위를 상징하는 황금색 월계관이 빛나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액세서리로 치장한 다른 영애들과 달리, 칼리는 자기 흉부를 본뜬 실용적이고 견고한 로리카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개인의 무력을 중시하는 제국의 전통 복식이었다.

 그 용맹하고 자랑스러운 형태의 복식이 지금은 로이의 주스 세례에 의해 흠뻑 젖어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어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칼리는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차 초강대국 로마니아의 여제로 등극할 칼리 황녀의 카리스마와 존재감은 다른 평범한 십 대 소녀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로이는 칼리가 황녀란 걸 몰랐지만 그런데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로이는 자신이 맹수 앞에 놓인 생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이가 우물쭈물하자 칼리는 단숨에 허리춤의 글라디우스 검을 뽑아 로이의 목에 겨눴다.

 느닷없이 날카로운 칼날이 목에 겨눠지자 로이는 저도 모르게 ‘힉!’하는 소릴 냈다.

 칼리 황녀는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대답해라!”

 

 그때 객실이 암전되었다.

 때마침 열차가 터널을 지나며 객실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터널 내벽에 반사된 기차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덜컹! 덜컹!

 

 이윽고 열차는 터널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느라 눈동자가 암순응된 승객들은 갑작스레 다시 열차 안이 밝아지자 잠시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 황녀는 그때까지도 움직임 없는 자세로 로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구경하던 승객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로마니아 황녀에게 시비를 건 거지?”

 

 “보아하니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국가의 왕자 같던데.”

 

 “너무 멍청해서 칼리 황녀 얼굴도 몰랐던 거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멍청해도 나름 왕족인데 그녀의 얼굴 정도는 알았겠지.”

 

 “어쨌든 그 나라는 안 됐네. 멍청한 왕자 하나 때문에 왕국 하나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생겼으니.”

 

 구경꾼들은 제멋대로 수군거리는 동안 아직 로이가 주스를 끼얹은 일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듣지 못한 칼리는 로이를 재촉했다.

 

 “할 말 없나? 그럼 그냥 베어버려도 불만 없겠지?”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로이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 로이는 육성으로 ‘힉!’소리를 낼 만큼 겁에 질려 있었지만, 지금은 마치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로이는 얼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나는 분명 경찰한테서 도망치다가 창문에서 떨어져서···. 어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로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곧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여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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