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1부 세상 (3)
작성일 : 22-01-16 14:12     조회 : 178     추천 : 0     분량 : 14658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장례식은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기별이 어째서 도련님이 사는 곳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연유는 몰랐다. 사실 그런 건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어왔다. 검은색 옷에 암울한 표정을 지은 그들은 어머나, 세상에. 라는 말을 연거푸 반복하며 그녀를 애도했다.

 퀭한 눈으로, 속이 비워내다 못해 내장까지 다 빠진 듯한 감각을 안고서,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하인들은 구석에 한자리를 잡고 따로 시간을 내서 그녀를 애도해야했다. 나는 모두가 얘기하는 이름 속에 빠져있는 다른 그녀를 찾았다. 하얗고 통통한 볼로 나를 사랑스럽게 봐주던 그녀. 나를 아이삼고 싶다고 말해주던 그녀. 가끔은 말없이 나를 꼬옥 안아주던 그녀. 그럴 때면 항상 부엌냄새가 나던 그녀. 내게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그려낼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아직도 내가 아기인 것처럼 푸근하게 안아주겠지. 그리고 매번 감수성 풍부한 그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을 텐데. 내가 사랑한 그 밤색 눈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볼품없게 늘어져 있었다. 내가 토한 건 역겹고 징그러워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아픈 자세로, 가만히 있는 그녀가 안쓰럽고 다시는 내 말이 닿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그랬다. 사람들은 너나 나나 약혼녀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데 불운의 사고로 떠난 그녀를 입에 담았지만 로자 아줌마의 흔적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환영을 본 것인가? 나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로자 아줌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아줌마를 아는 사람들은 내 물음을 모른 척했다. 나중에.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라니, 나중에 라니?

 불운의 주인공인 도련님은 검은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 입고 모든 조문객을 맞이했다. 붉은 입술이 들썩일 때마다 사람들은 경탄하고 애도하며 그를 다독였다. 걸맞게 그는 그런 역할이 썩 잘 어울렸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나는 뭔가를 갈구하는 눈으로 도련님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내내 내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로자 아줌마의 행방을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는 현상은 제대로 알려주었다. 나는 무기력했다. 그 앞에서 기절해버리지만 않았다면, 아줌마를 붙들고 어디라도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줌마의 행방정도는 알 수 있었겠지. 약혼녀와 로자 아줌마는 동시에 죽었다. 아줌마는 아마 약혼녀를 지켰을 것이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 목숨을 잃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화자 되는 건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고운 아가씨뿐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내게 소중한 로자 아줌마는 장례를 치러 줄 가치도 없다는 거였고 그걸 아줌마와 동고동락한 모두가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무기력만이 내 몸을 잠식했다. 이제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나도 아줌마를 따라가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례식 마지막 날, 나는 더 이상 그곳에 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로자 아줌마를 찾아다니는 데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내가 이 저택에서 죽는다고 해도 이렇게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허망함이 몰려왔다.

 나는 그냥 걸었다. 걸을 기운도 없었는데 유령처럼 걸어 다녔다. 가끔씩 누군가와 부딪히기는 했으나 너무 미약하고 볼품없어서 사람들은 그저 혀를 한 번 차고 지나갔다. 이렇게 걷다가 진짜 유령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저택 부엌 옆 소각장으로 넘어간 건 순전히 아줌마의 그림자를 찾아서였다. 나는 숨도 크게 쉬지 않았고 걸을 때 소리도 내지 않았다. 허기진 위장은 이따금씩 연료를 부르짖었지만 그 또한 무시하니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 내가 그들을 보고도 쉽게 내 기척을 숨길 수 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못 보던 남자 둘이 커다란 관을 들고 왔다. 편목나무로 제작한 위엄 있는,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입을 모아 칭찬한 약혼녀가 담긴 관이었다. 나는 그것을 방금 전에 보고 온 참이었다. 그새 사람들이 들고 온 건가. 하지만 나는 그 관이 열리고 그 속에서 약혼녀가 짜증스런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입은 떡 벌어졌고 소리를 지르려던 걸 애써 삼키느라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얼굴로, 마치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연신 하품을 했다. 푸석해졌지만 여전히 풍성한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커다란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그녀는 드레스를 툭툭 털더니 눈썹을 찡그리고 입 꼬리를 비틀었다. 그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 씨 못해먹겠네.."

 "이제 끝났어요."

 "그러니까. 보수는 계좌로 바로 넣어줘요. 그리고 관 속이 아주 기분 나빠. 진짜 죽은 것 같고..여하튼 마음에 안 들어. 내 소지품은?"

 "나가서 드리겠습니다. 여긴 위험합니다."

 그녀는 남자가 건넨 뭔가를 받아들고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풀었다. 검은색 상하의였는데 옷이 끝나는 매무새가 독특했다. 남자처럼 바지를 입은 그녀는 낯설었다. 구불거리는 풍성한 웨이브를 돌돌 말더니 마지막엔 어떤 검은색 꾸러미에 넣는 것처럼 하고 그걸 머리에 썼다. 아무래도 모자인 듯 했는데 앞으로만 각이진 게 사냥 모자 같기도 했다. 하지만 모자의 앞코가 이마선을 따라 둥그런 아치형으로 휘어져 있었다. 살아난 그녀. 이상한 의복. 나는 로자 아줌마를 절실히 떠올렸다. 아줌마가 정말로 단순히 사고 때문에 죽은 걸까? 로자 아줌마가 정말 죽은 게 맞을까?

 수수께끼만 남기고 그들은 숲길로 보이는 길을 지나 사라졌다. 야생동물이 가득할 그곳으로 가는데 무장도 하지 않은 채였다. 마을은 반대편이었다. 저 너머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나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행여나 그들이 다시 돌아올까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이 같던 길로 끝끝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가 어긋나고 이상하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동물적 감각을 제외하고는 반증할만한 것도, 설명할 길도 없었다. 내가 어떤 불만이나 불안감을 표출하는 건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자, 내 정신상태가 현재 어둡고 음침하다는 걸로 받아들여졌다. 로자 아줌마가 널 참 좋아했는데. 히, 너는 열심히 살아야한다. 다들 그런 식으로 말했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행여나 아줌마가 정말 죽은 게 맞냐고 물어본다면 도련님조차도 나를 포기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 약혼녀를 본 이후로 정신이 바짝 돌아온 듯 싶었다. 처음엔 의아했고 나중엔 화가 났다.

 속였다. 모두를 속였다는 사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 그녀를 도와준 누군가가 있다는 것.

 순수하고 맑은 얼굴로 도련님을 바라보던, 나를 바라보던, 누군가 나를 받아준다면 저도 기꺼이. 라는 듯한 얼굴로 볼을 붉히던 그 상냥한 아가씨의 마지막 모습은 비틀린 웃음이었다. 낮게 중얼거리는 욕지기였다. 사라지기 직전 저택을 돌아본 그녀의 경멸 섞인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얼굴은 내 안에 각인되었다. 저택뿐만이 아니라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혐오하는 얼굴 위로 짙게 진 그림자는 섬뜩했다.

 그녀의 혐오가 어디서 온 건지 몰랐다. 이유가 있을 건데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약혼녀를 도와준 건 주인님인가. 내 상식 수준으로는 그 정도 힘을 실어줄 만한건 주인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

 한편으로 나는 로자 아줌마에 대한 희망이 솟아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줌마는 살아있을지도 몰라.

 실낱같은 희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 살아있을지도 몰라. 나는 마차 안에 누워있던 두 사람이 죽은걸 확신했다. 산자에게서 나올 수 없는 적막과 고요. 결코 잠든 것과는 다른 감은 눈과 굳은 입매가 그랬다. 그런데 약혼녀는 살아있었다. 그녀가 고귀한 신분으로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면 남은 로자 아줌마는 아직 이곳에 있을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차마 저택 뒤편 너머의 숲을 통과하지는 못하고 그 언저리만 맴돌았다. 소각장 뒤편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이라 사람 기척은 없었다. 사람이 살만한 오두막도 지붕 덮인 어떤 공간도 없었지만 나는 그 곳 어딘가에서 로자 아줌마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줌마가 살아있다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거라 믿었다.

 약혼녀의 장례식이 끝나고 여드레 만에 나는 로자 아줌마를 찾았다. 파헤친 땅부분이 여물지 않아 들썩이듯 허물어지는 구덩이를 하나 발견했고 그 구덩이를 지나 더 작은 구덩이 속에서 나는 그녀를 발견했다.

 아줌마의 팔과 다리는 내가 일전에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꺾여서 제 구실을 못하지만 피부 조직 때문에 뜯어지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때부터 이미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무엇을 봐도 피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어떤 잔혹한 광경이라도 그게 진실이라면 두 눈에 담아야했다.

 나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제대로 보지 않아도 아줌마는 죽었다는 확신과 슬픈 감정으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결코 감지 않았다. 로자 아줌마의 뺨 한쪽은 부패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은 완전히 뜨이지는 않았으나 어떠한 물리적 충격이었는지 왼눈이 반쯤 뜨여있었고 그 사이로는 흰자만이 보였다. 아줌마를 반쯤 덮은 흙과 낙엽은 바짝 마른 상태였다. 그녀의 건조한 입가 위로 개미가 기어 다녔고 그 위 콧대에 파리가 앉았다가 날아올랐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슬픔이 몸을 잠식하는 사이 매캐하고 시큼하고 위악적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옅은 흐느낌이 커지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썩어가는 시체를 안을 수 없었다. 그건 끔찍했다. 내가 알던 로자 아줌마의 육신임에도 나는 그것이 싫었다. 미칠 것 같은 괴로움과 혐오가 나를 동시에 덮쳤다.

 나는 등을 돌리고 뛰었다. 망자에 대한 예의도 배려도 묵언도 없었다.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넘어졌다. 아줌마가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나를 그렇게 찾았으면서, 나를 그렇게 그리워했으면서, 나를 두고 가다니.

 "아줌마...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는 넘어질 때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힘없는 발바닥으로 뛰어갈 때마다 계속해서 빌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저택 소각장에 도착해서야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렸다. 결국 진실을 목도한 내 눈동자는 허공을 향했다. 눈물인지 흙인지 모를 것이 내 얼굴과 머리에 온통 뒤범벅해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줌마한테 한없이 미안했고 눈물이 났다. 약혼녀는 성대한 장례식으로 모두의 기억에 남았고 살았다. 로자 아줌마는 모두의 기억에서 남지 않고 죽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작은 아이조차 그녀의 시신을 안아주지 않았다.

 불공평이란 단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러하듯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깊게 고민한다고 해도 바뀔게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도련님이 총에 맞아 죽는다 해도 약혼녀와 아줌마의 결말과 한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근데 그게 정말 맞는 일일까?

 그러자 놀랍게도 어마어마한 분노가 나를 뒤덮었다. 순간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작은 불 하나가 내 심장 구석에서 열기를 품고, 급속도로 커져갔다. 이내 그 불꽃이 내 몸을 활활 태웠다. 손끝과 발끝이 미칠 듯이 뜨거웠다. 눈에 환한 불이 일었다.

 그 때. 저택에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던 그 날이 기억났다. 먼지가 쌓인 내 낡은 담요를 코끝까지 덮고서 오지 않던 잠을 넘기며 창문을 바라보던 그 날 밤의 풍경.

 하늘에서 번개가 일었고 나는 온 시야가 화해지는 하얀색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때 죽었다.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살아온 나는 고아에다 하인이고, 여자이고, 장작패기 따위를 빼면 아무런 가치 없는 인간이었다.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가? 그게 정말 맞는가?

 아름다운 도련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련님과 동일선상에서 곁눈질 할 수 없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내가 장난감. 그 이상은 되지 않으리라. 나는 누군가의 부속품에 항시 달려있을 것이고 그러다 죽을 것이다.

 온전히 나로 살아갈 나날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불길이 멈추고 나는 잠시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땐 하늘에 달이 있었다. 나는 별이 있다고 들었다. 책에서 보았다. 하지만 하늘에 별은 드문드문 했다. 나는 저택의 크기만큼 그늘진 부지를 바라보았다. 불이 일고 죽고 일어나면 새로운 생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 적어도 주인님과 도련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는 생은 거짓이었다. 이곳에도 불이 필요했다. 불을 지피고 나면 나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약혼녀를 찾을 것이다. 찾아내 물을 것이다. 로자 아줌마가 당신을 지키다 죽었는지, 당신이 죽였는지. 알아야했다.

 바닥에서 일어났을 땐 어쩐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옷에 묻은 먼지와 흙을 털어내고, 소맷부리로 눈가를 쓱쓱 비볐다. 머리를 적당히 정돈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나는 씩씩한 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괜찮냐는 말에 괜찮다고 답했다. 로자 아줌마 몫까지 더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을 때 퀘 아저씨는 괜스레 코끝이 빨개져 큼큼거리는 소리를 냈다.

 도련님이 나를 찾아왔다. 도련님이 나를 부르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반대는 처음이었다. 그는 어딘지 어색한 얼굴과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내게 인사를 하는 상황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히, 이제 좀 괜찮아?"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살이 빠졌고 어쩐지 전보다 어른스러워져있었다. 약혼녀를 잃은 비운의 주인공은 그 서사덕분에 독특한 분위기를 발하고 있었다. 피곤에 잠긴 눈은 아직 휴식이 필요하다 말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의아한 모양이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아직 부어있는 눈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려 노력했다. 시선이 비슷한 높이로 부딪혔다. 하인이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건방진 행동이었다. 먼저 쳐다보는 건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쳐다봐도 그는 내 상태를 보느라 잘 모르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한 느낌은 받았는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어디가 바뀐 지 모르는 거겠지. 높은 자로 대우받는 것이 숨쉬듯 당연했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는 도련님의 모습은 티끝 없이 순수했다. 그리고 잔인했다.

 아직 자라나는 도련님의 모습은 내게 경이를 가져다주었다. 날이 갈수록 길게 뻗어나가는 손과 다리.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의 윤곽선. 사고의 영역이 넓어지며 깊어지는 눈동자. 죽음을 경험하느라 한껏 성숙해졌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도련님을 관찰하는데 있어 아주 최적화된 인간이었다. 그를 보며 동경했고 그처럼 되고 싶었다.

 앞으로 보지 못하겠구나. 거기까지 생각하니 목이 살짝 멨다. 그래도 그는 주인님의 아들이었다. 로자 아줌마의 썩어가는 얼굴이 아직도 도련님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다른 이들의 모든 삶보다 도련님의 삶이 존귀하다는 말을 나는 이제 믿지 않는다.

 

 기름을 구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양초를 구하는 일은 그보다도 쉬웠다. 요리를 하는 여자들, 보일러를 정비하는 남자들, 기타 모든 것들에 들어가는 기름을, 정해진 용도 외에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그걸 마셔보겠다며 유희나 객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식용이 아닌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이는 드물었으며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한들 그 자는 더 이상 저택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기름과 상당양의 양초를 구할 수 있었다. 일정 수준을 지나자 내 방에서는 기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방에 들어오는 건 로자 아줌마나 황 아줌마 정도 였다. 황 아줌마는 절친한 사이었던 로자 아줌마의 죽음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주인님과 도련님의 서가- 도련님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서가를 받았다-에서 몰래 가져온 몇 권의 책을 매만졌다. 이들은 가지고 가고 싶은 물건이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내 몸 이외의 그 어느 것도 남기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이 책들은 저택으로 번져가는 빨간 불빛의 시발점이 되어야할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간 비가 오지 않던 어느 날, 풀잎이 바싹 마른 바스락 거리던 어느 날, 새벽에 머금은 촉촉한 습기가 이 전보다 훨씬 적게 느껴지던 어느 날, 나는 딱히 때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지만 바로 오늘이 행동으로 옮겨야 되는 날이란 걸 깨달았다. 내 온몸은 주위 환경에 곤두세우며 모든 걸 주시하고 있었다. 안녕이란 인사, 추억에 잠기기. 조금 망설이기. 이런 것들이 발목을 잡거나 누군가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데에 영향을 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조차도 지금?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날. 나는 스스로를 속임으로써 그 날을 맞이했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꿈뻑이며, 좀 더 자고 싶고 누워있고 싶은 욕망을 여실히 느끼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오래되어 이제는 내 발을 덮으려면 몸을 구부려야하는 담요를 바닥에 놓았다. 그 위에 마른 책들을 얼기설기 겹치고 구석 옷장에서 옷을 꺼내 올렸다. 기름통에선 머리가 띵할 정도로 진한 석유냄새가 났다. 나는 아직 개이지 않은 머리에 현기증을 느끼며 힘을 썼다. 기름을 다 붓고 나니 손과 발이 미끌거렸다. 옷에 대충 닦고 나는 방문을 나섰다. 챙길게 몸뚱어리 하나뿐이라는건 발걸음이 가벼우면서도 지독히 쓸쓸한 감정을 동반했다. 나는 작은 성냥 하나를 손가락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불을 붙였다. 내가 가진 옷 중 제일 낡은 옷 하나를 잘게 찢어 꽈리를 따놓아 줄처럼 만들었다. 그 줄을 방 중앙에 있는 책 밑에 깔아놓고 방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모든 것이 활활 탈 것이다. 나는 한때 옷이었던 그 끄트머리에 성냥을 가져다 대었다. 모든 것이 너무 쉬웠다. 불은 화르륵 소리와 작지만 강한 열기를 내품으며 달려 나갔다. 바로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데, 나는 그 모습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불꽃이 길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짙은 열기가 방문에서 품어져 나왔다. 닫힌 문 틈새로 바알간 불길이 밖을 향해 자기주장을 확고히 했다. 불길이 방문 테두리 틈새로 빨갛게 번져나가는 게 사실 너무 아름다웠다.

 매캐한 연기가 폐 속에 들어와 놀라고 불쾌한 감정이 튀어나올 때가 되어서야 나는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참으려 해도 켁켁 거리는 기침 소리를 숨길 도리가 없었다. 입을 막느라 컥컥 하면서 숨까지 막혔다. 눈이 매서웠다. 달리는 걸음이 빨라졌다.

 계단을 내려가 바깥으로 나가니 아직 밤은 고요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등뒤에 실리는 뜨거운 기운은 곧 이곳을 아비규환으로 만들 것이었다. 나는 이제 떠나면 되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발을 내딛는데, 풀 자락과 하늘과 달이 보였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짐을 알았다. 그리고 이걸 인지하고 경험 하는데에 기여한 모든 것들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도 알았다. 도련님과 얘기를 처음 시작했던 열 살. 머뭇거리던 이후 말문이 트였던 시기. 주인님께 얻어맞고 나서 문자를 가르쳐주던 세심한 손길. 나는 글을 안 이후로 도련님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나보다 어린 도련님은 그 난감함을 기꺼이 숨기지 않으면서도 기뻐했다. 눈동자 속에 담긴 환희와 어떠한 열망을 본 것은 꽤 여러 번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으스대지 않는 편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다른 하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옆에 없다는 걸 인지한 상태의 행동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이 저택에 주인님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걸 똑똑히 했다. 직설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하인들 스스로의 입에서 '감히' 도련님께 뭔가를 할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그런 능력은 가히 주인님의 아들이라고 할만 했다. 그렇게 오만하고 고고하고 꺾이지 않는 도련님의 모습은 내겐 어느 정도 생소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본관으로 달려가는 도중 뒤에서 사람들이 깨어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택의 불길이 커져가 길을 환히 밝혔다. 본관으로 번지기 시작한 불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방 안에서 뛰어나오고, 우탕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응당 도련님은 이미 대피했을지도 몰랐지만, 그는 아직 잠든 채였다. 나는 도련님의 방에 처음 들어가 보았다. 그의 방은 넓고 쾌적했다. 내 방은 그의 화장실만도 못했다. 감상에 잠길 틈도 없이 나는 도련님을 잡아 일으켰다.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다 나를 보고 놀라며 소리쳤다.

 "히?!"

 "나가요."

 내 손에 남아있는 기름기가 도련님의 고급스런 파자마에 묻어났다. 미끄러워서 나는 그의 연한 살갗을 잡았다. 팔목이 부러질 정도로 얇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의 손목은 굵고 단단했다. 내 한 손에 다 잡아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절박하게 말한 탓인지 힘을 쓰지 않고 순순히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왔다. 방문으로 나오자마자 열기가 훅 올라왔다. 연기와 불꽃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이닥쳤다. 도련님의 굵은 방문 넘어는 고요를 약속했지만 이런 긴급상황에서는 바로 죽기에 알맞았다.

 잠이 여실히 깬 얼굴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 나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게 끌려오던 도련님이 어느새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미끈거리는 기름과 땀이 섞여들었다.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북쪽 건물 별관이 무너져 내렸다. 나와 있는 사람은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몇은 무너지는 건물에 오열했다. 도련님의 허망한 표정을 바라보다 나는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는 모르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조심히 뛰어갔다. 소각장 건물 쪽은 불길이 치솟는 반대편이라 무척이나 어두웠지만 건물 너머로 보이는 불길이 큰 것만은 한눈에 보였다. 그때였다.

 "히..!"

 언제부터였는지 나를 뒤쫓아 온 도련님이 나를 불렀다. 실내화를 신고 파자마를 입은 탓인지 그는 유약해보였다. 땀에 젖은 가다듬지 못한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며,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릎을 살짝 구부려 고개만 들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를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기는 했지만 밖으로 나온 행동은 묘하게 침착했다. 도련님을 두고 왔어야 했다. 내가 굳이 그의 방까지 들어가 끌고나온 이유를 물어본다면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어디가는거야?"

 "..."

 "혹시, 네가 그랬어...?"

 나는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내 모습이 도련님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은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 충분히 대답이 되었을 터였다. 도련님은 이내 괴롭게 얼굴을 구기며 내게 소리쳤다.

 "왜?!!"

 그러면서도 그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주먹을 들어 나를 한대 날린다거나,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다른 하인을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를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대체 네가 왜 내게 이러냐는 얼굴로. 나는 그 얼굴에 대한 대답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을 향한 분노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도련님."

 내가 나직이 불렀을 때 그는 크게 몸을 떨었다. 내가 그 정도로 그에게 영향력이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불길은 치솟고 소각장 근처는 뜨거운 햇살아래 있을 때처럼 더웠다. 펑 하는 소리가 났다. 까만 연기와 함께 저택의 일부가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은 허무함을 닮아있었다. 내 눈을 피하려 하는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저는 떠날겁니다. 아주 멀리요.“

 “...”

 뭔가를 포기한 듯한 얼굴이 싫었다. 정말로 모든걸 내려놓을 때,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주인님 앞에서 좋아하는 예술을 포기한다고 말했을 때, 큰 웃음소리를 내지 않기로 마음 먹었을 때, 다른 사람과 있는 경우 나를 그저 하인으로 대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항상 그랬다.

 하지만 도련님은 그래선 안되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도, 이 얼굴을 보고 싶었다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니..나를 죽이러 오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커다래지는 그의 동공을 보았다. 그에게 새로운 목표를 주었다는 기쁨따윈 없었다. 그저 그가 살기를 바랐다. 무언가에 대한 분노로도 사람은 살아지는 법이니.

 나는 몸을 굽혀 이제는 거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도련님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가져다대고 매번 보기만 했던, 호를 그리던 그 붉은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가 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우면 도련님의 심장소리까지 알 수 있었다. 떨리는 입술과 막 흐르기 시작한 땀까지 알 수 있었다. 나는 허공을 헤매는 그의 손을 잡아 쥐고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놀라 피하려는 그의 손을 꽉 잡아 심장을 만지라는 듯 부드럽게 눌렀다. 입술은 닿은 채였고 눈은 떴다. 도련님의 눈이 부릅뜨면서 그의 까만 흑갈색 눈동자가 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언젠가 내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던 그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

 나는 충격 받아 나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 꾸벅 인사를 하고 뛰어갔다. 그가 쫒아오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가 내게 굳이 도련님의 방에 왜 들어갔느냐고, 그를 왜 데리고 나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해야 했다. 그건 내 생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래도 말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나의 세상이었다고 말하는 수밖에.

 열일곱, 나는 저택을 나왔다.

 

 

 숲길은 험했고 또 험난했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있던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길을 지나가다 우연이라도, 아마 그 전보다 부패되었을 그녀의 시신을 마주칠까 겁이 났다. 너무 피곤해 잠이 들 때면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줌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감각을 상실하고 며칠이 지났을지 모를 만큼 헤맸을 때, 나는 평지로 나왔다.

 그곳은 평지라고 하기엔 이상한 공간이었다. 흙이 덮인 땅 너머로 어떤 회색빛 땅이 보였다. 발을 디디자 그곳은 아주 딱딱했고 얼굴을 바닥에 대고 쳐다봤을 때 자잘한 무늬같기도, 요철 같기도 한 것들이 무수히 이어지고 있었다.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 보니 하늘을 향해 비스듬한 격자무늬로 그림을 그린 듯한 경계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구멍이 뚫린 담장 같은 것이었다. 손가락이 쑥 들어갔고 난 그 너머를 눈에 담는 수밖에 없었다.

 발 아래로 절벽이나, 호수나 바다가 아닌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어딘지 알싸하고 화한 냄새가 났다. 자연과 숲이 담고 있는 향과는 확연히 달랐다. 푸르른 하늘아래 네모난 모양의 길쭉한 건물이 들쑥날쑥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대낮인데도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아래 회색빛 땅에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어떤 빠른 물체가 서로 비슷한 속도와 방향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빠른 물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멈춰 섰고 그들이 움직일 때는 빠른 물체가 멈췄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찬찬히 모든 걸 바라보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상상력의 범위 밖에 있는 어떠한 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 자체가 나를 집어삼킬 듯 했다. 어느새 나는 격자무늬 경계선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었다.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내 시선을 웃도는 방향에서 뭔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쳐다보았을 때 그곳의 네모난 벽에서 그림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그림이라기엔 지독히 사실적이었다. 여러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림 앞쪽에 쓰인 문자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체 숲 중반 너머 숨은 공간에 있던 사이비 마을 발견. 모든 이들에게 주인으로 지칭되던 샘 그리쳐(58)는 천애고아이자 자수성가한 변호사로 30대 초반에 사이비종교에 빠져 결국에는 자신이 새로운 교리를 발현 시키고 세상이 타락했다는 이유로 전재산을 털어 19세기에 멈춰버린 유토피아 마을을 형성. 그 후 20년간 세속과 교류를 끊은채 생활해 왔다는 사실은 세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백작’의 호칭을 달고서 마을의 지주 노릇을 하던 그는 이내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정신적 착란 증세로 빠져들었으며 마을 내 어린 아이들과 자기세뇌에 빠진 어른들은 현 시점과 마을의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는 부조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샘의 친아들인 에녹 그리쳐(15)를 비롯하여 그 마을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대략 스무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들은 태어난 시점부터 현재의 세상을 모르는 관계로 주 미저시 대학에서는 해당 아이들에 대한 심리치료 연구진을 파견할 예정인 것으로..'

 눈 속으로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내 시력을 앗아가 버릴 듯 찔러왔다. 도련님.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이라는 말 속에 현실이 없었다. 손에 힘이 풀리고 나는 주저앉았다.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한데다 선명하게 뇌 내에 칼집을 내고 있는 바람에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비적비적 일어나 걸었다. 누군가를 찾아야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

 회색빛 땅에 주저앉았을 때 아까 점점이 보던 빠른 물체가 내 앞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예상보다 훨씬 컸다. 마차와 닮은 그 물체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내게 소리쳤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남자는 짧은 하의에 노란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내 추레한 행색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물었다.

 "지금이 몇 년도 인가요?"

 "뭐?"

 "현시점 말입니다."

 고상한 말투에 그가 얼굴을 기묘하게 틀었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잠시 서있다 7월 27일이라고 했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자, 년도? 라고 되묻더니 별걸 다 물어본다는 투로 대답했다. 예상보다 훨씬 엄청난 말이 나왔다.

 "20XX년.“

 나는 세상의 벽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1 에필로그 2022 / 1 / 31 176 0 12145   
20 3부 그 너머 (7) 2022 / 1 / 31 176 0 10526   
19 3부 그 너머 (6) 2022 / 1 / 31 160 0 10700   
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78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75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192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83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193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75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81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70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80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78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69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190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70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187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74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79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81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04 0 11260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아이어른
세느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