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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1부 세상 (2)
작성일 : 22-01-16 14:11     조회 : 181     추천 : 0     분량 : 1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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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파요."

 "음?"

 나는 예의와 배려에 대해 배웠다. 그 둘의 차이를 알고 구별하여 쓸 수 있었다. 신사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신사가 아니었으므로 내용만 인지하는 걸로 충분했다.

 내게 친절한 사람, 더더욱 친절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그와 비슷했다. 내가 아프다고 하는 말에 로자 아줌마는 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히, 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그녀가 부르는 내 이름은 마음의 문을 잔잔하게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줌마는 한 번도 내게 가엾다는 말을 한 적 없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가 아파요."

 "..."

 "심장은 중요한 기관이라고 들었어요. 심장이 아프면 죽을 병 이랬는데. 근데 양쪽이 다 아파요. 심장은 양쪽에 있나요?"

 아줌마는 내 손을 이끌고 주방 구석으로 갔다.

 "그 이야기 누구한테 했니?"

 "아줌마뿐 이예요. 제가 누군가한테 무슨 말을 한다면 그건 아줌마가 가장 첫 번째인걸요."

 "오, 히. 네 말에 너무나 기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겠구나. 다른 사람들, 특히나 아저씨나 도련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 얘야. 그리고 그건 심장이 아니라 가슴이야. 네가 더 늦게 알기를 바랐다만...이제는,"

 그때 구석으로 요리사 아저씨가 들어왔다. 공기가 굳었고, 그는 눈을 잘게 흘겼다. 아줌마는 부러 큰 기침 소리를 내며 나갔다. 나를 잡아끌지는 않았으나 나는 눈치껏 그녀를 따라 나갔다. 등 뒤로 끈덕지게 요리사의 시선을 느꼈다. 몸을 휙 돌려서 혓바닥을 낼름 내보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그 이후로 며칠간 아줌마가 너무 바빠져 나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최근 나도 키가 부쩍 자라 이것저것 일에 늘어나긴 했다. 아저씨들은 내가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고 있으면 근육 좀 키워야겠다고 한마디씩 했다.

 통증은 계속 되었지만 죽을병이었다면 로자 아줌마는 주인님께 빌어서라도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터였다. 내심 안심한지라 나도 감각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꿈속에서 주인님을 보았다. 주인님이 내 꿈에 나타난다는 건 '그 시간'을 다시 경험한다는 말과 같았다. 나는 이미 떨고 있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카앙. 포효하는 듯한 울음소리 같다.

 어이쿠. 저런.

 나는 그 말을 잊지 못한다. 나라는 근본을 이루고 있던 어떤 걸 박살낸 후 미처 알지 못했다는 탄식으로, 그 소리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기계적인 울음소리를 내는 뻐꾸기시계와 같았다.

 고저 없는 말투. 주인님의 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주인님의 아주 사소한 실수로 사람이, 내 가족들이 생명을 잃었다. 내 앞에서 무너지는 등을 나는 속절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내 가족의 죽음이 그에겐 단 한톨의 긴장감이나 당황함도 주지 못한 것이었다. 어느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나 또한 귀찮으니 처리 될 거란 것도.

 쿨럭 쿨럭 피를 토해내는 몸뚱이를 보고 나는 굳는다. 오줌을 싸고 만다. 안 돼.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정없이 소리친다.

 "제발 적선을."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말이 꼬인다. 나는 일곱 살이었다. 곧 여덟살이 되는 겨울이었다.

 남들에게 구걸하는게 습관화된 몸은 불쌍히도 굽었다. 나는 작고 뼈만 남은 내 몸을 더욱 쪼그라들게 만들어 동정심을 유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팔과 다리를 덜덜 떨며 힐끔거리는 눈짓을 할 줄 알았다. 부모는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쳤고, 나는 곧잘 했다. 내가 걷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 가족은 조금 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너의 부모가 이미 없는데도,"

 "...."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냉엄한 주인님의 목소리는 내 뼈마디마디에 새겨졌다. 질끈 감은 눈에 눈물이 흘렀지만 슬픔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처럼 나는 울고있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고요 후 그는 한마디 했다.

 "데려가."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주인님의 감정없는 눈빛을 보았다. 내 눈 속엔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사함이 비춰졌을 것이다. 주인님은 눈썹을 찡그렸다. 고개를 획 돌려버리고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따라간다.

 꿈에서 깼을때 내 온몸은 젖어있었다. 정말 내가 웃었을까? 열 살 이후로 꾼 적 없는 꿈이었다. 부모의 얼굴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축축하고 불쾌한 기분에 들었다. 이불을 걷어냈을 때, 검붉은 피를 마주했다.

 

 로자 아줌마를 보자마자 애써 참은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와 이불보를 번갈아 보더니 로자 아줌마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서렸다.

 "왜, 왜 웃어요?"

 억울한 마음에 물었더니 아줌마가 말했다.

 "너에게 해줄 말이 두가지 있어, 히. 먼저 지금까지 말해주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너무나 축하한다 이 어여쁜 아가씨야."

 그러고선 내 코를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내 콧물이 그녀의 손에 살짝 묻었지만 아줌마는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아가씨예요?"

 "그럼."

 나는 여지껏 내 성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저택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 팔이 가늘고 목소리톤이 높은건 보편적인 남자아이의 특성에 어긋난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저씨들보단 아줌마들이 편하고 좋았다. 그건 제이 아저씨 말처럼 '치마폭'을 좋아하는 밝히는 놈이라 그런거라고도 생각했었다. 아줌마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아줌마들은 가끔씩 모여 '남자들은 믿기 힘들다'고 했다. 그 믿을 수 없음이 나한테도 내제되어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녀석이라는 말에 아무도 아니예요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나라고 믿었다. 머리는 항상 짧게 쳤고, 아저씨들이 하는 일을 배웠다. 이 다음에 힘이 더 세지면 더 큰 짐도 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그 말은 저도 나이가 들면 아줌마처럼 된다는 건가요?"

 내 말에 로자 아줌마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이제 막 생긴 주름이 가득했다. 아줌마는 살집이 있고 품에 안기면 포근했다. 아줌마한테서는 항상 부엌 냄새가 났다. 나는 그걸 따뜻한 냄새라고 표현했다. 여지껏 생각해본 적 없는 미래가 그려졌다. 내가 말했다.

 "정말 근사한 일이예요. 전 항상 아줌마처럼 되고 싶었거든요."

 아줌마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아줌마가 우는 연유를 알지 못해 한참을 쩔쩔맸다.

 

 2차 성징 이후 나는 날로 여성스러워졌다. 그건 크나큰 문제였다. 첫째로 나는 여성스러워지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 나는 그 사실을 기왕이면 평생 숨기고 싶었다. 로자 아줌마는 내가 치마를 입거나 머리를 기르면, 향수를 뿌리거나 입술을 붉게 칠하면 얼마나 아리따울지 얘기하곤 했으나 나로써는 상상 속 동물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때 황 아줌마는 시크하게 왜 그러냐고 핀잔을 주곤 했으나 내가 머리를 자르고 온 날이면 아쉬운듯 내 머리칼을 매만지는 사람 또한 황 아줌마였다.

 나는 최대한 품이 큰 옷을 입으며 팔 운동을 열심히 했다. 아줌마들 눈엔 어여쁘게 보였을지 모를 일이지만 솔직히 내 얼굴은 거친 삶의 흔적이 선명해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엔 부족했다. 키도 껑충하게 큰 편에 속했다. 굳이 여자라고 말해주지 않는 한 큰 의심을 받을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로자 아줌마만큼 풍만한 가슴을 가지게 된다면야 숨길 도리가 없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자라나는데 한 가지 커다란 문제는 목소리였다. 아직도 꾀꼬리같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는 도련님도 언젠가는 주인님처럼 굵직한 목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부주의하게 있다가 놀랐을 때 꺅 하며 소리를 내지르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했다.

 나는 남들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저택에서 최대한 멀어질 수 있는 만큼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소리를 질렀다.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쯤 그새 흐른 땀을 훔치고 열심히 달려왔다. 입을 벌리고 고생한 성대가 내뜻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랐다.

 벙어리가 되는건 원치 않았음으로 완전히 낫기 전 다시 소리를 지르고, 돌아오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히, 너 목소리가 굵어졌다?"

 도련님이 나의 이변을 눈치챘을 때는 속으로 환호성을 쳤다. 목이 아프지 않아도 목소리가 꽤 굵어져 있었다.

 나는 아저씨들에게 담배도 배웠다. 내가 고개를 기웃거리자 그들은 어딘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피우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줌마들이 알면 기함할 일이었으니 나는 비밀로 했다. 담배를 피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게 맛없다는 거였지만 아저씨들과 나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생기기도 해서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글자를 깨우치는 데는 일 년이 걸렸고, 서재에 있는 책들을 급한듯 허겁지겁 읽어내리는데는 또 다시 일 년이 걸렸다. 나와 도련님의 대화 수준은 급격히 높아졌다. 그 날 이후 한참동안이나 도련님은 내가 부서져 내릴까 전전긍긍했다. 그 날의 기억이 도련님에겐 어지간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나도 거울을 보지 못해 내 모습을 몰랐지만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내가 다 나을 때까지 이어진 행동은 어린 도련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다시 튼튼해진 나를 두고도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것이 썩 기분 나쁘지 않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챙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그보다도 한참이 지나서였고 나보다 지체 높은 도련님이 나를 '챙겨'준다는 건 그 나이의 내겐 이해를 넘어선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련님은 여전히 나의 우상이었다.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와 사랑스러움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열세 살, 도련님을 처음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은 나보다 작고 여린 존재를 위한 것이었다. 우러러봐야하는 도련님은 이제 어린 동생같았다.

 열네 살, 도련님은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걸로 보였다. 가끔씩 흥얼거리는 허밍소리는 다채롭고, 색감이 가득 찬 화음이었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그는 씨익 웃으며 자신이 지어낸 거라고 했다. 그런 도련님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열다섯, 나는 그녀를 만났다.

 

 도련님이 약혼한건 열 살 때의 일이다. 코흘리개 시절 맺어진 약속은 종종 화두가 되곤 했으나 정작 도련님은 약혼자를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도련님이 처음으로 그녀를 본 날, 입을 떡 벌린 게 이해됐다. 그녀는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서 마차에서 내렸다. 자그마한 체구에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이미 몸에 자리매김한 예의바르고 우아한 몸짓은 열세 살이라기엔 과한 기품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도련님의 유순함과 여자아이 같다고 표현하는 외모는 그녀에 비하니 완전한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높고 청아한 울림으로 그녀가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목울대에 손을 가져갔다. 그건 더 이상 내가 바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도련님의 약혼자는 훔쳐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첫인사를 제외한 후 하인들은 그녀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객실을 정리해주고 다과를 가져다주는 황 아줌마만 유일하게 그녀를 몇 번 보았을 뿐이었다.

 "아가씨가 어찌나 도도하던지. 네, 거기에 놔주세요."

 그녀의 말투를 따라하며 아줌마들은 웃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흉내내며 즐거워했다.

 집안의 분위기로는, 두 사람이 어떠한 성적 교감이 있기를 바라는 투였으나 그들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잰 채 하는 도련님을 그녀가 매우 언짢게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와해되었다. 둘의 관심사는 확연히 달랐고, 그 다름에 대해 양보하고 맞춰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재미가 없어."

 "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저한테 물으신 거예요?"

 "그럼 너 말고 여기 누가 있다는 거야?"

 날이 좋은 날 도련님은 바깥에 있는 걸 좋아했다. 저택 뒤편 야트막한 언덕은 내가 맞은 날 이후 가본 적이 없었다. 도련님은 그곳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를 제쳐두고서라도 종종 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느덧 그 언덕의 입구에는 무성한 풀이 가득 자라 있었다. 대신 그는 저택에서 조금 더 올라간 어귀로 언덕이라기엔 조금 더 평야에 가까운 다른 공간을 발견하고 나를 데리고 갔다. 돗자리를 펼 때도 있었지만, 옷이 더러워지는 걸 개의치 않고 그냥 앉는 날이 더 많았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도련님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나를 끌고 갔지만 내가 딱히 그곳에서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의의를 두는 거죠." 내가 말했다.

 "그건 전혀 실용적이지 않잖아."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요?"

 내 말에 그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은 근래 살이 빠지고 키가 컸지만 아직 얼굴이 앳되어 소년보다는 아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련님은 멍청하지 않았다. 고급 교육을 받았으며,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다운 행동거지를 보였다.

 내 말이 핵심을 파악했기 때문에, 도련님은 잠시 침묵했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도련님의 인상이 바뀔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을 거다.

 "너랑 있는 건 좀 달라."

 "..."

 "달라.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네."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 조언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련님은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변변찮은 심부름을 시키며 두 사람의 은밀한 시간-다른 사람들이 부르는-에 끌어들였다. 나는 최대한 감정 없는 얼굴로 걸어 들어가 마찬가지로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나왔다. 서로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법한 거리에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건 꽤나 재미난 일이긴 했다. 허리를 한껏 뒤로 내빼고 다리를 쭉 내민 도련님과 간의탁자에 팔꿈치를 기대고서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고, 저만큼이나 매력적인 두 사람이 서로 끌리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나와 그녀는 몇 번 두 눈이 마주쳤다. 다과에 흥미를 잃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그 접시를 치우고 있었다. 그제야 내 존재를 인지한 그녀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홉떴다. 왜 그러지. 유달리 놀란 표정의 그녀를 나도 모르게 주시하다, 남자하인이 다과를 치우는 광경이 생경할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내 행색. 아침에 장작을 패고 온 터라 옷에선 먼지냄새, 흙냄새가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예요. 남성분이 오신 줄은 몰라서."

 그 말에 놀란 건 나였다. 아저씨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한참 꼬맹이였다. 게다가 '남성분'이라는 호칭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자였지만 남자로 여겨지는데 큰 저항이 없었다. 그렇게 믿고 자라온 시간이 생의 반을 넘어선 것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편리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지껏 나를 남성이라는 말로 격상시키고, 남자 대 여자라는 성별의 선상에서 말을 시작하는 대우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도련님과 있을 때도, 그와 꽤나 깊고 진지한 학문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도 나는 그에 비하면 '사내 녀석'이나 '놈' 따위라는 말이 어울리는 처지였다.

 내가 생에 처음 겪는 혼란으로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고 눈만 댕그랗게 뜬 채 가만히 서있자 그녀는 그런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웃었다.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기는 했으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구불거리는 옅은 베이지색의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내비쳤다. 나는 한 번도 가지지 못한, 가져보지 못할, 그 모든 것을 숨쉬 듯 당연하게 가진 그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이제 조금씩 솟아나는 봉긋한 가슴과 그 신체의 유연함을 감싸는 드레스는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터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독한 허기가 몰려왔는데 그게 어디서 온지 몰랐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도련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뒤로 한껏 쏠렸던 자세는 정으로 돌아와 있었고 의자 팔걸이에 왼쪽 팔을 기대고 그 팔로 턱을 괸 채였다. 그의 시선은 나를 힐난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알아챈 건 그 눈빛이 주인님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법한, 내가 말하는 걸 알지 않냐는 시선이었다. 어쩐지 뜨겁고, 불쾌하고 녹진녹진 했다.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소년과 소녀의 시선이 한참을 멀어질 때까지 내게 머물러 있었다. 나는 개울가로 달려가 세수를 했다. 흙이 잔뜩 묻은 옷을 털어내고 발을 담갔다. 일렁이는 물살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너는 누구냐고 묻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너는 쿼터인 것 같아.

 누군가 철들어 가는 내 머리통 위로 말했다. 그 말엔 일종의 무시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나는 그보단 그 단어에 이끌려 물었다.

 그것은 4분1정도씩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인 사람이었다. 나는 그정도로 정의내렸을 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저는 어떤 쿼터인가요? 낸들 알겠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른다고 했다. 아마 동양계와 북유럽계가 섞였을 거라고, 흘리듯이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누군가 추측으로 쿼터라고 짐작하는 쿼터. 그리고 하인. 남자하인이지만 사실은 여자. 주인님이 거둬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 조차 시작되지 않았을 인생. 자라날수록 나를 정의하기 어려웠다. 사실 나는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냥 잡일을 하는 '히'로 족했다. 하지만 나는 자라날수록, 점점 더 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나를 정의하고 싶어졌다. 나의 유일한 욕망은 글자를 알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그 뒤에는 새로운 욕망이 일렁였다. 나는 알면 알게 될수록 더 열망하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련님의 약혼녀는 나를 궁금해했다. 다시는 부르지 않을 거란 내 예상과 달리 도련님은 가끔씩 나를 불러 옆에 두었다. 그래서 가끔씩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매번 다른 드레스를 입고선 그 하얗고 볼이 통통한 얼굴에 호기심어린 커다란 눈을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부끄러웠다. 나도 그녀를 곁눈질하고 싶었지만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그런 게 불가능했다.

 시선이 맞부딪히면 그녀의 눈동자를 먼저 피하는 건 매번 나였다. 아가씨는 막상 눈이 마주치면 당돌하게 나를 마주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항시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했고 마주치는 순간 사람을 끌어당기는 작용을 해서 쉬이 눈을 떼기 어려웠다. 내가 그 힘에 이끌려 피했던 시선을 마지못해 슬그머니 돌리면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가 있었고,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관심이 많아."

 오랜만에 갖는 둘만 있는 시간이었다.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약혼녀는 병원에 잠깐 다녀온다고 저택을 비운 날이었다. 도련님이 말했을 때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그 말뜻과 그 말이 향하는 대상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가요?" 짐짓 모른 척 내가 대답하니,

 "모른 척 하지마. 히."

 그가 내 턱을 잡아 돌렸다. 도련님의 갈색 눈동자는 진실을 요구하라고 소리쳤고 나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의 얼굴에 일렁이는 것이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독점욕이라면 나는 그 이유를 찾아야했다. 도련님은 그녀와 함께하는 거의 모든 시간에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모를 리 없다. 나는 그와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눈앞에 있는데 바라보지 않고 사랑을 하고 있다 말한다면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도련님은 언제나 옳으시니까요.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녀는 내거다."

 그는 내 턱을 손가락으로 한번 훑고 떨어져나갔다. 손에 묻은 뭔가를 닦아내려는 듯 음미하려는 듯 손가락을 맞물려 두어 번 쓸었다. 도련님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유려하고 짜임새 있었다. 처음 본 그날의 충격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차분히 자라나 어느새 앳된 느낌을 지우고 청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라던가 알겠습니다, 라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그건 도련님을 모독하는 말이었다. 감히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짧은 내 대답에 나를 힐끗 바라 본 도련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며칠 뒤 도련님과 약혼녀는 산책을 나갔다. 약혼녀의 시중을 들던 황씨 아줌마가 그 날 새벽 몸살감기로 몸져눕는 바람에 로자 아줌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들은 저택 뒤로 넘어서면 나오는 숲길로 향했다. 커다란 마차와 하인들을 대동하고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웃었다. 주인님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으나 도련님의 얼굴엔 지루함과 따분함에 가까운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여러모로 귀찮을 일을 넘길 때 짓는 희미한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인님은 저런 도련님의 얼굴을 구분해내지 못했다. 여타 다른 사람들도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이 출타 후 한나절이 지나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없는 저택이 내게 처음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열다섯인 도련님이 여지껏 저택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튼튼했고 어디든 뛰어다닐 수 있는 팔다리와 건강함을 자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 또한 일곱 살 이후 이 저택을 나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밖으로 나간다한들 먹고 살 궁리만 해야 하는 존재였다. 도련님과 비교하는 건 실리에 어긋났다.

 해가 진후로도 한참이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넘어갈 무렵이 가까워지니 주인님과 저택 하인들은 발을 동동구르며-그런다고 해결되는 일이란 전혀 없었다- 대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소식통이 아직 없냐는 호통에 한 하인은 말만 머뭇거렸다. 그게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출발한 전보가 도착해서 다시 오지도 않았다. 그동안 대문 앞에 서있던 주인님도 그걸 알았다.

 나는 도련님을 떠올렸다. 내 머릿속에 그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목울대와 점점 단단해져가는 허벅지를 가진 남자였다. 내가 걱정인 건 그의 약혼녀. 품이 좁아 어찌해도 움직이기 불편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설상 약혼녀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 앞에 몸을 내던져야만 할 로자 아줌마였다.

 나는 어느새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었다. 불안감이 내 뇌와 다리와 장기까지 덮어가고 있는데도 이건 미련하고 아둔한 한낮 하인의 어설픈 착각이라 믿었다. 지금만큼은 난 아주 멍청하고 아는 게 없어야했다. 수도 없이 되뇌었다. 덜컥, 소리를 내며 손톱이 부러졌다. 알싸한 피가 손톱 사이로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그때 저 멀리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흙과 풀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마차의 바퀴 한쪽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위편이 깨졌고 네마리 말 중 말 한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도련님이 앞장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주인님은 도련님을 끈질기게 눈에 담으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간절한 눈동자를 놔두고 그의 발이 얼어붙어있는 이유를 나는 몰랐다. 나는 그래야 하는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였다. 수많은 저택 사람들이 대문 앞에 서서 출타인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용기인지 나는 뛰쳐나갔다. 하루 종일 배로 일한 다리가 욱신거렸지만 넘어질듯 달려가 도련님을 붙잡았다. 내 행색은 깨끗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도련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소매를 움켜쥐더라도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도련님!"

 "히.."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담겼지만 이내 내 눈을 피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니야. 그러지마. 눈알이 빠르게 움직였다. 깨진 마차. 일그러진 바퀴. 사고가 났다면, 그냥 두고 오는게 나았을 터. 왜 굳이 이걸 끌고 왔는지. 대체 여기 '뭐가 담겨 있길래'.

 "미안하다. 나는.."

 나는 그를 놓아버리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도련님이 내 팔목을 세게 붙들고 허리를 낚아챘지만 이미 늦었다.

 마차 안쪽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의자 부분에 다소곳하게 누워있는 약혼녀. 그리고 바닥에 대충 던져놓은 것처럼 누운 로자 아줌마. 아줌마의 팔과 다리는 기괴한 형상으로 굽어 있었다. 나는 보자마자 두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왜. 어째서.

 뱃속 깊은 곳에서 토기가 올라왔다. 나는 도련님이 넘어지든 말든 세게 내치고 나무근처로 가서 토악질을 해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었지. 감자쪼가리와 묽은 액체를 몇 번 게워낸 후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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