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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1부 세상 (1)
작성일 : 22-01-16 14:09     조회 : 304     추천 : 0     분량 :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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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련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몸을 크게 떨었다.

 불길이 등 뒤에서 치솟고 있었다. 얇은 잠옷만 입은 채였지만 서있는 곳은 숨쉬기 버거울 정도로 더웠다. 다시 한 번 펑 하는 소리가 났다.

 뭔가가 무너진 건가? 하지만 고개를 들 수도, 돌릴 수도 없었다. 내 머릿속은 혼돈상태였다. 왜. 대체 왜.

 천천히 다가온 그가 내 앞에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무거운 시선을 들었다. 두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내게 날린 비수 같은 한 마디.

 "..나를 죽이러 오세요."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숨을 삼킨다. 시선이 올곧다. 나는 문득 두려워진다. 그가 무서운 건가? 그럴 리가. 정말로? 무엇이 무서운지도 모른채 벌벌 떨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너...."

 그의 돌발행동에 나는 차마 그 이상 말하지 못한다. 그런 내게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 뛰어간다. 발이 얼어붙어 나는 결국 쫒아가지 못한다.

 한참이 지나서야 등 뒤로 시선을 돌린다. 붉게 타오르는 저택은 눈이 멀 정도로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그을리는 듯 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다. 이글거리며 건물을 집어삼키는 불길은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열다섯, 나의 세상이 무너졌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내가 생각해도 잠기운은 전혀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엔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이불 끝을 잡고서 시선은 천장을 향했다. 다시 한 번 눈을 깜빡거리며 이번엔 그 숫자를 세어보았다.

 이례 없는 폭우였다. 저택 사람들은 번쩍이는 천둥번개에 몸을 크게 움츠렸다. 이윽고 시끄러워졌다. 어른들은 새는 물을 퍼내는 인원으로 투입되었다. 달그닥 거리는 소리. 퉁퉁퉁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소리. 끼익 거리는 소리. 밝은 빛이 대낮처럼 쏟아지고 나면 몇 초안에 들리는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

 이불 속에 몸을 뉘일 수 있는 건, 나처럼 아주 어린 아이이거나 주인님의 가족들뿐이었다. 주인님은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들고, 고민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매만지는 콧수염을 건드리며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설령 그가 이 자연재해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얇은 천 이불을 코끝까지 덮으며 도련님을 생각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민해보는 일은 아무리해도 지겹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에 있지 않을 지도 몰랐다. 늙은 유모의 품에 안겨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있을 지도 몰랐다. 혹은 그저 잠에 깊이 빠져 이 사단을 모를 지도 몰랐다.

 쾌쾌한 먼지 냄새가 폐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나한테는 기댈 곳도 할 일도 없었지만 잠을 자는 것만큼은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밤을 맞이하지 못한 나의 불쌍한 가족들을 떠올렸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늘이 다시금 새하얘졌다.

 한순간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눈을 뜬 채로 죽어버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숨을 쉬고 있었을까?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나는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폭우가 가셨고, 나는 그날을 한참동안 잊어버렸다.

 

 저택에선 모두에게 주어진 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아침 일찍 새소리가 들릴 때 일어나 아직 풀내음에 습기가 덜 마른 공기 속에 눈을 비비며 일을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나를 '히'라고 불렀다. 부르기 쉬운 호칭이라 나는 어디서든 불렸다. 그걸 이름이라고 해야할지는 애매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억 속 끝자락을 뒤지자면 언제나 저 말이 들렸다. 그래서 나는 히였다.

 주인님이 내 이름을 지우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이름 뿐 아니라 존재도 지우지 않았다. 들은 말로는 주인님은 도련님 또래의 아이들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 하인이 아이를 낳으면 아이만 내보내거나, 부모와 함께 내보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유는 여러가지 추측으로 난무했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쨌든 주인님에게 감히 그런걸 물어볼만한 대범한 인간은 이 저택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연유를 모른 채 자라났다. 나로써는 아마도 지난날의 후회와 연민이 있어서라고 짐작ㄴ할 뿐이었지만, 가끔씩 마주치는 주인님의 눈을 볼때면 모든 가정은 무너졌다. 먼지 한톨만큼이라도 내게 신경을 써본적 있는 사람이면 그런 눈으로 쳐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집에서 나보다 어린 건 도련님뿐이었다. 두 살이 어리고, 세상 누구보다 깜찍하다고 사람들이 그랬다. 나는 도련님을 보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뽀얗고 윤기나는 얼굴. 반짝이는 눈을 굴리던 그는 나를 처음 봤을 때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 또래 아이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을 그의 표정은 의기양양에서 애매모호함으로 옮겨져 갔다. 나 또한 또래 아이를 본 적은 있으나 그토록 귀티나고 말끔한 차림새의 아이는 본 적이 없었음으로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신기하다."

 그는 나를 향해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리켜 말했다. 신기하다. 몇 번이고 말하면서 저 혼자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내 옆에 있던 로자 아줌마가 나를 붙잡았다. 어깨를 부드럽게, 하지만 힘있게 쥐는 통에 몸이 포박당한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나는 그 손아귀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도련님이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콕콕 찍어보고 한 마디 더했다.

 "너 신기하다."

 그가 내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서, 나 역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이는 배움의 후천적 반영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하인들을 그림의 배경이나 쳐다보는 것처럼 보았다. 처음엔 그 시선의 의미를 나도 알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을 본다면 정물보는 듯한 그런 표정은 나오지 못한다. 순수한 어린 아이였다지만, 그럴 때 도련님의 모습은 주인님을 복제한 듯 닮아있었다. 그건 무척이나 소름 돋는 일이었다.

 

 나를 둘러싼 어른들은 도련님께 잘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왜요 라고 물으면 도련님이니까, 라는 이해 못할 대답만 돌아왔다. 잘해라. 왜요. 도련님이니까. 세 가지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해서 말하다 지친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어깨를 으쓱했더니 사람들이 와하하 웃어서 나는 또 기분이 상했다.

 도련님이 나를 부른 건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왜 잘해야 한다는 거지. 나처럼 끊임없이 물어보는 애는 처음이라면서 아줌마들은 내 볼을 꼬집었다. 그 쯔음 나는 하인들의 귀여움을-특히 여자들-한 몸에 받고 있었다. 사내 녀석이 벌써부터 여자품이나 좋아하면 어쩌냐고 아저씨들이 말하면 아줌마들은 난감하게 웃기도 했고, 내 귀를 막으며 뭐라뭐라 소리치기도 했다. 단어와 말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어떤 단어나 말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환경에 익숙해지는 인간의 특성상 나도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은 지나가듯 한 소리였겠지만 그날은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아줌마들은 나를 제대로 꾸며 보내야한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아저씨들은 도리어 그런 속보이는 짓은 하는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신분상승따위를 꿈꾸는 건 아니겠지?"

 제이 아저씨와 퀘 아저씨는 노골적으로 내 앞에서 으름장을 놓았다. 로자 아줌마와 황 아줌마는 기함하며 대체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아저씨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나중에 하는 말로,

 "짖궃은 아저씨들은 무시하렴. 그네들은 불안한 거야. 웃기게도 너를 경쟁상대로 보고 있단다."

 "경쟁상대?"

 "그러니까, 앞으로 알게 되는 사실을 꼭 아저씨들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내가 그 말 뜻을 이해하게 되는 건 열두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여덟 살이었다.

 결국 몇 아줌마 아저씨들의 의견이 일치해 그 힘을 몰아부쳐 나는 적당히 말끔한 차림새로 도련님한테 가게 되었다. 그래봤자 샘물에 머리를 빗어 넘기고 그나마 보풀이 제일 덜한 옷을 빳빳하게 눌러 입었을 뿐이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훤하다고 칭찬해줄 때는 조금 으쓱했지만 도련님 앞에 섰을때 그것이 오만이자 실로 멍청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련님은 예의 신기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하지만 기괴한 동물 보듯 하던 눈빛은 사라져있었다-나를 반겨했다. 그 태도에는 기본적으로 내가 너의 우위에 있다는 상위의식이 담겨 있어 나는 놀랐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깨닫는 것에는 그다지 좋은 것이 없었다.

 오만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 도련님은 서스럼없이 내게 명령했다.

 "여기 앉아."

 나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잘 빚어진 반죽같았다. 촘촘하게 자리 매김한 눈코입은 딱 필요한 만큼의 간격와 크기로 조화를 이뤘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파닥파닥 거렸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예쁜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풍경을 볼 때의 평화가 내 안에 찾아들었다. 분홍색 입술은 뭘 바른건지 윤기가 났다. 그의 동공도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와 가느다란 머리칼. 소매 사이로 나온 팔은 짧고 오밀조밀 했다.

 "넌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 몇 살이야?"

 "네 도련님, 저는 여덟 살입니다."

 "난 여섯 살!"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도련님과 대화할 때면 '네, 도련님'을 꼭 말의 어미에 붙이고 묻지 않는 말에 대답하지 말라고 배웠다. 도련님이 묻기만 하고 내가 대답만 하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자 그는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넌 앵무새야? 왜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말아?"

 "네, 도련님. 저는 앵무새는 아니지만 대답은 합니다."

 이런 식으로 밖에 대화가 되지 않으니 그가 내게 빽 소리치고 말았다.

 "너도 나한테 뭘 물어보도록 해."

 "네 도련님."

 "물어보라니까? 난 책을 많이 읽는단 말이야. 뭐든 알려줄 수 있어."

 "....'책'이 무엇입니까?"

 도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질문을 받은 자의 책임감으로 그는 곰곰이 고민했다. 그래봤자 어린아이가 벤치에서 발을 까딱까딱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뭔가를 바랐다. 정의내리지 못한 답답함이 해소될 실마리를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책은 종이를 모아놓은 이야기야!"

 나는 그 말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듯 그는 내게 질문을 하라고 재촉했다. 질문의 반 이상이 어린 그 또한 대답해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꽤나 재밌었는지 그 다음부터 나는 종종 도련님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도련님을 처음 보고 온 날, 모든 어른들은 도련님을 궁금해했다. 내가 보고 온 도련님을 나처럼 느껴보고 싶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순순히 다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작고 소중한 앨범처럼 나만이 간직해야 할 한 가지는 필요했다.

 도련님의 뽀얀 얼굴을 얘기하던 어른들 사이에서

 "저도 하얀편인데요?" 라고 말했을 때,

 내 말에 아줌마들이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목소리가 하도 우렁차 고막이 아팠기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런 내 표정을 잔뜩 불만으로 찬 철없는 아이의 얼굴로 해석했는지 가장 뚱뚱한 아줌마가 내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연민과 귀여워하는 얼굴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도 물론 하얀 편이지. 하지만 도련님에 비할 바가 아니란다. 도련님이 특별한 게 아니야. 바깥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아주 많단다."

 "그게 안좋은건가요?"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아줌마 말투가 그래요. 그냥 그런건..느껴져요."

 아줌마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얗고 뚱뚱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다. 황 아줌마는 구리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날씬하고 튼튼했다. 내가 황 아줌마를 생각하고 있는게 들킨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누가 누구를 비교하다가 싸움이 터진 하인들은 쫒겨났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과의 의미로 아줌마를 꽉 껴안으니 아줌마도 내 볼에 얼굴을 비벼댔다.

 

 도련님이 나의 우상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토록 고귀하게 여겨지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그를 아주 소중한 존재로 만들었다. 도련님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의 너그러움과 포용력. 오만함과 자부심까지 나는 동경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나는 도련님에게 끝없이 질문했고, 그는 답을 찾으려 애를 썼다. 우리의 놀이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내가 자라는 동안 주인님은 한 번도 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련님의 성장은 눈에 띌 만 했다. 내가 내쳐지지 않은데다, 도련님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이제와 히?"

 "네 도련님."

 "도련님이란 말은 집어치워. 너의 그 기계적인 목소리에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야."

 도련님은 그때 즈음 사교모임을 따라가 당시 청년이 되지는 못했으나 소년의 범주에 들어선 귀족 아이들의 말투가 옮아온 듯한 행동거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훗날 정치로 나가고 싶다는 뜻을 이때 미리 세워놓았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시나요?"

 "정치학개론. 지루해 죽겠군."

 겨우 여덟 살짜리인 도련님은 요양 온 늙은 백작처럼 말했다.

 "책이 무척이나 더럽습니다."

 "아 이거? 고전 중의 고전이라나. 아버지 서재에 있었는데..아마 아버지도 안 읽으셨을 거 같아."

 서재. 나는 말로만 그곳을 들어보았다. 도련님이 내 질문에 막힐때면 항상 그곳에서 뭔가를 찾아내 오겠다고 말했다. 서재는 신성한 공간이라 청소하는 하인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그 단어를 내뱉을 때면 나는 서재에 대한 환상과 부러움이 한데 뭉쳐 목구멍을 꽉 쥐는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기분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탓에 얼굴 근육이 씰룩였다. 다행이 이 년 넘도록 나를 자세히 보지 않는 도련님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가 먼지를 좀 제거해드릴까요?"

 그가 나를 '주시했다.' 그늘진 눈매에 깊이가 생겨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교모임에 가서 배워온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건 나의 착각이었나.

 하지만 도련님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선 내게 책을 넘겨주었다. 보기 편하게 해놔. 습한 곰팡내가 났다. 종이에 베인 눅눅함은 여지껏 내가 알던 그 어떤 냄새와도 달랐다.

 그 날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책을 음미했다. 삐걱거리는 내 침대에 앉아 진귀한 물건 다루듯 책머리부터 조심히 쓸어내렸다. 한 장 한 장 적당히 마른 수건으로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한 번 꼼꼼히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책만 손에 쥔다면, 도련님이 발 디딘 세계에 조금쯤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건 어설픈 착각이었다. 꼬불거리는 글자. 나는 문자를 알지 못했다. 말로만 할 줄 알았지 종이에 쓰인 글귀를 읽어 내린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귀한 암호인 듯 내 앞에서 춤을 추며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면 알게 되기라도 한다는 듯 나는 한없이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지막 장까지 덮고 제법 깨끗해진 책을 봤을 때, 이미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만족한 도련님은 그 다음부터 내게 책을 맡겼다.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전집이 되고. 더 이상 도련님이 내 앞으로 책을 끌고 오게 무겁다고 여겨질 쯤, 그가 제안했다.

 "안되겠다. 서재에 와서 닦아놓고 가."

 나는 비교적 깨끗한 수건을 들고 신이 나 그를 따라갔다.

 서재는 나의 상상을 넘어선 영역이었다. 끝도 없이 가져오는 책을 보며 그것들이 빼곡히 쌓인 어떤 공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있을 뿐이었다. 종이 뭉치가 모여 이뤄내는 화음이 있다는 걸, 단지 나란히 놓은 그 배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웅장함과 경외감이 있다는 건 정말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나는 최대한 정물 보듯-이건 주인님과 도련님의 행동을 따라한 것이다-덤덤하게 그 공간에 섰다.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간 도련님은 거미줄까지 생기기 시작한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부터 순차적으로."

 그게 시작이었다.

 

 내 어린 시절은 단조로운 몇 가지로 채워져 있다. 아침이슬. 풀내음. 흙내음. 아줌마들. 아저씨들. 그리고 도련님.

 그날도 나는 평소처럼 어린 도련님과 놀고 있었다. 저택 왼쪽은 숲길로 이어져 있었는데, 덩쿨이 타고 올라가 뒤덮은 저택의 외벽과 우거진 나무 사이가 이루는 그 아래 자그마한 공간이 하나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구석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야트막한 언덕 하나가 나타났다. 그 언덕은 도련님의 아지트였다. 그와 나는 종종 그곳에서 놀았다. 알기는 했으나 도련님이 없을 때 나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그는 식물학에 관련된 책 몇 권을 들고와 정원에 있던 잡초나 풀, 이름모를 나무와 꽃 따위에 대해 나와 이야기 나누고 싶어했다. 글을 모르는 내게 스케치되어 있는 그림과, 이 그림 속 이름 모를 꽃과 풀에 대해 그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고 긴 이름의 열대 꽃과 풀이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우면 어떨 것인지, 실제 눈앞에 있는 풀도 햇빛과 바람에 따라 그림과는 전혀 달리 보이는데 알아볼 수 있는 건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구름에도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신기해하는 내게 잘 모르는 분야인듯 도련님이 다음에 가져오지 라며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도련님의 머리 위로 짙은 그늘이 졌다.

 나는 처음에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세상에 내가 움켜쥔 작고 작은 따스함을 앗아가는 한줌의 어둠이었다. 당혹스럽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이런 감각을 선사하는 건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실을 잊고 있던 내가 기억해내기에는, 그 그늘만으로 충분했다.

 주인님은 어리둥절한 도련님 뒤로 섰다. 나를 내려다보는 주인님의 얼굴은 근 몇 년만인지도 몰랐다. 그도 나이란 것을 먹는 사람일 텐데, 어쩐지 내가 일곱살이던 그 날과 수염 한 톨마저 바뀐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겨울, 아무 표정없이 서 있던 주인님을 오려다 이곳에 붙여놓은 것만 같았다.

 주인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우리를, 아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나는 도련님이 건넨 책에 손을 짚고 있었고, 무슨 죄라도 지은듯 그 손을 후다닥 떨쳐내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도무지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새 땀이 베어든 종이가 내 손바닥에 달라붙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감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말이 나오는 건지 들리는 건지 모를 새로 순식간에 시야가 새까매졌다. 화한 충격이 왼쪽 뺨에 달라붙었다. 너무 아프면 눈물이 나올 수도 있구나. 놀란 눈동자는 감기지도 않고 눈물을 데롱데롱 달고 있었다. 내가 다시 쳐다보려하자 주인님은 사정없이 나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오로지 소리를 높이는 건 도련님뿐이었다. 나는 헉하는 단말마만 내지르며 개새끼마냥 맞고 있었고 주인님은 그 어마어마한 힘을 어린아이에게 내두르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도련님은 맞은 내가 안쓰러우면서도, 그렇게 안쓰러운 나를 때린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마지않는, 평소라면 너무나 자랑스러워했을 피붙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말려보려는 소극적시도가 통하지 않자 발을 동동거렸다. 그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매질이 멈췄다. 주인님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고, 아들은 그 눈빛에 압도당해 울음을 멈췄다. 사실상 시작도 안한 그것은 온몸의 흐느낌 비슷한 행동으로 치환되었다. 애써 참는 그를 보고 한숨을 한번 쉰 주인님은, 도련님의 작은 머리통을 작게 쓰다듬고 사라졌다. 나를 세차게 때린 그 손이 부드럽게 선을 그리는 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히.."

 그가 애달픈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일단 나는 너무 아프고 힘들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내 움직임이 느껴졌고, 그런 바둥거림이 서글퍼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바닥에 대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내가 일어나려 하자 도련님은 후다닥 다가와 내 몸을 받쳤다. 나보다 체구도 작았지만 힘을 꽉 주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이 와중에도 그는 제 아버지를 항변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 앞에 나타나 제 아들만한 아이를 매질했는데도, 그 모든 걸 똑똑히 봐놓고도 이유가 있을거라. 네가 맞을만 했을 거라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내 눈을 피했다. 도련님이 내 눈을 피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말을 하려 했을 때 입 속이 터진걸 알았다. 비릿한 피맛이 끔찍하게 내 입속을 휘감았다. 꾹 참고 피를 삼키며 내가 말했다.

 "저는 잘못한 거 없.."

 거기까지 말하는데 속에서 훅 올라오는 게 있어 나는 가슴을 들썩거렸다. 최소한의 말을 하는데도, 이런 말을 굳이 변명처럼 해야 하는 내 자신이 서러웠다.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도련님이 작은 손을 움직여가며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실제 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히 왜 그래. 히. 어떻게 해. 그만 좀 울어.. 그럴수록 나는 꺼이꺼이 더 울어재꼈다. 목이 아프고 뻑뻑했다. 두 눈덩이는 불에 덴듯 뜨거웠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내가 미안하다고 내 옷을 붙들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작고 여린 도련님에겐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생각보다 나를 좋아했다. 내가 하인이고 그가 도련님인 상황이 바뀔 일은 전무했고, 그는 나를 물건처럼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없는데도 그랬다. 그게 아마 정이란 거겠지. 나는 내가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치못한 말에 잠시 소리 내 우는걸 멈췄다.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랫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해야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이미 눈물은 잠금장치가 풀린 호스처럼 줄줄 흐르기를 멈출 줄 몰랐다. 그래도 우는 소리가 멈춘 내 반응에 도련님은 반색하며 나를 달랬다. 미안해 미안해 히. 그 말소리가 너무 달콤하고 부드러워 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내가 뭐든지 할게. 이제 그만 울어..”

 그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눈물을 쓸었다. 아무리 부드러운 손길이라도 이미 눈물에 쓸려 여린 피부는 따끔거렸다. 어쩌면 조금 어른스러운 얼굴을 한 도련님. 나는 이게 내게 온 기회란 걸 알았다. 뻐끔거리는 목구멍 너머로 이 상황을 가늠했다. 도련님은 다시는 내게 이런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안에 깊게 숨어있던 욕망을, 버리고자 했던 그 강렬한 소망을 떠올렸다. 아픔 너머로 넘어온 그것을 붙잡았다.

 나는 구태여 덩어리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지 않았다. 눈앞에 뿌얘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내가 도련님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시선은 계속 앞으로 두었다. 그리고 통하길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그러면 저한테 글을 가르쳐 주세요."

 내 목소리는 쩍쩍 갈라졌다. 걸걸거리는 쉰 소리가 났다.

 "..."

 "아니라면 도련님을 보지 않겠습니다."

 두 말 모두 진심이었다. 도련님은 나의 첫 제안에 당황했지만 뒤이어 나온 말에 숨을 삼켰다. 그는 절대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확신이 들자 온몸이 욱씬거리고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기분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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