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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천 일간의 대리인
작가 : 반치음
작품등록일 : 2022.1.12

[로판/마법/그리스풍] “딱 천 일 동안, 당신의 언니로 살 수 있다면요?” 마법을 쓰지 못하는 포티스의 공주 ‘안드레아(드레)’는 유능한 마녀이자 왕태녀인 ‘아나스타샤(아냐)’를 동경해왔다. 그러나 차대 왕이 되리라 여겨졌던 아냐는 사이반 전쟁 출정식에서 현왕 ‘고르고폰’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산 제물로 바쳐지고 만다. 고르고폰의 출정 뒤 홀로 남겨진 드레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의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승전 후 귀국한 고르고폰은 전쟁에서 얻은 뛰어난 마녀 ‘멜라니아’를 새 왕비로 삼아 마력을 가진 왕손을 다시 생산하려 한다. 왕실의 눈엣가시가 된 드레는 결국 한밤에 쫓겨나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벼랑 끝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한 가짜 신관 ‘에오스’가 놀라운 제안을 한다. 드레가 천 일 동안 죽은 ‘아냐’의 모습으로 변신해 살며 왕국을 되찾아보자는 것이었다.
backkyumm@gmail.com

 
프롤로그: 안드레아
작성일 : 22-01-12 18:31     조회 : 272     추천 : 0     분량 : 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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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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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전히 그 날을 기억한다.

  시원스런 바닷바람이 가슴 깊이 날아들던 날.

  뱃사람 조상들의 유물과도 같이 뱃고동이 북소리로 메아리치던 날.

  아버지 고르고폰이 사냥한 사슴 한 마리의 값을

  황태녀의 목숨으로 치른 날을.

 

 

  내가 아홉 살 때의 이야기이다.

 

 

  둥- 둥-

 

  북이 울렸다. 나는 짧은 팔로 휘두르던 목검을 침대에 내던지고 창가로 달려나갔다. 잔뜩 까치발을 뜨곤 침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사원 앞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난번에 못다했던 출정식을 마저 하려는 거구나!’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바마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는데.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다.

 

 

  얼마 전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출정군 막사에 ‘전연병’이 돌고 있다고 했다. 나도 다프네도 ‘전연병’이 어떤 병인지 잘 모르겠어서 궁정에 신관 알렉스가 입궁하기만을 기다렸다.

 

  알렉스는 어제 몇 명의 신관 할아버지들과 함께 궁에 와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뵈었다. 어른들의 회의는 평소보다 훨씬 늦게 끝나서, 알렉스는 서쪽으로 해가 오렌지 색이 되고 나서야 내 아지트에 들렀다.

 

  “하하, ‘전연병’이 아니고 ‘전염병’이에요 공주 자가. 빛의 신께서 노하셔서 내리신 돌림병이지요.

 주상 전하와 뛰어나신 문관, 무관들이 모여 꾸준히 사죄할 방책을 고민하고 있으니, 신께서도 곧 거두어 주실 거에요.”

  “신께서 병을 내린다고? 그런데 알렉스, 지난번엔 신께선 모든 생명을 사랑하신다며. 그런데 왜 군인 아저씨들을 아프게 해?”

  “…….”

 

  알렉스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일부러 메고 나온 내 목검을 보는 가보다 생각했다. 이참에 그동안 수련한 검술을 알렉스에게 자랑하고 싶어 검자루를 빼 들었다. 그런데 알렉스는 그럴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음엔 경전에 나온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오늘은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다른 신관님들과 함께 퇴청해야 해요.”

  “아니야. 갑자기 안 궁금해졌어.”

  “우리 공주 자가는 공부하는 걸 제일 싫어한대요-”

  “세상 최고의 마녀인 우리 언니가 왕이 될 건데, 언니만 똑똑하면 됐지 뭐! 난 훌륭한 장군이 돼서 우리 언니를 지겨줄 거야."

 

  그러고 나서 알렉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갑자기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알렉스는 나와 다프네의 손을 자기 양손으로 하나씩 잡아 우리를 일으켜주었다. 벌써 돌아갈 시간이었다.

  매주 입궁할 때마다 알렉스는 우리를 내가 지내는 별궁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날은 이야기한 시간이 짧아 아쉬웠지만, 나는 보통 알렉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양 벽이 정원을 향해 뚫린 복도에 노란 햇빛이 길게 비치면, 내가 올려다보는 알렉스의 속눈썹도 레몬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면 그냥도 예쁜 알렉스의 얼굴이 더 예뻐졌다.

 

  “그래도 공주 자가 마음이 이해는 가요. 자가께선 맨날 공부 얘기만 들으시거든요. 다른 선생님들은 맨날 책 읽으라고 그러고 시험만 보게 해요. 그래서 신관님이 맨날맨날 왔으면 좋겠어요.”

  “왠지 제가 너무 허술하게 가르친다는 것으로 들리네요. 그래도 매일 공주 자가와 다프네 아가씨를 볼 수 있다면 저도 즐겁겠어요.”

  “그래? 알렉스, 그러면…….”

 

  기회다!

 

  “나랑 혼인해서 계속 궁에 살자!”

 

  알렉스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더니 쿡쿡대며 우리 손을 놓았다. 알렉스가 나를 마주 보고 꿇어앉으니까 그제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공주 자가,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신관의 사명을 받았기에 그 누구와도 혼인할 수 없답니다. 율법인걸요.”

  “거, 걱정하지 마! 우리 언니가 왕이 되면 바꿔줄 거야! 우리 언니가 내 부탁은 다 들어줄 거랬으니까……!”

 

  알렉스의 표정이 또 이상해졌다.

 

  “그러면 자가, 혼인 대신에 제 청을 한 가지 들어주실 수 있나요?”

 

  나는 기분이 조금 상해서 대충 고개만 끄덕댔다.

 

  “내일 정오가 지나기 전까지 절대 별궁 밖으로 나오지 말아 주세요.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꼭이요.”

  “이상한 청이네.”

  “들어주신다면, 저도 한 가지를 약조 드릴게요.

 제가 사원에 있는 밤은 초록빛 등불을 내걸게요. 제가 오지 못하더라도, 자가께서 제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아실 수 있도록요.”

  “음……. 알겠어. 안드레아 포티스의 이름을 걸고 약조할게.”

  “하, 감사합니다.”

 

  나는 왕실의 어른들이 약조 후 으레 그렇게 하듯 한 손을 내밀었고, 알렉스는 내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감사합니다, 공주 자가.”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광장에는 막 축제라도 벌어질 듯한 모양새였다. 알렉스에 대한 배신감이 생겨나려고 했다.

 

  “공주 자가!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어제 알렉스 신관님이 나오지 말라고 하신 게 바로 이것 때문일까요?”

 

  어느새 다프네도 잠에서 깨어 잠옷 바람으로 내 침실에 찾아왔다.

  우리는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다 숄처럼 나누어 두르고 다시 발코니로 나갔다. 아무도 방에 옷을 가져다주지 않아서 입을 게 없었다.

 

  “다들 저 축제를 즐기러 갔나 봐. 불러도 아무도 오질 않아. 다프네 너라도 날 버려놓고 놀러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야……. 어제 자가께서 약조하시는 걸 봤으니까요. 저는 자가랑 있어야 하잖아요.”

 

  다프네의 표정이 왠지 시무룩했다.

 

  “다프네.”

  “네?”

  “너도 나가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봐.”

 

  다프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고민해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알렉스가 우리만 축제에서 빼놓으려고 장난을 친 건 아닐까?

 

  “우리 그럼 같이 나가자!”

  “하지만, 어제 공주 자가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셨잖아요…….”

  “괜찮아! 혹시나 누가 약조를 깼다며 딴지 걸면 내가 결투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내 검술 봤지?”

  “자가……."

 

  나는 맑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뒤,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는 하녀들이 어디에서 옷을 꺼내오는지 몰랐다. 평소 몇몇 일들을 도와주러 오는 언니의 시녀도 궁 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침대보를 벗긴 뒤 가운데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뚫고, 허리를 긴 머리 리본으로 졸라맸다. 마무리로 어깨에 핀을 달아 그럴듯한 *스톨라 드레스를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괜찮아 보였다.

  우리가 겉옷을 갖춰 입고 나자 광장에는 나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든 이제 곧 식을 시작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두두두둥- 두두둥-

 

  북소리가 점점 더 빨라져 갔다.

  궁 밖에도, 심지어 성문에도 누구 하나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덕에 나와 다프네는 궁전 정문에서 사원 광장까지 이르는 비탈길을 신나게 달려 내려갔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더 또렷이 들렸다. 광장 남쪽에서는 짭짤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건물과 사람들 사이로 저 멀리 모래밭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신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프네는 벌써 숨이 찬지 언덕 중턱에서부터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다프네! 빨리 안 오고 뭐 해!”

 

  다프네를 뒤돌아보며 달리던 나는 그만 누군가의 등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조심 좀 하시……. 이런, 공주 자가 아니십니까! 대체 누가 자가께서 여기에 오도록 내버려 둔 것이야!”

  “드루브 장군!”

 

  아는 얼굴을 만난 것이 반가워, 나는 활짝 웃어주었다. 드루브 장군도 아바마마와 함께 몇 날 며칠을 근심하더니, 이제 일이 해결되어서 축제를 보러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르게 장군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자가. 어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싫어요. 왜 나랑 다프네만 궁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궁 안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구경을 와 있습니다.”

  “자가,”

 

  장군이 무서운 목소리로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지금 돌아가시지 않으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을 떠안게 되실 겁니다. 제발, 저를 봐서라도 돌아가 주십시오.”

  “장군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두두둥-

 

 딱.

 

  북소리가 멈췄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잦아들었다.

  나는 드루브 장군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원 앞에 크게 설치된 제단 위로 맨발에 하얀 전통 **토가를 입은 신관 하나가 올라왔다. 얼굴을 네모난 베일로 가리고 있었지만, 나는 단숨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스였다.

 

  “알렉-”

  “쉿. 공주 자가……. 이제는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더는 이곳을 떠나실 수도 없습니다.”

 

  드루브 장군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장군은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제단을 향해 뒤돌았다. 하지만 나는 장군의 옆구리로 고개를 내밀어 계속 알렉스를 지켜봤다.

  알렉스의 베일은 월계수 잎 모양으로 된 금관에 매달려 있었고, 목에도 금으로 된 커다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양쪽 팔에는 차르륵 소리가 나는 팔찌들이 여러 겹으로 꿰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왼손에 번쩍이는 단도를 들고 있었는데, 그 칼자루는 금과 여러 반짝이는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그동안 본 알렉스 중에 가장 예쁘게 꾸민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알렉스의 목소리는 내가 들은 중 가장 차갑고 무서운 목소리였다.

 

  “피로 지은 죄는, 오직 피로 갚는 것.

 이 왕국과, 우리의 영광스럽고 영원한 동맹들과, 만물의 소생이신 빛, 그리고 그 힘을 주관하는 당신께 감히 청하오니

 흘린 피를 주워 새 피로 메우게 하시고

 지나간 과오를 돌이켜 믿음을 자아내시어

 내지부터 대해까지 당신의 은총이 다시 퍼지고 닿게 하소서.

 이제 당신께 더럽힌 이의 핏줄로 대신 속죄하나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치고, 알렉스는 날카롭게 돌아서더니 탁자를 가리고 있던 흰 천을 걷어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탄식을 자아냈다.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있는 힘껏 발돋움을 했다.

  바로 다음 순간, 불현듯 몇 달 전 알렉스가 가르쳐 주었던 전례 상식이 기억났다.

 

  ‘제단 위 탁자에는 신께 바칠 제물을 올려놓는 거예요. 올려놓는 위치도 제물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산 제물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 놓는답니다.’

 

  나는 후회했다.

  알렉스와의 약속을 지켰어야 했는데.

  장군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 건 그로부터 더 오랜 세월이 흘러서였다. 하지만,

  내 언니, 아나스타샤가 밧줄로 제단에 묶여 산 제물로 준비된 광경은

  드루브 장군의 말대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앞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마! 마마!”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왕비 마마께서……!”

 

  어마마마도 언니처럼 바닥에 누웠나.

  나는 장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 나는……. 나는 내 방으로 갈래요. 속이, 안 좋아요.”

  “의식이 거행되는 중에는 그 누구도 장소를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물은 희생하나 신께선 받지 않으십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시작 전에 돌아가시라고.”

 

  알렉스는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언니를 향해 섰다.

  알렉스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양손으로 부여잡은 칼끝은 떨리는 게 보였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러고도 또 한참이 지나자 옆 나라에서 왔다던 동맹군 할아버지가 제단 앞으로 뛰쳐나와 소리쳤다.

 

  “거행하지 않을 참이요?! 당장 제물을 희생시켜 역병이 멎고 바람이 불게 하지 않으면…….”

  “신이시여!”

 

  그때 갑자기 이미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던 언니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비명 질렀다.

  탁자 밑으로 힘없이 늘어진 머리가 휘청거겼다. 예쁜 아침 햇살 색깔. 내가 좋아하던 언니의 색이 계속계속 흔들렸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다시 수군대기 시작했다.

 

  “거행해!”

  “어서 출정군을 내보내라!”

  “신의 노여움을 풀어라!”

  “전쟁을 시작하자!!”

 

  사람들의 소리가 고함으로 변해갈 때,

  알렉스의 단도가 언니의 가슴을 향해 떨어졌다.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 눈이 멀어버린 줄 알았다.

  나를 다급하게 찾는 드루브 장군의 목소리가 이건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임을 알게 해주었다.

 

  “자가, 제 손을 꼭 잡고 계십시오! 떨어지셔서는 안 됩니다!”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일곱 밤은 잔 것 같이 긴 시간이 지나자 다시 제단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탁자에 꽂힌 단도 손잡이에 매달린 채 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데 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의 칼은 하얀 꽃 한 송이의 줄기를 뚫고 박혀 있었다.

  나이가 많은 흰 수염 신관이 제단 위로 올라가더니 알렉스를 밀쳐내고 칼에서 꽃을 뽑았다. 흰 수염 신관은 꽃을 높이 들어 모두에게 보이게 했다.

  싱싱한 백합 한 송이였다.

 

  “신께서 노여움을 푸셨다! 역병은 멎고, 서풍이 불어올 것이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내 귀를 찔렀다.

 

  “사이반 놈들을 무찌르자!”

  “동맹국의 명예를 되찾자!”

 

 

  「동맹국력 413년 10월. 고르고폰 왕 즉위 18년.

 사이반 전쟁을 위한 출정식 사냥에서 종주국 왕이 실수로 신께 바쳐진 사슴을 죽이자 바람이 멎고 출정 부대에 전염병이 돈다.

 여러 사람과 신관들이 모여 논의하니 이는 신이 벌함이 분명하다.

 율법에 따라 피를 흘린 죄는 피로 갚아야 하므로, 신께는 스스로의 피로 제물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출정하는 왕 대신 그의 첫 번째 핏줄이자 성스러운 마녀,

 왕태녀 “아나스타샤 헬리오 크로소 포티스”가 명예로이 신께 숨을 맡기니,

 노여움을 푸시어 그 징표로 백합 한 송이를 내리시고

 바람이 불며 병이 낫는다.」

 

 

  기록서에 남겨진 이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보기 좋은 허울로 꾸며졌지만, 이는 결국 아냐(***아나스타샤)의 죽음을 의미한다. 처음 사이반 전쟁 출정식을 거행하던 날, 내 아버지인 국왕은 전통에 따라 숲에서 가장 큰 사슴을 잡았다.

  하지만 그 사슴은 아바마마의 대관식 때 신에게 바쳐진 사슴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신관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왕국을 주관하는 '빛의 신'께선 이 일로 아주 노하여 온 출정군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전염병을 퍼뜨렸다. 만회할 방법은 단 하나. 신의 사슴을 피 흘리게 했으니, 죄 지은 이의 피로 갚는 것.

  국왕 고르고폰 포티스는 전쟁의 총사령관이기에 출정 전에 죽어서는 안됐다.

  그럼 나는? 둘째 공주 안드레아 포티스는 9세가 되어서도 왕실의 상징인 마력이 발현되지 않고 있었다. 즉, 고르고폰의 친자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남은 고르고폰의 직계 희생양은 오직 황태녀 아나스타샤 포티스 뿐이었던 것이다.

  고작 열 일곱의 나이였다.

 

  그래, 아무튼.

 

  그 날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알렉스를 만나지 못했고,

  제단에 오른 언니를 보고 실신하셨던 어마마마께선 원정군이 떠난 뒤 3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이 넓은 궁에 완전히 홀로, 아니, 다프네와 단둘이 남겨졌다.

  지금은 동맹국력 423년. 사건이 있었던 후로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이 아쉬워서 자꾸만 과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씨.”

  “아가씨. 도서관 폐관합니다.”

  “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장로들의 눈을 피해 시가지의 왕립 도서관으로 잠행을 나와 있었다.

  도서관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주변에서 밝은 것이라고는 내 코앞의 사서가 들고 있는 랜턴뿐이었다.

  나는 *스톨라 겉에 걸친 재킷에서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고작 저녁 8시밖에 되지 않았다.

 

  “폐관까지는 2시간이나 남았는데요.”

  “오늘은 일찍 정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요.”

 

  또 의회로부터 내가 모르는 지시가?

 

  “……왜죠?”

  “아- 사이반 전쟁이요. 곧 원정대가 귀국한다나 봐요. 개선식 준비한다고 당분간 시가지를 일찍 비우라네요.

 아직 언론에 발표는 안 했다고 하니까 어디 가서 소문은 내지 마시고.”

 

  예상치 못한 자극인걸.

  의회 영감탱이들이 나를 자기들 정보로부터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몇 년 째였다.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부적격한 공주가 왕의 권한대행을 맡을 것에 대한 반발이랄까.

  하지만 왕의 귀국에도 함구라니. 이건 도를 넘었다.

 

  “사이반이요?”

  “아가씨! 아가씨!”

 

  마침 때 좋게 다프네가 도서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가씨, 원정대가 곧 귀국한대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셔도 되겠네요. 이미 소문 다 났구먼 뭐. 읽던 책은 빌려 가셔도 됩니다. 이제 나가서 담소 나누세요. 문 잠글 겁니다.”

 

  사서는 새침하게 책장 뒤로 사라졌다. 다프네는 내 옆에 서서 헐떡대며 숨을 골랐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방금 여기 사서에게 들었어. 의회에 앉아있는 대머리들이 제 버릇 남 못 준 거지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가,”

  "음?”

  “아, 아니! 아가씨,”

 

  다프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내 어머니와 언니의 목숨을 갉아먹은 아버지가

  10년 동안 내게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았던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주운 정체불명의 여자를

  새 왕비로 데려오고 있다고.

 
작가의 말
 

 *스톨라 **토가

 각각 고대 그리스의 여성, 남성 의복입니다. 구태여 전통의상으로 입지 않는 경우, 작중에서는개량된 형태의 일상복으로 등장합니다.

 

 서식과 내용 일부를 수정하여 재업로드하였습니다. 본편부터는 분량이 5000자 기준으로 조정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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