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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흡혈 퇴마사
작가 : 제이드Q
작품등록일 : 2022.1.2

빙하 속 바이러스, 우주로 부터 날아든 괴물질에 의해 초토화된 지구.
흡혈귀 출신 파로크는 지구 정화를 위해 인간으로 환생한다.
숨어 있는 사악한 영혼들을 퇴마하는 임무를 맡고 내려온 파로크의 앞날은..

 
초보 퇴마사 2
작성일 : 22-01-09 14:50     조회 : 179     추천 : 0     분량 : 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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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릉!

 

 내 생각에 동의라도 하듯 천둥이 요란스레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 비나 쳐와라.”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쏴아!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툭.

 

 투명한 유리창 위로 크고 작은 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선들이 점점 모이더니 물방울이 되어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위스키가 필요해.’

 

 3000년간 불지옥에 갇혀 있었는데, 왜 오래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쩝

 

 술도 땡기고, 사랑도 땡기고.

 

 “사람 환장.”

 

 -쿠르르, 쿵!

 

 천둥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갈증이 나서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았던 쿠키나 비스켓 따위가 아닌 독한 위스키나 럼주, 부드러운 와인 같은 것을 찾았다.

 

 여기저기 위아래를 샅샅이 살피던 중, 이윽고 묵직해 보이는 술병이 눈에 띄었다.

 

 유럽산은 아니었지만, 알콜 도수가 무려 95도였다.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았다.

 

 “크흠.”

 

 살짝 와인 향이 묻어나는 기분이다.

 

 뱃속을 지질 만큼 뜨겁고 독한 녀석일거라 기대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입속으로 술을 흘려 넣었다.

 

 -꿀꺽꿀꺽.

 

 “와.”

 

 혀를 불태우고 식도를 집어삼킨 위스키는 곧장 뱃속을 적셨다.

 

 단번에 3분의 1가량이 비어버렸다. 한 손에 그대로 술병을 든 채로, 턱 아래로 흘러내린 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9층 높이의 거대한 성, 지하 깊숙한 곳엔 수없이 많은 양의 술병들로 그득했다.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웠다. 그곳에 맛보았던 술과 그 향이.

 

 젠다르시아 가문, 흡혈귀 생에서 맛보았던 것보단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뱃속이 점점 뜨거워졌고, 목구멍은 화끈거렸다.

 

 두 눈에서 화르륵, 불길이 타올랐다.

 

 적갈색 눈동자가 더더욱 짙은 빛을 내뿜었다.

 

 “후.”

 

 휘몰아치는 열기에 몸을 떨었다.

 

 부엌, 진열장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술병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조리 삼켜 버리고 말리라 생각하며.

 

 술병을 손에 쥔 채로 소파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왔다.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앉았다.

 

 취하진 않았지만, 술을 마셔서 그런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욕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물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주위엔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내게 시간은 많았다.

 

 무려 1000년이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낼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큭큭.”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미친놈. 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남은 술을 더 들이켰다.

 

 또 한 모금. 또 한 모금. 그렇게 연거푸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술병은 완전히 비어 버리고 말았다.

 

 빈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쏴아!

 

 여전히 쏟아지는 물소리.

 

 ‘기다리다 나 죽는다.’

 

 팔짱을 끼고 있다가 다시 한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았다.

 

 그러기를 5분.... 10분... 20분... 30분...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여자들의 샤워 시간이 원래 길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에오가 욕실 안으로 들어간 지 벌써 1시간가량이 지나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위스키로 가득 찬 뱃속이 찌릿찌릿해졌고, 입안에 향긋한 냄새가 풍겨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졌다고 느꼈지만.

 

 이내 그러한 기분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심장을 훑는 서늘한 감촉은 뭘까.

 

 “이상한데.”

 

 본능적인 불길함.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비는 더더욱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사나운 천둥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시퍼런 번갯불이 하늘을 갈랐다.

 

 이보다 더 불길해 보이는 광경이 있으려나.

 

 고개를 돌렸다.

 

 닫혀 있는 욕실 문을 흘끔거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흠흠. 쿨럭쿨럭.”

 

 문 앞에 선 채 일부러 크게 기침을 했다. 혹시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정말 아무 일도 없이 열심히 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어.’

 

 -쿠르릉, 쾅!

 

 무시무시한 소릴 내며 하늘을 찢어발기는 흉포한 천둥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뭘 어떻게 해볼 생각 따윈 이제 사라져 버렸다.

 

 에오는 곁에서 내 임무를 도와줄 사람이다.

 

 만일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는 거라면?

 

 맙소사.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똑똑

 

 일단 노크 먼저.

 

 -쏴아!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에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미약하지만 신음 비슷한 소리가 났다.

 

 “에오? 괜찮아? 무슨 일이야?”

 

 “흐읍.... 흐... 아앗...”

 

 신음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황홀감에 취했거나 쾌락과는 거리가 먼 소리였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뭐 하는.”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몸이 말을 듣질 않은 건지 간신히 숨을 내뱉으며 헐떡이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움직였다.

 

 좀 전에 보았던 도도해 보이던 눈빛이 아니었다.

 

 -도와줘.

 

 겨우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귀접이다.”

 

 절로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서둘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바닥에 누워 파르르 몸을 떨고 있는 에오를 안아 들려고 하는 순간 뭔가가 빠르게 내 곁을 스쳤다.

 

 -스스스슥!

 

 눈동자가 놈을 쫓았다. 짙은 회색 안개 같은 덩어리가 서둘러 창문 틈으로 새어나가더니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맘 같아선 뒤쫓아 가 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지만, 지금 중요한 건 기절 직전인 그녀를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눈 좀 떠봐, 에오! 괜찮아?”

 

 놀랍게도 내 목소리엔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흡혈귀 시절,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적의 목을 물어뜯던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손발이 오글거리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그녀를 안아 들고 급히 욕실 문을 나섰다.

 

 몹시 추운지 에오의 몸이 마구 떨렸다.

 

 서둘러 방으로 건너간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눕혔다.

 

 “너무 추워... ... 죽을 것 같아...”

 

 에오의 눈은 여전히 반쯤 풀려 있었고, 붉고 탐스럽게 보이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서둘러 그녀의 몸에 걸쳐있던 젖은 옷을 벗겨냈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몸은 환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지금 그런 걸 느낄 새가 없었다.

 

 젖은 드레스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나서 서둘러 옷장 문을 열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살폈다.

 

 하얀 원피스 잠옷이 눈에 띄었다.

 

 우선 급한 대로 잠옷을 꺼내 들어 에오에게 입히려 했지만, 축 늘어져 있어서 그런지 쉽지가 않았다.

 

 낑낑거리며 여지껏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절한 여자 잠옷 입혀 주기, 를 끝마치고 나자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조금 전 마신 위스키의 효과였다.

 

 하얗고 창백한 볼과 새파랗게 질려버린 에오의 입술과는 달리 내 몸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활활, 화르륵!

 

 하얀 원피스 잠옷을 입은 에오의 몸을 이불로 덮어주고 나서 굽혔던 허리를 폈다.

 

 충격이 꽤 큰지 에오는 아직까지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보였다.

 

 “망할.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할 것 아니야.”

 

 서류를 들추며 거만한 얼굴로 번쩍이는 황금 의자에 앉아 있던 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나저나.

 

 육체가 없는 혼령이 인간을 이렇게 실신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걸까. 퇴마 상식이 거의 없는 나로선 매우 불쾌하고 짜증 나고 열 받는 일이었다.

 

 “걸리기만 해봐라.”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나도 아직 손도 못 댔는데, 죽은 영혼 따위가 감히!”

 

 -부드득.

 

 이를 갈았다. 주먹을 쥐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고, 목덜미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적갈색 눈동자에서 살기가 폴폴 풍겼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주위에 떠돌고 있는 부유령과 그 밖에 다른 모든 혼령들을 죄다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에오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게 급선무였다.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좀처럼 깨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몸을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내 필살기를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굳이 이렇게까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중얼거리며 몸에 걸친 가죽자켓을 벗었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도드라져 보이는 상의도 벗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복근과 가슴이 드러났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치료행위의 일종이야. 절대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 아니라고.”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는 말들을 주절주절 내뱉으며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휴.”

 

 크게 숨을 한번 내뱉고 나서 옆으로 돌아누운 채,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쿵쿵.

 

 ‘가슴이 왜 뛰냐. 지금.’

 

 에오를 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뺨이 화끈거렸고 관자놀이까지 덩달아 쾅쾅 울렸다.

 

 그래도 그녀로부터 몸을 뗄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차갑고 축축한 그녀의 몸, 그리고 떨림이 내게 전해져 왔다.

 

 미친 듯이 질주하던 내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을 무렵, 에오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안정을 취한 듯 그녀는 곧 잠에 빠져들었고, 눈을 뜨고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나도 차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

 .

 .

 

 -쿠르릉! 콰쾅!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에 절로 눈이 떠졌다.

 

 손에 와 닿는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 향긋한 살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옆으로 누운 채 에오를 끌어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였다.

 

 벌어진 적갈색 눈동자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축축한 긴 머리칼을 베개 위로 늘어뜨린 채, 그녀는 잠에 취해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피가 요동쳤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목에 시선이 갔다. 갑자기 갈증이 일었지만, 참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에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창백하던 그녀의 뺨은 혈색을 되찾았다. 입술은 붉었고,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이러다 갑자기 그녀가 깨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닥에 널려있던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려던 찰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왜... 어...헉!”

 

 급히 움직임을 멈췄다.

 

 당혹스럽고 놀라고, 충격을 받은 듯 에오의 목소리는 극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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