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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마르카
작가 : JakeCello
작품등록일 : 2021.12.30

변방에 있는 작은 마을 ‘누주’의 대장장이 ‘마르카’가 마을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수도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17. 우물
작성일 : 22-01-03 13:54     조회 : 178     추천 : 0     분량 : 7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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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모네에서 우시장으로 가는 소장수들이 프라소스에 도착했다. 소들에게 짚신을 두 번 갈아 신기고, 로비스가 자신이 아는 수도의 언어를 마르카에게 거의 다 가르칠 즘이었다. 막상 두 말을 익히고 나니 누주 말과 수도어의 거리가 썩 멀지만은 않다고, 마르카가 어린 선생에게 소감을 전했다.

 와사는 이렇게 운이 따라주는 여정은 이제껏 겪지 못했다. 마을 몇 개를 무난히 통과했고, 사고는 두 번 밖에 나지 않았다.

 한 번은 도중에 소 한 마리가 독사에 물려 다리를 잘라야했다. 몇 마리 죽는 건 예상한 바였으니 큰 손해는 아닌 셈이었다.

 그리고 화적떼를 만나 시비가 붙기도 했으나 가모네 무리가 더 많았고 도둑떼는 겁이 많아서 별 탈 없이 통과했다. 그들이 칼을 들고 위협했을 때 누주의 대장장이가 보여준 활약도 한몫했다. 배낭에서 대장간용 망치를 꺼내 기세등등하게 허공에 대고 휘두르니 그놈들 넋이 싹 나가지 않았던가. 짚신장이는 그 날 처음으로 마르카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며 말을 붙였다.

 “줄곧 그런 망치를 배낭 안에 넣고 다녔단 말이요?”

 

 *

 

 무리는 입구에서부터 기이한 기미를 알아챘다. 누군가 손으로 코를 막았다. 마르카는 집에 숨어 자신들을 훔쳐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이 사람들 영 넋 놓은 지 오랜 것 같지 않아? 전에는 희미하나마 생기가 돋았는데…….”

 오든은 꾸러미에서 육포를 꺼냈다. 그들이 들르는 마을마다 육포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럴 때면 늘 우호적인 분위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우린 가모네에서 출발하여 부피에서 열리는 우시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서먹하시겠지만 가모네는 매해 프라소스를 지나도록 허락을 받아왔소. 당시와 마찬가지로 선물을 가져왔으니 확인해보시오.”

 조금 있다가 한 남자가 프라소스의 주민들을 이끌고 가모네의 무리 앞으로 나타났다. 초로하고 야윈 중년 남자였다. 체구가 작은데다가 허리까지 굽었다. 그의 눈빛만 유달리 형형했다. 로비스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는데, 아이는 자기가 포착한 본능적인 감각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로비스는 마르카의 손을 붙잡고 그의 뒤로 몸을 반쯤 가렸다.

 오든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물었다.

 “깃살? ……맞소?”

 깃살이 얼굴을 실룩였는데 그 나름대로 웃는 행위였으리라. 프라소스의 대표가 오든에게 악수를 청했다.

 “간만에 만나외다, 오든. 그리고 가모네의 농사꾼이자 소치기들이여.”

 오든이 깃살의 손을 붙잡아 뼈와 살을 짧게 감각하고 손을 놓았다.

 “살집이 더 붙어 있으면 바로 알아봤을 텐데요. 우리 육포를 너무 오래 기다린 거 아니요?”

 “육포가 구원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하지. 염병, 요전에 고약한 놈들이 휩쓸고 갔거든. 그 바람에 겁쟁이가 돼버렸어.”

 “도둑놈들 말요? 그러잖아도 엊그제 아주 혼쭐내버렸지요. 재차 얼굴 비출 용기 없을 거요 이제.”

 “마는, 여기 사람들도 동의할까 모르겠다. 요즘 들어 우물에 물이 차오르다 말다 해. 주기는 일정치 않은데 안 좋은 일정을 버텨야 하지 않으면 안 되리란 장담은 가능하지. 우물이 너무 자주 경고해. 경고가 잦아.”

 “우물이 뭘 경고하는데요?”

 로비스가 상대방을 꺼려하지만 호기심 당긴다는 표정으로 깃살에게 물었다.

 “다른 무리인가? 생김새가 낯설구먼.”

 마르카가 자기들은 누주에서 왔으며 가모네 무리와 함께 수도로 가는 중이라 답했다. 깃살이 그러냐고 쉰 목소리로 수긍했다.

 “내 원체 이 마을 벗어나길 했어야지. 하여간 그래, 그렇담 모르는 거야 당연지사다. 간만에 이 몸이 프라소스의 명소를 소개시켜주지.”

 그리고 낯익은 다수와 낯선 소수로 찾아온 이방인을 손짓으로 이끌고 마을 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간 곳에는 정방형으로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이 있었다.

 “평소에는 바닥까지 싹 다 말라버린 쓸모없어. 해서 먼 냇가까지 물을 길어 와야 하지. 새로 우물을 파기에는 돈이 많이 드니까. 그러나 어쩌다 난데없이 우물에 물이 차오르는 날이 있다. 마셔도 되는 물이야. 허나 공교롭게도 우물물을 맘껏 쓰더라도 우리 주민은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어. 왜냐면 이 우물은 프라소스에 재앙을 부르는 우물이거든. 재앙이 닥치기 전에 우물에 물이 차오르지. 조금 차면 가벼운 경고지만, 반쯤 차면 숨 막힐 지경인 재앙을 부른다, 이런 소개를 하고 싶군.”

 “넘치면요? 넘치면 어떻게 되요?”

 깃살이 로비스에게 겁을 주려는 양 목소리를 올렸다.

 “그럼 이 사막에 큰일이 나지!”

 로비스가 마르카 뒤에 몸을 아예 가렸다. 마찬가지로 놀란 마르카가 깃살에게 물었다.

 “넘친 적이 있나요?”

 “놀라긴! 아직 그 수준은 듣도 보도 안했어. 전설에는 세 번 넘치면 큰일 난다는데 아직 반밖에 찬 적이 없거든. 물높이야 어찌하든 우물이 마르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흉흉한 재액이 터진다. 두렵게도 요새 또 우물물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추악한 장사치들이 다녀갔고, 우리를 겁박했지. 게다가 우연히 당신네 무리가 딱 왔으니 얼마나 예민했겠는가.”

 “그럼 미리 대처하면 되잖아요. 벽을 세우든, 다른 데로 피하든.”

 마르카가 물었다.

 “그럼야 좋겠지. 그런데 야, 봐라 젊은이야. 우리가 그런 여력이나 있어 뵈나.”

 마르카와 로비스는 다시 한 번 프라소스를 제대로 훑어보았다. 낡은 집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고 굶주린 노인이 쥐를 잡으려고 부들거리며 손을 뻗치는 모습도 띄었다.

 “도망도 못 가, 배고파서. 어차피 갈 데도 없어 다시 돌아와야 돼. 누주에서 왔다지? 여기보다 형편이 수월하지, 노을차인가 뭔가도 팔고. 우린 팔만한 게 없어. 터 자체가 시원찮거든. 대신 외양간과 잘 곳은 널려있지. 우린 많은 이웃을 떠나보냈고, 병과 적에게 가축을 빼앗겼지만 그만큼 손님과 떠도는 가축을 모실 황무지는 언제든 준비하고 있다. 그들을 상대로 먹고 사는 길 밖에.”

 깃살은 우물가에 비스듬히 세워둔 큼지막한 나무뚜껑을 들어 올려 우물을 덮었다. 만일 그가 프라소스 장로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마을을 꿋꿋이 지키는 이유는 우물을 관리하는 것과 경고를 이웃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리라. 그러나 세월과 인간을 경험하면서 프라소스의 사람들은 우물을 두려운 존재로만 기억했다. 머잖아 이들은 본디 그곳의 역할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할지도.

 

 *

 

 눈부시게 흰 눈밭. 로비스는 넓은 등에 업혀 발자국 남지 않는 고른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디론가 향했다. 앞사람의 형체가 새까만 탓에 로비스는 자기가 누구 등에 업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소리 내지 못 했다. 겹겹이 쌓인 눈 밟는 소리만 한 음, 한 음 귀에 들어왔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설경도 변함없어 제자리걸음하는 모양새였다. 검은 등은 점점 좁아지고 허리도 굽어졌다. 로비스는 오랫동안 발음하지 않던 단어를 입 밖으로 터뜨렸다.

 “아빠?”

 아이 쪽으로 천천히 검은 머리형체가 고개를 돌렸다.

 “내 아들 많이 컸구나.”

 새까만 민낯에 하얀 눈동자가 번뜩였고, 소년이 굴절된 비명을 질렀다.

 로비스는 낯선 사람의 등에 업혀 있었다. 잠에서 깬 작은 체구가 내리려고 발버둥치자 뒤에서 지독한 냄새 나는 손이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로비스가 손을 세게 깨물어 균형을 잃은 납치범의 등에서 떨어져 나왔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지만 아픈 것도 몰랐다. 로비스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빼내 어두운 사위를 찢어내듯이 마구 휘둘렀다. 칼끝에 천이 걸리는 듯한 감촉이 손아귀에 전해졌다. 동시에 고통스러운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로비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그리고 잽싸게 단검을 빼앗아 소년의 뒤에서 칼등을 목에 갖다 대었다. 로비스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름비, 잘했다. 이번에도 네 쓸모를 보여 줬다.”

 “아가리 닥쳐! 내 손가락이나 찾아!”

 “그거 있어봐야 제 새끼들 잡아먹기 밖에 더 하나?”

 자신이 왜 목표물이 되었는지 모르는 소년은 불빛에 드러난 어느 형상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한 사람이 왼손을 보며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는데, 낮에 쥐를 잡아먹던 여자였다. 그녀의 왼쪽 손가락 네 개의 중간 마디가 잘려나갔다. 로비스가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목에 댄 칼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쇄골에 흘러내렸다. 여자의 피였다. 손가락 주인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잘려나간 손가락 두 개를 찾아냈다. 큰 출혈과 충격 탓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소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잠에서 깬 마르카와 일행이 횃불을 들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로비스!”

 마르카는 깃살이 로비스의 뒤에서 칼로 위협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깃살은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큰 소리로 외쳤다.

 “야이, 나와라! 이제 숨길 이유 뭐 있냐!”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골목이며 우물가며 벽이며 곳곳에서 무기를 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곳곳에 불을 붙여 마을이 점차 환해졌다. 칼이나 창도 있었지만 무기라 봐야 대부분 곡괭이와 낫 같은 농기구 따위였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창도 있었는데, 어떤 건 끝에 쇠촉 대신 가시 많은 선인장을 박아 놓았다. 장비는 허술했지만 손님을 겨냥하는 손은 단호했다. 그림자가 찌를 듯이 사냥감으로 뻗었다.

 오든이 나서서 따졌다.

 “이게 무슨 짓이요! 우리는 손님으로서 음식과 비용을 제대로 치루지 않았소?”

 “우리가 언제까지 육포 쪼가리에 만족할 줄 아나? 염병할 손님 타령, 알게 뭐냐. 객이랍시고 강도로 탈 바꾼 무리가 어디 한둘인가? 너희라고 뭐 다를라고?”

 깃살은 소년이 다치지 않게 신중히 칼날과 목의 간격을 띄웠다. 그는 진작 계획대로 급습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어둠 탓에 덩달아 외지인 꼬마까지 죽이지 않기 위해 계획을 바꾼 자기 탓이지만. 름비가 주먹으로 로비스의 얼굴을 갈긴 탓에 상처가 난 바람에 값어치가 떨어질 수도 있다. 이 꼬마는 내일 찾아올 상인과 매매할 상품이니 더 상처를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했다.

 “그래, 너희 무리는 그나마 손님다운 손님이지. 그래도 거저로 들어줄 순 없다. 이 아이와 소 두 마리를 넘겨. 내가 직접 가장 품질 좋은 놈들로 고르겠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나중에 후회할 짓일랑 그만 두시오.”

 “우리는 너희들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싶지 않아. 자주 볼 사이이고, 그쪽 육포는 맛있으니까. 백 마리 다 건지겠단 것도 아니잖아? 두 마리만 동냥해. 나중에 애 판 돈으로 갚든가 하지.”

 그 때 외양간에서 소가 고통스럽게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웃이 내 말을 언제까지 잘 들을지 모르겠다. 이 사람들은 욕심이 커. 너희가 협상할 대상은 나 밖에 없어.”

 와사는 오든이 망설이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번 한 번만 고된 장삿길을 다녀올 심산이었다. 와사뿐만 아니라 가모네의 무리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밀농사와 적당한 가축만으로도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 확실히 목돈을 쥐고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소 두 마리면 아주 큰 손해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이 목표한 수익은 벌어들이는데 지장이 없었다. 와사가 오든을 제치고 발언했다.

 “좋다. 대신 우리는 바로 떠날 터이니 군말하기 없기요.”

 오든이 와사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곧 힘을 풀었다. 그리고 깃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 하나에 소 두 마리. 다음번에 이런 일이 없다고 약속하시오.”

 깃살은 칼과 로비스를 옆 사람에게 넘기고 오든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와사는 대장장이 청년이 어디론가 가는 걸 보았다. 도망치는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좋아, 약속하지. 이번만이요. 너무 힘든 시기라. 참, 당신네도 복수하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딴말하지 마시오. 이 정도면 아주 상냥하게 대우하는 거요.”

 “약속한다.”

 오든은 로비스를 본 체 않고 몸을 돌려 동료들에게 출발을 명했다. 그 때 마르카가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손으로 소 한 마리를 끌며 나타났다. 누군가 외양간을 확인한다면, 힘없이 쓰러진 장정들을 발견하리라.

 누주의 대장장이는 망치로 오든을 가리켰다.

 “실망했습니다, 오든과 가모네 무리들! 왜 토박이인 여러 무리의 수가 더 많고, 정착한 역사가 오래됐는데도 매번 주인들에게 당해야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방금 한 결단 당장 철회해!”

 그리고 깃살과 그 옆에 있는 로비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그가 끌고 온 소의 머리 위로 망치를 치켜들고 엄포했다.

 “저 애를 풀어주지 않으면 이 망치로 모든 소의 머리를 으깨버리겠어! 겨우 숨 붙은 놈들은 사막에 내다버릴 거야! 이에 해당하는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겠다! 어서 그 아일 풀어줘!”

 로비스가 마르카와 눈을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입술을 앙다물었다. 오든이 마르카에게 장난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고 엄하게 다그쳤다. 망치를 든 손은 굳셌다. 보다 못한 와사가 마르카를 설득하려 했다.

 “이보게 대장장이 청년, 진정해요. 거 말 못하는 짐승 이마를 박살낸다니 불쌍하지도 않소?”

 “말 하는 짐승은 불쌍하지 않은가 보군요? 어디 이 친구한테 말 한 번 가르쳐보시오. 그래도 내가 맹세를 거둘지 두고 보세요.”

 “그런 소리가 아니고…….”

 로비스는 별안간 여기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빠져나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고초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깨달았다. 마르카는 믿음직스러운 벗이긴 했지만 그가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능력이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마르카조차 오롯이 의지하기 어려운 벗이었다. 소년은 이대로 순순히 붙잡히느니 발악하고 싶었다. 그 때 소년의 목소리가, 혹은 로비스의 목소리를 닮은 음성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아들아.’

 동시에 로비스를 붙잡고 있던 사내의 손에 힘이 풀렸다. 소년은 경계가 느슨해진 단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내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그의 허벅지를 빠르고 얕게 세 번 찔러댔다. 중심을 잃은 남자가 욕지거리를 하며 도망쳤다. 깃살이 사태를 파악하고 로비스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로비스는 칼로 자신을 옥죈 자의 목을 그었다. 등 굽은 사내가 쓰러지고 소년이 바닥에 착지했다. 일련의 과정이 신속했다.

 그 틈에 마르카가 소 등에 올라타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갈겼다. 놀란 소가 앞으로 달렸고, 마르카가 자세를 낮춰 타이밍 좋게 로비스를 낚아채어 품에 안았다. 다급한 마르카와 달리 로비스는 아직 냉정한 눈빛을 유지했다.

 “이 칼, 너무 탐나.”

 뒤에서 욕설과 분란이 뒤섞이어 어수선했다.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프라소스를 빠져나왔다.

 

 *

 

 인질과 손님이 떠나고 지도자가 쓰러진 어두운 마을에 거주민만 남았다. 모두 무기력한 걸음으로 허름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독 한 여자만 그늘진 불빛에 의지해 땅바닥을 더듬고 다녔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절해 있던 그녀는 다시 눈을 뜨자마자 잃어버린 신체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반쯤 잘려나간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고 손가락이 짧지 않은 손은 작은 손마디를 쥐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던 여자가 메마른 흙이 점점 물로 젖는단 걸 알아챘다. 낌새가 이상해 우물을 보았다. 우물을 덮은 나무 덮개가 흔들렸다. 덮개 틈으로 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여자가 멍하니 우물을 보는 잠깐 동안, 덮개는 솟아오르는 물을 견디지 못하고 뒤집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우물물이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길어졌다. 살점이 붙은 뼈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잔해가 우물물에 섞여 나왔다. 여자가 사람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생물이 그녀에게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새.

 날지 못하는 새.

 그러나 어느 동물보다 빠르고 성가신 새, 에뮤.

 에뮤 한 마리가 부리에 여자가 잃어버린 손가락 한 마디를 물고 씹어대고 있었다. 삐쩍 마른 온전한 손을 내밀어 휘저었다. 움직임은 느렸다. 출혈이 심한 여자는 숨이 낮아지고 눈이 천천히 감겨왔다. 희미한 그녀의 시야에 수십 마리의 에뮤가 비쳤다.

 마을 사람들은 집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바깥에 생기가 떠나 널브러져 있는 육신을 둘러싼 짐승들이 어서 떠나길 바라고 있었다. 우물가에 모인 새들이 깊은 땅속에서 올라온 뼈와 잔해를 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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