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은 도망치지 않기로 하였다. 윤슬과 함께 도망을 친다고 하여도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써는 다만 윤슬에게만 피해가 안 갈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장모님 윤슬 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 계세요. 아마도 역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거동을 못 하였으니, 큰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화가 부인에게 미칠 수 있으니 저희가 혼례를 올린 것은 비밀에 붙이셔야 합니다.”
“서방님! 먼 소리를 그리 섭섭하게 한다요. 한 번 부부의 인연을 맺었는데, 왜 우리가 부부인 것을 숨겨야…”
“부인 입 닥치시오! 더 이상 길게 이야기 하지 않겠소.”
금현이 윤슬에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윤슬 엄마도 놀랐지만, 모두가 그 뜻을 잘 알고 있다. 둘의 눈치를 살피던 윤슬엄마가 윤슬을 잡아끌고 집을 나간다.
“이년아 김 서방 말대로 혀. 니가 살아야 또 김서방을 구하던지 말던지 할 거 아녀. 잘 못 하다가 모두가 개죽음 당하면 김서방을 위해 암 것도 못 혀.”
이때 조정에서 나온 관군과 대신이 김현의 집 마당으로 들이 닥친다. 도승지가 마을에서 김현의 집을 확인하고 찾아 온 것이다.
“상주 김 씨 계림공파 7대손 김현이 맞으십니까?”
“그렇소. 내가 김현이요”
“어명이 내렸으니 어명을 받을 예를 갖추시오.”
관군이 마당에 자리를 깔고 도승지가 교지를 꺼내자 김현은 준비된 자리에 어명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는다.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와 있고, 윤슬은 엄마 품에서 불안한 눈길로 어명을 기다린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서도 김현은 담대한 표정과 몸짓으로 왕족의 기풍을 잃지 않는다.
“어명이오. 상주 김 씨 계림공파 김현을 세자로 책봉 하니, 어명을 받들어 즉시 입궐을 명하니 채비를 서두르시오.”
어명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도승지가 한 말을 실감을 못하고 있다. 김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조정에서 김현을 체포하기 위해 온 줄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세자로 책봉을 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가 제일 놀라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세한 내막을 묻는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요? 왕께서 아직 춘추 젊으신데 어찌하여 나를 세자로 들인단 말이오?”
왕의 죽음은 아직 이 시골마을까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왕께서는 얼마 전 붕어 하셨습니다. 왕위를 이을 분이 안 계시기에 우선 세자로 책봉 되시고 입궐을 하시면 왕위 계승절차가 진행 되는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모두들 너무 놀란 나머지 무거운 침묵만이 흐른다. 윤슬은 입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윤슬엄마가 정적을 깬다.
“김,,,김 서방이 우리 김 서방이 왕이 된 다고라고라? 이기 시방 꿈이여 생시여?”
“무엄하도다. 어찌 왕이 되실 분을 그리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모두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라”
마을사람들은 너무나도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도승지의 호통소리에 무릎을 꿇는다.
“입궐 준비를 마치시면 하교를 내려 주시옵소서. 저희는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입궐은 혼자 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김현이 사가에서 혼례를 올린 것을 눈치 챈 도승지는 김현에게 미리 귀 뜸을 해주는 것이다.
조정을 장악한 박세동은 허수아비 왕이 필요하였고, 왕이 되어도 전혀 위험이 되지 않을 자를 찾고 있었다. 김현은 이미 모든 일가가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멸족을 한 터이라 이 보다 적당한 자가 없었던 것이다. 의종과 김현은 동갑이지만 형식상 양자로 채택을 하여 왕위를 계승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물러간 후 김현은 정신을 가다듬은 후 윤슬에게 당부를 한다.
“부인, 이 것은 마냥 좋아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오. 그러니 우선 나 혼자 궁에 들어가서 상황을 판단 한 후 부인을 꼭 데리러 오겠소.”
“아니 먼 소리인가 김 서방! 우리 윤슬이도 데불고 가야지. 여기서 혼자 기다리니? 혼례를 올린 지 얼매나 됐다고 부부가 벌써 생이별이 웬 말이랴 절대 안 될 말이지.”
윤슬엄마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윤슬이 버림을 받아 과부 아닌 과부로 살 것이 걱정되어 이번 참에 바로 딸려 보내려고 한다. 김현이 장모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 하자 윤슬이 말을 가로챈다.
“아따 엄니. 무식한 소리 좀 허지 마소. 왕이 되실 분이 행차 하는데 나가 어찌 이 꼴로 따라 가겄소! 그라고 가마도 하나 밖에 없소. 내는 여기서 차분히 기다리면 우리 서방님이 먼저 궁에 가셔서 나한테 비단옷도 보내주시고 가마도 보내 줄 것 아니오. 난 그때 이쁘게 하고 갈라요.”
윤슬은 김현이 자신을 버릴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왕비가 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 기이 무신 지랄 맞은 운명 인고, 내 우리 서방님을 어찌 살리 냈는데, 참말로 하늘도 무심하지.’
윤슬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우선 김현의 떠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윤슬의 속 깊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현이다. 김현은 뒤 돌아서서 눈물을 참고 있는 윤슬을 살포시 껴안는다.
“윤슬아. 내 반드시 널 데리러 올 것이다. 혹여나 그리 아니 되면 내 그 까짓 왕위를 버리고서라도 널 찾아올 것이다. 내 약속은 기필코 지킬 것이다.”
윤슬은 눈물이 나 등을 돌리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을 잇는다.
“아따 우리 서방님 얼굴도 고운디 말도 참 이쁘게 하시요. 내 딱 3년만 기다릴 것이어라. 그 후에도 안 오시면 왕비고 머고 다 버리고 떠날 것이요”
윤슬엄마가 울며불며 난리를 치자 윤슬 아버지가 다독이며 집으로 데리고 간 후에도 김현은 윤슬을 뒤에서 안은 채로 한 동안 서 있었다. 윤슬은 마음을 다 잡고 김현을 떠나보낼 채비를 한다.
“서방님. 궁에 가면 좋은 것 천지 일 것이니 여기서 챙길 것은 없고, 내가 기묘천서랑 구슬 하나 드릴 테니 꼭 챙겨가소. 잠시만 기다리쇼잉.”
윤슬은 방으로 들어가 기묘천서와 구슬을 챙겨 나와 김현에게 건넨다.
“이 붉은 구슬은 어디서 난 것 이오 부인?”
“그 왜 인어 아 기억 하시지라? 그 아가 주고 간 것이오. 서방님이 꼭 필요할 때 이 구슬을 사용하소. 헛으로 쓰실 양반도 아니지만 한 번 밖에 못 쓴다고 허니 참 말로 중한 일이 생기면 서방님을 위해서 꼭 사용하소.
“나는 도대체 부인한테 머 하나 해 준 것이 없는데, 이리 받기만 하니 정말로 미안하오.
“부부끼리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이 구슬이 나 라고 생각하시고 나가 보고 잡을 때 가끔 꺼내 보소. 난 서방님 퉁소 고이 간직 하겄소”
이렇게 신혼의 단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둘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이별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