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
코발트 블루
작가 : 현준
작품등록일 : 2020.9.25

수감된 주인공이 옛 사랑을 그리며 추억여행을 떠나는 중편 소설입니다.

 
3화
작성일 : 20-10-14 21:37     조회 : 247     추천 : 0     분량 : 1973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독방에서 홀로 지내며 과거를 회상하고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점점 늘어만 갔다. 망상이라고 칭해야 할까.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이 서류로 점점 탑을 쌓아 올라가듯 어느새 구원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결국은 같은 패턴의 삶이 원인 이었을까. 어제 낮 열두시 삼분에 밥을 먹었다면 오늘도 열두시 삼분에 밥을 먹는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누군가에게는 영원토록.

  아침의 노래가 울리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진 날이었다. 야밤에 기온이 확 내려가더니 잠을 조금 설쳤다. 그래서인지 평상시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가뭄으로 갈라진 땅에 뭉쳐진 흙덩어리처럼 그런 쓸모없는 무게였다.

  아직은 차가운 어둠이 짙은 파랑으로 변하기 전의 아침, 나는 문득 달이 어디에 떠있을지 궁금했다.

  평소에 우연히 발견했던 야밤의 달조차도 직접 찾아서 본 적은 없었다. 우연의 상징이었던 노란 달. 물가에 비춰진 달도, 만월이 되어 유독 꽉 차서 빛나던 달도, 창문에서 발견한 금 바가지 같던 반달도,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금빛의 우주공주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연히 먼저 나를 찾아와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벌레들의 합창이 들리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어느 형태로든 남아있지 않은 것들이 우연히 그리워졌다.

  *

  일요일. 아침에는 떡국을 먹었다. 아삭아삭한 파와 보름달처럼 둥근 노오란 계란은 없었지만 걸쭉한 쇠고기 육수는 훌륭했다. 밑반찬으로는 오징어 젓갈과 김치.

  나는 바깥 생활을 할 때만 해도 편식이 꽤 심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바다와 가까이 살아서 그런지 생선만큼은 익숙하면서도 지겨웠다. 젓갈류는 물론, 생선의 잡내가 조금이라도 풍겨오면 음식을 거를 때도 많았다. 자극적인 음식도 멀리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식습관이 오히려 이곳에서만큼은 잘 맞았다. 짜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고, 비린 음식도 없고.

  나는 식사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J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꺼냈다. 접혀있는 종이 위에 최대한 반듯하고 정성들인 글씨로 J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혹시라도 비뚤게 쓰다 잘못된 주소를 적을까봐 지난번에 손바닥에 적은 주소를 예쁘게 옮겨 적은 것이다.

  나는 무심한 듯 종이와 펜을 꺼내놓고 그 위에 깍지를 얹었다. 마치 기도라도 올리듯 아무런 미동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사색에 잠겼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쉬운 일만은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겪어왔다. 마음을 전해야 할지, 단순히 안부를 물어야 할지. 혹여나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일지. 마치 섞여있는 퍼즐 조각들처럼 맞춰보는 데에는 시간이 꽤 필요한 것이었다. 완성된 그림이 무엇일지 난해한 추측들만 던져가면서. 결국 미련일 텐데.

  하지만 나는 미련이라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현실과 그동안 힘들게 세워둔 도미노가 와르르 무너질 것이 두려워서, 쓰러진 도미노들을 다시 세울 용기조차 없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기심.

  그것을 나 스스로도 느낀다. 어쩔 수 없는 걸까. 모든 것이 나의 중심인 곳에 살고 있으니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다시 집중해보자. 어디까지 나의 진심을 전해야 할까. 과연 내가 제대로 전할 자신이나 있을까. 물론 진솔하게 적을만큼 솔직하지도 못하겠지만. 진심이 무게를 재려는 이기심.

  잠깐, 내가 또 무슨 엄청난 기대를 하려는 거지. 이제는 정말 배려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편지야, 편지일 뿐이라고. 제발, 쿄우.

  침착하자, 존중하자. 그리고 생각하고 휘두르는 거야, 진실의 검을.

  다리를 쭉 펴고 안자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우두둑.

  J, 네가 내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듯 나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러워. 공백을 계속 유지하는 게 서로를 위하는 것일지, 과연 지난날처럼 그대로 썩혀두는 게 맞는 걸지. 혼란스러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참 많아. 네가 떠나고 나서 텅 빈 화분처럼 생겨버린 빈자리.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슬픔, 깨어나지 못한 악몽, 부끄러운 시간, 그리고 상실되어버린 사랑의 의미. 변한 거 하나도 없지, 나.

  나는 그때 했어야 했던 말들을 비로소 떠올렸다. 그날 했더라면, 차라리 매달렸었더라면. 수긍하지 않고 네게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었다면, 애원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그동안 비축해둔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입술에 닿았다. 오래 아껴둔 녀석이라서 그런지 쓴맛이 느껴졌다. 아직은 눈물이 쓰게 느껴질 그런 나이인가보다. 하긴, 겁이 많을 때였으니까.

  나는 몇 번이고 펜을 쥐었다 놓았다 반복했다. 고장 난 시계태엽처럼 삐거덕거리는 내가 너무 애처롭고 한심했다. 오늘도 넌 틀려먹었구나.

  나는 펜 뚜껑을 닫고 한숨을 내쉬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대로 뒤로 발라당 누워버렸다. 아, 힘들다.

 

 

 

 

  *

  한번은 굉장히 붉은 석양을 본적이 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빨간 물감을 풀어놓은 예술작품 같았던, 그 우아함에 구름마저 잠시 멈춰서 바라보게 만든 그런 석양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매혹적인 석양은 처음이라 호송버스에서 나는 넋을 놓고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점점 넘어가려해도 봉숭아물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던 끈질긴 빨강을.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이러한 멋진 광경을 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검사가 구형을 내리며 마치 아름다움을 볼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었으니까. 전혀 의도치 않던 붉음이 얼굴에서 솟아오르며 이글거렸고, 나의 운명을 좌우할 시나리오를 법정에서 듣고 있자니 세상 빛이 하얘질 정도로 내용은 비현실적이었다.

  검사의 구형이 끝나고, 곧바로 판사는 판결문을 읽었다. 이러한 점, 저러한 점, 이해할 수 없는 점, 받아들일 수 없는 점, 마땅한 점, 점,점,점. 마흔 개의 점들이 내 마음속에 잊지 못할 별자리로 남아 각인되어 버린 날이었다.

  법정은 더웠다. 식은땀이 비 내리듯이 흘렀고, 손은 마치 풀 묻은 것처럼 끈적였고, 발바닥은 후끈했다. 마치 달궈진 온돌 위를 맨발로 서 있듯이.

  손바닥이 아팠다. 판사가 마흔 개의 점을 읊는 동안 초조한 나머지 검지로 손바닥을 거칠게 긁어대었기 때문에 손마저도 붉어졌다. 어느 몸 한구석 붉지 않은 곳이 없었으리라.

  선고하겠습니다... ... 피고인은... ... .

  더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인지한 뒤에서야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결국 나는 눈물을 제어 하지 못했다. 하필 이런 때에 스위치가 고장이 나다니,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예고 없이 눈물이 흘렀다. 물줄기는 달아오른 뺨을 지나 턱 끝에 매달리더니 살포시 손등을 때린다. 그 작은 감각이 거대한 공포를 일으킨 것 마냥 손은 부르르 떨려왔다.

  순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작게 고여 있는 눈물샘하나 가둬두지 못하다니. 이미 꽁꽁 얼어버려 쉽게 잠기지 않는 수도가 야속하기만 했다.

  손목에는 수갑이 꽉 조여 있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둥근 족쇄를 노려보며, 나는 눈물을 거두려고 온갖 생각을 다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소리라도 내지 않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침을 삼켰을 뿐.

  “힘내세요. 더 힘 빠지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비슷한 운명 아니겠습니까. 슬픈 일이 있다면 기쁜 일도 있을 거라고 코헬렛 왕이 말씀하셨지요.”

  무릎 위로 다른 수갑이 불쑥 나타났다. 마치 추운 날의 담요처럼 온 몸에 포근함을 전달했다. 그때는 그 따듯함이 위로의 전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어리석을 만큼.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듯 나는 코를 훌쩍이며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들이 어디 고여만 있겠습니까. 그리 보이면서도 다 흘러가고 있지요. 저기 저 붉은 석양도 곧 흘러 넘어가겠지요. 우리는 내일을 준비해야합니다. 현재의 슬픔이 결코 고여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려보냅시다.”

  해는 완전히 떠났지만 빛은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태워 없애주려는 모닥불처럼, 활활. 그렇게 석양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는 연인이 되어 젖어버린 내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눈물을 흘린 진짜 이유를. 석양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새끼하마는 성인무리에 합류하려면 무리들의 거친 경계의 혹독함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여러 차례 몸을 긁히며 부딪쳐야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계절의 변화도 내게 그런 충돌을 주었지만, 어느 정도의 그런 변화는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문제는 매시간 새끼로 돌아가야 하는 고독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4구역에서 빼꼼히 보이던 뒷산의 한때 푸르고 노란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라하게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총에 맞은 듯 곳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자신을 길러준 나무와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전장에 끌려가는 생이별의 슬픔이 가득하지 않을까. 나무도 정말 슬프겠지, 그래서 가지들이 점점 더 앙상해져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늘위의 햇살은 눈물이 그렁 맺힐 만큼 찬란하게 빛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반대로 땅위의 우리들은 다른 길을 걸으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색상이 담긴 물감을 쓰지 않겠다는 듯. 붓을 깨끗하게 씻어 내어버렸다.

  4구역에는 엉성한 작은 갈대(강아지풀)들만 남고선 모두가 잠이 들거나, 남쪽으로 이동을 했고, 발레리나가 되어 여행을 떠나버렸다. 구석에서 거대한 집을 지어 살던 대왕거미도 비축해 둔 식량들을 몽땅 남겨둔 채, 사라져버렸다. 손톱만한 작은 코스모스 한 송이도 잠이 오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다 지쳐 쓰러지듯이.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착각이란 참 무섭다. 혼자에서 혼자가 되어버렸다고 착각해버리니까.

  나는 쉽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뒤통수를 짓누르듯이 그 상태로 꽤 오랫동안 굳은 채로 발끝만 쳐다보았다.

  새로운 익숙함이 두려워서,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빙글빙글, 가을에는 낙엽만 도는 것만은 아닌가봐, 하고 나는 생각했다.

 

 

 

 

 

 

 

 

 

 

 

 

  *

 지난여름은 어땠어? 외로웠지?

 

  나는 방안에 가만히 앉아 대뜸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늘 혼자가 아니라고 착각했던 두려움의 여파가 쉽게 잦아들지 못하고 있던 걸까. 홀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벌레들과의 병정놀이부터 방안을 가득 메워주던 풍성한 여름날의 소리. 착각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들. 굳이 애써 찾으려 한 것도 아닌데, 항상 팅커벨은 먼저 내 안의 문을 두들겨 주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특정한 인물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외롭다는 말을 꺼내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것들 투성이었다. 하지만 그 풍경들을 쓱싹쓱싹 지워버리는 잔혹한 행위는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이리라. 불완전한 인간의 정석.

  나는 외로웠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편지지를 꺼내었다. 종이가 한번 스윽- 소리를 내더니 탁자 위로 살며시 펼쳐졌다. 나는 이때다 싶어 마치 공을 드리블하며 질주하는 축구선수처럼 편지를 써내려갔다.

  메마른 땅 위로 사뿐히 내려오는 함박눈처럼 마음은 점점 가벼워지고,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운 그리움이 글썽이며 나를 적시기 시작했다.

  처음 몇 문장을 적어 보았더니 그동안 느꼈던 고독과 아픔이 압축되어 내 심장을 조여 왔다. 어쩌면 치유의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계속해서 내 자신을 달래며 손목을 휘둘렀다.

  그렇게, 나는 너의 외로움을 용기 내어 물어보았다.

 

  오늘, 아직 시들지 않은 작고 하얀 꽃에게 말을 건냈어.

  너는 왜 아직도 그러고 있니?

  네 친구들은 이미 콩나물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잎들은 말라버려 바람을 타고 긴 여행을 떠났는데. 무엇을 기다리는 거니? 꽃줄기조차 바닥에 누운 듯이 축 쳐져서 말이야. 너도 나름 생명이라고, 견디고 있는 거니? 그런 거니?

  작고 하얀 꽃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 나는 한참을 멍하니 가을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꽃잎을 바라보다가, 혹시나 이별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꽃에게 사과했어. 그동안 잔인하게도 네 친구들을 꺾거나 밟았었다고. 연인일지도 모를 붉은 잎들을. 이렇게 견디어내고 있는 꽃을 보니까 내가 너무 작은 생명들을 무시했던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어.

  꽃에게 약속했어. 네가 견디는 동안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쓰러지면 일으켜주고, 목이 마르면 물을 주고, 하루라도 더 너의 간절함을 응원해 보겠다고. 그리고 나는 말했어.

  혹시 조금 더 우리가 친해지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겠니?

  혹시 너희에게도 언어라는 게 있다면, 나의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겠니.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나대신 그녀에게 진한 향기를 전해주겠니.

  그래, 동화 같은 일이겠지만. 언젠가 당신 코끝에 내가 맡았던 그 향기가 닿아 작은 미소를 짓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작고 예쁜 하얀 꽃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

  한참을. 그렇게. 오랫동안... ...

 

 

 

 

 

 

 

 

 

 

 

 

 

  *

  일찍 마감을 한 날에는, J의 아파트에서 잠을 잤다.

  그녀의 집에 들어설 때면, 나는 언제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밤의 포근함을 맞이하곤 했었다.

  “고생했지, 오늘은 어땠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을 때 J가 물었다.

  일상에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듯, 그녀의 목소리는 아침이슬처럼 상쾌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매일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기쁨일까. 그날 나는 J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얼마나 초대해야 할까, 난 스몰웨딩이 좋을 것 같은데 어르신들은 싫어하시겠지. 식이 거창하면 신경써야할게 너무 많다던데, 음식부터 이것저것. 포춘 쿠키도 직접 구워야 할 테고...

  “무슨 좋은 일 있던 거야? 싱글벙글 인데, 지금, 쿄우.”

  말똥말똥한 눈으로 J가 웃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말해줄게, 하고 나는 맞이하던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그래, 아무래도 스몰웨딩이 좋겠어, 하고 생각하자 달콤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J가 순간 움칫하자, 나는 평소에 그녀를 안아주었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라도 많이 안아줄게. 앞으로도 시간은 많을 테니까. 그렇게 눈으로 말하자 그녀도 이해했다는 듯 허리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심장이 크게 반응한다. 가깝게 밀착되어 있기에 누구의 심장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상관없겠지만.

  J, 당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어차피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녀가 먼저 입술을 포개었다.

  입술은 좋아, 라고 고백하듯이 달콤했다.

  “씻고 와, 맥주 사놨어.”

  응, 하고 나는 대답했다. 모든 게 완벽해서 현실감은 상실해져 가고 있었기에 더는 어떤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지키고 싶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깨질 것처럼 얇은 유리잔 같은 이 소중한 순간을.

  그날 밤, J는 먼저 잠들었다. 맥주를 반 캔 정도 마시더니 먼저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술이 약해서 였을까, 아니면 내가 말이 너무 길었을까.

  혼자 한 캔 정도 더 마신 무렵부터, 나는 그녀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내 자신을 자책했다. 바보, 가게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어.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내 편을 만났다는 안도감은 가끔 어리석게도 자제력을 잃곤 한다. 그리고는 꼭 다짐한다. 절대 짧은 대화조차 가볍게 생각하지 말자고. 자꾸 반복되면 난처해 질 테니까.

  이런저런 다짐들을 안주삼아 떠 올릴 때, 나는 마침 작은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어떤 물건을 발견했다. 분홍색 배경 위에 곰 캐릭터가 그려진 J의 교환 일기가 식탁위에 고스란히 놓여있던 것이다. 언제부터 놓여 있었던 걸까. 꽤 긴 시간 식탁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트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아주 뜸하긴 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일기장을 집어 들고서 곧장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일기장을 펴자, 그동안의 손길이 한 장 한 장 가득해서 마음이 찡했다. 정성이 고마워서, 사랑이 가득해서. 그녀의 공간에서 그녀를 읽는 일이 가슴에 와 닿자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글썽인다. 조금은 취한 걸까, 나.

  나는 최근 쓴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맨 뒷장부터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씨가 적힌 페이지 위에 오늘 날짜가 적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이 나도 모르게 환희의 비명을 소리 없이 질러보았다.

 

  나는 지금 빈둥빈둥, 쿄우를 기다리고 있어. 오늘 일찍 마칠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집 청소를 하고나니 간단하게라도 끄적이고 싶었어. 쿄우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지 못할 것 같아서. 손이라도 움직이는 중.

  쿄우, 지금의 나, 정말 행복하다. 우리 만난 지 2년 정도 되었지만 난 아직도 설레고 막 그래. 쿄우도 그런 거야? 나만큼은 아니어도 좋아. 사실은 내가 설렌다는 게 현재로서는 내게 가장 중요해. 여전한 욕심쟁이 J일까.

  교환일기가 예전보다 많이 뜸해졌지만, 가끔씩 힘들거나 혹은 나에게 털어놓지 못할 감정들이 생기게 된다면 이 일기장을 읽어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감히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너무 소중한 공간이야. 그렇다고 매일 펼쳐서는 안 돼. 그러면 나 슬퍼질지도 몰라.

  맥주 조금만 마시다 들어와. 그리고 날 꼭 안아줘, 쿄우.

 

  기분 좋은 슬픔이 이리저리 마음속을 맴돌았다. 마치 딱딱한 파스타면이 서서히 풀어지는 듯한 설렘까지. 그릇에 옮기기만 하면 완성.

  나는 J가 깨어 날까봐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어서 그녀가 자고 있는 이불 속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포근한 이불과 침대 전체에 배어 있는 J의 향기가 내 취기를 더욱 자극시킨다.

  나는 J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힘을 거의 주지 않았지만 J는 불편했는지 조금 뒤척였다.

  이번만큼은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들리는 이 소리는 내 심장소리가 확실하다고, 쿵쾅쿵쾅.

  지금처럼 언제나 널 감싸줄게.

  잠깐은 뒤척여도 좋아. 잡아줄 사람은 항상 나일 테니까.

  달빛이 몰래 지켜보던 어느 희던 밤.

  우리.

 

  눈이 번뜩 떠졌다. 웬일인지 어둡지 않다. 실내조명이 눈이 부셔서 눈곱이 따가웠다.

  새벽에 깨지 않고 잠을 푹 잔 게 얼마만인지. 무조건 새벽 중에 깨어나는 게 정상이었는데, 마치 어젯밤 과음한 것처럼 기분이 잠깐 동안 몽롱했다.

  창문을 열자 아침 찬바람이 창살을 피해 기분 좋은 속도로 들어온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놀라지 않게.

  개운한 듯한 몽롱함을 더해 찬 공기가 방안을 찾아오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승차한 롤러코스터가 마침내 출발하듯 다가올 푸름이 설레었다.

  마침내 오늘인건가.

 

 

 

 

  *

  아침에 브로콜리 수프와 딸기잼을 듬뿍 바른 옥수수 빵을 먹었다. 한 주에 두 번 수프와 빵을 주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목요일.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따뜻한 스콘과 비슷한 크기지만 반대로 차갑던 옥수수 빵. 맛은 떨어지지만 아무렴 어때. 잼을 바르면 다 같은 맛인걸.

  긍정은 상쾌한 무언가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언젠가 폐쇄적인 한 숨을 내쉴 때도 있었지. 축축해진 눈을 건조시키던 아침이었을 때도 있었고. 불과 한주 전 까지만 해도 이렇게나 마음이 가벼웠던 적이 있었던가.

  평온이라는 게 이렇게나 무섭다, 강하다. 지난 얼룩은 얼룩일 뿐. 옷을 뒤집어 입으면 그만이다.

  보통 편지를 보내려면 직접 우체국을 가야하겠지만, 이곳은 친절하게도 찾아오는 우체국이 있다. 오후 네 시가 되면 집배원 역할을 맡은 교도관이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배회한다. 날갯짓이 결코 어설픈 낡은 유니콘 같다.

  유니콘은 마치 다마고치를 육성하듯이 정해진 패턴으로만 움직인다.

  띡 (버튼 누름),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서명해주세요.

  띡, 편지를 접수했습니다. 잘 전달하겠습니다. 꾸벅.

  띡, 우표를 추가 구매하시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지를 건네자 탑승 중 이었던 롤러코스터는 가장 높은 지점에 멈춰서 하강을 준비한다. 하강에 앞서 설렘을 머금은 세상의 풍경이 실눈 속으로 연기처럼 흘러 들어온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푸른 잎의 포레스트.

  하강 즉시 사라질 거란 걸 알고 있지만, 내게는 찰나의 추파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겨버렸다. 변화 속 확실한 징조. 그 속의 주인공인 나를 만나는 일이 어쩌면 설렘의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J에게 편지를 보내고 완전히 후련해질까 했던 기대는 조금씩 낯설게 다가왔다. 마치 또 다른 초조를 불러오려는 듯 마음이 완전히 맑게 개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른 느낌의 기다림이 생겨났을 테니까.

  가장 익숙해왔던 기다림. 태아였을 때부터, 유아가 되고 말을 하기까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호흡이 매우 무뎠기에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배제시켜 버렸다.

  그러나 나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죽음을 기다렸던 것이리라. 다만 그 사이에 어떤 필름을 남기고 가는가. 그것만을 결정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곳으로부터.

  각종 고민들이 밀물처럼 덮쳐왔다. 주소를 제대로 찍었겠지. 왜 다시 한 번 더 확인해보지 않았을까. 나는 봉인되어있던 편지봉투만 보아도 내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아서 초조했고, 마치 어항 속 물고기처럼 못 본 척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편지와의 동거를 회피했었다. 도플갱어 같아 보였으니까.

  그만 생각하자, 더 나아가면 찌질 해 지겠어. 뭐, 이미 그럴 대로 망가지긴 했지만.

 

  비가 한번 쏟아져야 완전한 겨울이 오려나.

  올해는 농사꾼들의 기도가 간절했는지 하늘이 푸르고 맑은 날이 참 많다. 마치 한 번도 물을 뿌린 적도 없던 것처럼 작은 구름들이 시치미를 떼며 금요일 오후를 흘러가고 있었다.

  겨울이 온다 해도 내 환경이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내심 기다리고 기다리게 된다. 새하얀 세상을.

  산타는 어린 친구들에게만 선물을 주는 걸까. 나, 아직도 매년 기다리는 것 같은데. 엄마도 그래?

  “2724번, 실례합니다. 혹시 바쁘신가요?”

  스트레칭을 하려고 자세를 잡고 있을 때, 간혹 얼굴 도장을 찍어주는 피터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배식구로 빼꼼, 얼굴을 갖다 대며 인사를 건넸다.

  “그 말, 오랜만인데요. 전혀 바쁘지 않아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바쁘다는 말이 왠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사회에서 흔한 인사말이었을지라도 지금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언제한번 밥 먹자, 부모님은 안녕하시고, 얼굴 좋아 보이는 걸, 한잔해야지... 어떤 인사말도 대화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빈말일지라도, 화색이 맴돈다.

  “생활하시는데 불편하시거나 고충은 없으신지 확인 차 왔습니다.”

 의무적인 질문을 해서 실례한다고 피터 씨의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다. 동시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당신의 불평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 당신이 후련해지기만 한다면,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불편함을 말하다가는 너무 길어서 피터 씨의 업무를 방해할지도 몰라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좋아요. 들어준다는 것만큼은 익숙합니다.”

  피터 씨는 쑥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교도관이 맞나 싶을 정도의 친절함. 신이 내려 보낸 교도관이라는 기운이 그의 눈빛에 담겨있다는 것을 과연 피터 씨는 알고 있을까. 그만큼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산타클로스의 미소처럼.

  “머플러는 잘 지내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기억하시네요. 이미 완성해서 제 손을 떠났지 좀 되었어요. 어머니가 굉장히 좋아하셔서 그동안의 노력을 제대로 보상받은 듯 했죠. 요새는 또 무엇을 만들어볼지 고민 중이랍니다.”

  “고충은 피터 씨에게 있었네요.”

  피터 씨와 나는 함께 웃었다.

  웃는다는 것. 익숙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낯설게 되어버린.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게 맞긴 맞나보다. 피터 씨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으니까. 거봐, 이 사람 신이 보낸 사람 맞다니까.

  “춥지는 않으시죠? 올 겨울은 좀 늦네요. 내일 모레면 12월인데 전혀 겨울 분위기가 안나요. 캐럴이라도 틀어 놔야하나 싶어도 캐럴 금지령이 떨어져서 마음대로 크게 듣지도 못해요. 세상이 참 예전 같지가 않네요.”

  “오히려 이 안에서는 안 나오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아마도 약 오를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하. 다 어릴 때 이야기죠. 어른이 되면 캐럴이 슬프게 들린다는 것을 어렸을 적엔 상상도 못했잖아요. 매년 들을 때마다 점점 멀리하게 된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세상살이에 골동품이 쌓여가는 거죠. 새 물건을 구입할 틈도 없이.”

  나는 피터 씨와 이곳이 아니었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 철문이 없었다면, 수인번호보다는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줬더라면,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텐데.

  그래도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명백한 선이 그어져 있다 할지라도. 제비가 물어다 준 씨앗처럼, 지금 이 순간도 키워나갈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그래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는 건 여전히 기쁘지 않나요?”

  나는 말했다.

  “상대가 있을 때나 기쁨이었죠. 제가 교제했던 친구들은 모두 뜨개질을 좋아해줬어요. 정성에 감동해주는 타입이 있어요. 그래봤자 2명 정도였지만.”

  “돈은 안 들었겠어요.”

  “무슨 소리! 선물에 정성을 쏟으니 데이트 비용 지출이 더 나가던걸요.”

  “그건 좀 슬픈데.”

  크리스마스 이야길 하다 보니 어디선가 캐럴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배식구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방을 관통하여 창밖으로 이동한다. 그 살랑거림이 좋아서 순간적으로 눈을 감자, 피터 씨가 눈치 챈 듯 몸을 비틀어 공간을 좀 더 열어주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스트레칭은 좋지만 너무 과격하게만 하지 말아주세요. 규율이 있어서요.”

  피터 씨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이들의 산타가 되러 자리를 떠나자, 배식구에서는 조금 더 강하고 찬바람이 불어왔다.

  곧 12월이구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달이라니. 곧 새해라니. 며칠 후에는 눈을 맞게 되겠지.

  모든 게 꿈만 같지만 결코 달콤하지는 않다.

  각오를 해야겠어, 하고 나는 지난 어느 12월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또 다시 승선해야겠구나. 어두운 밤 하늘아래의 항해.

  무수한 별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곳. 밤바다의 주인공이 되어 바람에 날 맡길 수 있는 곳. 그러나 몹시 외로운 그곳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북두칠성처럼 아름다웠던, 동시에 초라했었던, 불꽃을 잃은 초가 한순간에 연기로 변하는 것처럼 거센 바람이 부는 12월 속으로.

  이 년 전이었다. J가 이별을 통보했던 그 겨울. 남은 연기마저 사라져 버리고 코끝을 스치는 잔향만이 남아있었던 날. 나는 그것마저 잃게 될까봐 눈물을 펑펑 쏟았었지. 그때는 그랬었지. 그때도 그랬었지.

  주체하지 못했던 그 때의 마음이 조금은 그립다. 그나마 네가 가깝게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미련을 가져보기도 한다. 지난 12월의 슬픈 향기를 떠올리며.

 

 

 

 

 

 

 

 

 

 

 

 

 

 

 

 

 

 

 

  *

  고요하다. 그리고 차다. 늘 생기 넘치던 초록 공기에 무게가 생겼는지 소리마저 무거워진 듯한 조숙함. 몇 마리의 까치만 남고는 모조리 남쪽으로 떠나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생명을 위해서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녹슨 창살 밖 휑한 풍경은 나를 밀어내듯 더욱 허전해 보였다. 텅 빈 냉장고처럼.

  채워주고 싶었다. 창가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마법의 액자였으니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액자. 화가의 영혼이 담긴 듯 언제나 살아 숨 쉬고 있다. 비록 색체를 잃어 갈지라도.

  예전에는 이런 액자들이 참 많았었는데. 테두리가 없거나, 커튼에 가려져 있던 때가 대다수였지만. 그래서였을까, 느낄 수가 없었어. 눈앞에 고스란히 숨어있던 그 소중함을.

  한 끗 차이였지. 커튼을 열고 빛을 안내했더라면...

  전혀 몰랐던 거야. 그만큼 어리석었던 거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전부인 줄 알았던 거야.

 

 

 

 

  *

  그날 오후, 푸르던 하늘은 수억 마리의 양떼들에게 밀려나 점점 사라지고, 흐릿한 잿빛 솜으로 뭉게뭉게 뒤덮이고 있었다. 전혀 튀지 않게 조용히 몸을 바람에 맡기면서.

  언젠가 하늘 위에서도 이런 구름을 본 적이 있다. 착륙 불이 켜지고 비행기가 하향을 하기 시작할 때 즈음 드넓게 펼쳐진 뭉게구름이 마치 겨울 이불처럼 평온해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하얀 바다 같던 구름 위 덩그러니 놓인 태양까지 기분 좋게 눈이 부셔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일 정도로, 아름다웠던 저 위의 세상.

  천국도 이런 분위기일까. 하얗고 빛나고, 때 묻지 않은 순백만이 존재하는 곳.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심심할 것 같기도 하다. 왠지 음악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날 저녁, 양떼들이 서로 조물조물 거리더니 눈이 내렸다. 색조를 잃어 부끄러워하던 땅에게 마치 천사가 내려와 옷을 입혀주듯이 새 신부처럼 아름다움이 되살아났다. 끊임없이 춤을 추며 내려왔다, 올해의 첫눈이.

  천사들은 꼭 사람의 형태가 아닐지도 몰라. 구름 위 세계가 천국이라면, 그곳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모두 천사이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우아하게 땅으로 내려와 우리와 섞이는 거야. 영혼이 얼려있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거지. 자연스럽게, 깍지 끼듯이.

  아주 느리게, 마치 지구의 축이 멈추면서 모든 것이 멈춘 듯이 첫눈은 아주 천천히 내렸다.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조금 설레었을 뿐. 모든 게 자연스러웠으리라. 마치 약속된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만난 것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천사는 그렇게 땅위로 내려앉아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솜털로 아름답게 꾸며진 청결지역에 또 다른 하양이 도착했다.

 

 ‘쿄우에게’

 

  교환일기를 가득 채웠던 익숙한 글씨가 하얀 봉투위에 마법처럼 쓰여 있었다. 꿈처럼 혹은 소중한 낙서처럼.

  꼬르륵.

  어라, 갑자기 네가 반응을 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쿠키를 집고서 한 입 베어 먹었다. 쿠키의 달콤한 초콜릿향이 느껴진다.

  쿠키는 뭉개진 밀가루가 되어서 겨우 목구멍을 통과해서 넘어간다. 그러자 살짝 목이 매였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그러나 결코 쿠키 때문은 아니리라.

  그래, 현실이야. 놀라지 말자고. 잠시 이 순간을 즐겨 보는 건 어때? 흑백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잖아. 안 그래, 쿄우?

  눈꺼풀은 이내 눈에 쌓인 것처럼 무거워지고, 금세 또 눈이 녹았는지 속눈썹 끝엔 투명한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동공과 심장이 조금은 안정을 되찾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그녀의 안부를 읽을 수가 있었다. 어디선가 “Just like a star"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꿈을 꾸었다. 초콜릿에 풍덩 빠진 마시멜로우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꿈.

  나는 삿포로 오타루지역에 있는 아케이드를 걷고 있었다. 도심 속 가로등과 네온사인들이 무색할 만큼 별은 무수하고, 빛났다. 하늘에서는 빨강별, 파랑별, 노랑별, 그리고 까망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천사들의 눈동자처럼.

  아케이드 상점들은 굳게 닫혀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을까. 내 발걸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터벅터벅.

  내게는 무척 생소한 시간이었으리라. 주말도 아닌 평일에 새벽 공기를 맡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다음 장사를 위해 일찍 자야했으니까. 고개가 하늘을 향할 새도 없이 바빴던 그때. 프라이팬, 튀김기, 냄비, 오븐, 마이크로 웨이브, 가스불과의 사투. 그 때의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던 걸까. 요리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요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건 트럭 위에서 장사를 하고나서 한참 뒤의 일이었다. J를 만나고 나서부터 비로소 내 직업이 좋아졌다. 오븐 타이머의 시간이 굉장히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 때의 달콤함이 흐르는 삿포로의 밤이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골목 사이사이로 불이 켜진 가게가 있는지 기웃거리기도 했다. 삼분정도 더 걷다보니 어디선가 자그맣게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 걸음을 재촉하자 음악은 더욱 귀에 가까워졌다. 액슬 로즈가 부르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맞다, 아이리시 펍에 가고 있었지. 왜 깜빡하고 있었던 걸까.

  가게 안은 한눈에 담길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각종 스포츠 포스터와 맥주 광고 포스터가 사방에 붙어있고, 구석에는 허름한 다트와 축구 게임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우측 바에는 수천 장의 LP와 생맥주 브랜드들이 어서 당겨달라는 듯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고, 그 반대편 테이블에는 J가 앉아있었다.

  귀만 살짝 보이는 뒷모습이었기에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아도, 나는 확실히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턱을 바치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을 듣고 있었던 걸까.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바에서 유리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말했다.

  “아, 네. 기네스 부탁드립니다.”

  대화 소리가 들려도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나는 조금 더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가 왠지 방해가 될까봐. 나를 낯설어 할까봐. 그렇게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비가 보이던가요?”

  바텐더는 기네스를 건네며 그렇게 물었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늘이 맑던 걸요.”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별들을 보셨겠군요. 다채로운 별들 말이에요. 오늘은 비가 보이는 밤일 테지요.”

  그는 닦고 있던 유리잔을 건조대 위로 뒤집어 놓으며 말했다.

  “조금 특이한 별들을 본 것 같은데 그게 비란 말이죠? 밤하늘을 처음 보아서 잘 모르겠군요.”

  “이곳이 처음이시죠?”

  “네. 삿포로는 처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안거지, 하는듯한 표정을 짓자 그는 살며시 미소를 보이며 내 앞으로 가까이 몸을 기대며 말했다.

  “곧 있으면 비가 내릴 거예요. 별들 중 하나가 펑 하고 터지면서 물을 뿜을 겁니다. 마치 폭죽이 터지듯이 말이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 비가 무슨 색인지 그녀에게 알려주시겠어요?”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렴 지금은 J의 모습만이 눈에 담길 뿐이었으니까.

  “오늘 술값은 무료이니 마음껏 즐기시죠. 자, 이제 그녀에게 가셔야죠, 2724님.”

 하고 바텐더는 뒤쪽에 있던 작은 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말했다.

  낯이 익은 사람인데 어디서 봤더라. 교도소에서 만난 사이였을까. 아무렴 어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J가 바로 저기 앉아있는 걸.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싫어서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드르륵, 하고 소리가 나자 귀를 보이던 J가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 오랜만이네.”

  그녀가 말했다. 굉장히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작고 또박또박 움직이는 분홍빛 입술에 맞추어 내 발걸음도 그녀에게 향했다.

  “잘 지냈어?”

  나는 그녀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같이 나눠마시려고 주문했어, 오랜만에.”

  어색하면서도 따듯한 공기가 음악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다. 잘 모르는 팝송이 흘러나와서 였을까. 온 신경은 테이블 위에 놓인 J의 두 손을 향해있었다.

  잠시 따스함이 출렁이는 공기 속에서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잔을 내려놓자 그녀도 덩달아 맥주를 마셨다.

  예전 우리 모습이네, 따라 마시기.

  기포가 톡, 하고 쏘였는지 그녀는 크, 하고 정겨운 소리를 내었다. 그 짧은 소리가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곳, 어딘지 알고 있어?”

  J가 물었다.

  “나는 삿포로가 처음이야. 하지만 여긴 왠지 낯이 익네.”

  “나 말이야, 쿄우.”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쿄우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이년 전 겨울부터 말이야. 걱정 마, 춥거나 지루한 시간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이곳은 나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뒤에서 일하고 있는 키프로스 씨는 50년 동안 아내를 기다리고 있지. 그에 비해 이 년은 뭐, 불평할 정도는 아니었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키프로스 씨는 다시 바에 나와서 새로운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쿄우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쿄우가 이렇게 다시 찾아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 그동안 올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J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착각을 했었나봐.”

 하고 나는 말했다.

  “쿄우,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이년 만에 만난 그녀는 계속해서 수수께끼를 건네는 듯이 말했다.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그 담담함 속엔 여유마저 흐르고 있었다. 시간을 가져, 언제든지 쿄우의 대답 기다릴 수 있어, 라고 말하듯이.

  “사실 잘 모르겠어, 미안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해, 라는 말이 가슴에서 종이 울리듯 아픔으로 울려왔다. 종의 떨림이 J에게도 닿았는지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진동을 음미했다.

  펍에서는 본조비의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 노래가 연주되고 있는 내내 우리는 서로가 기다려왔던 말을 누가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는 바보처럼 맥주잔을 만지작, 두 손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짧은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빗소리였다.

  잠시 노래가 끊겼을 때 생긴 고요의 틈을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펑, 하고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으로 키프로스 씨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J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별을 보러 나가자.”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고, 나는 그 뒤를 재빠르게 쫒았다. 키프로스씨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원한 소나기 같았다. 비는 시원하게 내리는데 밤하늘을 최고로 맑았다. 마치 갈라져 있는 평행세계를 동시에 보듯 땅과 하늘은 서로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땅을 적시는 비의 연주도, 하늘을 알록달록 가득 채운 별빛들도 모두 아름다웠다.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그때로.

  “저기 저 빨강별은 사랑, 파랑별은 우정이고 노랑별은 설렘이래.”

  J가 말했다.

  “좋은 것만 있네.”

 하고 나는 말했다. 약간은 비꼬듯이.

  “저기 저 까망별 보이지? 저건 슬픔이랬어, 키프로스 씨가.”

  “살색은 없어? 흥분을 의미한다거나 뭐 그런.”

  내 입에서 자연스레 농담이 흘러 나왔다.

  “그런 건 없어, 바보.”

  J가 처음으로 키득키득 웃는다. 아니, 평소 때처럼 웃었다.

 “쿄우에게는 어떤 별의 비가 내리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신비롭게 들려왔다. 마치 물방울이 언어가 되어 날아와 귓가에서 톡, 하고 터지는 듯.

  순간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에 놀랐는지 두 눈도 번뜩하고 떠져버렸다. 이슬처럼 가벼웠던 몸은 순식간에 물 가득 채운 욕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출렁출렁.

  아직 밤이네. 지금이 몇 시지, 하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 열두시 십육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참 새벽이잖아. 더 자자.

 

 

 

 

 

 

  *

  맑은 겨울밤, 유난히 많은 별들이 수줍게 빛나던 밤.

  별똥별은 다채로운 선을 그리며 아름답게 춤을 춘다. 이윽고 하늘 위 보석들은 조각조각 나뉘어져 누군가에게 다가가리라. 조각들은 때로는 희망이 되고, 사랑이 되며, 꿈이 되고, 아픔을 씻어주는 비누가 되리라. 그렇게 미끄러져 간절한 우리에게로 빛을 비춰준다.

  머리맡에는 수없이 반복하며 읽은 J의 손 편지가 마치 햇살을 받은 듯 다이아몬드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때로는 붉게, 때로는 금빛으로. 어쩌면 꿈이 아닌 어떤 다른 세상으로 잠시 다녀온 건지도 몰라.

  우리는 틀림없이 함께 바라보고 있었어. 장미처럼 아름답고, 너의 입술만큼 눈부신 투명한 겨울비를.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다시 잠이 들었다.

 

 End.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3 3화 2020 / 10 / 14 248 0 19739   
2 2화 2020 / 10 / 14 254 0 26700   
1 1화 2020 / 10 / 14 431 0 2334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