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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코발트 블루
작가 : 현준
작품등록일 : 2020.9.25

수감된 주인공이 옛 사랑을 그리며 추억여행을 떠나는 중편 소설입니다.

 
2화
작성일 : 20-10-14 21:33     조회 : 253     추천 : 0     분량 : 2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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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허브의 향이 코스모스를 스쳐 날아와 인사를 한다. 12구역에는 반가운 선물들이 많아서 나는 마치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해피 그린 크리스마스.

  “이리 와서 토마토 몇 개 따가시오.”

  파브가 미소 지으며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보통 방울토마토와는 다른 종자라오. 블랙 토마토라고들 하지요. 보다시피 빨갛기보다는 진한 올리브색 같지 않소?”

  파브는 허브 잎도 몇 장 떼어주었다. 허브 잎을 따자 좀 전에 코를 맴돌았던 향긋함이 더 진하게 풍겨왔다.

  “허브는 씹어 먹기보다는 차로 우려내어 먹는 게 좋다오. 떱떠름 할 수 있으니 소량만 담그시오. 그리고 농약 같은 건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시구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쉰 소리가 나는 휘파람을 불며 정원을 두리번거리는 파브의 기분은 굉장히 좋아 보였다. 가슴에 붉게 칠해져 있는 수인번호가 무색할 만큼 그의 미소는 마치 소년 같아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나이도 죄명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입으로 소리를 내고 귀로 듣는, 짧지만 풍성한 친밀함이 좋았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결코 길지는 않았다. 동행한 교도관의 배려의 길이는 기껏해야 2,3분 정도랄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뭐.

  그렇게 종종 파브와 나는 그렇다할 주제도 없이 몇 마디를 주고받을 뿐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삶의 비타민이 되어주었다. 비타민 P(Pav).

  “무더워지면 수박씨를 뿌릴 거요”

  “가을에는 감을 말려 곶감을 만들 거요”

  “기후가 매년 변해서 올해는 잘하면 멜론도 수확할 수 있다던데”

  평소 주제가 농사다보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적었다. 그래서 대화를 이어간다기보다는 말을 받아주는 리시버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농사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지만, 파브는 뭐든지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빠른 말투로 말풍선을 채우곤 하였다.

  “다음 주에는 선풍기를 설치한다던데. 시간당 10분씩은 꺼진다오. 작년에는 그 10분 사이가 지옥이었지. 허허”

  “많이 더웠었나 봅니다. 파브씨”

  “말도 마시오. 배식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워낙 뜨거워서 입구를 열어둘지 닫을지 고민이 되어 미칠 뻔 했소. 열면 뜨겁고 닫으면 숨이 막혔으니까. 이도저도 못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10분이 흘러 다시 펜은 돌아가고. 이 짓만 반복했었소. 조만간 시작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군요.”

 하고 리시버는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소. 금주 오후부터 얼음이 지급된다오. 아이스커피를 즐길 수가 있지요. 이제는 매일 그 시간만 기다리게 될 거라오.”

  “흥미롭군요, 아이스커피라니.”

  “그런데 어쩌지요? 30도가 넘은 날에는 굉장히 빨리 녹아버린다오. 아끼면 절대 안 되지요. 잠시 딴짓거리라도 하게 되면 순식간에 얼음은 사라져버린 답니다, 허허”

  그는 항상 대화의 마무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혹시 무엇을 말할지 미리 짜고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4구역에 들어가기 전의 시간은 점점 나의 가장 아끼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마치 물속에 뛰어들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것 같이 긴장을 풀어주고, 고독한 생활은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싸늘한 잿빛에서 뜻밖의 금빛으로.

  날씨가 점점 얼음을 녹일 때가 되자, 장마가 시작되었다.

  완전한 초록 날을 알리듯 소리 한번 시원하게 내린다. 마치 등기를 들고 찾아온 반가운 집배원처럼 이곳저곳 땅의 문을 두드려댄다. 청아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고요한 빗소리가 오후를 지배한다. 묵직한 꽃가루를 뿌리듯 들려오는 사뿐한 단비의 소리. 축축해진 지면에서 분수처럼 뿜어대는 풀의 향기가 찾아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 때의 고요함이 참 좋더라. 모든 생명체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정숙했다. 마치 멀어져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뒤돌아봐주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듯한 그런 고요함이었다.

 

  장마 셋째 날은 비를 맞았다. 오전에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운동장에 나왔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림자가 없던 작은 사하라 4구역에 동그란 얼룩들이 점점 번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땅은 짙은 갈색이 되어버렸다. 코발트블루 상의도 진한 네이비로 점점 물들어 버렸다. 그때 나는 세상의 소리를 잠재우는 아름다운 시간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잠시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웠던 그 소리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하라 위 가장 거대한 생명체는 자연과 함께 하늘에서 뿌리는 신성한 자비를 맞이했다. 잿빛 하늘이 다시 푸름으로 활짝 핀 날이 되면 모두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리라고 상상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연주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듯 빗줄기가 줄어들자 주변의 소리들이 속삭이듯 점점 가까워졌다. 새들의 합창이 청중의 박수가 되어 멋진 비의 현을 축복한다. 나는 박수 대신 미소로 보답했다. 다음에는 아름답고 조금은 더 긴 연주를 희망하면서.

  비에 흠뻑 젖은 모습을 살펴보니 흙이 묻어있던 하얀 신발은 도리어 깨끗하게 씻겨있었다.

  마음이 가벼워진 날. 비는 눈물이 아닌 성수가 되어 내 안의 상처 묻은 흙들도 씻겨주듯 상쾌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물은 한 겨울의 계곡물 같이 차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있을 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름 물놀이를 다녀왔다 이건가.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수건을 널어놓은 뒤, 나는 바닥에 앉아 팥빵을 꺼내어 먹었다. 소보루로 둘러싸인 단팥과 생크림. 적당한 단맛이 포만감을 기분 좋게 채워준다.

  내가 원래 팥을 좋아했었나. 어린 시절 겨울에 사먹던 붕어빵 말고는 팥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팥죽은 좋아했지만 팥보다는 새알이 더 좋았었지. 그때는 정말 새의 알 인줄알고 신나게 먹었었는데. 나는 바닥에 부스스 떨어진 빵가루들을 꼼꼼히 쓸어 모아 새들을 위해 창틀에 뿌려놓았다. 합창하던 새의 노래에 대한 작은 성의랄까. 먹는 모습은 실제로 본 적 없지만, 어느 순간 보면 개미들이 실어 갔는지 바람에 날아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렴 상관없다. 그대들의 집사 노릇은 언제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이곳 수용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집사 노릇을 하고 있겠지. 그들은 비의 하모니를 어떻게 감상했을까. 나름대로 나처럼 자신만의 지구를 구축해서 들여다보고 있을까. 전혀 다른 생존게임이려나.

  가끔은 정말 궁금했다. 그대들도 나와 같을지 말이다.

  장마가 끝난 뒤 해는 더욱 뜨거워졌다. 열기는 온도의 개념을 파괴하려는 듯이 강렬했다.

  파브의 말대로 각 방마다 벽걸이 선풍기가 설치되었다. 총 3단의 바람세기가 조절 가능한 구식 선풍기. 나는 물로 깨끗이 팬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고 시간당 십 분씩 쉬어가며 열기를 식혔다. 엔진소리가 상당히 커서 처음에는 조금 거슬렸지만, 피해갈 수 없는지라 빠르게 수긍했다. 그저 방안의 더위를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소리들도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 더위는 가까이에 있었다.

  선풍기가 설치된 이후, 다른 수용자들의 목소리가 간혹 크게 들려오곤 했다. 십 분 브레이크 때마다 들려오는 탄식. 중간을 못 참고 분출시켜버리는 고함. 그리고 십 분이 지나자 엔진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환호. 짧은 시간 여기저기에서 음계들이 들려왔다. 도미솔 도미솔, 도.

  과학의 바람이 불어오기 전, 물론 차가운 얼음도 지급되기 시작했다. 조각 얼음인줄 알았더니 500ml 페트병 속에 꽁꽁 열러있는 물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흉기를 받는 것 마냥 묵직하고 차가웠다. 살점이 붙어버릴 만큼.

  상당히 단단한 얼음은 한두 시간 정도 지나야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페트병에 공간이 생기면 물을 조금씩 부어서 녹이는 속도를 재촉하고, 이를 반복하면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자, 나는 하루 카페인 적당량인 폴리페놀 200mg를 계산한 45mg짜리 커피스틱 네 개와 물을 부어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파랑 플라스틱 컵에 황금처럼 빛나는 커피를 따르고, 후끈해진 몸속으로 부어버린다. 아, 신이시여. 반응은 즉각 표정으로 나타났다. 커피의 향과 차가운 온도가 지닌 우아함은 숨길 수 없는 표정이 되어 미소로 번졌다. 매일같이 차가운 페트병 속 빙산이 거룩한 무언가가 되어 내 안으로 녹아 흘러내릴 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행복했다. 불완전한 DNA들까지 전부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공작새 날개처럼 하늘은 화려한 보랏빛 노을을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짙은 어둠속으로 날개를 접어버린다. 여름날의 흔한 해질녘. 잠시 후 달이 떠오르면 언제 차가운 액체들이 있었냐는 듯 열대야는 찾아오고, 밤중에도 십분 러시와 씨름하며 쉽지 않은 밤들을 맞이하겠지.

  역사 깊은 콘크리트 건물에서의 여름이야기는 변함없는 나날들로 채워 가리라. 아멘.

 

 

 

 

 

 

  *

  주말이 되면 영화를 보았다. 지루한 주말을 격려하기라도 하듯, 90년대 영화부터 나름의 최신작까지 무작위로 상영되었다. 자막이 없는 해외 영화라든지, 자막이 있는 국내영화가 상영될 때도 있었다. 이건 좀 너무하잖아. 액션이나 서양 로맨스물은 그럭저럭 볼 수 있었는데 아시아영화에 자막이 없는 것은 마치 조개가 빠진 봉골레 파스타와도 같았다. 먹을 수는 있겠지만 무언가 크게 빠져버린 것만 같은, 그런.

  하루는 영화 노트북을 또 보게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레이첼과 가난한 목수 라이언의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리 슬픈 장면일지라도 레이첼의 미소가 아름다워서 자꾸만 꽃밭에 누워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평온함에 취해 몇 번을 보아도 이 영화만큼은 질리지가 않는다.

  나는 영화 속 장면과도 같은 평온함을 실제로 느껴본 적이 있다. 사랑이 막 싹 트이고 어떤 꽃으로 자라날까 설레어하던 시절, 어느 날 J가 노트 두 권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앞으로 우리가 공유하며 적을 교환 노트라며 설명했다.

  “맨 앞장에는 우리 둘만의 약속을 다섯 가지 적는 거야. 각자 서로를 위해 지켜야 할 약속들로 말이야. 십계명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J가 십계명 따위 지키며 살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파랑색 노트를 건네받았다. 귀여운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노트였다.

  “쉿, 아무튼 내게 꼭 지키고 싶은 걸로 잘 생각해서 다음에 만날 때까지 적어 와줘. 나도 적어올 테니까.”

  “알겠어. 만약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건데?”

  “참나, 지킬 생각부터 해야지. 서로에게 다섯 가지라도 지키지 못한다는 건 조금 너무하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말광량이처럼 조금 웃어 보였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J와 사귄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라서 이 모든 게 설레었다. 뭘 해도 좋고 아쉬울 시기.

 “내가 주문하고 올게, 쿄우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J가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는 눈이오나 비가 오나, 입김이 자욱한 추운 날에도 커피에는 늘 얼음을 넣어 마셨다. 어른들 눈에는 아직 원두의 깊은 향긋함을 모르는 20대 커플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떨까. 심지어 이날은 얼음 수십 개를 때려 넣어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그런 더운 날이었다.

  “요새 갈매기 눈썹이 유행이라던데, 나도 한번 해볼까. 아무래도 어울릴 것 같은데.”

  잠시 후, 그녀가 진동벨과 영수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눈썹인데?”

  “왜 있잖아. 눈썹을 갈매기 날개 모양 비슷하게 양쪽 끝을 높게 잡고 M자로 만들어 다듬는 거야. 약간은 화가 난 듯한 메간 폭스의 눈썹처럼.”

  J가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눈썹 끝을 위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자,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상할까?”

  그녀가 가볍게 노려보며 말했다.

  “글쎄, 방금 그 모습은 너무 귀여워서 안 되겠는데. 혹시... 눈썹을 존중해달라고 교환 노트를 작성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흥, 아니거든. 이따위 눈썹을 소중한 한 칸으로 채우기는 아깝지.”

  “이따위 눈썹이라니. 얼마나 귀여운데. 만약 갈매기 눈썹을 한다면 나는 매일 불안할 것 같은데. 그 미모에 다른 갈매기들이 달려들까 봐.”

  그녀는 웃었다.

 

  실제로 J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 얼굴은 요즘 말로 말하자면 주먹만 하고, 키도 꽤 큰 편이고, 약간은 터프한 성격도 있지만 그 내면에는 앙증맞은 무언가가 잠식되어 있었다. 아마 나는 그 무언가에 반했던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츤데레라고나 할까.

  사랑의 깊이를 잘 파악하던 나는, 그녀의 외모보단 오히려 항상 작은 것들까지 세심하게 챙길 줄 아는 그녀의 성격에 더 끌렸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 고백을 했다는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마치 샤프에는 샤프심이 필요하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만남, 그리고 헤어짐까지도.

  노랗고 작은 조명들이 가득한 카페였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듯이.진한 쿠키향이 잠자리처럼 맴 돌았다. 벽에는 거대한 거울들이 많아서 해가 지면 엷게 빛나는 노랑 조명들이 더욱 아름답게 반사될 것 같았다.

  U2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 진동벨이 울렸다. 이번엔 내가 커피를 가져올 차례.

  모스코 뮬 잔에 담긴 얼음들이 걸을 때마다 달그닥 달그닥, 보노 목소리에 맞춰 리듬을 탄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었던 카페가 마치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나는 노트를 굉장히 진지하게 적고 있던 J를 보며 생각했다. 그 장면이 너무 예뻐서 나는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거기 서서 뭐해?”

  J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영화 감상.”

  “빨리와, 커피마시고 싶어”

 하고 그녀가 웃는다.

  “무슨 영화 봤는데?”

  자리에 앉아 커피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 게 있어, 야해서 말 못해.”

  “그래? 평점 몇 점짜리 영환데?”

  “별점 다섯 개 중 무려 다섯 개.”

  나는 손가락을 쫙 피며 말했다

  “주인공 몸매가 보통이 아닌가봐.”

  나는, 괜스레 침을 꼴깍 삼키고 싶어서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그러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너무나도 맑고 투명해서.

  “그나저나 다섯 가지 전부 적어오는 거 아니었어?”

  J는 노래에 리듬을 맞춰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노트를 적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가지는 같이 있을 때 적고 싶어서.”

  그녀가 말했다. 속삭이듯이.

  J의 가녀린 손목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마치 햇살 듬뿍 담은 파도의 물결처럼.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으로 자꾸 시선이 쏠렸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우유처럼 맑고 하얀 손. 잡고 있을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하얗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약간은 허전해 보이는 그녀의 손가락과 손목을 보니 가슴이 조금 먹먹해 지는 것 같았다. 그 허전함이 왠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달까.

  언젠가는 그녀의 손가락에 예쁜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내가 꼭 직접 끼워 줄 거라고, 나는 바이올린 활처럼 아름답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을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그 때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약속을 함께 써내려가고 있었으리라.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너의 마음속에서.

  자, 다 썼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파란 노트를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함께 올려놓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던지, 백년 묵은 산삼을 꺼내어 시식하려는 심마니 마냥 가슴이 떨려온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지금 읽을 거야?”

 하고 나는 물었다.

  “아무래도 고민되는 걸. 왠지 집에 가서 혼자 읽고 싶지 않아서. 마침 카페에 사람도 없고.”

  보노의 목소리가 어느새 리암 갤러거로 바뀌어 매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각자 자신이 적은 약속들을 읊으며 맹세하기로 하자.”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왔던 것 같은데 뭐.”

  “어느 정도 그렇긴 하지만. 난 여자니까 쿄우가 먼저 읽어줘.”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앙증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에, 그렇게 어디 있어. 가위 바위 보로 정하자. 제의한건 J였잖아.”

  동공이 커진 내 모습에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기회를 주는 거야. 쿄우의 용맹함에 내가 반해버릴 기회를.”

  어차피 먼저 읽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차가운 커피를 마셔야할 시간. 옷 뭇매를 고쳐야 할 시간. 갑자기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듯 쿵 하는 동시에 bpm이 오른 것 같은 심장을 달래줄 시간.

  “좋아. 용맹함이 부족하더라도 대신 실망하지는 않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걱정 마.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거라구.”

  J는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와 턱받침을 하고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시작해, 라고. 튤립 같은 미소가 말한다.

  머쓱해하던 나는 일단 노트를 펼쳤다. 이거 매우 부끄럽잖아.

  한두 장 넘기자마자 내가 적은 약속들이 비뚤비뚤한 글씨체로 나를 놀리고 있다. 나름대로 어젯밤 소중한 고뇌의 흔적들이리라.

  “그냥 읽으면 되는 거지?”

  나는 약간의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찰나를 즐거워하는 J.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여러번 가다듬었고, J가 커피를 마시자 나도 그녀를 따라 마신다. 이번엔 얼음들이 부딪히며 불협화음을 내었다. 리암의 목소리는 노래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첫 소절을 부를 타이밍이었다.

  에헴.

  “첫 번째, 나는 평생 J를 사랑한다.”

  푸흡, 하는 소리와 함께 J는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웃음을 참는다. 이따가 두고 보자.

  “두 번째, 자주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하고 나는 말했다. 노트로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면서

  “잠깐, 좀 틀어달라고 말하고 올게.”

  그녀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나 안 해”

  알겠어, 알겠어, 안 놀릴게, 하고 그녀는 말하지만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약이 올라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중에는 이때의 우리가 굉장히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다음 문장을 읽고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세 번째, 하루의 시작과 끝은 달콤하게 속삭이리라.

  “잠시만, 쿄우. 조금만 천천히 읽어줘. 나의 행복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본인의 차례가 점점 다가오자 J의 귀는 조금씩 하얗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열 가지로 늘릴걸 그랬어.

  “네 번째, 상처 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어서 다섯 번째 약속을 말할 때 우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마치 노른자 대신 달콤함이 톡하고 터져서 마음속으로 미끄러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옆에서 걸어줄 것.

  “행복해.”

  J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틀림없이 들릴 정도로.

  깜짝 놀라 붉어진 볼과 귀는 그녀의 한마디에 더욱 뜨거워졌다.

  콜드플레이의 가 들려온다. 앵두같이 작은 금빛조명은 여전히 반짝인다. 반짝반짝. 작은 별이 되어. 붉고 아담한 J의 입술을 비춘다. 모든 게 참 조화로웠다. 신기하게도.

  나는 노트를 덮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컵을 여러 번 쥐어서 그런지 J의 손은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아서 기뻤다. 내 손은 한없이 따듯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잠시 가만히 손을 잡고 음악을 감상했다. 지금의 흐름을 감상했다. 담백했던 소년의 고백은 천 가지의 약속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리라.

  “아무래도 내 노트는 집에 가서 읽어주었으면 좋겠어.”

  그녀가 먼저 흐름에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지. 나도 들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얼른 읽어줘, 빨리.”

  나는 재빠르게 말했지만, 사실은 나중에 따로 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온도에도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바보. 밥이나 먹으러가자. 대신, 내가 살게. 쿄우의 용기 값으로.”

  그녀는 내 노트를 집어 들고 화장실, 이라고 말하며 먼저 일어섰다. 나는 솜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J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 손이 더 따듯했을지도 몰라. 지금 내 마음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

  나는 하프처럼 빛나는 금빛 속에 나의 소중한 감정을 기록해 두었다. 영원히 바래지지 않길 바라며.

 

  아쉽게도, 당연하게도, 유감스럽게도, 혹은 젊은 연인들이 대부분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만든 십계명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지키며 살겠어, 이천년이 훨씬 지난 이 유혹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 속의 이야기는 슬프게도 늘 지나가버린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신조차도 그 시간 속에 머무를 수 없겠지. 오로지 기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아름다움이 진한 향기가 되어 남아있다면, 그것은 곧 추억이 된다.

  기억은 쉽게 향기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평생 그 향기를 머금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토록.

  가끔 고독에 휩싸여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초라한 기분이 들 때, 나는 노트 위에 쓰인 약속들을 추억에서 꺼내어 읽었다. 그녀가 남겼던 다섯 마디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박또박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글에 담긴 의미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날의 향기들은 구불구불하고 못생긴 그녀의 글씨체에 고스란히 봉인되어 있으리라.

  비록 추억이라지만, 그 속에 봉인이 되어버린 사랑이 그리웠다. 아무리 시간이 마치 뒤돌아보지 않는 무심한 마라토너처럼 이기적이게 흘러갔을 지라도, 신은 나의 소중한 공간을 지켜주었다. 크리스탈처럼 빛나던 내 안의 십계명을. 낡은 벽화처럼 바래진 우리들의 약속을.

  1. 서로에게 솔직해지자.

  2. 내가 먼저 걱정시키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3. 언제나 쿄우를 존중할게

  4. 쿄우가 변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대로일거야.

  5. 항상 옆에서 힘이 되어줄게.

  *

  아침 여섯시 반. 별들이 지구반대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시간. 벽 안쪽으로 내장되어있는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제이플라가 부르는 ‘Billie Jean.’

  그녀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지만 썩 반갑지만은 않다. 월요일의 시작일뿐더러 이불을 정리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으니까. 잠옷을 벗고 수인복으로 갈아입으며 새로운 한 주를 맞이했다. 아직 잠긴 목은 물 한 컵도 마시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Billie Jean’을 따라 흥얼거린다.

 

  People Always Told Me

  Be Careful Of What You Do

  And Don't Go Around Breaking Young Girls' Hearts

  And Mother Always Told Me Be Careful Of Who You Love

  And Be Careful Of What You Do

  'Cause The Lie Becomes The Truth

 

  곧 후렴구가 다가와 제대로 따라 부르려는 찰나, 음악은 꺼져버린다. 매번 이런 식이다. 이 정도면 일어들 낫겠지, 하고 끊어버리는 듯하다. 이곳에는 알람시계가 없어서 잠귀가 어두운 누군가에게는 모닝콜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분명히 대다수는 밤잠을 설치느라 예민해져 있었을 것이리라. 해가 없어도 뜨거운 날이었으니까. 나는 차곡차곡 이불을 정리하고, 노오란 물을 빼고, 물 한 컵을 마시고, 바닥에 털썩 앉는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월요일 다음이 항상 화요일인 것처럼.

  아침 특유의 몽롱한 기분은 없었다. 잠에서 덜 깨어나 눈을 끔뻑이지도 않고, 몸이 무거워 늘어지는 감각도 없었다. 해소될 숙취도, 확인할 메시지도, 체크할 일정도 없다.

  대화 상대도 거의 없으니 마치 인적이 드물어 망해가는 동물원과 다름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러한 아침에 대한 큰 불만은 없지만, 가끔은 달콤한 꿈을 깨트려버리는 제이플라가 야속했다. 꿈속은 나의 유일한 일탈이었는데, 꿈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악몽이라도 꾸면 모를까.

  아침 식사를 할 때 즈음이면 생방송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의 흐름을 느끼면서 그들과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하루를 시작했다. 격리되어 있고, 조금 억압되고, 방문에 철봉들이 몇 개 놓여있을 뿐. 아마 아침만큼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싶었다.

 

 - 오늘 낮 기온 34도로 무더위가 예상됩니다... 리오넬 메시의 멋진 득점 골로 바르셀로나가 홈팬들에게 멋진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동쪽 해수욕장에는 정체모를 거품들이 떠밀려와 피서객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서퍼들의 눈에는 좌절감이 담겨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인터뷰가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면서 현재 백악관은 모든 질문을 회피하며 묵묵부답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 자신이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사회와 공감하지 못해서, 섞이지 못해서. 작은 고문. 단절과 체념은 착각이라고, 일깨워주는 듯한 고문이자 교훈이리라.

  식사는 채소 죽. 세상이야기로 반찬삼아 먹다보니 맛은 점점 미궁 속으로 사라져만 갔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라디오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아침은 차라리 고요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계적이고 잔인한 세상의 목소리가 아닐 텐데.

  진한 햇빛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보라카이 해변처럼 하늘이 파래도, 아침이 싫었던 건 나만의 비밀. 매일 같이 내가 만든 비밀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내 자신이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Billie Jean’은 케이지 위에서 결투가 아닌 질투의 시작을 알리는 종. 이겨도 아프고 져도 쓰라린 나와의 싸움이자 혈투. 링 안에 속박되지만 말자고, 나는 다짐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 거릴 것 같아서.

  나는 아침의 경계를 기다렸다. 어서 더욱 밝아지기를, 어서 조금만 더 해가 떠올라야 링 밖으로 벗어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여덟시. 마침내 라디오가 꺼지고 고요함이 잦아든다. 이제서야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시작되곤 했다. 외로운 박서의 몸부림.

 

  점심이 조금 지나고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 땀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아서 빨래에 세재를 풀어놓고 샤워를 했다. 짧은 물놀이를 마치면 세제가 녹아 어느새 빨래에 묻은 떼를 벗겨 물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행궜다가 짜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면 빨래 끝. 샤워만큼이나 신속하다.

  샤워나 빨래, 그리고 청소만큼은 매일 하게 되었다. 작은 노동일이라도 자꾸 만들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생성되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사상가로서, 백수로서, 수용자로서. 나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권리만큼은 주어졌지만, 안타깝게도 허용되는 범위는 매우 좁은 영역이었다. 그러다보니 상상의 영역이 커져버려서 많은 시간들을 닥치는 대로 꿀꺽 삼키기 마련이었다.

  이거 완전 로댕 같잖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팔을 괴고 고뇌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베르사유 궁을 바라만 보는 자. 나도 평생 생각만 하며 굳어있을 것만 같아서 위대하지만 초라한 그 프랑스인을 떠올렸다. 누군가 직업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해야겠지, 적어도 당분간은.

  요리사라고 대답했었던 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좁은 트럭이라는 세계에서 쌓아온 흔적. 볶고, 삶고, 빚고, 튀기고.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이 바빴던 때.

  움직이는 자영업이라 시간에 속박되어있지도 않았다. 준비한 재료들을 다 써버리면 그만큼 시간도 수입도 많아졌다. 메뉴 개발에 대한 시간도 충분했다. 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기존에 충실하긴 했지만.

  비가 오는 날엔 손님이 적어 인근 지역으로 배달을 병행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J는 종종 일손을 도와주러 왔었다. 그런 날은 오히려 비가 더욱 주르륵 쏟아져 배달마저 불가능하기를 바라는 때도 있었지. 빗소리와 음악소리, 그리고 J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던 그 순간. 황홀함. 마치 천사가 빌려준 구름위에 누워 오로지 평온만이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그 순간이 그리웠다.

  그 날이었던 것 같다. J와 첫 키스를 했던. 거짓말처럼 바라는 대로 비가 폭포수처럼 변해 쏟아져 내렸고 눈앞이 빗물로 꽉 차서 어두컴컴해지던 오후 일곱 시. 일찌감치 켜진 조명들이 노을 대신 몽환적인 금빛을 내뿜던 시간. 용기를 내어 입을 맞추었다.

  기억이 난다. 아니 정확히 기억한다. Rae의 ‘Just like a star’를 따라 부르는 J의 목소리. J의 달콤한 향기와 여름 냄새, 지긋지긋했던 만두냄새까지, 새록새록 하다. 감추려고 애쓰던 내 심장박동 소리마저도, 전부.

  달콤함이 주체 없이 서로를 오가던 때, 갑자기 음악이 꺼지고 핸드폰이 울리면서 긴장을 살짝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공원 입구에 위치한 부동산에서 배달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마감중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J가 신속하게 포장용지를 꺼내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영수증을 끊었다.

  “다녀와, 돌아와도 난 여기 있으니까.”

  내가 아쉬워한다는 것을 아는 듯 J는 그렇게 말했다.

  우산을 들고 포장된 만두를 품에 안고 트럭을 잽싸게 나서자 조심히 다녀와, 하고 J가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비를 뚫고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소리는 순식간에 우산을 강타하는 빗물에 씻겨 사라졌지만 내 세계에 서있는 그녀가 보인다. 빗물의 진공관 속 그녀는 물에 비친 달이 되어 출렁출렁 리듬을 타며 빛을 내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왼팔에 물줄기가 흐르고, 무릎 아래로는 몽땅 젖을 만큼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좋았던 요리사 시절이 미친 듯이 그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미련이었을까.

  그 때, 음악에 몸을 맡겨 고개를 까닥거리던 너는, 무슨 음악을 듣고 있었건 걸까?

  오늘은 그 모습이 느닷없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

  새벽 두시 반,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동시에 오른쪽 벽을 향해 누워진 몸을 왼쪽으로 돌린다. 한쪽 어깨가 뻐근했던 탓일까. 침대는커녕 매트리스도 없지만 등 베길 정도의 불편함은 없던데. 서서히 적응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잠을 설쳐대고는 한다.

  꿈을 꾼 것 같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는 동안 깨끗하게 잊은 듯 했다. 불과 10초전 일 같은데 이럴 때 보면 인간은 참 신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과거의 미련 따위는 수천 시간이 지나도 잘도 기억하면서 말이야. 혹시 꿈을 꿀꺽 삼키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걸까. 뭐 맛있을게 있다고.

  이번에는 꼭 기억해봐야지, 하고 나는 엷게 남아있던 꿈의 여운 속으로 내 영혼을 살며시 불어넣는다. 소곤소곤, 숨소리와 함께.

 

  나는 차가운 흑맥주 두 캔을 꺼내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아마도 ‘아쿠아맨’인 것 같다. 물속에서 주인공이 숨을 쉬고 말을 하는 영화였다.

  처음에는 똑바로 앉아 상영하던 몸은 맥주 캔의 무게가 줄어들수록 느슨해지더니, 이내 스르륵, 누군가의 허벅지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들어가서 자자. 다리 베고 자면 고개 아파.”

  같이 영화보자더니 또 먼저 잠드네, 하고 여자는 투덜거린다. 그녀는 J였다.

  어느새 눈을 떠보니 언제 침실에 와서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자고 있던 J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이불 속으로 사뿐히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살 냄새를 기억한다. 먼저 잠든 내게 삐쳐있었는지 쭈욱 내밀고 있던 입술을 기억한다. 살짝 입을 맞추자 온갖 인상을 쓰며 눈을 뜨던 그녀. 나를 발견하고는 내 품으로 쏘옥 들어오던 그 때를 기억한다.

  그렇다, 이 모든 건 꿈이 아닌 추억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이 색 바랜 벽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가로 막고 있었다. 차단하고 있었다. 무지갯빛 막대사탕을 부숴버리고 있었다.

 

  나는 발끝에 놓인 얇은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 위로 덮어버렸다. 떨려오는 눈꺼풀을 보호해줄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현실을 가로 막아줄 보호막도 필요했다. 해저탐사를 들어가기 전에 꼭 입어야 할 잠수복처럼, 물이 조금 새어 들어올지라도, 불편함을 주는 무게가 어깨를 꽉 짓눌러 피로도가 쌓일지라도 무엇이든 내 몸을 감싸주기를 바랐다.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걸까. 영원할 것만 같던 두려움을 잊기 위해 나는 눈을 감는다. 그렇게 한참동안 영혼을 구속시켜 버린다. 물속에 잠긴 미라가 되어.

 

  장난감을 사달라며 떼를 쓰고 조르는 아이. 부모가 외면해도 계속해서 매달리는 아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자, 부모의 지갑이 열린다.

  아이가 왼손으로 솜사탕을 쥐고 있다. 몇 분 뒤면 예쁜 설탕 덩어리는 내팽개쳐질 것이리라. 곧 있으면 경찰차로 변신하는 멋진 로봇이 손에 쥐어질 테니까. 무려 가슴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로봇이었다.

  앞으로 이 로봇과 함께 살아갈 날을 생각하니 행복만이 가득할 것만 같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구급 로봇이 아이를 맞이한다. 일 년 동안 아이와 함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던 작은 로봇 친구. 아이는 새로 온 경찰 로봇을 구급 로봇에게 보여주고 자랑한다. 두 로봇은 놀이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뽐내며 누가 더 아이와 잘 어울리는지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조금 더 세련되고 가슴에서 소리가 나는 경찰 로봇의 완승이다. 그저 사람을 태우기만 할 수 있었던 구급 로봇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얼마 후, 구급 로봇은 자연스럽게 박스 안으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어둠 속에 갇혀 아이가 자신을 꺼내주기를 기다려보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구조를 요청해 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돌이 되어버린 눈물.

  그렇게 혼자가 되어버린다. 박스는 밤은 물론이며 낮에도 어둠으로 덮여있었다. 마치 피라미드 속에서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는 파라오의 노예처럼. 점점 그 시간들이 익숙해진다. 무감각해져만 가는 시간속이 언제부턴가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드디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웅성웅성 뭉개져 전해오는 목소리들과 주위에 놓인 물건들을 분주하게 나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박스 뚜껑이 열리자 마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듯 강렬한 빛이 박스 안을 비추고 익숙한 감촉을 지닌 손이 구급 로봇의 몸을 감싼다.

  아이가 돌아왔다. 구급 로봇은 조금은 커져버린 손의 온기를 느끼며 확신한다. 틀림없는 그 아이의 손이야. 내 몸을 감싸던 그의 손길을 잊을 리가 없지. 굳어있던 눈물이 부숴 지는 것만 같았다.

  아이의 손은 이곳저곳을 돌려보고 가슴의 중간부분을 여러 차례 누르기를 반복한다. 왜 이러는 거지. 설마... 사이렌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아참, 구급차가 아니었지.”

  내 몸은 순식간에 다시 박스 안으로 던져진다. 뚜껑이 닫히고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긴 어둠이.

  사람을 구하러 다니던 구급 로봇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다 타버리고 남아버린 구겨진 담배 필터처럼.

  철컹.

 

 

 

 

 

 

 

 

 

 

 

 

 

 

 

 

  *

  무더위 속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자, 어쩌면 태양을 향한 그대들의 반항의 소리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매년 여름에 깨어나는 매미에게도 과연 봄날이 존재할까.

  날개달린 곤충들마저 비틀거리는 듯한 기나긴 더위의 연속. 어쩐지 수영장이 생각나는 날이군,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선풍기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왠지 살찐 오리들처럼 둥둥 띄어져있는 튜브들이 지배한 야외보다는 인체에 해로운 락스의 향기가 넘치는 실내가 당기는 걸. 요새는 실내마저도 살찐 오리들이 점령하고 있다곤 하지만.

  매미처럼 선풍기 앞에 얼굴을 밀착하고 상상의 피서를 즐길 때, 배식구에서 피터 씨가 얼굴을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2724님, 안녕하십니까.”

  피터 씨와는 딱 한번 접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패션디자인과를 전공하고 디자이너로서 꿈을 키우다가 재능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결국은 전혀 길이 다른 교도관이 되었다. 오히려 장시간 복역 중인 초고수들에게 바느질만큼은 배울 점이 더 많았다고 한다. 교도관도 썩 흥미로운 직업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특히 매일같이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피터 씨를 보노라면.

  “여름철 벌레가 많아 소독을 좀 할까하는데,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예의가 바른 디자이너 피트.

  “물론이죠. 그런데 제 방에는 벌레가 없는걸요.”

  선풍기 앞에서 말을 하니 바람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어어어없느느는거어어얼요오.

  “그렇다면 예방차원으로 간단히 하수구 쪽에만 뿌리겠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수구에서 가끔 올라오는 것들은 결코 청결하지 않으니까요.”

  피터는 화장실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부탁해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등에는 스쿠버다이빙용 산소통 같은 쇳덩어리가 아기처럼 업혀있었고, 산소통에는 크게 ‘방역’이라는 글씨가 삐뚤삐뚤하게 쓰여 있었다. 하양 페인트로 급하게 칠한 듯이.

  피터는 단숨에 화장실로 들어가 분무기를 하수구 입구에 뿌렸다.

  칙, 칙, 두 번. 끝.

  “과연 소독의 효과가 있을까요?”

 하고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딱히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락스향 같은 호감적 냄새와 가깝다랄까.

  “글쎄요... 안 뿌린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에, 안 뿌린 것만도 못할 것 같은데요. 오히려 독특한 냄새에 이끌려 전부 기어 나올 것 같아요. 조의 아파트처럼 말이죠.”

  그러면 곤란한데, 하며 피터 씨는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여름이 되면 늘 하는 일입니다. 방역도 위생의 일부니까요.”

  나는 녹이 선 산소통의 상태만 봐도 얼마나 전통적으로 오래 방역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요새도 뜨개질 하고 있어요? 날도 더운데.”

  나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 대화를 이어가려고 아무 질문이나 던져버렸다. 사실 소독약을 하수구에 뿌리든 머리 위에 뿌리든 아무 상관없었다. 지루한 일상이 연속인 이곳에서 대화만 이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럼요! 가을용 머플러를 뜨고 있어요. 겨울용보다 얇은 재료를 써야 해서 더 힘들더군요. 그래도 시간은 아주 잘 가는 편입니다.”

  “설마 피터 씨가 직접 하고 다닐 머플러는 아니죠?”

  “다행히도 아닙니다. 어머니께 선물하려고 뜨는 거랍니다.”

  애인은 없나보군, 하긴 외진 곳에서 데이트를 즐길 수도 없을 테니까.

  “제게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 머플러.”

  “물론이죠. 어머니는 무조건 예쁘다고 하실 것 같아서 객관적인 생각도 필요하던 참이에요.”

  잠시만요, 하고 피터 씨는 문을 나서더니, 잠시 후 산소통을 그대로 맨 채로 머플러를 가지고 들어왔다.

  감색실과 검정색 실이 체크무늬 패턴으로 짜여진 디자인이었다. 결코 내 취향은 아닌 패턴이었지만 꽤나 흥분돼 보이는 피터 씨를 보아하니, 칭찬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지 좀 더 자주 찾아와줄 것만 같았으니까.

 

  굉장히 젊어지실 것 같은데요? (거짓말 후보1)

  감색실이 너무 예쁘네요. 안목이 대단한걸요. (거짓말 후보2)

  세상에, 이걸 다 직접 만들었다고요? 믿기지가 않은 걸요. (거짓말 후보3)

  그리고,

  색상이 너무 촌스럽잖아요. (진실1)

  무엇을 전공하신 거죠... 소독? (진실2)

  다음부터는 선물은 꼭 봉투로 드리세요. (진실3)

 

  머플러는 결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거짓말 후보들을 적절히 섞어 피터 씨에게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지루했던 시간들이 보상받는 기분입니다.”

  때마침 선풍기가 꺼지면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피터씨도 다음 방역을 위해 방을 나서 주었다.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미소 짓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번졌다.

  철문이 다시 굳게 닫히고 대화로 붐비던 방 안이 숙연해지자,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잠시 고요하게 느껴졌던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다시 그대들의 소리가 공간을 메우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나는 문득 청량한 파도소리를 떠올렸다. 마음 한 구석이 차분해져서 였을까. 아무렇지도 않았던 대화가 남기고 간 여운은 마치 소라껍데기 속에서 바다를 들려주는 듯한 기분을 맴돌게 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칠 때 즈음, 노을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어느 천사의 작품이었을지 구름은 다양한 모양들로 펼쳐져 앙증맞은 낙서를 이룬다. 나는 흘러가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점점 노을을 과거로 떠나보냈다.

  조금은 가벼웠다, 마음이. 깔끔하게 비어낸 맥주잔처럼.

  나는 문득 평온함이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노을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시간이 비록 아주 잠깐일지라도. 그 찰나가 따듯한 용기를 생산하리라.

  달이 떠오를 시간이 되면 마치 썰물과 민물이 하이파이브를 하듯 평온함은 밀려가고 그리움이 밀려온다. 어둠을 통해 들려오는 침묵의 메아리. 그 미묘한 진동과 떨림을 느끼며 하루를 마감한다.

  낮에 울던 벌레들도 어둠이 찾아들자 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두려운 걸까. 조금은 쉬어도 괜찮을 텐데. 혹시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어둠이 전해주는 외로움만큼은 모두에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대들의 울음소리가 왠지 더욱 애잔하게 들려왔다.

 

  슬픔 행진곡이 울리는 어느 깊은 밤, 창문에 나방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아마도 수용동 옥상 위 조명 주변을 맴도는 무리 중 한 녀석일 것이다. 자리싸움에 밀려났을까. 무슨 일인지 홀로 날아와 시무룩하게 방충망에 앉아서 배를 보인다. 엄지만한 크기에 진한 회색빛이 맴도는 papillion. 혹시 들어오고 싶었던 걸까.

  이봐, 그런 거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밖이 훨씬 더 좋다고.

  달보다 더 밝게 빛나는 여러 조명들의 유혹에도 나방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녀석도 나를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교도소를 밝히는 조명 주위에는 나방뿐만 아니라 벌레 수백 마리들이 모여 있었다. 얼핏 보면 무도회 같기도, 또는 신흥종교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저렇게 그들은 빛에 열광하는 걸까. 여름밤 모래사장에 앉아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 같은 심리일까. 나는 빛에게 구애하는 스파르타쿠스들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다소 불완전한 날갯짓을 하고 있는 나방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마치 맹수를 피해 정신없이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정신없이 움직였다. 만약 나방이 아닌 나비였다면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아름다운 색에 속아서, 그 우아함에 속아서 그들은 춤을 추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했겠지.

  나비의 화려함을 떠올리자 왠지 눈앞에 앉아있는 나방이 더욱 외롭게 느껴졌다. 가지런히 늘어진 날개가 마치 지친 일상을 보내고 퇴근하는 사람의 짓눌린 어깨처럼, 초라해보였다.

  그래, 저쪽으로 가봤자 뜨겁기만 하겠지. 오늘은 여기에 있으렴. 땡볕아래 달궈진 모래 속으로 네 몸을 파묻으려 할 필요는 없어. 가혹할 뿐이지. 괜찮다면 내가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어, papillion.

  그날 밤, 우리는 그렇게 공감했다. 각자 등 뒤에 놓인 현실을 마치 반사된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듯이. 네가 바라보는 나 또한 항상 엉성한 스텝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백지화가 되어버린 ‘나’라는 그림속의 물감이 되어주려는 듯이 나방이 뿌린 신비한 가루들은 내 마음속에 녹아들면서 그렇게 위로라는 단어로 점점 변해갔다. 오, papillon. 그대도 나와함께 오늘밤을 기억해주기를.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 떠난 걸까. 조명 주위에서 머물던 녀석들도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새들이 깨어나기 전에 미리 몸을 숨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아직 남아있는 새벽공기를 가슴이 커지도록 들이마신 뒤 다시 내뱉었다. 마치 미세하게 남아있던 어둠을 빨아들여 없애듯이 끝 맛에 상쾌함이 맴돌아 후련했다.

  그 상쾌함이 좋아서 나는 한 번 더 깊게 심호흡하였다. 지금 이 느낌이 점점 작은 모래알이 되어 날아가 버릴지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끝없이 반복되겠지. 영원히 사라질 것은 아닐 테니까.

  나는 조금씩 더 밝게 다가오는 아침을 바라보며 어딘가를 향해 날고 있을 나방을 떠올렸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자유로웠다.

  다시 우리가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때는 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딩동-. 벨이 울린다. 문을 열자 가을이 문 앞에 서있었다.

  잘 부탁해.

 

 

 

 

 

 

 

 

 

 

 

 

 

 

 

 *

  “살 빠졌어?”

  턱수염을 촌스럽게 기른 찰리가 물었다.

  “좀 더 신선한 질문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글쎄, 다음번에 꼭 생각해서 올게.”

  찰리가 유리 건너편에서 중절모를 벗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찰리가 찾아왔다. 더워지기 시작할 즈음 왔다가, 다시 더위가 뒷걸음치는 좋은 타이밍 끝에.

  “잘 지냈어?”

 하고 나는 식상하게 물었다.

  “이번 태풍 때문에 공장 지붕이 날아간 것을 제외하면 꽤 살만했었지.”

  “이런, 꽤 바빴겠군.”

  “밤에 날아갔길 다행이지. 낮이었으면 인명피해가 심했을 거야. 식당으로 날아가 꽂혀버렸거든.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날아가 꽂혀 버리듯이.”

  “그래서 얼굴이 핼쑥했던 거구나. 살은 찰리가 빠진듯한데.”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며칠 통 잠잘 시간이 없었어. 밤낮으로 아버지 차를 몰았거든. 마침 기사님은 해외 휴가 중이고.”

  “아들노릇 잘 했구만 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대머리가 된 공장은 찰리가 물려받을 거잖아.”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 위로 형제가 둘이나 있자나, 쿄우.”

  그래서 남 이야기처럼 말하는구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나를 점점 저 아래 직원 대하듯 하고 있어. 정말이야. 지치지만 별 수 없잖아.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찰리는 퇴직 군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전쟁영화나 총기류에 관심이 많아 특출난 용맹성을 띄우더니 이른 나이에 직업군인이 되었지만, 단체 생활에 너무 일찌감치 무료함을 느껴 작년 초에 제대했다.

  용맹한 군인출신답게 어떤 계획도 없이 계급장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집안에서 뜯겨져나간 지붕 같은 존재로 살고 있었다.

  “사귀는 사람은 없어?”

  “생기면 꼭 데이트코스로 이곳을 추진해보지.”

  “과연 그녀가 좋아할까.”

  “이색적으로 생각해줄 사람을 만나면 되지.”

  찰리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결혼식은 꼭 참석하고 싶은데.”

  “쿄우를 위해 식은 10년 후에 올려도 이해해줄 그런 여자를 만날게.”

  그는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찰리는 변함없는 모습이 참 좋다.”

 하고 나는 말했다.

  “언젠가 이색적인 그녀를 만나게 되면 나의 변화된 모습을 기대 해봐도 좋아. 지금 상태로는 영원히 혼자일 것 같다고.”

  “그 말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는걸.”

  “왜 이야기가 다시 아버지로 튀는 거지? 마치 로드킬 당하는 기분이군.”

  오랜만에 나누는 시답잖은 대화가 즐거웠다. 늘 지녔던 익숙함이 자연스럽게 잠식하여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잊게 만드는 것 같았고, 별 것 아닌 대화에도 마치 잊고 지낸 비상금을 발견한 듯이 눈이 반짝였다.

  “이 순간 맥주가 없는 게 아쉽군. 혹은 청주라던가. 기가 막혔을 것 같은데.”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희망고문은 좀 심했는데, 찰리.”

  나는 정색하는 척하며 말했다.

  “오, 이런 내 실수야. 미안하군.”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찰리가 재빠르게 말했다.

  “장난이야, 찰리.”

  내가 싱긋 웃자, 어색함을 살짝 담긴 미소를 지으며 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웃는 모습 보니 찾아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쿄우.”

  웃는 모습이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찰리를 쳐다보았다.

  내가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내 모습은 마치 지우개 가루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행복하게 웃고 있던 장면들은 마치 조작된 상상 같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타인의 모습은 생생했는데, 내 모습만 지워져 희미한 자국만 남아있던 것이리라. 비갠 후 사라져가는 무지개처럼.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어.”

  다소 진지한 듯 찰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J구나.”

  나는 그가 J의 소식을 전할 거라는 걸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잘 지내고 있대?”

  하고 나는 곧바로 물었다.

  “딱히 삐거덕거리는 조짐은 없어보였어.”

  “대신 썩은 이가 계속 신경 쓰였겠지.”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접견 시간은 3분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빠르게 말할게. 많이 걱정하고 있어. 쿄우와 그렇게 헤어지고 여러모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야. 아마 지금까지도 그렇겠지. 자네 상황 또한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고 자책하듯 얘기하던 걸.

  “...”

  “먼저 연락하길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갇혀있는 쿄우에게 조금씩 아물어간 상처가 혹여나 다시 벌어질까 걱정하더군. 먼저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할지 모르겠다더라. 뭐지, 헤드위그가 된 이 기분은. 아무튼 쿄우, 먼저 안부를 묻는 건 어때. 주소는 지난번에 알려준 곳과 같아. 서로 이 정도로 걱정해주는 사이인데 안부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꽤나 기대하는 눈치던데.”

  찰리는 내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썼다 지우며 반복한지를 모른다. 보내지 못한 편지들도 여러 통 있었다. 나는 편지의 왕래가 끊기게 되면 받게 될 아픔의 짐작을 쓸데없이 해버린 까닭에 겁이나 선뜻 보낼 수가 없었다. 마치 30m 다이빙대 위에서 겁먹고 우쭐해대는 것과 같이.

  “내가 대신 안부를 전해주겠다고 이야기했어.”

 하고 찰리가 약간 톤을 낮춰 말했다.

  “그랬더니 J가 뭐래?”

  “부탁한대.”

  나는 J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것 같아서 귀가 후끈거렸다.

  “고마워, 찰리. 조금 더 고민해볼게.”

  “고민이라니! 그러다가 이 타이밍마저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오히려 놓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내 위치를 보라고, 찰리.”

  이봐 쿄우, 하며 찰리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게를 잡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건 결코 배려가 아니야. 쿄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자신을 낮추려 들지 마. 이 모든 건 그저 삶의 어떤 과정일 뿐이니까.”

  침묵이 몇 초간 흐른다. 나는 지난번에도 어정쩡한 상태로 대화가 중단된 것을 떠올리고 찰리에게 미안함을 느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겠어, 찰리. 직접 안부를 전해볼게.”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 줘야 나도 전해줄 말이 있지.”

  찰리는 말했다.

 쉽지 않군, 하고 나는 졌다는 듯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찰리는 만족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처음으로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온 몸의 힘을 빼는 듯한 모습으로 마주 앉았다.

 “그런데 찰리는 왜 J와 나 사이를 집착하는 거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쿄우.”

  찰리가 대답하자 종료를 알리는 알람음이 종점을 알리는 기차처럼 작은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찰리는 중절모를 반듯하게 고쳐 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나는 무엇에 집착을 하고 있던 것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자신과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까지 시동만 걸어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액셀을 밟아보자. 어느 정도 굴러는 가봐야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끝도 없이 펼쳐진 1번 국도일지라도. 같은 곳을 자꾸만 돌지도 모를 아스팔트 트랙일지라도. 이러다가 정말 배터리가 방전이라도 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유유히 사라지는 찰리의 뒷모습을 마치 희미해져가는 아지랑이를 보듯이 배웅하며, 그렇게 다짐했다.

  폭주한 기관차가 낡은 레일 위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나는 그 안에서 종착역을 잊은 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풍경들이 쉴 새 없이 지나쳐간다. 계절들이 흘러간다. 그리고 시계바늘이 빠르게 돌아간다. 마치 스스로 태엽을 감아 자명종 알람을 맞추듯이.

  그리고 마침 때가 되었는지 기차는 나를 황량한 어딘가로 내뱉는다. 성가신 이물질처럼 갑작스럽게 툭하고. 예고 따위는 없었다.

  내팽개쳐진 역에서 얼른 적응을 해야만 했다. 다음 열차는 당분간 없을 테니까. 언젠간 나를 뱉어낸 기다란 녀석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이곳에 올 날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다림은 지루하다. 그 지루함 속에 설렘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을 땐 종종 소름 돋기도 하지만, 그것을 느끼기 위해 기다림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매번 거치는 역들의 가르침이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역은 다른 곳들에 비해서 유독 쌀쌀했다.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허름했고, 생기도 없었으며, 사람의 인기척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해골을 발견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마치 비밀리 숨겨져 왔던 사하라의 고대유적지처럼 외로웠다. 안개 또한 새벽 다섯 시가 멈춰있는 듯이 자욱해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뿌옇게 보였다. 볼만한 것 또한 없었지만.

  이번에는 개척자가 되어야겠다고, 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나서 주위를 탐색하기 위해 발을 떼려는 순간 나는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실행하기도 전에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변화의 삶은 오랜 시간 함께 해왔기에, 변성기가 소년의 목에 잠식되는 듯이 겸허히 받아들인다.

  나는 모래바람이 낙서를 해놓은 듯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며 기다렸다. 내버려두자고,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행동하자고.

  족쇄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번 상황은 마치 줄에 묶여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개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안개 속 저편 어딘가에서 제이 플라의 이 울려 퍼졌다. 소리는 점점 회오리를 만들며 가까워지더니 어느 새 귓가에 도달해 정체모를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나는 J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단지 겁이나 주춤하는 게 아닐까, 도대체 무엇을?”

  어둠속에서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고요한 동굴 속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듯한 아슬아슬한 목소리로. 질문은 매일같이 이어졌다.

  눈꺼풀이 굳게 닫힌 공간에서 안구는 쉴 틈 없이 움직이며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서 되감아 재생하듯이 나를 괴롭혔다.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나는 족쇄가 발목을 점점 조이는 것 같다고 느꼈고, 이번만큼은 왠지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불안감과 기차가 그대로 지나치는 모습을, 머저리처럼 바라만 볼까봐, 내심 두려워졌다.

  9월의 담백한 악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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