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
 1  2  3  >>
 
자유연재 > 일반/역사
서사모아
작가 : 갑주어
작품등록일 : 2020.9.22

1950년 7월 15일, 우리가 아는 대한민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전쟁에서 패한 이들이 망명한 곳은 다름아닌 남태평양 환상의 섬, 서사모아 제도.
그곳에서 50년 전, 태평양 깊이 잠들어있던 대한민국의 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6화 - 서울인민병원
작성일 : 20-09-30 23:16     조회 : 291     추천 : 0     분량 : 15412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젯밤 기상 알림을 잘못 설명해놓은 듯, 로농집합시간에 그다지 여유가 없는 시간이다.

 급히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하고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밖은 매우 춥다. 따스한 물이 하루 내내 나오고 전체난방을 통해 늘 따스한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다. 본래 나 같은 경우가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은 편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6년 전, 서대문인민대학 외과전공이자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춘천인민병원에 배속되었던 나는 우연히 조선로동당 간부인 모 씨를 치료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충수염이었다. 그는 배탈 혹은 식중독이 난 줄 알고 응급실을 찾았는데, 걷기가 힘들 정도로 배가 아프다며 오른쪽 무릎을 절룩거리는 행보를 보고 혹시나 해서 진료했더니 역시나 충수염이었다. 수술은 완벽하게 끝났고, 나중에 그의 도움을 받아 공화국 최고의 의료기관인 서울인민병원에 차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와 동시에 서울인민병원의 전문의만 거주하는 전용 아파트를 얻어 이렇게 공화국에서 보기 드문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파트에서 로동현장인 서울인민병원 외과 구역은 걸어서 10분밖에 안 걸리는 매우 짧은 거리다. 하지만 살을 에는 혹독한 칼바람에 마치 1시간이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 추위는 유독 더 추운 것 같다. 언론에서는 지나가는 추위일 뿐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소주도 얼어붙는 이 추위가 걱정이 안 될 리는 없다. 나처럼 난방이 제대로 되는 집과 로동현장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인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침 7시 반이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어둑어둑하다. 골목을 나와 큰길로 나오니 많은 인민이 몸을 움츠린 채 손을 입으로 불며 횡단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들 뒤에 섰다.

 옆의 한 인민을 보니 공장 로동자로 보인다. 색이 바래 마치 쥐색으로 보이는 겨울 로동복 바지에 여기저기 꿰맨 흔적이 있는 겨울 로동복 상의를 입고 초점 없는 눈으로 어금니를 딱딱 부딪히며 추위를 이겨내고자 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보급받은 검정 롱코트에 장갑까지 낀 터라 그렇게까지 춥지 않지만, 이와 같은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곧 신호가 떨어지자 기다리던 인민이 동시에 길을 건넜다. 사실 큰길이지만 지나가는 차가 없어 그냥 횡단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공화국에서 그랬다간 큰일 난다. 10년 전쯤에 조선로동당 소속 인민의원의 아들이 운전 중 무단횡단을 하던 인민을 치어 죽인 사고가 발생하자 곧바로 최고인민회의에서 ‘무단횡단 처벌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과 시행령에 따라 무단횡단을 할 시에는 주변에 숨어 있던 경찰이나 정치경찰, 보안대가 즉각 출동해 체포하여 최소 40,000원의 엄청난 범칙금을 부과한다. 40,000원이면 보편적인 로동자 한 달 임금의 절반이 되는 엄청난 돈이다. 이를 내면 한 달 생활이 생지옥으로 변하고, 안 내거나 못 내면 곧바로 공화국 내 도로교통 기본교육을 위해 교화소로 끌려간다. 그래서 공화국의 인민 중에는 아무리 차가 지나가지 않고 작은 도로라 할지라도 횡단 가능 신호가 없이는 절대 횡단하지 않는다. 굉장한 도로교통 질서유지다.

 

 길을 건너자마자 보안국에서 나온 경찰 두 명이 두꺼운 방한 근무복을 입은 채 지나가는 인민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곤 내가 걸어가자 그중 계급이 더 높은 한 놈이 방긋 웃으며 나한테 인사한다.

 “아이고 로동당 최측근 어의 나으리~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이는 본래 여기서 살고 여기서 근무할 수 없는 사람인데 조선로동당의 줄을 잡아 벼락출세했다는 식으로 나를 비꼬는 말이다. 이놈의 이름은 박재성. 종로보안국 안전과 과장이며 계급은 경정이다. 서울인민대학 경찰행정과를 졸업하고 보안국 경찰 간부가 되어 활동해온 전문 인재라고는 하나, 내 눈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민들 트집 잡아 벌금 부과로 삥 뜯으려는 쌩 양아치로밖에 안 보인다. 안전과 경정이나 되는 양반이 이 추운 날 종로 한복판에 나와 있다는 거 자체가 인민들 트집 잡아 삥 뜯으려는 거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어의 나으리~ 오늘도 일찍 출근하시네요?”

 박재성 경정이 내 옆에 따라붙으며 깐죽거렸다.

 “경정님, 제 로동현장 집합시간이 10분 남았습니다. 이제 5분 걸어가면 되니 나중에 보시지요.”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응대한다. 무엇보다 동문은 아니지만, 공화국 내에서 동급인 인민대학 출신으로서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고, 나를 삥뜯지 않지만 그래도 시비가 걸리거나 트집이 잡히면 귀찮은 일이 너무나도 많이 생기니 그냥 내가 조심하는 것이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지금 아침 7시인데, 8시까지 집합 아니신가요? 어의 나으리 혹시 남조선 잔당들과 모의하기 위해 일찍 가는 거 아닙니까? 예?!”

 한마디로 미친 또라이 양아치 경정이다. 항상 저런 식으로 지금보다 수십 분 늦은 시계를 들고 다니면서 순진한 인민들을 꾀어내고 이에 넘어간 순진한, 또는 시계가 없는 인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유를 부리게 되고, 그러면 곧바로 그의 뒤를 보안국 부하 경찰들을 시켜 미행함으로 태만분자를 만들어 체포하는 방식을 쓴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만 20명이 넘는 인민이 저 자식에게 당해 교화소로 끌려가거나 회피 목적으로 거금을 뇌물로 빼앗겼다. 각목으로 쳐 죽여도 시원찮을, 말이 필요 없는 개새끼다.

 “쳇, 오늘도 재미없으시네~.”

 내가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병원을 향해 걸어가자 재미가 없어진 듯, 제자리로 돌아가는 박재성 경정. 제발 하늘에 신이란 게 있다면 저놈을 데려갔으면 좋겠다. 아, 물론 공화국에서는 종교를 지양하므로 신이란 건 없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로동현장 집합 점호를 받는다. 나는 외과의므로 외과 구역에서 점호를 받는다. 서울인민병원 외과 구역의 외과의는 나를 포함해 총 24명이다. 소속된 간호사는 50명. 이런 대규모로 의료진을 보유한 병원은 여기 서울인민병원과 평양의 조선로동당사 옆에 있는 조선로동당중앙병원 뿐이다. 참고로 춘천인민병원 외과 구역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의 외과의와 12명의 간호사가 전부였다. 그곳의 생활에 비하면 정말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점호가 끝나자마자 외과 구역장 동무의 간단한 브리핑 후, 로동배치시간표 대로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한 시간 뒤에 있을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수술실로 이동했다. 이번 수술 대상은 조선로동당 소속 인민의원의 딸인데, 위장에 종양이 발견되어 이를 제거하는 수술이다. 일전의 사건 때문인지 유독 조선로동당 소속 의원이나 간부들과 그들의 자녀에 대한 진료가 잦다. 이를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종종 고민된다.

 지나가면서 병원 1층을 내려다보니, 진료허가증을 받아 온 많은 환자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딱 봐도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이 끙끙 앓고 있는 이도 있고, 앞의 환자가 새치기를 했다며 싸움이 벌어지거나 씩씩거리며 혼자 욕을 하고 열을 내다가 쓰러지는 환자도 있다. 정말 이게 병원인지 난리판인지 도통 모르겠다.

 “준비되셨습니까?”

 많은 생각을 뒤로 한 채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대에는 이미 끙끙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환자가 누워있었다. 환자는 나를 보더니 애써 방긋 웃었다.

 “의사 동무, 동무 실력은 익히 들었어요. 잘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환자에게 인사한 후 마취약을 투여했다.

 “환자 동무, 인민에 대한 맹세를 읊어보세요.”

 “나는 자랑스러운 공화국기 앞에, 늘 푸르고 아름다운 강산을 자주로 지키고, 인민의 역사 그 찬란함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 할...”

 “동무들, 수술을 시작합시다.”

 

 수술은 세 시간 만에 완료되었다. 환자는 회복실로 이동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자 수술실 앞에 환자의 아버지인 조선로동당 소속 현 최고인민회의 윤상호 인민의원 동무가 있었다. 일전에 지나가다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나 자세힌 모르겠다. 아무튼, 윤 인민의원 동무에게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고 나서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윤 인민의원 동무는 나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조선로동당에 함께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난 바빠서 당원 활동은 못 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보길래, 수술실의 산소통 관들이 다 낡아 위험하다고 그것 좀 교체해달라고 부탁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조선로동당은 우리 공화국을 책임지는 제1당으로 가입절차가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공화국에 대한 애국심은 물론이거니와 레닌 동무의 자본론에 대해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주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난 그런 사상적 지식이 없을뿐더러 공부할 시간은 더더욱 없다. 물론 조선로동당 당원이 되고 의료진위원회 같은 당내 기구에 들어가 위원장이라도 되면 앞으로 공화국 내 의료계에서 승승장구하게 되겠지만, 난 딱히 그러고 싶지가 않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놈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유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민민주당이나 자유인민당으로 공화국 내 정치활동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로동당 1당 독재 체제가 아니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만든 위성 정당 인민민주당과 남로당 후예로 전라도에서나 활동하는 자유인민당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물론 수십 년째 무소속으로 유일하게 당선되어 활동하는 그... 이름은 내가 까먹었는데 대구의 어떤 선거구 인민의원인 그는 꽤 관심이 가긴 한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수십 년째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있는데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냥 우리 공화국의 정치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거다. 평등을 외쳐댄 공화국이지만 결코 평등할 생각조차 안 하는, 밖에서 선거철만 되면 우리 의료계 동무만, 수술실 앞에서는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순한 양이 되는, 그런 공화국의 정치인들은 많이 봐 왔기에 관심을 떠나서 의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때때로 토악질이 나온다.

 참고로 말하자면, 한 조선로동당 소속 인민의원은 선거철 당시 외과의가 든 메스와 인민식당 아주머니가 든 부엌칼이 같은 값어치를 하는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선거구호를 써서 당선되었다. 나는 유권자 인민 동무들이 왜 이런 구호에 환호를 외치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다. 수술실에서 내가 드는 메스는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기 위한 칼이고, 인민식당 아주머니가 든 부엌칼은 내가 먹을 된장찌개에 들어갈 오이를 써는 칼인데 어떻게 같은 값어치가 될 수 있을까? 게다가 공화국이 세워진 지 5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평등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9번 연속 제1당을 기록한 조선로동당이 무능한 당 아닌가? 물론 선전 문구를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써야 많은 유권자 동무들의 표를 받을 수 있으니 양보하고 양보해 이해한다만, 그런 식으로 인식을 심어 놓으니 병원마다 의사 동무들이나 간호사 동무들이 본인들을 치료할 환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심지어 폭행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거라고 본다. 그래서 난 정치인들이 싫다. 동무라고 부르기도 싫다.

 

 점심시간이 되어 병원 지하에 있는 인민식당에 가 밥을 먹었다. 오늘은 멸치볶음과 중국 마라를 볶아 만든 야채볶음에 무국이 나왔다. 중국 마라를 써서 볶을 거면 차라리 마라탕을 끓이지 라는 궁시렁을 뒤로 한 채 맛있게 먹고 잠시 시간을 내어 산부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산부인과 병동에는 내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입원해 있다. 곧 있으면 태어날 사랑스러운 우리 아기를 위해 기다리며 몸 관리를 하는 것이다. 본래 한 달에 5,000원 하는 고가의 시설이지만, 외과 구역에서 로동하고 있는 나 덕에 반값인 한 달 2,500원을 내고 지낼 수 있다.

 “여보 왔어요?”

 병실은 역시 산모가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외과 구역보다도 따스하고 가습기도 틀어져 있었다. 방금 막 식사를 마쳤는지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내는 8인실을 사용하고 있기에 다른 산모들도 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한다. 나는 산모 동무들에게 미소로 인사하고 아내의 자리로 갔다.

 “밥은 잘 먹었어?”

 “응. 방금 막 먹었어요.”

 “오늘은 뭐 나왔어?”

 “닭죽. 맛있더라고요.”

 역시 공화국 지침이기도 해서 산부인과는 대우가 더 좋다. 병원장 동무가 좀 또라이로 유명하긴 한데 산부인과는 그래도 잘 챙겨주는 거 같아 마음이 놓인다.

 “여보는 뭐 먹었어요?”

 “나? 나는 인민식당에서 마라탕 나와서 그거 먹었어.”

 사실 무만 들어간 무국에 마라 야채 볶음이지만, 대충 거짓말했다.

 “맛있겠다. 여보 저 출산하고 나면 여의도 중화거리에 마라탕 먹으러 가요. 한강 바라보면서 얼큰하게.”

 “돈이 어디 있어서?”

 “봄이면 아이랑 같이 퇴원할 수 있을 거니까. 저 다시 로동신청 할거에요.”

 아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내는 우리 아기를 임신하기 전,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무원이었다. 출산을 앞두고 휴직한 상태지만, 출산 후 퇴원한 뒤에 로동관리국에 로동신청을 하면 다시 업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우선 몸조리 잘 하고.”

 “네. 여보 집은 어때요? 엉망진창?”

 “무슨 소리야, 내가 저녁마다 쓸고 닦는데. 당신이랑 우리 아기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어.”

 “훗, 저 없어서 청소도 대충 하고 살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사실 아내 말이 정답이다. 청소한 지 2주는 넘었다. 무엇보다 집에 귀가하면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 버리니까.

 “참, 바쁜데 어서 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여기 언니들도 다 좋은 분들이라.”

 아내 말에 문득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다. 나는 말 없이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아내는 마치 중급학교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며 나를 작은 주먹으로 톡 쳤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우린 서로 얕게 입을 맞추었다. 아내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태연한 척 똑바로 서서 의사 장옷을 정리했다.

 “내 걱정은 말고 몸조리 잘 해. 무슨 일 있으면 내선으로 연락하고.”

 “네 여보, 힘내요.”

 그렇게 빨개진 얼굴로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아내를 뒤로하고 외과 구역으로 다시 돌아와 오후 일과인 일반 진료를 보았다.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 아침 여덟 시에 병원에 출근해 아침점호를 한 뒤 오전 일과를 보고, 병원 지하의 인민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아내를 보러 갔다가 오후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저녁 7시 즈음이 되면 마침 점호를 한 뒤 퇴근한다. 아쉽게도 산부인과 병동은 오후 5시부터 면회가 금지되기 때문에 하루에 아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밖에 없다.

 응급실 당직이 있는 날에는 당직복으로 갈아입고 응급실에서 밤을 꼬박 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그대로 퇴근하게 된다.

 퇴근길에는 어김없이 또 사거리에 박재성 경정이 범칙금 명목으로 인민들 삥을 뜯고 있고, 내가 지나가면 나한테 인사하는 척 비아냥을 보낸다. 아주 익숙한 광경이다. 퇴근 후 시원하게 마실 맥주나 막걸리는 이 추운 겨울에는 구경하기 힘들다. 추위 때문에 기계가 잘 고장 나는 겨울은 그야말로 공화국 내 모든 물류의 정지나 마찬가지다. 조선로동당 간부나 소속 인민의원이 아닌 이상에야 이 추운 겨울에 술을 마실 수 없다. 구하더라도 비싸서 입에 대지 못하니 그냥 마실 수 없다고 하는 게 좋다.

 이렇게 공화국에서 로동자의 하루는 쳇바퀴 굴리는 생쥐 마냥, 단순하고 또 똑같이 지나간다. 여행을 가거나 취미를 가지거나 무언가 삶에 활력이 될 만한 것은 짜내고 짜내야만 존재하는, 어찌 보면 정말로 평등하고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 로동현장만 다른.

 

 “어의 나으리~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요새 돈도 많이 버실 텐데 좀 쏘시죠? 예?!”

 그렇게 똑같은 하루를 보내던 날, 아내의 출산예정일이 1주 남은 어느 날, 병원장 동무가 급히 나를 병원장실로 소환했다. 서울인민병원의 책임관리자이자 모든 의사를 대표하는 병원장 동무가 구역장도 아닌 일개 외과의인 나를 보자고 할 이유가 없는데 찾는다 하니 괜한 걱정이 됐다.

 “병원장 동무, 찾으셨습니까?”

 병원장실 문들 두드린 후 들어가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병원장 동무는 공화국 보안대 소속 정치장교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뒤쪽에는 병원장 동무의 개인 비서 두 명이 불량배 같은 인상으로 앉아있었다.

 “어, 동무. 여기 앉게.”

 병원장 동무가 시가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나는 정치장교로 보이는 남자 옆에 앉았다. 시가 냄새가 독했지만 참았다.

 “이쪽은 공화국 중앙보안대 2과의 리황혼 대위 동무라네.”

 병원장 동무가 그를 소개하자 그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다고 소문 난 중앙보안대 소속 대위 동무를 눈앞에서 보니 큰 긴장이 몰려왔다. 내가 뭐라도 잘못한 걸까? 혹시 지난번 위종양 수술이 잘못되어 날 잡으러 온 건가?

 “동무, 긴장한 모양이군요.”

 리황혼 대위 동무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살짝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중앙보안대 동무를 보는 것이 처음입니다.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까지야.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병원장 동무를 통해 온 것일 뿐이요.”

 리황혼 대위 동무는 내 손을 놓고 진지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달, 서대문인민대학 학생 동무 중 몇이 폭동을 일으켰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죄송합니다, 동무.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하, 대위 동무가 이해 좀 해 주십시오. 이 동무 맨날 열심히 인민들 진료만 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잘 모르지요.”

 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병원장 동무가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혓바닥 놀리는 거 하난 최고다. 병원장 동무의 말을 들은 리황혼 동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사건을 설명해주고자 입을 열었다.

 “의사 동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내가 서대문인민대학 외과 출신인데 그 학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그러니까 한 해를 마무리하기 직전의 이야기다.

 예부터 서대문인민대학에는 특혜를 받아 러시아의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을 가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때때로 독특한 러시아만의 풍습을 가져와 즐기는 경우가 있다. 유명한 것으로는 연인에게 쇼콜라드를 나누어주는 블린틴날이나 12월 25일에 인민들에게 무작위 선물을 나누어주는 끄루즈디스티보가 있다.

 블린틴날은 그냥 쇼콜라드를 연인들과 나누는 날이라고 해서 최고인민회의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데, 문제는 끄루즈디스티보다. 끄루즈디스티보는 중동의 어느 사막에서 태어난 신을 기리기는 날로 그 사막의 신의 탄생을 축하하며 주변에 서로 무작위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공화국의 정의로는 그 사막의 신 신도로 만들기 위해 선물로 인민을 유혹하고 선동하는 날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종교 전파를 위해서 사막 신의 뇌물을 주고받는 날인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한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끄루즈디스티보를 즐기며 대학 주변 모든 인민에게 사 온 선물을 나누어 준 것이다. 그 제보가 들어가 그 학생은 서대문보안국에 체포되어 끌려갔고,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서대문 거주 인민들이 서대문보안국으로 몰려가 단체로 돌을 던지고 보안국 경찰들을 폭행했으며, 유치장을 습격해 철창을 훼손하려 하다 출동한 공화국 보안대로 인해 진압당했다는 이야기다.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야기를 들은 후 리황혼 대위 동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시가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동자 중 한 명이 조사 중에 쓰러져서 말이야, 의사 동무께서 진찰 좀 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하지만 대위 동무, 중앙보안대에도 군의관 동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믿음직스럽지 못하오. 동무의 실력은 익히 들었으니 부탁 좀 하겠습니다.”

 리황혼 대위 동무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은 채 다시 시가를 뻐끔뻐끔 피워댔다. 아무래도 거절하기는 못 할 분위기 같다.

 “동무, 부탁 좀 합시다. 가서 진찰 좀 봐주고 오시오. 나도 동무 말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구려.”

 병원장 동무가 시가를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말했다. 병원장 동무는 희대의 또라이지만, 유독 공화국 정부 관련이나 조선로동당 관련에 대해서는 늘 충성을 바친다. 아마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리황혼 대위 동무에게 내가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여기서 거절하게 되면 온갖 불편한 일이 생길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좋소. 지금 나와 함께 바로 이동합시다. 한시가 급하오.”

 리황혼 대위 동무가 내 손을 잡고 악수하며 말했다. 그리곤 일어나 시가를 눌러 끄고 병원장 동무에게 고맙다고 악수한 뒤 먼저 나갔다. 나도 그를 따라 병원장실을 나왔다.

 “내가 짐을 챙겨다 드릴게. 대위 동무와 함께 내려가쇼.”

 언제 따라붙었는지 병원장 동무의 개인 비서인 엄정훈 동무가 말했다. 본래 그는 뒷골목 양아치 출신인데 병원장 동무와 연이 있다는 이유로 이곳 서울인민병원에서 병원장 비서로 로동하고 있다. 병원장 동무가 희대의 또라이 이기에 이 엄정훈 동무 역시 평판이 매우 안 좋다. 하지만 병원장 비서 동무이기에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난 엄정훈 동무에게 내 짐을 부탁하고 나는 리황혼 대위 동무와 함께 주차장으로 가 보안대 차량에 탑승했다.

 

 리황혼 대위 동무와 함께 도착한 곳은 남산 중턱에 있는 중앙보안대 본부였다. 보안대 소속이나 관련된 동무가 아닌 이상 이 건물을 보는 것은 삶의 마침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나는 수사받으러 끌려가는 것이 아니니 이제 관련된 동무가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의사 동무, 미안한데 보안상 안대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운전병 동무가 나에게 두꺼운 검은색 안대를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곧바로 안대를 착용하고 두 손 모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러자 검문소를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건물에 도착한 뒤에는 안대를 계속 착용한 채 보안대 병사들의 인도를 받아 이동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진료를 위해 방문한 나도 살 떨리고 긴장되는데, 무언가 죄를 지어 끌려온 이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안대를 푸시오, 의사 동무.”

 리황헌 대위 동무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안대를 풀었다. 옆을 보니 언제 엄정훈 동무가 가져다 놨는지 외진용 내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마자 나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벽지 없이 에스팔트로만 모든 면이 둘러싸인 방, 전선과 수도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벽과 천장, 위에서 떨어지는 동그란 형광등 하나, 방 한쪽에는 텅 빈 욕조,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문쪽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세 개가 제멋대로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는 두들겨 맞아 실신한 듯 퉁퉁 부은 얼굴을 푹 숙인 채 의자에 구속된 상처투성이의 인물이 보였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중앙보안대 심문실이라고,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껴졌다.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시오, 의사 동무. 평범한 심문실일 뿐이오.”

 리황헌 대위 동무가 말했다. 내 눈에는 전혀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나는 리황헌 대위 동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대위 동무, 이 동무를 진료하면 됩니까?”

 “그렇소.”

 리황헌 대위 동무의 대답을 들은 후, 나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청진기를 착용하고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단추를 풀러 가슴팍을 보니 여기저기에 얻어맞아 생긴 상처가 수도 없이 많았다. 내 추측하건대, 보안대 병사들이 두들겨 팬 흔적이리라. 청진기를 가슴팍에 가져다 대니, 다행히 맥박은 문제가 없었다.

 “대위 동무, 실례지만 이 환자 동무의 구속을 풀어 바닥에 눕힐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는 진료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하자 리황헌 대위 동무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며 생각하더니 이내 벽에 설치된 전화기를 들고 병사들을 불렀다. 곧바로 병사들이 들어오더니 환자의 구속을 해제하고 바닥에 눕혔다. 나는 리황헌 대위 동무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답하고 다시 진찰을 시작했다.

 

 환자의 맥박은 조금 낮은 편이다. 하지만 위험할 정도의 저혈압은 아니다.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동공이 살짝 풀려 있다. 호흡은 미약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어 아마도 혼수상태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고문으로 인해 뇌나 중추신경계에 피해가 갔을 것으로 예상된다. 근처에 있던 수건을 둘둘 말아 베개처럼 두었다.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하의를 벗겨놓으니 주먹이나 발길질로 당한 듯, 둥근 피벙이 온 몸에 가득했다. 아무래도 붙잡고 두들겨 팬 것으로 추측된다. 앞머리가 많이 뽑혀 피가 고인 걸 보면 구속된 이 환자의 앞머리를 잡고 발길질이나 주먹질을 한 것 같다.

 붓고 피멍이 난 부분에는 연고를 바르고 찢어진 상처는 소독한 다음 급히 꿰맸다. 입안을 보니 하도 얻어맞았는지 치아 몇 개가 뽑히거나 부러졌다. 피 흐르는 부분은 막아 지혈하고, 부러져 가루가 입안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는 부스러기와 코에 들어있던 피딱지 등을 제거해 숨을 쉴 때 불편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내가 애써 못 본 척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이 부위만 남은 터라 치료하게 된 부분이 있다. 바로 환자의 오른쪽 뺨이다. 역삼각형 모양으로 살이 불에 탄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내 추측에 의하면 이것은 분명 열 낸 다리미로 지진 것이다.

 “뭘 그렇게 보기만 합니까, 의사 동무?”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리황혼 대위 동무가 와서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놀래 그를 쳐다보았고, 식은땀을 닦고 바로 화상치료를 위해 소독약을 준비했다.

 “이 동무는 손전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문 중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증인에게 전화하는 도중, 손전화가 폭발해 생긴 상처입니다. 그 손전화는 재미있게도 미제였습니다.”

 옆에서 리황혼 대위 동무를 돕던 보안대 병사가 말했다. 난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인 걸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손전화를 사용하는 도중 이런 큰 상처를 남길 정도로 큰 폭발을 일으켰다면 당연히 고막은 터졌을 것이다. 또한, 역삼각형 모양의 상처가 아니라 둥근 모양일 것이며, 오른손 손바닥은 온통 화상이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리황혼 대위 동무와 여러 보안대 병사 동무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떨리는 손으로 환자의 환부를 소독하고 화상 연고를 바른 뒤, 반창고를 붙였다. 모든 치료를 마치고 나서 환자의 왼쪽 팔에 포도당 링거를 놓았다.

 “대위 동무, 다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되니 따스한 방에서 회복시켜야 합니다.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어나 식은땀을 닦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리황혼 대위 동무는 당배를 하나 꺼내 물더니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폭동 주모자 신분인지라 인민병원으로 데려갈 순 없소. 우리 의무대에 수감 하도록 하지. 고생했소, 의사 동무.”

 리황혼 대위 동무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리곤 병사들을 시켜 환자를 데리고 가기 위해 들것에 실었다.

 “그,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더 이상의 심문은 무리일 듯합니다. 이를 꼭...”

 나는 들것에 아무렇게나 올려 이동시키려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다 말하지 못했다. 리황혼 대위 동무가 내 옆에 와서 어깨동무를 한 채 내 어깨를 꽉 쥐었기 때문이다. 나는 말 없이 바로 옆의 리황혼 대위 동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Я пытал его. Вы знаете это, но вы должны притворяться, что не знаете этого.”

 그가 내 귀에 러시아어로 속삭였다. 나는 그의 말에 순간 소름이 돋아 주저앉을 뻔했다. 환자의 상태를 보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너무 당당하게 말을 해서 놀랄 뿐이었다.

 “의사 동무, 너무 걱정 마요. 환자는 우리가 잘 돌볼 테니. 오늘 치료를 해 줘서 고맙소. 이건 사례금이오.”

 환자를 옮기는 병사들 말고 다른 보안대 병사가 와서 나에게 가방 하나를 보여주었다.

 “200만 원이요. 시원섭섭하게 넣지는 않았소. 의사 동무는 보안만 유지해주오.”

 나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딱 봐도 위조지폐는 아닐뿐더러 빳빳한 새 지혜 냄새까지 나는 만 원짜리 지폐가 2백 장 쌓인 가방이었다. 2백만 원이면 내 20개월치 봉급인 어마어마한 돈이다. 리황혼 대위 동무가 내 옆에 다시 다가와 귀에다 속삭였다.

 “의사 동무. 나는 공화국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보안대, 그것도 중앙보안대의 간부요. 내가 일하는 것이 모두 공화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것이오. 혹시라도 지금 머릿속에서 ‘끄루즈디스티보는 누명일 뿐이고 다른 목적이 있어 체포해 심문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은 당장 접으시오. 불법 시위대를 진압하다 보면 어느 정도 폭력은 수반되는 법이오. 믿는 그대로를 보고 이에 순응하시오. 그리고 부디 나의 작은 성의를 받아주기 바라오, 의사 동무. 그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소.”

 내가 멍하니 서서 리황혼 대위 동무의 말을 듣고 있으니 한 병사가 가방을 닫고 내 손에 꼭 쥐었다. 말이 마치자 뒤에서는 문이 열리며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엄정훈 동무가 서 있었다. 그는 심문실로 들어와 내 도구를 다시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도구는 내가 사무실에 넣어둘게,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푹 쉬쇼. 외과 구역장에겐 내가 말해두었으니 걱정 마라.”

 도구 가방 정리를 마친 엄정훈 동무가 나에게 말하곤 먼저 나가버렸다. 멍하니 돈가방을 들고 서 있으니 사복을 입은 보안대 요원들이 들어와 나에게 안대를 씌워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전에 집까지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다. 퇴근해야하는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오늘은 무언가 놀란 가슴을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받은 돈을 천장의 비밀보관소에 넣어두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분명 오늘 못 볼 것을 본 느낌이다. 의사로 생활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아니, 살면서 이런 광경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전혀 없다. 2000년이 넘은 지금도 비밀리에 신체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아무도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까. 공화국 이면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 잔인무도한 신체 고문은 미제나 남조선 잔당들이 우리 공화국 인민에게 저지르는 일이라고 배웠고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오늘 본 일은 모른척해야 한다는 리황혼 대위 동무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울려퍼진다. 그런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난생처음 보는 신체 고문의 흔적, 그런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미제 앞잡이나 남조선 잔당들이나 저지를 행위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분명 중앙보안대도 엄연한 군부대라 상주하는 군의관이 있을 것인데, 어째서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상주하는 군의관들이 더 보안 유지하기 쉬울 것인데, 못 미덥다는 이유로 보안유지의 불확실성이 있는 나를 데려다가 치료하게 한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다.

 문득 군의관을 지원하여 간 동기가 생각나 그에게 찾아가 중앙보안대 군의관들에 관해 물어보려 했으나, 리황혼 대위 동무가 나에게 오늘 본 것은 모른척해야 한다는 말은 분명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그저 나 혼자 기억의 한켠에 두고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리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거금도 받았겠다 술이나 한잔하고 털어버릴까? 아니다. 혹시 모르니 이 돈은 쓰지 말고 둬야 한다. 어쩌면 엄청난 흑막에 휘말린 것일지도 모른다.

 안정을 되찾기 위해 텔레비전을 틀었다. 마침 인민가수들이 잔잔한 노래를 부르는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방송을 보며 인민가수들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아무리 들어도, 방송이 끝나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덜덜 떨리는 온몸 때문에 식욕도 없어 이불 속에서만 뒹굴다 그렇게 선잠이 들었다.

 
작가의 말
 

 조선공화국에서의 이야기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7 17화 - 사퓬 2020 / 9 / 30 285 0 1287   
16 16화 - 패잔병 2020 / 9 / 30 299 0 5421   
15 15화 - 109인의 배신자 2020 / 9 / 30 299 0 4833   
14 14화 - 서귀포항쟁 2020 / 9 / 30 290 0 3932   
13 13화 - 남조선 섬멸전 2020 / 9 / 30 295 0 4921   
12 12화 - 최후의 연대 2020 / 9 / 30 287 0 5813   
11 11화 - 대한민국의 패망 2020 / 9 / 30 306 0 3246   
10 10화 - 밤하늘 2020 / 9 / 30 291 0 2032   
9 9화 - 섬 2020 / 9 / 30 305 0 12269   
8 8화 - 바다 2020 / 9 / 30 295 0 15934   
7 7화 - 홍제동 인민납골당 2020 / 9 / 30 294 0 13074   
6 6화 - 서울인민병원 2020 / 9 / 30 292 0 15412   
5 5화 - 사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2020 / 9 / 30 307 0 11765   
4 4화 - 코리 2020 / 9 / 30 300 0 9645   
3 3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020 / 9 / 22 302 0 11557   
2 2화 - 서사모아의 한국인 2020 / 9 / 22 311 0 3294   
1 1화 - 다른 세계 2020 / 9 / 22 477 0 6337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군필 마법소녀
갑주어
아틀란티스 소녀
갑주어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