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가씨?”
에녹은 델리아를 보고선 깜짝 놀라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귀엽던 봄의 아가씨가 아닌 평범한 낯빛의 예쁘장한 소년이 서있었으니까.
이런 분장들은 어떻게 하는 거지?
여자들의 화장술이 원래 이런가?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이상하다. 나름 괜찮았는데.”
“어…그러니까….”
“안 어울리나요?”
“어……울리네요.”
노력이 가상하여 별 다른 말없이 어울린다고 말을 건넸다.
“정말 아가씨 맞아요? 아하하!”
테오는 연실 정말 델리아가 온 것이 맞느냐며 유쾌하게 떠들어대며 웃었다.
웃음꽃을 피운 시간은 길게 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함께 남게 되는 호위 기사를 보더니 급격하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준비가 되었으니, 가죠.”
델리아는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나치게 높은 의지와 욕망이 델리아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에녹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테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몸조심하세요. 아가씨!”
저와 동거 동락한 에녹보다 델리아의 안위가 먼저였다.
지나치게 높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정말 떠날 때는 ‘가지마세요.’라고 중얼거렸다.
에녹에게 매달려 눈물로 배웅을 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끈질기게 따라왔다.
“간다.”
눈칫밥 속에 있게 될 어린양 테오를 뒤로하며 입단 서류를 적어냈던 허름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암흑의 세계로 가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길엔 완벽한 봄을 알리는 듯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했다.
델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함을 느꼈다.
느껴보지 못했던 평범한 복장과 자유로움에서 자연을 맞는 느낌.
백작가로 오기 전 느꼈던 행복을 다시 맞는 듯했다.
순간순간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하자 어느새 사람들이 여럿 몰려 있는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공간이 눈에 띄자 ‘아가씨, 저쪽이에요.’라고 말하며 팔을 뻗어 에녹이 가리켰다.
“잠깐만요.”
델리아는 에녹의 팔을 서둘러 붙잡으며 외쳤다.
뻗었던 팔의 옷가지를 붙잡아 당겼기에 에녹은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꽤 생각보다 많이 가까웠다.
돌발적인 델리아의 행동에 에녹은 숨을 멈추며 깜짝 놀라 토끼눈을 떴다.
‘……이런.’
마음속으론 다른 이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애써 남자처럼 꾸며도 가까이에서 보면 누구든 의문을 품을 것만 같았다.
긴 속눈썹에 앙증맞은 볼까지, 전혀 남자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빨리요…! 빨리.”
지나가는 다른 이들이 힐끗 쳐다보며 걸어가기에 에녹은 민망함에 서둘러 떨어지려했다.
오히려 델리아는 에녹에게 서둘러 귀를 가져다 대라는 시늉으로 손을 까닥였다.
에녹은 조심스럽게 델리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아가씨가 아니죠!”
“네?”
“앞으로 테오라고 불러요. 저도 에녹이라 부를 테니.”
아가씨라는 호칭을 다른 이가 듣고서 눈치 챌까 서둘러 그를 붙잡았던 것이다.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에녹은 멍하니 있다가 이제 이해한 듯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델리아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옷가지를 꽉 쥐었다.
“알겠어요.”
에녹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어서 불러봐요.”
“지금요?”“네. 당장.”
이글거리는 델리아의 눈빛에 에녹은 머뭇거리며 ‘테오!’라고 외쳤다.
그러자 델리아는 제가 구긴 에녹의 옷자락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펴주었다.
하지만 이내 더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듯, 살짝 머뭇거리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테오의 성은 뭐예요?”
가문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인, 성.
대부분 이름을 말할 땐 성까지 말하는 것이 예의이자 통성명에서 오고가는 나름의 배려였다.
이름만을 말한다면 ‘당신에게 가문을 숨기고 싶어요.’라는 내면의 욕구가 드러나는 것처럼.
물론 귀족들의 대화에서나 쓰이는 것이지 평민들에겐 이름이 사람을 나타내고 자신을 증명하는 단어이자 수단이었다.
성이 아닌 이름조차 널리 알리지 못하고 일평생을 살다가 가는 이가 대다수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에녹은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의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주의력이 좋은 델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혹여나 불릴 성에 대해 대비한다는 생각이겠거니 싶었다.
“……펠터.”
무언가를 생각하던 에녹은 작게 입안에서 읊조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언급해서인지 에녹은 자신이 말하고도 어색하여 수평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큰 두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는 델리아를 보고나서야 자신이 너무나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펠터예요, 테오 펠터.”
테오 펠터. 델리아가 사용하게 될 이름과 성.
델리아는 계속해서 ‘테오 펠터’가 머릿속에 찰싹 붙도록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이쯤 되니 에녹의 성 또한 궁금했다.
물어보려 입매를 달싹이는 순간 에녹은 제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항상 차고 있는 금색의 시계였다.
슬쩍 보고선 에녹은 서둘러 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머지않아 그들이 도착한 곳엔 사람들이 꽤 모여있었다.
에녹의 예상대로 시장터나 골목길에서 싸움을 즐겨하며 주먹질에 내로라! 하는 놈들은 전부 몰려있었다.
“네놈보단 내가 낫지!”
“웃기시네! 너보단 내가 낫지.”
이런 녀석들을 제외하고 의외로 자신의 검을 가지고 있으며 기사를 꿈꾸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눈에 비춰진 수를 전부 세어 보자면 대략 서른 명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자! 조용!”
약속한 시간이 되자 맨 앞에 나와 있던 자들은 이름을 불러 얼굴과 수를 확인했다.
연달아 부르며 방을 함께 쓸 자들을 엮어주었다.
“카이드!”
불리는 이름이 많아질수록 델리아는 불안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방을 같이 써?……’
순식간에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름에 대한 대답부터였다.
놓칠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이윽고 에녹의 이름이 불리고 뒤따라오듯 테오의 이름이 불렸다.
‘다행이다!’ 천만 다행히도 에녹과 같은 방이었다.
“네.”
델리아는 낼 수 있는 한 가장 낮은 목소리로 손을 들며 대답했다.
동시에 주위의 이목은 소리를 낸 델리아에게로 쏠렸다.
이름을 표시하던 자들은 서두르기 위해 곧바로 다음 이름으로 넘어갔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넘어가지 않았다.
델리아의 목소리가 앳돼 보여 얼굴이나 보자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온 거지?”
곱상한 모습에 모두가 의문점을 가지고 다시 델리아를 샅샅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길거리에서 본 기억이 없었으며 주먹으로 한 대 치기만 해도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저만치 날아가 있을 것같이 여리해보였다.
“너무 꼬맹이 아니야?”
“에이, 멋 떨어지게.”
남자들과 방이 배치되었으니 여자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저런 꼬맹이도 들어올 수가 있다는 건가?
더욱 아리송해진 마음들로 인해 델리아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바깥으로 들릴까봐 불안했다.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붉힐 때쯤, 가느다랗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들은 언제 델리아에게 관심을 주었냐는 듯이 그 목소리를 향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뭐야, 여자잖아?”
순간 델리아는 심장이 터져 숨이 멎을 뻔 했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닌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가지고 있네?”
“보통내기가 아닌가 보군.”
“이름이 뭐라고?”
“세실? 이라고 한 것 같은데…….”
관심을 한 번에 쓸어버린 자는 남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세실이었다.
꽉 묶은 머리가 등의 중반까지 내려오는 세실은 델리아와 대비되는 붉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
허리춤엔 검이 빠지지 않게 묶어놓은 검집이 달려있었다.
날렵한 눈으로 짓는 당당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만만치 않은 여자라는 것은 이곳의 누가 봐도, 아니 지나가는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세실로 인해 델리아로 향한 시선이 바뀌었으니 에녹은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건넸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다른 여성들의 이름이 불려졌다.
“여자들도 얼추 여섯은 되는 것 같군.”
“뭐! 우리가 선택될 확률은 높아지고 좋지!”
왼편에서 우락부락한 체형과 다부진 근육을 자랑하던 남자 둘은 두터운 손가락으로 그녀들의 머리를 가리키며 수를 세어갔다.
예의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들을 보자 델리아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차올랐다.
그들의 입에서 ‘남작가의 일당’이 될 것이라는 예측의 목소리만 늘어놓자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이 죽어도 들지 않았다.
델리아는 조용히 이를 물고 새어나는 소리를 막아내었다.
‘그딴 놈 밑에서 일하는 게 뭐가 좋다고.’
델리아는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루드 남작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저절로 그의 외관과 바닥을 기는 인성이 두 번째로 떠올랐다.
델리아는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자, 모두 이동해!”
이름불리기가 전부 끝이 났다.
일주일간의 훈련으로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형식.
나름 약육강식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시험.
실력이 약하면 돈을 벌 수 없다.
실력이 있다면 남작가의 일원이 되어 돈을 받는다.
돈을 원하는 자들에겐 지독하고도 간단한 싸움일 것이다.
다 같이 모여 무사히 남작가 안으로 이동하게 되자 델리아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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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 층이 있는 침대와 넓이가 조금 더 큰 침대로 이루어진 방.
공간이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창가는 진녹색 빛의 커튼이 방의 분위기를 더욱 칙칙하게 만들었다.
“아- 같은 방을 쓰시는 분이군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에녹과 델리아의 앞에 문가에 서있던 작은 체구의 남자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틴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짧게 다듬어져있는 짙은 갈색 머리에 그보다도 더 진한 고동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웃음을 내보여도 여전히 동그란 모양을 유지하는 눈과 적당한 살집이 그를 귀엽게 보이게 했다.
“이쪽은 테오, 저는 에녹입니다.”
에녹은 델리아가 애써 입을 열지 않도록 대신해서 말했다.
허리춤에 색이 바랜 검이 있는 마틴은 손으로 에녹과 델리아를 가리켰다.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어, 그러니까…저를 따르는 동생이에요.”
“아하-!”
“피만 안 나누었지, 그 있잖아요?…의형제! 아시죠?”
당황함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로 에녹이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사이가 가까우신가 봐요. 여기까지 따라올 정도면.”
마틴은 아무래도 델리아가 에녹을 따라왔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 때문이죠. 그렇지? 테오?”
에녹은 멋쩍게 웃어보였다.
델리아는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은 궁금증이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에녹이 대신해서 답변을 계속하였다.
어찌나 방어를 잘하는지 델리아는 에녹을 신기해하며 빤히 쳐다봤다.
그때였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놈이야?”
열린 문 쪽에서 심술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