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놈이다!
“아저씨 멋있지?”
어느새 강율이 유나 뒤에 있었다. 유나는 사진 속 양정태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렴풋 남아있었지만 강율이 원투 펀치를 날리는 통에 그 모습이 날아갔다.
강율은 교복을 벗고 통이 큰 긴 바지와 검은 면 티를 입고 있었다. 모습이 꼭 권투 선수 같기도 하고, 태권도 선수 같기도 했다. 목에는 글러브를 두르고 머리에도 글러브 비슷한 것을 꼈다. 유나는 골무를 머리에 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아껴야 하는 법이다.
“너도 멋있는데?”
“진짜? 고마워. 근데 내가 하는 거 보면 더 멋있을 걸? 너, 내 시합 때 올 거지?”
“응?”
“얘가! 진짜 요즘 정신이 없네. 나 이번 달 말에 전국킥복싱선수권대회 나간다니까! 너 요즘 진짜 수상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율은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눈빛은 링 위에 올라 서 있을 때만큼이나 결의에 빛나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하나? 유나는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율이라면 괜찮겠지? 어차피 마음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조만간 율에게는 다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유나가 막 입을 열려는데 체육관 문이 딸랑하고 열렸다.
“우와 대박! 저 사람 네가 좋아하는 기자 아니야?”
강율이 입을 벌리고 서 있자 유나도 고개를 돌렸다. 손은영 기자가 유나의 눈에도 들어왔다. 유나는 눈을 깜빡였다. 손 기자 뒤로는 카메라맨이 한 손에는 카메라를 다른 한 손에는 삼각대까지 들고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손 기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유나와 율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 나 NBS의 손은영 기자야.”
“안녕하세요.”
강율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유나의 등을 떠밀었다.
“얘가 언니 되게 좋아해요. 완전 팬이에요.”
유나는 명함을 든 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래? 안녕! 반갑다.”
손 기자가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나는 손 기자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손 기자는 다시 강율에게 시선을 꽂았다.
“저기,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저요?”
강율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유나와 눈을 마주쳤다. 손 기자가 다시 말했다.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카메라맨은 손 기자의 뒤에서 렌즈를 조절하고 있었다. 유나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카메라의 렌즈를 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손 기자의 얼굴에 겸연쩍어하는 빛이 나타났다.
“어.. 그게.. 좀 민감한 이야기라. 강율 학생하고만 얘기하고 싶은데?”
“얘랑은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강율이 유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둘의 손에 낀 반지에는 Y&Y 이니셜이 반짝 거렸다. 손 기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장 관장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손 기자는 장 관장에게도 명함을 건넸다. 장 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 기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강율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하는 프로에서 2년 전 사건의 피해자를 찾고 있는데 그게 강율 학생이라는 제보가 있어서요.”
장 관장은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손사래를 쳤다. 강율은 누구에게 가해를 하면 했지 피해를 받을 애가 아니었다.
강율은 장 관장과 서 기자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도 입을 벌린 채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속으로 헐! 대박을 연발했다. 반면 유나는 손이 떨리는 걸 애써 감추고 있었다. 율이 피해자라고? 내가 아니라? 유나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듯 했다.
유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내내 꼭 발밑의 지뢰를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터지지 않는다. 심지어 안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침 체육관 문이 딸랑하고 열리고 이번에는 중국집 배달원이 들었다.
“이제 다들 가주시죠. 저희가 아직 식사 전 이어서요!”
장 관장의 말에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평일 오후, 유나의 집 앞 성당은 조용했다.
스테인 글라스 사이로 색색 깔의 빛이 밀려들고 멀리서는 간간히 아이들 떠드는 소리와 새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유나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여기를 오면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을 느꼈다. 유나는 성당에 홀로 앉아 한참동안이나 더부룩한 배를 밑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자장면을 몇 가닥 먹지 않았지만 몸속에 밀가루들이 위의 통로에 꽉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은 기분이다. 밀가루가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건 다 그 영상 때문이다. 자신을 보러 몰려온 구경꾼 때문이다. 거짓말쟁이가 된 자신 때문이다. 율의 화난 그 표정이라니! 유나는 율이 꼭 자신의 오물을 다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나 때문인가? 내가 얘기를 안 해서?’
유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몸이 떨려왔다. 유나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강율의 이야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런 자신이 싫어져 입술에 잇자국이 나도록 꼭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 이따 율이 준 반지를 돌리고 또 돌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름 행복했었는데……. 불행은 꼭 뜻하지 않을 때 자기 마음대로 온다.
유나는 천장에 매달린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율에게 톡을 보냈다.
유나: 어디야? 아직 체육관?
율 : 응. 왜 벌써 나 보고 싶어?
유나: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돼?
율 : 웬일이야? 나야 언제나 콜이지♡
유나는 서둘러 자기 집을 향해 갔다. 결심이 변하기 전에 율의 집에 가야했다. 그러려면 먼저 집에 가서 이것저것 챙겨야했다.
같은 시간, 할은 화실 앞에서 하염없이 유나를 기다렸다. 그래도 유나가 오지 않자 이번에는 성당을 지나 유나의 집으로 향했다.
‘도대체 또 어디를 간 거야?’
할은 이제 하루라도 유나를 보지 못하면 불안했다. 그리고 혹시 유나 옆에 강율이 있다면…….
이제는 강율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둘 다 괜찮을 테지만. 뭐 혹시나 아주 혹시나 말이다.
한강을 마주 보며 높이 솟아 있는 아파트 현관에 양정태가 주차를 했다. 손에는 며칠 전 한식집에서 오근찬이 놓고 간 홍삼박스가 들려 있었다. 오근찬은 요 며칠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급한 놈이 우물을 판다고 양정태는 오근찬의 집으로 찾아가 이런 저런 법률 조문을 더 얻을 생각이었다. 마치 자신의 친구의 이야기인 냥 물으며 말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와 합의만 잘해도 잘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피차 법정을 가서 더러운 꼴을 보느니 다들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하면 된단다. 양정태는 부잣집 아내 덕에 돈이야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터무니없는 금액을 줄 수는 없는 일! 오근찬에게 조언을 좀 얻은 다음, 슬슬 피해자를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피해자야 사람을 시켜서 경찰 쪽에 물어보면 금방 나타나지 않겠는가! 그것도 뭐 오근찬이 알아봐주면 더없이 좋겠다.
‘이왕이면 좀 가난한 애면 좋겠는데…….’
양정태가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며 근찬의 아파트 현관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멀리서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뛰어왔다. 그는 안경을 고쳐 썼다. 닮았다. 주먹을 꼭 쥐고 앞을 향해 달리는 모습, 이목구비까지.
분명 오근찬의 딸이다.
“안녕?”
양정태가 달려오는 유나를 향해 인사를 날렸다. 유나는 멀뚱히 선 채 어영부영 인사를 받았다. 찰나지만 유나의 눈은 적대감을 내비쳤다. 요즘 애들이란! 양정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근찬이 대학동창인데. 근찬이 딸, 이름이... 맞다. 유나 맞지? 반갑다.”
목소리. 유나는 흠칙 놀랐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두 어 걸음 뒷걸음을 쳤다. 아빠의 친구라고? 유나의 눈에 양정태는 아빠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다부진 체격 덕분일 수도 있고 바른 자세가 한 몫을 하는 걸 같기도 했다. 양정태는 친근하면서도 세련되게 악수를 청했다. 유나가 뒷걸음을 쳤는데도 더 다가오거나 꺼려하지도 않았다.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웃으면서 여전히 손을 허공에 들고 있다. 유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양정태의 얼굴을 꼼꼼히 보았다. 잘 모르겠다. 목소리. 그래 목소린 비슷하다. 하지만 아빠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단번에 날 알아보지 않았나. 유나는 양정태의 손을 잡는 대신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양정태는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대신 집으로 함께 들어가자며 유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순간 유나의 몸이 굳었다. 어깨에 벌레가 붙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떼어내지도 못하겠다. 유나는 가방 끈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날 이후 이정도로 몸이 누군가를 크게 거부하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사건 직후 비슷한 체격과 나이 때의 남성만 보면 몸이 굳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도 어디서 들리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유나는 그때처럼 얼음이 됐다.
‘누가 좀 도와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유나의 팔을 거세게 당겼다. 유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할이었다. 할은 양정태를 보며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야?”
“어...”
유나가 구할을 보며 우물쭈물하는 사이 양정태는 할을 보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여튼 요즘 애들이란! 보아하니 유나의 남자 친구 같았다. 양정태가 할을 보며 막 말문을 열려는데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애인의 문자였다.
자기, 뭐하고 있어? 심심하면 이거 봐. 그때 ‘살려줘’ 영상 꽤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아서.
피해자 사진이 떴네. 꽤 예뻐. 뭐 나보단 못하지만!
메시지 끝에는 강율의 졸업사진이 있었다.
양정태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 속 강율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이럴 수가! 양정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어째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사진 속 인물은 얼마 전에 후배가 데려온 그 학생이었다.
‘어쩐지…….’
양정태는 홍삼을 유나에게 쥐어주고 급하게 사라졌다. 후배를 먼저 만나봐야 했다. 강율의 배경을 좀 더 파볼 필요가 있었다.
남은 건 유나와 할이었다.
“어.. 난 여기 지나가는 길에...”
할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횡설수설했다. 그러더니 바쁜 일이 있다면 양정태와 마찬가지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할은 몇 발자국 갔다가 다시 돌아와 가방에서 전기 충격기를 유나에게 꺼내 주고 갔다는 것이다. 위험할 때 쓰라는 말과 함께. 유나는 돌아서는 할의 뒷모습을 보며 전기 충격기를 쟤한테 써야 하나? 고민하다 한 손에는 홍삼박스를 한 손에는 전기 충격기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