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아이돌 9화: 어그로의 꽃, 스캔들
“자, 티엠을 책임질 대들보! 티엠 주식의 미래! 자 나와주세요, 젝시! 그리고 베드~엑스!”
엠씨가 우리를 소개 하자 방청객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한다.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신기할 다름이다. 그리고 우릴 보고 웃고있는 제로세븐의 남진혁 그리고 토미 형. 자리에 앉아 정해진대로 팀 인사를 하고 한명씩 자기 소개를 한다. 우리 멤버만 아홉, 그리고 젝시 멤버만 여섯이라 은근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같이 스튜디오 촬영이라 왠지 마음이 놓이는 건 사실이다. 전학갔는데 그 반에 아는 애가 있는 느낌 이랄까.
춤 멤버가 나와 간단히 곡 홍보를 하고선 이젠 다들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예능 담당은 아니라서 그래도 좀 할만한 시간이었다. 웃긴 게 그렇게 방송을 하고싶어 죽겠었는데 아직 예능은 좀 어렵다.
“그러면 그러면, 현진씨가 맏형이잖아요. 팀에서 또 유일하게 스무살이고.”
“네.”
“오, 그런데 말하는 게 상당히 귀여우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잘생겼어, 잘생겼어.”
“아.. 감사합니다.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패널들에게 또 감사인사를 한다. 말곤 딱히 할말 도 없는 걸.
“그런데 리더는 현호씬데 혹시 리더 정할 때 하고싶다거나 그런 얘긴 안했어요?”
“네, 제가 맏형이기는 하지만 제가 봐도 현호가 더 카리스마가 있어요. 저는 좀 더 다정한 타입이고요. 사장님이 꼭 데뷔 팀은 첫 무대 전에 밥 사주시거든요. 저녁 먹으면서도 그러시더라고요, 현호가 아빠라면 제가 엄마같은 역할을 해주라고.”
“오~ 그럼 베드엑스의 부부네요.”
하하하하하하. 때 맞춰 터지는 박장대소.
“현진형이 연습생활 할 때도 많이 챙겨줬어요. 저 처음 한국 왔을 때부터 형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아무도 저 신경 안 쓰는데, 밥 못 먹으면 안된다고 배달앱 쓰는 법부터 알려줬다니까요.”
제이가 말할 때마다 빵빵 터진다. 어눌한 발음에 귀여운 제스추어가 잘 먹히는 거 같았다.
“어때요, 제로세븐이 볼 땐 어떤 후배들이였어요?”
“저 사실 젝시랑 베드엑스에 같이 연습했던 친구들 있어요.”
“오, 그럼… 동갑인 친구들인가?”
“맞아요, 현진이랑 저기 수현이.”
진혁은 특유의 눈웃음을 하고 무해한 척 혀를 내밀며 웃는다. 으, 저 가식적인 새끼.
“저희가 다 같은 해에 회사에 들어왔어요. 어쩌면 현진이가 제로세븐이 될 수도 있었겠죠??”
방청객에서 익룡소리가 들린다. 알았어, 너네 오빠 자리 요만큼도 탐 안낼게.
“두분은 어땠나요? 친했어요? 진혁씨랑?”
“완전 친했죠~ 저희 막 예전에 체중 재는 거 피해서 도망 나갔다가 라면먹었는데 걸린 적도 있고 그래요. 같이 혼나고 화장실로 숨고 몇번 그랬는데, 되게 재밌던 추억이죠 이젠.”
“아니, 수현씨는 화장실에 어떻게 갔대요? 거긴 남자 화장실 아냐?”
“아뇨, 아뇨. 그런 화장실 아니고 왜 편의점 옆 건물에 붙어있는 화장실 같은 거 있잖아요. 남녀 공용 같은 데. 그런 데로 숨고 그랬었어요. 하하. 기억 나지 너네.”
방청객의 안타까운 리액션. 여기까지는 대본대로 잘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남진혁은, 사전에 없는 얘길 꺼내기 시작했다.
“저 수현이 처음 봤을 때 되게 놀랐었어요.”
“왜요?”
“너무 예뻐서?”
하핳하하 혼자만 웃고, 당황하는 나머지. 그리고 꺄악 꺄악 소리지르는 팬들과 패널들. 특히 수현은 눈에 띄게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지네 오빠들한테 묻어간다고 제로세븐 팬들이 수현의 팀과 내 팀 둘 다 곱게 보지 않는 상황인데 여자 동료에게 저런 소리를 던지다니.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진혁의 표정을 살폈다. 남진혁은 누가 뭐라 그러든 말든 순진한 얼굴로 이 리액션을 즐기고 있었다.
“수현이가 예쁘기도 한데 뭔가 느낌이 특이? 했어요, 보면 좀 모델 같은 느낌이지 않아요? 키도 크고."
토미 형이 수습을 하려 하려는데 남진혁이 덧붙인다.
"그래서 더 눈에 띄더라구요. 그리고 워낙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춰서 수현이 월평 할 때마다 넋놓고 봤었어요.”
쐐기를 박는다. 내일부터 백수현의 안티팬은 엄청나게 늘어날 거다. 저새끼 무슨 꿍꿍인 거야.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날 정도로 영악한 녀석인데 모르고 저런 발언을 했을 리가 없다.
“진혁씨 혹시 수현씨 좋아했던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그냥 말 그대로 예뻤다. 그게 다였어요. 하하. 이게 더 이상한가.”
“오~ 분위기 묘한데? 수현씨는 좀, 진혁씨 어땠나요. 두분이 처음 알 떄면 중학교 2학년 때 아냐. 알 거 다 알 때지.”
마이크가 수현에게로 넘어간다. 긴장한 얼굴이 역력해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여기서 인정을 해도 웃기고 안 해도 욕먹을 건 뻔하니까.
“진혁이도 당연히 멋있었죠..,”
뒤 이어 말하려는데 패널들이 자리에 일어나며 오바를 한다. 사겼네 사겼네. 서로 좋아했네~ 하면서. 젝시 멤버들도 모두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손사레를 친다.
“멋있고, 다 잘하는 친구였어요. 저는 그때 연습만 하느라 뭐 다른 건 생각하고 그럴 겨를은 없어가지고…, 개인적인 감정을 생각할 순 없었던 거 같아요.”
가까스로 문장을 완성해내는 수현. 나는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진혁은 처음부터 수현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거다. 아무리 그래도 타칭 자칭 사장님의 딸랑이인 저 자식이 이런 똥을 끼얹다니, 이제 막 데뷔한 애를. 무슨 생각인 거야?
쟤만 생각하면 도대체 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방송이 끝나고 수현의 매니저는 사색이 되어 제로세븐의 매니저와 상의하고 있었다. 어떤 수라도 좋은 수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남돌인 제로세븐. 그리고 그 중 막내와 이상하게 엮여보일만한 빌미를 이렇게 쉽게 내주다니. 매니저들은 피디와 뭔가 얘길 하는 것 같았지만 피디는 웃으며 몇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듣지 않아도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알 것 같았다.
“수현.”
벤에 타려고 지하주차장 앞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백수현에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얼마나 쫄아있던 건지, 내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거 같다.
“아, 응.”
“괜찮아?”
“…..뭐 그래야지.”
“하. 괜찮을 거야. 같은 기획사니까, 쟤네 팬들도 까다 말겠지.”
“……..”
수현은 괜찮아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우린 아직 안티에 면역이 없다. 나라도 벌써 탑아이돌이랑 이렇게 엮이면 존나 무서울 거다. 요즘 악플 다는 사람들 사람들 보면 얼마나 지능적이고 욕도 고차원인데.
“미리 걱정하지 말고.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관심 받는 게 나으니까…”
“…….”
이건 괜히 말했다. 사실 아직 악플. 별로 필요없다. 데뷔한지 이제 한달도 되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우리 두 그룹의 반응은 대박이었으니까. 남자 팀인 우리는 순탄하게 덕후생산을 하는 중이었고 젝시는 해외에서 제일 잘나가는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데뷔하자마자 음원 1위였다. 그 중 수현은, 예능 멤버에 리더로 뽑혀서 대중들에게 얼국 각인 시키는 것도 순항 중이었다. 진짜 어떡하냐.
“현진아! 뭐해, 차 타.”
“네. 갈게요! 야 백수현, 쓸데 없는 생각 하지말고 일단 숙소 가서 쉬어. 방송날 인터넷 보지말고. 알았지? 연락할게.”
“어. 들어가.”
벤이 닫히자 나와 같이 탄 멤버들이 수현이 괜찮냐며 묻는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 * *
방송이 나오는 날.
회사 내에서는 회의를 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다 말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하필 남진혁이랑 엮인 얘기라 어차피 기사는 우후죽순 쏟아져 나올 거고 생각보다 이렇다할 말들이 없으면 반응하지 말자고. 그리고 혹시라도 수현에 고정 악플 세력이 등장하면 그 때 둘이 연습생활 때부터 거의 동성처럼 친한 그런 단짝 컨셉으로 밀자고 했단다.
하, 말이 좋아 단짝 컨셉이지. 이제 막 데뷔한 나한테도 위에 여자 선배랑 베프니 뭐니 하면 벌써 신선도도 신비감도 다 잃는데. 여돌인 백수현은 더 이미지 타격이 클 거다. 남진혁 미친놈 아니야? 듣기로는 그날 토미형한테도 혼나고 상무님한테도 불려갔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해서 백수현을 멕인 이유는 뭐야?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저 지랄을 펼치는 건가.
헷갈리는 녀석이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인 내게 개인시간이란 그냥 없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기에, 진혁과 단 둘이 만나길 바랐지만 그럴 일은 앞으로, 당분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자꾸 이 새끼랑 연락하는 거. 나도 싫다만 어쩔 수 없다.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바쁘겠지, 그래. 이러는 시간에도 진혁은 중국으로 광고 찍으러 갔다.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놈이니까 지 마음대로 사는 건가.
드디어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잠에 들려는 찰나. 진혁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전화했었네? 안 그래도 연락할라 그랬는데.]
“하… 야 남진혁.”
[뭐야 웬 분위기를 잡아. 소름돋아, 빨리 말해.]
“너 방송 봤어?”
[문 방송?]
아 새끼 똥은 싸놓고 똥 싼 기억조차 없기냐.
“… 우리 지난 주에 촬영한 거. 너 백수현한테 예쁘다고 개소리한 날.”
[이게 선배한테 된소리를. 뭘 봐, 보기는, 바빠 죽겠는데.]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너야 팬 많고 원래 이미지 날라리니까 별일 없겠지만 백수현은 이제 막 데뷔한 애야. 무슨-.”
[야, 정현진. 적당히 해. 니가 뭔데 백수현 일이라며 눈알 뒤집혀서 나대냐? 너 선 넘지? 지가 매니저야 뭐야.]
“…남진혁. 우리 그래도 친구 아니였냐? 걔나 나나 곤란하게 해서 니가 얻는 게 뭐가 있어서 자꾸 그러는 거야.”
수화기 넘어에선 오바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진짜 웃겨졌다. 하면서.
[야, 나 정도 급 되는 애가 얘랑 친했네, 예뻤네 하면 백수현이 개이득인 거야. 이 쪽 생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어그로의 꽃, 스캔들. 몰라? 그것도 이렇게 소프트한 스캔들이면 젠틀하지, 이런 거 가지고 너 이러는 거 되게~ 이상해보여.]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니가 나 데뷔 하고 나서부터 더 이상하게 굴어. 차라리 전 처럼 무시를 해.”
[너 백수현 좋아하냐?]
“…..미쳤나. 진짜.”
존나 발끈하네. 좋아하네 이거.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경박스런 웃음소리. 됐다. 됐어.
“좋아한다고 하면, 그럼 너 안 그럴래?”
[아하하하하, 뭘 안 그래. 내가 뭘 했다고. 아, 말 나온 김에 백수현 꼬셔볼까.]
“….야 끊어, 짜증난다.”
더 이상 듣고있다가는 머리 속에 퓨즈가 끊길 것 같아서 가까스로 참아낸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진혁이 나를 다시부른다.
[야, 정현진. 장난 그만 까고, 나 할말 있어서 전화한 거니까 제대로 들어.]
“……”
[백수현한테 내 말 또 무시했다가는 더 좃될 줄 알으라고. 알아서 하라 그래.]
“야 이 미친, 너 수현이한테 무슨 짓했어?!”
[말했지, 백수현한테 직접적으로 바라는 거 하나도 없다고. 그 년이 괜히 비싸게 구는 거야.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뭔 개소리야, 또라이 새끼야.”
[나 솔직히 이제 그룹 활동에도 그렇게 미련 없어. 솔로도 낼 거고, 봤지 나 강남바닥에 아는 사장님들 넘치는 거. 사업도 시작할 거야. 내 레이블도 만들거고. 나, 더 무서울 거 없어.]
남진혁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씨부리기 시작했다.
[똑바로 전해.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다가는 이번 일,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만들어 준다고.]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런 식이라니. 이 자식이 백수현을 괴롭히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겠다만, 다른 말들은 내 기준에선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이 돌아가더라도 할말은 해야 겠어서 남진혁에게 한바탕 쌍욕을 퍼붓고 전화를 끊었는데, 이번 일만큼은 내가 한 게 옳은 건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