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아이돌 6화: 수상한 제안
숙소인 논현동 빌라 2층을 내려와 유리 대문을 여니 이 작은 골목에 짙은 무광 회색의 레인지 로버가 서 있었다. 햐, 돈이 좋긴 좋네. 문을 열고 올라타니 남진혁이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채로 씨익 웃는다. 어느 순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새끼는 분명 못생긴 것도 아닌데 인상이 구리다.
“굿모닝.”
“하하. 그래, 너도 좋은 아침.”
“야, 죽이지 않냐.”
“뭐가?”
“이 차.”
“아… 어, 좋네. 얼마쯤 해 이건?”
옛다, 니가 원하는 질문.
“얼마 안해. 한 2억 하나?”
우.와. 기계적인 리액션으로 진혁의 기분을 띄워준다. 워낙에 또라이라 또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모르니까. 데뷔 전엔 최대한 아무 일도 만들고 싶지 않다. 뭐, ‘타임워프 운명’의 뜻에 따르면 지금 내가 이렇게 나오는 게 이번 퀘스트를 미션 컴플릿~ 하는 거라 하니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동식이 형한테 들었어. 사장님이 나 오늘 빼도 된다고 했다고.”
“유아 웰컴.”
하, 새끼, 진짜 외국물을 이상하게도 쳐먹었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남진혁을 만난 이유를 알아내야 이번 퀘스트를 안전하게 마칠 수 있을 것 같기에. 나는 나사 하나 빠진 애처럼 멍청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다음 팀에 나 데뷔한다는 건 어제 사장님한테 들은거야?”
“하하. 궁금하냐?”
“당연하지. 존나 궁금해.”
“으흐흐.”
뭐야 미친놈 왜 말을 안 하고 쪼개.
“일단 밥부터 먹자. 차차 말해줄테니까.”
도착한 곳은 도산공원 근처의 한 타파스 빠. 보통은 이렇게 낮부터 열진 않지만 진혁이 아는 사람이 하는 곳이라 쉽게 들어왔다. 녀석은 한산한 거리에도 혼자 엄청 의식하며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발렛을 맡겼다. 알아봐 달라는 건가. 하여간 행동 하나하나가 다 부자연스러운 놈이다. 곧, 아주 짧은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8대 2가름마를 한 멀끔한 남자가 쉐프복을 입고 나타났다. 진혁은 일어나 그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며 하이파이브를 하며 인사를 한다.
“형, 여기 우리 회사 연습생. 곧 데뷔해.”
“오, 안녕하세요. 잘 보여야 겠네. 자주 와주세요.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네. 안녕하세요. 정현진이라고 합니다.”
얼결에 일어나 인사를 한다. 곧 둘은 둘만 알아들을 것 같은 토픽들을 늘어놓다가 진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스무살 특유의 청량한 미소는 걷어내고 다시 내가 아는 거만한 표정. 이게 니 디폴트인 거지? 하얗게 탈색한 머리에 녀석의 또랑또랑한 눈은 얼핏보면 미소년같았지만 그렇지 못한 저런 표정은 그 예쁜 얼굴마저 잊게 만든다. 왜 이렇게 변한거냐 너.
“너 안되겠다.”
“뭐가.”
“옷 좀 줘? 뭐 그딴 걸 걸치고 나왔어.”
“……”
“있다 매니저 형한테 너 옷 좀 갖다주라 그럴게.”
티엠, 품위 유지비 안 주나. 뭔 거적대기를…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궁시렁대며 문자질.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뭐하는 거야. 오래지 않아 차례 차례 음식이 나왔다. 예쁘기도 하네. 엔다이브니 뭐니 하는 알배추같이 생긴 거랑 견과류와 엔초비가 담긴 접시부터, 케비어와 트러플이 몇장이나 켜켜이 쌓인 튜나 타르타르인지 뭐시기 까지. 솔직히 다 실제론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점심 장사는 하지 않는 곳이라 당연히 이 널다란 곳엔 나와 남진혁 둘 뿐이었고 그래서 더 어색했다. 데이트냐고.
어설프게 포크질을 하고 있는데 문득 보니 진혁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 끝엔 음흉한 미소. 아이씨, 이제 나도 참을만큼 참았다. 새끼야 할 말 있음 빨리해.
“어제.”
깜짝이야. 뭐야 이 자식 독심술사야?
“사장님이랑 미팅했어. 독대로.”
“어. 그렇구나.”
“사장님이 토미형 아끼는 거 같다가도 꼭 중요한 얘기는 나랑 하더라고. 내가 팀 막내긴 해도 날 제일 믿는 거지.”
“어어~”
“넌 인마, 지금 줄 잘 탄거야.”
뭔 개소리야.
“사람들 알지도 못하면서 제로세븐 하면 토미형이랑 준희형이 팀 중심인 줄 알지. 우리 팀 형들, 음악 말고 할 줄 아는 거 아무 것도 없어.”
도대체 뭔 소리지? 아이돌이 음악 잘하면 돼지 또 뭐 해야 해, 아.., 연기, 예능 뭐 이런 거 말하는 건가?
“뭘 이렇게 맹하게 쳐다봐. 너 무슨 말인지 모르지, 지금?”
“어.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려는 얘기가 뭐야?”
진혁은 또 입꼬리 하나만 올려 야비하게 웃었다. 사람 한심하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로 픽 하고 웃으면서. 하여튼 재수 털리는 새끼…
“이 바닥도 결국 사람 잘 다뤄야 오래 남아. 그리고 너, 계속 춤, 노래나 하면서 시키는 거만 할래?”
“……”
“사장님 따로 패션사업 시작하신 건 알지?”
“응 뭐. 알지 그 정돈. 기사로도 나왔고.”
“그거, 해외 겨냥이라 결국 다 인맥이야. 내가 또 그런 거 잘하잖냐.”
“응. 근데 진혁아, 너는 나 데뷔하는 거 어떻게 알았고, 계획 들은 거 있음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서 나온건데-.”
“아, 정현진. 성격 졸라 급하네. 들어봐 좀.”
니가 계속 말을 빙빙 돌리니까 그렇지.
“흐. 운 좋은 줄 알아. 너 방송 나온 거 보고 싱가폴 쪽 투자자가 너 마음에 든다고 꼭 키워준댄다.”
“어?”
이게 뭔 소리지. 스폰..? 같은 거야? 말로만 듣던.
“스폰 같은 거 아니야 새꺄. 쫄기는.”
이 새끼, 진짜 독심술 있나…
“그럼 그 사람이 왜 날 키워주는 건데?”
“빙신아. 그거야 우리가 알 이유 없지. 다마고찌 하듯, 포켓몬 하듯 지가 찍은 거 키워주는 게 너무 재밌나 보지.”
“…너도 그런 사람들 있었어?”
“아~, 얘 또 선 넘네.”
진혁은 금방 인상을 구긴다. 나를 띠껍게 쳐다보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의뭉스러운 미소 장착.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 투자자가 너 크는 거 보고싶다 그래서 사장님이 나 어제 부른 거라고. 무슨 뜻인지 몰라?”
“…..”
“이게 무슨 뜻이냐면 빙신아, 너 존나 밀어준다. 그 소리야.”
아. 이 얘길 들으라고 시간이 되돌아갔던 건가. 아니 근데, 나 밀어줄 거라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그래 뭐. 알겠어.”
나는 기분이 더러운 걸 애써 감추며 소고기 초밥 위에 성게알이 올려져 있는 걸 집어 들었다. 안 먹어본 걸 계속 입에 넣고있자니 맛은 있는데 이게 뭔 맛인지는 잘 모르겠는 느낌이였다. 분에 넘치는 맛이랄까.
“근데,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그 분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한테 뭐 바라는 게 있는거야?”
“야. 오바하지마. 우리 회사가 괜히 티엠이냐. 아티스트한테 절대 스폰, 이런 거 안 붙여. 이상한 식으로 몰아가지마.”
“알겠는데, 그래도 이상하잖아.”
“그냥 친하게 지내자 이거야. 돈 많은 사람들, 잘 나가는 연예인이랑 노는 거 좋아하거든. 그걸 자기가 만드는 거면 이상하게 더 좋아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재밌나봐, 그게.”
“진혁아.”
“어.”
“내가 이십년밖에 안 살아봤지만 세상에 대가 없는 거 잘 없더라. 난 이게 이상하게 들려. 친해질 거면 그냥 뭐 막말로, 너 통하거나 해서 따로 만나서 친해지면 되지. 투자금을 왜 넣어?”
듣던 진혁은 정말 답답했는지 유난히 짜증나 한다.
“순진한 놈아. 데뷔해봐라. 이 바닥 그냥 다 돈이야. 우리 사장이 그런 사람한테 너 좋단 얘길 들었는데 옳다구나 하고 너 바로 데려가서 밥멕이고 친해지세요~ 하겠냐? 회사 투자라고 생각하고 주는 돈은 받아야지.”
하여간 바보도 아니고. 진혁이 혀를 끌끌 찬다. 다시 들어도 찜찜한 제안이지만 가끔 인사나 해주고 밥이나 먹어주면 된다니까 일단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게다가, 지금 남진혁이랑 이런 자리를 오는 게 맞다고 ’아이돌 시뮬레이션의 신’께서 그게 운명이라고 하시니까. 일단은 오케이.
남진혁은 나를 숙소에 데려다 주면서 명함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형식적일지라도 관심 주셔서 감사하다고,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를 하라고 간단한 영어 문장까지 알려줬다. 이게 괜찮은 건가… 정말 모르겠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 * * *
왠지 내키지 않아 하루를 그냥 보내고 회사로 출근했다.
연습실에 들어오니 정말 남진혁이 말한대로 인사팀장까지 내려와서 오늘 데뷔 명단이 나왔다고. 티엠의 새로운 남자 아이돌로 확정된 애들만 여기 온 거라며 서로 인사하라고 시켰다. 그동안 유닛을 여러모로 짜서 가장 캐미가 맞는 9명으로 팀을 만들었다며. 2년이나 같이 살긴 했지만 정말 같이 데뷔할 될 줄은 몰랐는데 제이와 민호도 함께라, 하하, 이건 진짜 기쁘더라. 얘네 잘하는 건 내가 더 잘 아니까.
팀명은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 뭐가 중요한가 싶다. 팀 이름이 뭐 떡볶이, 연필, 지우개 이런 거라도 좋을 것만 같다. 뭣이 중혀,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비록, '아이돌 시뮬레이션’님이 내게 강림하고 약간의 치트키를 쓰고 나서야 이뤄낸 성과지만 아무렴 상관 없다. 일단 데뷔하면 됐지!! 나도 이제 아이돌이라고..!!
이제 진짜다. 정말 열심히해서, 보고싶을 때마다 볼 수 있게 우선 집부터 사고 엄마 꼭 서울에 오게 해야지. 하하.
“너네들 누구보다 열심히 한 거 잘 아니까, 한 팀으로 데뷔하는 거다. 아직 서로 어색한 애들도 있을텐데. 이번 기회에 숙소도 다같이 쓰게 바꿀 거고. 사장님이 특별히 합숙다녀오라고 하셔서 곧 합숙도 갈거야. 가서는 빡세게 안 돌릴테니까 우선 서로 편해지는데 집중하자.”
“네!”
어떤 때보다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울먹이는 소리도 들린다. 진짜 장수생인 현호. 나보단 한살 어리지만 연차로는 7년 차니 충분히 그럴 자격있다. 이렇게 너나 나나 끝내 버티고 버텨서 막차 탔구나 싶어 왠지 찡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바빠진다. 팀 컨셉을 정하고, 전담 프로듀서에 다른 유명 작곡가, 작사가, 편곡가 까지 있는대로 섭외를 하기 시작했다. 한명, 한명 각각의 캐릭터 또한 만들어야 하는데 내 캐릭터는 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큰 키로 기럭지를 담당하고, 또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얼굴로 구우우욷이 말하자면 훈훈한 대딩 남자친구 같은 이미지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성격은 다정하지만 쑥스러운 성격으로 세팅. 사실 난 할 말 다하고 시니컬한 타입이지만 앞으론 열심히 소녀들의 환상을 지켜줘야지. 하하.
회의를 끝낼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내심 뉴스를 들은 백수현일까 싶었는데 남진혁이다.
[문자 했어?]
이걸 답해야 하나. 나는 방을 들어가지 않은 채로 살짝 보고 내버려둔다.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해, 짜증나게 하지 말고.]
아니 이게 또 그렇게 빨리까지 해야 할 사안이야? 나는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들어 문자를 씹는다. 그러자 곧, 하 씨, 데자뷰. 연습실 바닥이 쿵쾅 쿵쾅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았다, 이 타임워프 신아, 보내면 될 것 아냐!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봤지만 이미 나는 또 시공간에서 사라진다. 뿅.
하. 이런 회차 결말 패턴 이젠 좀 지겨울라 그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