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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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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땡글
작품등록일 : 2020.9.27

쓸쓸한 삶과 죽음을 대하는 고귀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일상은 우릴 깨닫게 하거나 무뎌지게 했다
작성일 : 20-09-27 21:38     조회 : 361     추천 : 0     분량 : 1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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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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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늦어?............ 지금 시장인데 저녁 뭐 먹을까?”

  그와 동거를 시작한지 6개월이 흘렀고, 변한 게 없는 듯 변해가고 있었다.

  난 봄 학기에 복학을 하지 못했다. 하려고 했으나 등록금이 부족했다. 연락이 뜸해진 데다 문자로만 안부를 전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결국 난 엄마를 볼 용기도 복학을 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한 달 전 쯤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난 휴학 상태였고 욕심을 버려야 했다. 딱히 용준이에게 내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근심을 표현하진 않고 있지만 그는 늘 내게 긍정적인 얘기를 해 주었다. “복학은 다음 학기에 해도 돼!” 면접에서 떨어졌던 날은 “다른 곳 알아보면 되지. 설마 너 일할 데 없겠어? 그 회사는 널 놓친 거야! 넌 너무 고급 인력이야!” 라고 말해 주었다.

  졸업을 앞두고 그는, 얼마 전 인턴으로 입사한 프랜차이즈 식음료 유통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가고 싶어 했던 회사였거나 관심분야나 전공분야도 아니었지만 최근 사람들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유망한 회사로 꼽히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매우 의욕적이었고 입사한지 이제 삼 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정작 난 괜찮았다. 처음엔 그가 괜시리 내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난 그라도 취직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말대로 여기저기 지원하다 보면 어디선가는 날 받아 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금요일이니 집에 일찍 오겠다고 했다. 저녁 메뉴를 묻는 내 질문에 ‘김치 볶음밥’이라고 답했다. 난 면접을 다녀오는 길에 근처 시장에 들러 주말에 먹을 장을 보았다. 김치 볶음밥에 넣을 돼지고기를 사고 한주간의 피로를 풀어줄 소주도 몇 병 샀다. 주말이 지나면 면접결과를 알 수 있다. 난 편하게 주말을 보내리라 마음먹고 소주 안주의 레시피를 머릿속에 되뇌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백짬뽕을 요리하기 위해 오징어와 홍합, 미더덕을 사왔다. 재료 손질을 해 놓으려고 냉장고 속 채소들을 살펴보았다. 양배추 사는 것을 깜빡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시계를 보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용준이 올 때까지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올 때 집 앞 슈퍼에서 양배추 좀 사다줘.]

  난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놓고 김치 볶음밥과 백짬뽕을 만들 재료를 준비했다. 소주는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 요리 실력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만든 음식을 늘 잘 먹어 주었다. 또 한 번 오붓한 저녁 식사를 기대하며 요리하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다. 잡생각을 떨치는 데에도 그만이었다.

  “어디쯤이야?”

  김치 볶음밥을 끝내고 그 위에 올릴 달걀 후라이만 하면 되었다. 백짬뽕 재료와 양념을 준비하고 주방 정리까지 마무리한 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음........ 지금 양배추 사러 왔어. 금방 가!”

  슈퍼마켓에서 집까지 십 분 이내. 난 테이블을 세팅했다. 소주잔을 놓았고 먹기 전 냉동실에 넣어 둔 차가운 소주만 꺼내면 되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 시간에 맞춰 달걀 후라이를 했다. 정성을 들여 서니 사이드 업을 성공시켰다. 그가 오지 않아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현관 문 쪽으로 내 신경은 쏠려 있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난 그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중이었다. 뭔가 중요한 통화를 하느라 못 오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달걀 후라이가 식어 버렸다. 다시 한 번 그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난 베란다로 나가 빌라 입구 쪽을 내려다보았다. 입구로 향했던 내 시선은 곧 그의 목소리를 따라 빌라 입구 맞은 편 작은 골목으로 옮겨졌다. 어두운 골목에 서 있는 그의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에 나타났고 통화중인 그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하하......... 그래?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갖다 줄게........ 걱정 마........ 그래........ 내 걱정하지 말고 얼른 푹 쉬고 있어.......... 월요일까지 아프면 오빠한테 혼난다......... 그래........ 약 꼭 챙겨 먹고 자......... 잘 자.........”

  그의 한 손엔 서류가방과 양배추로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우연히 그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고 난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전화를 끊은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희미했지만 또렷이 보였다. 그는 휴대폰을 보며 부재중 전화기록을 확인했는지 빌라 입구로 얼른 뛰어 들어왔다. 난 당황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설마........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곧 초인종이 울렸다. 난 심장이 더욱 뛰었다. 심호흡을 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고 그저 내 불안정한 심리상태 탓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당황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벨이 울렸다. 난 문을 열었다.

  “문을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자! 양배추. 음....... 냄새 좋은데?”

  그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고 시선은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재킷을 벗고는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이거 하느라 문도 늦게 연 거야? 음........ 맛있겠다. 배고파 죽겠어. 아참! 지난 번 명절 때 내가 선물로 가져왔던 그거 말야........ 그 전통 차 세트....... 거기 모과차가 있었지?”

  그의 목소리 톤은 여전했고 손을 씻으며 내게 물었다.

  “어......... 왜?”

  “너 혹시 그거 먹었어?”

  “아니......... 근데 그건 왜?”

  “잘 됐다. 그것 좀 회사에 가져가려고........ 환절기고 해서........ 목이 좀 아프더라고. 회사에서 먹으려고.......... 아, 그리고 참, 비상약이 어디 있지? 지난번에 원주에서 보내온 공진단 같은 거 있었는데.........”

  손을 씻고 나와 대충 옷에 문질러 닦으며 그는 식탁을 향하지 않고 비상약통을 찾아 서랍들을 여기저기 열어 재꼈다.

  “연희야, 그 모과차 유통기한 날짜 좀 확인해 줄래?”

  그는 서랍을 뒤적거리며 내게 말했다.

  “배고프다며? 밥부터 먹어. 김치 볶음밥 해 놨잖아!”

  난 정신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역시 정신없는 그에게 말했다.

  “알았어. 이것 좀 찾아놓고........ 어디 있더라..........”

  그는 내 말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배고프다며? 김치 볶음밥 먹고 싶다며! 차려 놓은 거 안 보여?”

  억누르려 했지만 화가 삐져나왔다. 이번엔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화가 더 이상 참아지지 않았다. 참기를 포기하자 설움까지 밀려나왔다. 난 김치 볶음밥을 예쁘게 담아 놓았던 그릇을 들고 쓰레기통을 향했다. 식어버린 달걀 후라이가 밥 위로 미끄러져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졌다. 식은 밥은 그릇에 붙어 힘을 주어 털어냈다. 두 번째 그릇을 들고 다시 쓰레기통을 향했다. 그제야 그는 내 행동을 눈치 챘다.

  “뭐하는 거야?”

  그가 비상약통을 들고 서서 내게 물었다. 난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식탁 위의 음식들을 모두 버린 후 빈 그릇들을 개수대에 던져 놓듯 내팽개쳤다.

  “야! 왜 그래?!”

  요란한 그릇 소리에 그는 내게 소리쳤다.

  “밥 해 놨다고 했잖아!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내가 기다렸잖아!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해 놓고 기다렸잖아!”

  난 이성의 끈을 놓쳤다. 아니, 그냥 놓았다. 참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으나, 그는 처음 보았을 이런 내 모습을 그의 놀란 표정을 통해 느꼈다. 다시 생각했다. 내 행동의 이유를 알 리 없는 그 앞에서 섣불리 할 행동인 것인지. 난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뭐야? 뭐야........ 너 왜 그래? 연희야!”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난 크게 한숨을 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빠르게 고민했다. 비상약통을 든 채 얼어붙은 그를 보고 난 방향을 정했다.

  “미안.......... 미안해......... 모르겠어. 나도......... 나도 내가 왜 그런지.........”

  일단 나오는 대로 성토를 하자 더욱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답답함에 눈물이 났다. 난 그것이 뺨 위로 흐르기 전에 얼른 닦아냈다. 그제야 그는 약통을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나도 다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혼자 힘들어 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너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괜찮아. 잘 될 거야........ 괜찮아, 괜찮아.........”

  결국 난 그의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의 위로가, 위로가 되어서도 아니었고 무언가 해소되는 상황의 설움도 아니었다. 풀리지 않을 상황을 순간 화를 참지 못해 만들어 놓은 내가 원망스러웠고 더욱 답답함만 밀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속삭이며 계속 내 등을 쓰다듬고 있는 그가 너무 미웠다. 연락도 없는 엄마 생각이 나서 더욱 그랬다.

 

  그가 비로소 나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변치 않는 건 ‘변치 않는 건 없다’라는 사실 뿐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렇지 않을 것을 기대하거나 그렇지 않으려 노력한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그 모습은 참 궁상맞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만 그것을 모른 채 행한다.

  난 그렇게 엄마를 이해했다. 그 전에 아빠도 그랬고,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이 예전 같길 바라는 일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겐 더욱 그렇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어떻게,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감지하려 하며 그렇게 날 그냥 내버려두는 것에 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마치 겨울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여름을 홀연히 보내며 또 다시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면, 그 따스했던 태양의 배신을 맨 몸으로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 주위를 배회한 건 도리어 ‘나’라는 걸 깨닫게 되니까. 결국 ‘나’의 변화가 모든 것의 변화를 유도해 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는 걸 인정하는 게 이치에 맞을 것이다.

  용준이는 ‘나’로 인해 자신의 변화를 감지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난 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모든 일에 나의 의견을 묻고 눈치껏 제안하며 내 생각을 무조건 지지하고 따라주었다. 난 마치 그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어이없이 사라지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거였다.

  취직 후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주말 데이트나 외식도 자주 했다. 그는 최대한 내게 시간을 쓰려고 노력했고, 초여름이 될 때까지 일을 시작하지 못한 내게 잘 하지 않던 선물 공세까지 하며 기쁨을 주려 애썼다. 그런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노력이 계속될수록 나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는 것을. 내가 그런 그를 위해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쓸수록 이 깊어가는 고름이 언제 터질지 몰라 무섭기만 했다.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7월이 되었다. 꿉꿉했던 장마철이 끝나고 나서 난 지난 달 말에 보았던 한 자동차 영업소의 면접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무직이라는 것 이외에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아는 기업이긴 했으나 자동차에 대해선 문외한인 내가 온갖 아르바이트와 봉사활동 이력, 자격증 여부를 기록한 이력서와 미사여구를 남발한 자기소개서, 포토샵으로 보정한 가증스러운 표정의 사진을 수십 여 곳 뿌린 끝에 거둬들인 수확이었다.

  “축하해! 거 봐. 내가 그랬지? 이번엔 꼭 될 거라고. 내 느낌이 그랬다니까! 야, 이제야 우리 연희를 알아보는 회사가....... 하하. 야, 이제 그 영업소, 전국 영업 순익 1위 찍을 걸? 하하!”

  수요일 저녁, 합격 통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자 정작 나보다 그가 더 기뻐했다. 아니, 그런 척 해 주었다. 과장된 표정과 어휘들, 민망할 만큼 커진 동공과 그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그랬다. 좋게 봐 주어야 ‘배려’라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과장된 축하가 싫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기뻤고 그에게도 고마웠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반대로 너무 넘쳐서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여기는 내 자신이 못 미덥고 또 원망스러웠을 뿐이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이었다. 금요일 아침, 그는 출근을 하면서 나에게 제안했다.

  “우리....... 오늘 파티 할까?”

  “무슨?”

  “무슨 이라니! 너 취직 축하 파티 해야지. 저녁으로 뭘 먹을까? 내가 사올게. 오늘은 힘들게 요리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사먹자. 아! 케이크 사올까? 넌 첫 출근 준비나 하면서 오늘은 편하게 쉬어. 내가 다 준비할게.”

  그는 능글맞게 잘 하지 않던 윙크까지 하면서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난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도 나의 자격지심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작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도 난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름 터놓고 ‘문제’임을 받아들였을 때, 그와 나는 이미 변해 있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도달해 있음을 직감했다. 너무나 그대로이고 싶어서 지나치게 변해 버렸다. 난 계속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정신이 번쩍 든 순간이 있었다. 나 뿐 아니라 그도 역시 같은 상태였음을 깨달은 그 순간이었다.

 

  그래도 더 이상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근데 요즘엔 괜찮은가봐? 유 과장 땜에 그만두고 싶단 말도 잘 안 하고, 비교적 퇴근도 빨라진 것 같고........ 누구한테 잘 보이기라도 한 거야?”

  난 그저 괜히 스물 스물 올라오는 짜증을 식히려 화제를 돌렸을 뿐이다. 그는 옷을 갈아입다가 흠칫 놀라는 듯 보였으나 내가 그 모습을 눈치 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한 것 같았다. 난 그를 등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의 예민함은 초능력처럼 작용하기 시작해 공기의 흐름이나 미세한 온도 변화에도 상대방의 기분이나 마음을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잘 보이긴....... 내가 잘 보일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포기한 거지, 뭐. 유 과장도 그냥 그런 인간이려니........ 어떻게 보면 불쌍한 인간이야. 자기보다 돈 잘 버는 와이프한테 열등감 쩌는........ 뭐,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편해진 것뿐이야. 묵묵히 일만 하려고 마음먹은 거지. 그래야 오래 살아남고 또 그래야 우리 생활도 안정되지 않겠어? 후........”

  난 여전히 그를 등지고 우럭 회와 치킨을 그릇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와 맥주도 함께 놓았다. 그는 회에다 소주를, 난 치킨에 맥주를 거의 분담해 먹는 분위기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각자 좋아하는 안주에 술을 양껏 먹을 수 있었으니까. 먹는 내내 그는 내게 축하한다거나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수번 반복했고, 내가 다니게 될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정작 나는 잘 몰랐던 이야기들인데, 그 자동차 회사가 작년 순익이 얼마였다는 것과 세계 자동차업계 매출 몇 위안에 든다던가, 이번에 새로 출시된 신형 세단이 연비가 좋은데 비해 엔진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내용들이었다. 난 그의 얘기를 열심히 들어 주었고 서로 이야기와 이야기 들어주기에 지칠 때 쯤 집 안에 있던 모든 술을 소진해 버렸다. 그는 그 사실에 흡족해 했다.

  얼마 만이었는지, 그날 밤 우린 서로 무뎌진 척 하고 있던 성욕을 분출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섹스에 집중했고 나도 정성껏 그를 안았지만, 삽입 후엔 괴로우리만치 아무 느낌이 없었다. 취기를 빌려 연기했다. 가장 힘들었던 그와의 잠자리로 기억될 것 같았다. 그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눈이 떠졌다. 몇 시인지 궁금했지만 몸도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창밖엔 맑은 햇살이 가득했다. 그가 옆에서 뒤척이는 게 느껴져서 난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의 것이었다. 그는 2초도 안 되어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을 얼른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은 그는 약 5초간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 지금 몇 시야?”

  그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 꼼짝 않고 있는 나를 확인한 후 다시 등을 돌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 아무 일도 아냐. 지금 일어나서 그래......... 응. 받았어?......... 고맙긴....... 후후....... 어디 아픈 덴 없지? 거긴 춥다는데 감기 조심하고........ 내가 전화할게. 이제 일어나야겠다........ 응, 나도........ 알았어, 알았어. 쪽!”

  그는 있는 대로 몸을 웅크리고 이렇게 통화했다.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꽤 애교 있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였고, ‘사랑해’라고 말하는 소리와 ‘쪽’하고 들리는 입맞춤 소리는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훗’하고 코로 뱉는 그의 미소가 들렸고, 그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고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침대 밖으로 나가 옆으로 누워 있는 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불을 끌어다 내 목덜미까지 덮어 주었다.

  듣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잠이 깨지 말았어야 했다. 초능력이 되어버린 내 예민한 감각이, 내 눈꺼풀 위에 닿았던 창가 햇살이 원망스러웠다.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잠시 들었던 생각이 미웠다. 길을 걷다가 방향을 잃었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난 그 순간, 기약 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목까지 감싸고 있는 이불을 재끼고 싶고 몸을 돌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언제, 어떻게 진짜 잠에서 깬 것처럼 일어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정말 다시 잠 들어버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용케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그가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집 안을 정리하고 비로소 욕실로 들어갔을 때 몸을 돌리고 눈을 떴다.

  하룻밤 만에, 몇 시간 혹은 몇 분 만에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난 일부러 빨리 움직였다. 옷을 주워 입고 흐트러진 머리를 하나로 묶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난밤의 흔적들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릇들은 씻어 설거지 건조대에 올려 있었고 쓰레기도 종류별로 분리되어 봉지에 담겨 현관 쪽에 놓여 있었다. 흐트러진 침대만 정리하면 되었다. 이불을 들어 베란다로 나가 힘껏 털었다. 침대 스프레드와 베갯잇은 걷어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털어온 이불을 침대위에 다시 고르게 깔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잠시 서 있었다.

  ‘뭘 할까...........’

  그 때 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어! 일어났어? 왜 벌써 깼어. 좀 더 자지....... 아홉시밖에 안 됐는데....... 속은 괜찮아?”

  난 벽시계를 보았다. 분침이 아홉시 정각을 향해 닿기 직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마신 술의 양으로 봐선 숙취를 부르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렇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머리가 조금 아파오는 것도 같았는데 그 증상마저 곧 사라졌다.

  “청소하려고. 빨래도 좀 하고........ 오늘 대청소나 해야겠다!”

  난 말했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잠시 멈추고 나를 보았다. 뭔가 의아해 하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난 의식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그래.......”

  멍하니 서 있던 그도 곧 내 의견에 동조했다. 얼굴을 닦던 수건을 목에 두르고 먼지 털이개와 청소기를 챙겼다. 난 다른 빨랫감이 있는지 보기 위해 옷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방안 정리부터 시작해 바닥, 욕실, 베란다까지 우린 해장도 하기 전에 정신없이 청소에 열중했다. 청소는 오전을 다 보내고서야 마무리 되었다. 그 때까지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소통 없이도 그와 나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한 차례 빨래가 끝나면 그는 얼른 그것들을 옥상으로 가져가 널었고, 난 또 2차 빨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청소기를 돌리면 그는 얼른 걸레질을 했다. 그러는 동안 난 베란다 잡동사니들을 정리했다. 그는 걸레질을 끝내고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크게 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만은 말끔했다. 청소를 마치고 난 뭔가 빠진 부분이 없는지 체크했다. 나를 보고 그는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

  난 분명 그의 말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답하기가 귀찮았던 건지, 무시하고 싶었던 건지 나조차 몰랐다. 생각에 빠졌거나 아무 생각 없었다.

  “라면 끓일까? 해장도 해야 하니까 아주 맵게!”

  그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응.”

  난 대충 대답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싱크대에서 부스럭대고 라면을 꺼내면서 내게 말했다.

  “나 많이 먹을 건데, 너는? 세 개 끓일까, 네 개 끓일까?”

  “맘대로 해.”

  난 침대 밑에 있던 정리함들을 꺼내며 대충 대답했다. 정리함을 열어 내용물들을 모두 꺼냈다.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물건들을 꺼내어 버려야 할 것들을 분리했다. 라면 봉지를 뜯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물이 끓는 소리는 조금 전에 들렸는데도....... 맘대로 하라는 내 대답에 몇 개를 끓일까 고민하고 있는 줄 알았다. 잠시 후 그를 등지고 있던 나의 뒤통수가 뜨거웠다. 그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물건들을 분리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의 시선을 느꼈고 그 눈빛의 온도마저 감지했다. 등골부터 뒤통수까지 아려오는 것 같았지만 난 모른 척했다. 툭툭 책들을 정리하는 소리와 물 끓는 소리, 햇살에 비춰 나부끼는 먼지만이 그 순간, 그 공간의 싸늘한 느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싸늘함을 깬 건 그였다. 다시 조리대 쪽으로 몸을 돌려 부스럭 소리를 내며 라면 봉지를 뜯었다. 봉지를 뜯는 소리는 두 번만 들렸다. 그렇게 그는 라면을 끓이고 난 오랜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역시 아무 말 없었다.

  “먹자.”

  그가 말했다. 난 대꾸 없이 빈 정리함을 닦는 일까지 마무리하고 나서야 식탁으로 다가갔다.

  “배고프다며, 왜 두 개만 끓였어?”

  “네가 맘대로 하라며?”

  내 질문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하는 그의 말투가 차가웠다.

  “그럼, 밥 말아먹어. 찬 밥 있어. 줄까?”

  “됐어.”

  그는 내게 툭 던지듯 말하고 라면 한 젓가락을 크게 입에 넣었다. 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밥을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해동시켰다. 김치도 꺼내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침부터 일했는데....... 양껏 먹어.”

  그에게 말하고 난 젓가락을 냄비에 가져갔다. 우적우적 먹고 있던 그가 날 보며 입 안에 있던 라면을 삼켰다.

  “왜 그래?”

  그가 물었다.

  “뭐가?”

  이번엔 내가 우적우적 라면을 입에 넣고 말했다.

  “뭐긴......... 왜 갑자기 아침부터 대청소야? 더워 죽겠는데....... 다 뒤집어엎고.......”

  뭔가 억울한 말투로 그는 말했다.

  “왜긴, 그냥 대청소지. 주말이니까. 이젠 일도 나가야 하고......... 앞으로는 자주 하기 힘들 거 아냐.”

  난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라면국물을 마시며 말했다.

  “정말이야?”

  의심스럽다는 듯 그가 되물었고 난 그에게 의심을 씻어줄 미소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의심은 합리적이고도 남았다.

  ‘삐익’하고 전자레인지에서 소리가 났다. 그는 얼른 해동된 밥을 꺼내와 통째로 냄비에 쏟아 부었다.

 “물을 많이 넣길 잘했네.”

  그가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세 개, 네 개를 끓일까 어쩔까 하더니만.......”

  아침 내내 내게 매달려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잠시 느껴지지 않았다. 툭탁 소리만이 가득했던 이 매 마른 공간이 잠시 촉촉해졌다. 난 이것이 신기루임을 알고 있다. 조금 전 내 뒤통수에 꽂혔던 그의 차가운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라면 국물에 밥을 말며 군침을 흘리는 천진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고, 무거운 짐을 잠깐 내려놓은 손에 피가 쏠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듯 내 마음은 여전히 아린 채 있었다. 곧 그 짐을 다시 들어야 한다는 두려움 또한 머릿속에 꿈틀댔다. 라면인지 밥인지 내 혀는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물이 시원한지 얼큰한지도 모르고 난 빈 속만 그저 채웠다. 그는 어땠을까.

  그가 미워서인지 좋아서인지 모르겠다. 현실이라고 믿고 살던 삶이 꿈이었고, 그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던 것이다. 그저 그 두려움이 전부라고 차라리 믿고 싶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그와 어떤 관계인지, 또 그와 나와는 어떤 관계인 건지 알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딱히 어떻게 내가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무언가 해결되기를 무작정 바라기만 했다. 그것이 내 이성이 아니라, 그저 감각적으로 이 모든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변화를 감지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방어책도 없었다.

  내 자신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난 아빠와 엄마와도 그럴 수 있었다. 가족과도 가능했던 변화에 대한 적응이 이제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겐 익숙한 일이어서 자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와 동거를 시작했을 때, 혹은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거나 끝낼 때에도 난 남들만큼 혼란을 겪진 않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이제 와서 이런 일로 내 소중한 자아가 스스로에게 패배한 거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 맴돌던 따가운 공기와 “먹자.”라고 뱉은 그의 싸한 말투가 너무나 어이없이 날 무너뜨렸던 것일까. 난 그 공기와 말투에서 공포와 맞먹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던 게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 찰나에 난, 앞으로 혼자가 될지도 모르며 그 외로움을 감내할 자신이 없음을 동물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나를 속이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왔으며, 나에 대한 마음과 그녀를 향한 마음은 각각 어떤 것인지, 수많은 궁금증들이 봇물 터지듯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건, 그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생각들을 난 무모하게도 맨 몸으로 맞서 막아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다. 계속해서 나를, 그녀를 기만하더라도 그 만은 아무 생각 없기를 바랐다. 이토록 미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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