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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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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땡글
작품등록일 : 2020.9.27

쓸쓸한 삶과 죽음을 대하는 고귀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처음이라는 것
작성일 : 20-09-27 21:30     조회 : 345     추천 : 0     분량 : 1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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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수능 시험을 보지 않았다. 엄마가 일을 시작했던 그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을 뿐더러 남들보다 일찍 돈을 벌어 엄마와 편하게 살고 싶었다. 난 내 계획을 졸업 할 때까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3 후반부터 취업을 위해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다녔다. 어떻게든 졸업 때까진 취업을 할 계획이었지만 혹시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수능 시험 날부터 성적표가 나오는 날, 대학 원서를 내고 당락 통보를 받는 일까지 겨우 겨우 거짓말과 연기를 해가며 엄마의 눈초리를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엄마가 꽤 바빠지셔서 일일이 확인하진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졸업이 다가오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와 불안감에 떨었던 건 사실이다.

  그 땐 정말 운이 좋았다. 2월이 되던 날, 난 마지막으로 지원했던 증권회사 사무실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초조해 하고 있던 나에게는 뛸 듯이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 며칠 후, 내 고백을 들은 엄마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는 배신감이 든다고 내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하지 않던 일을 하고 피로와 외로움을 견디고 계신지에 대해 내게 하소연하며 우셨다. 정말 엄마가 그렇게 까지 속내를 내게 드러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 엄마를 설득하고 달랬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엄만 한참을 우셨다. 그동안 삼켰던 모든 설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난 그런 엄마를 안아주는 일 밖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다시 후회와 불안감을 맞이해야 했다.

 

  그 후, 일 년이 넘게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경제적인 차원에서였다. 엄마의 일은 안정을 찾은 듯했고 나도 생활비를 보탤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대학 보내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 두라고 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언제가 됐든 늦기 전에 대학은 꼭 가. 지금은 네가 안정적인 것 같아도 더 나이 들면 분명 후회하게 될 일이야. 엄마가 꼭 그랬어. 엄마가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다고....... 그러니까, 연희야! 꼭 그렇게 해. 엄마가 얼마든지 도울게! 그게 엄마의 소원이야.”

  난 엄마의 얘기가 협박으로 들리거나 부담스러워서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엄마의 고집보다도 내 일 년 동안의 사회경험에 설득을 당한 것이다.

  고졸이라는 학력이 핸디캡이 될 줄도 몰랐고 막내 여직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난 늘 비교를 당하거나 어떤 일에 대해서는 늘 열외 되곤 했다. 일 년 전, 난 너무 어렸고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던 것이다.

  난 엄마의 설득에 수긍하고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다시 일 년 동안 아르바이트와 학원을 오가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생활했다. 그 해 겨울, 난 집 근처에 있던 한 대학에 지원을 했고 합격통보를 받았다. 또 한 번의 운이 따라 주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무척 기뻐하셨다. 날 안고 또 한참을 우실 정도로.

 

  기대했던 대학생활도 결국 크게 다르진 않았다. 깐깐한 학점관리(이해가 안 갈 정도로 명랑 쾌활한 성격이거나 여유로운 경제적 배경과 빼어난 외모가 학점을 따기 위한 그 어떤 노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조건이라는 한계), 등록금 문제, 교우관계에 있어서 모두 그랬다. 난 당당하거나 애교가 있거나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고 돈이 많지도,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수업에 임하고 시험을 준비해서 학점을 받는 일, 그리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을 충당해야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등록금은 어느 정도 엄마가 서포트 해주고 있었지만 생활비와 용돈까지 해결하려면 아르바이트는 물론 학자금 대출에까지 의존해야 했다.

  내게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같이 다니는 유일한 친구가 있었다. 두 살 동생이지만 다소 까칠하고 시크한 성격의 동기였다. 재영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귀여운 미소년 같은 이미지의 동생이었다. 마치 남중생의 이미지가 풍기는 찰랑거리는 바가지 커트 머리에 늘 단색의 셔츠, 여름엔 5부 반 바지, 겨울엔 청바지에 하얗거나 검은 운동화, 커다란 백팩을 착용했다. 난 한 학기를 모두 보내는 동안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첫 개강 수업 때 그녀를 처음 보았는데 그녀는 내게 먼저 이렇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복학생이세요?”

  “.................”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재영이가 이어폰을 끼고 책을 보고 있던 내 책상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이어폰을 빼고 나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처음 보는 분 같아서........”

  “아닌데요. 복학생.........”

  내가 대답했다. 재영이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 라고만 반응했다.

  “복학생이세요?”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요? 저도 아닌데....... 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렸고 내겐 그 순간이 매우 신선한 느낌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부터 통성명을 하고 점심을 함께 먹었으며 이 후로 서로에게 유일한 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재영이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늘 내게 불평불만 같은 말들을 쏟아내곤 했다. 학과장이나 교수들이 학문 연구는커녕 연구실에서 낮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고 학생들의 과제 점검도 사실 하지 않는다거나 유흥이나 즐기고, 몰래 제자들을 사적으로 만나거나 촌지를 거래하듯 뒷돈을 챙긴다고 비아냥댔다. 또 학생들은 쉽게 학점을 따기 위해 또는 취업을 위해 교수 추천을 받으려고 돈과 몸을 아끼지 않고 그들과 더러운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며 일부 동기나 선배들의 흉을 보기도 했다. 물론 재영이의 말이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재영이처럼 일일이 그들의 행위에 관심을 갖고 반응을 하고 불만을 품기엔 나의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했고 내 역할 역시 턱없이 미비했다. 그렇다고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마땅해 하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환기하고 제 자리를 한 번씩 점검하면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일종의 방법이라고 난 이해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 맞장구 쳐주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는 정도로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이어가면서 우리는 정작 놓치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아마 분명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니, 빨리 좀! 왜 이렇게 굼뜨지? 오늘?”

  재촉하는 재영이가 평소의 그녀답지 못했다.

  “알았어! 왜 안 가던 술자리엔 가자고.......”

  주섬주섬 책들을 챙기는 나를 그녀는 억지로 일으켰다. 난 끌려나오듯이 강의 동 밖까지 나왔다.

  “이것 좀 놓을래? 가고 있잖아.”

  내가 그녀의 팔을 뿌리치자 그녀는 툴툴거리며 내게 말했다.

  “거기 앉을 데도 없다고! 아르바이트까지 미뤄놨는데 자리 없어서 참석 못하면 나 진짜 열 받을 거 같거든!”

  이번엔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4학년 개강파티. 원래 재영이와 나는 과모임이나 엠티 같은 데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개강 후 며칠 전부터 재영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개강 모임이라며 아르바이트 쉬는 날까지 바꿔가며 꼭 참석할 것을 내게 강요해왔다.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나 또한 졸업반이라는 것에 굳이 이유를 두고 아르바이트 쉬는 날을 주말과 바꿨다.

  막상 술자리에 도착하고 보니, 고등학생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신입생 몇 명과 재학생을 포함해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은 인원이 있었다. 재영이 말대로 장소는 매우 협소했지만 준비해 놓은 술과 안주, 그리고 자리는 남아돌았다.

  개강한 지 2주째가 되는 금요일이었다.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과 접시들이 눈에 띄었다. 재영이와 나는 거의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었다.

  “취한 것 같은데....... 괜찮아?”

  재영이가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비어있던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 네?”

  난 옆을 보았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 찾아?”

  선배인지 동기인지는 모르겠으나 후배는 아닌 것 같았다.

  “어! 재영이......... 가........”

  “아......... 걔가 재영이구나! 걔, 좀 전에 집에 가는 것 같던데?”

  내 옆에 앉은 그가 말했다.

  “네? 정말요? 아.........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아이 씨........”

  난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재영이가 집에 갔다는 말에 짜증이 났고 얼른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가려고?”

  그가 말했다.

  “.................”

  난 그의 말을 들은 체 않고 가방을 둘러맸다.

  “바래다줄까? 집이 어느 쪽이야?”

  난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연무동이요.”

  “어? 나도 연무동인데........ 그럼........ 같이 나갈까? 나도 아까부터 너무 졸려서 가려던 참이거든.”

  “.............”

  나는 걸음을 떼려다 잠깐 멈칫했다. 그러자 그가 나의 등을 살짝 밀며 나를 앞세우고 말했다. 그리고 술자리에 남아있는 동기와 후배들을 향해 말했다.

  “나 먼저 간다. 너희들도 얼른얼른 들어가! 잘 정리 하고!”

  난 얼떨결에 앞장서 나왔지만 무언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자 그는 나를 앞지르며 내 손목을 잡고 인도로 나왔다.

  “씨...........”

  난 인상을 쓰며 작은 목소리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술김이라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는 내 목소릴 들었는지 내 손목을 얼른 놓으며 말했다.

  “미안! 난 그냥........ 네가 취한 것 같아서........ 춥지 않으면 걸어갈래? 술도 깰 겸. 가깝잖아........”

  난 그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춥지 않을 정도로 느껴지는 찬 공기가 시원했고 술을 깨고 싶었다. 난 그와 상관없이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얼마가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내 자취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내 뒤에서 걷고 있었다.

  “여기야?”

  난 깜짝 놀랐다. 무언가 기분이 나쁘고 겁이 나기도 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어? 정말 가깝네? 그럼 들어가. 내일 보자!”

  그는 멋쩍게 내게 손짓을 하며 돌아섰다. 난 그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고 그는 뒤돌아 걷다가 두어 번 다시 나를 돌아보며 손짓을 하고는 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토요일은 숙취를 안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나마 일요일엔 오랜만에 실컷 밀린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 월요일 아침에 있었던 수업에 지각할 뻔했다. 헐레벌떡 강의실에 뛰어 들어오느라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보니 재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난 강의실을 나와 동기 아이들 몇 명에게 재영이를 보았는지 물었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전화를 해 보기로 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누굴 그렇게 찾아?”

  “..........? 아......... 안녕하세요.”

  지난 금요일 집까지 함께 걸었던 선배였다.

  “아까부터 누굴 계속 찾는 것 같던데.”

  “아....... 네....... 재영이......... 혹시 못 봤어요?”

  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하하........ 넌 맨날 걔만 찾는구나. 어? 저기 있네!”

  그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건물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얼른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재영이가 여유롭게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달려가 말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다그치듯 묻자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내게 말했다.

  “나가자. 커피 한 잔 마셔야겠어.”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다시 출입구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녕? 네가 재영이였구나. 이재영, 맞지?”

  선배는 나가려는 나와 재영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재영이는 잡았던 내 팔을 살며시 놓더니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뭐야? 너, 지금 온 거였어? 금요일에도 나 몰래 집에 가고! 뭐야?”

  난 그녀에게 원망스런 투로 말했다.

  “미안. 그 날 진짜,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어. 언닌 물 만난 고기마냥 재밌어 보이길래 그냥 나왔지.”

  “내가? 내가 언제? 참 나.........”

  재영이는 소극적인 말투로 변명했다.

  “커피........ 내가 쏠게, 갈래?”

  한 발짝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자 재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는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재영이와 나에게 차례로 건넸다.

  “.......... 잘 마실게요.”

  나도 우선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난 수업이 있어서. 다음 수업은 늦지 말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커피를 뽑아 치켜들며 손 인사를 하고는 가버렸다. 재영이는 그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 오빠, 어때?”

  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강의 동 앞 벤치를 향하며 대답했다.

  “뭐....... 글쎄, 별로. 그냥 그런데?”

  재영이도 나를 따라 걸음을 떼며 내 팔짱을 꼈다.

  “개강 모임 때 보니까, 저 오빠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술 마시는 내내 언니만 쳐다봤어.”

  그녀는 커피를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셨다. 난 당황스러웠다. 재영이는 당황한 내 얼굴을 확인하며 다시 말했다.

  “저 오빠정도면 괜찮지 않아? 키도 크고 뭔가 분위기도 있어 보이고........ 오늘 보니까 자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컵 안을 들여다보며 남아있는 커피를 흔들어 저었다.

  “글쎄......... 좀 느끼하지 않아? 처음 보는데도 막 아는 척하고....... 난 좀 그래.”

  대답하는 나의 표정을 또 다시 확인하고 조금 전과는 다른 또렷한 말투로 그녀는 말했다.

  “그래? 난 그게 매력 있어 보이던데....... 진짜 저 오빠 처음 봐?”

  “응. 이번에 복학한 사람 아니야?”

  재영이는 이렇게 말하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아닌데....... 지난 학기에 복학했는데. 우리랑 같은 수업도 들었었고. 진짜 몰랐어?”

  그녀의 표정이 음흉하게 느껴졌다. 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 해봐. 둘이 어울려.”

  “야!”

  음흉한 미소 끝에 내게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어깨를 난 툭 건드리며 정색했다. 그러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며칠이 지난 금요일, 재영이와 나는 수업을 받기 위해 강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재영이는 역시 내 팔짱을 끼고 새로 수강하는 교양과목 교수가 꽤 재수 없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었고 난 맞장구치며 걷고 있었다.

  “헤이!”

  재영이의 작지만 빈 틈 없이 들려오던 목소리를 뚫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 선배였다. 먼저 뒤를 돌아본 건 재영이었다.

  “어?”

  갑자기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난 얼른 재영이가 끼고 있던 팔을 뺐다. 팔짱이 풀리자 그녀는 나를 힐끗 보았다.

  “몇 번 불렀는데....... 복지법 수업이지?”

  그는 숨을 고르며 우리에게 물었다.

  “네. 오빠도요?”

  “안녕하세요.......”

  재영이는 그의 질문에 대답했고 난 인사를 했다. 그는 계속 숨을 고르며 재영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재영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아니.”

  우리는 그의 대답에 의아하다는 듯 서로를 바라본 후 그를 보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남아서....... 아점 같이 먹을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

  “어! 그래요? 그럼, 저희랑 같이 가요!”

  그의 말에 재영이는 반색을 띠며 말했다.

  “야!”

  난 놀라서 그녀를 팔꿈치로 툭 쳤다.

  “괜찮아. 사정이 있었다고 하고 다음 수업 들으면 돼.”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고 그를 보며 웃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래? 그럼 같이 밥 먹어줄래? 내가 살게!”

  “정말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학교 앞 주택가의 한 오래된 밥집에 들어갔다. 단골들의 낙서로 도배된 식당 한 쪽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오전 열 한 시를 넘기고 있었고 늦은 아침, 혹은 이른 점심을 하러 온 다른 손님들이 몇 보였다. 우리는 방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홀인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 공간 안엔 두 개의 테이블이 있었고 우린 한 쪽을 차지하고 앉아 주문을 했다.

  “뭐 먹을래? 뭐 좋아해? 부대찌개? 두루치기?”

  그가 물었다. 재영이는 벽에 적힌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고 있었지만 난 물만 마셨다.

  “선배는요?”

  재영이가 그에게 물었다.

  “난 아무 거나 다 좋아. 나 여기 단골이야. 내가 부탁한 거니까 너희가 골라.”

  “음....... 그렇다면....... 부대찌개로 해요. 이 언니가 좋아해요!”

  재영이의 말에 그와 내가 동시에 그녀를 쳐다봤다.

  “저도 좋아해요!”

  재영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 물 컵을 입에 갖다 대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모! 여기 우선 부대랑 밥 세 개 주세요! 아, 소주도요!”

  그는 밖에다 대고 큰 소리로 주문을 하고 우리에게 다시 물었다.

  “반주, 괜찮지? 안 내키면 내가 마실 테니까 걱정 말고.”

  “아! 좋아요. 반주!”

  재영이는 대답했다. 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날 모른 척했다.

 

  좋아하는 찌개이지만 무척 싱겁게만 느껴졌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먹던 찌개는 싸늘히 식어 국물이 모두 졸여진 채 있었고 소주는 세 병이 놓여 있었다. 반주로 소주를 마신 것이 잘못이었다. 밤 열 한 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유독 피곤한 날이면 오히려 잠을 설친다. 저녁부터 내내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다음 날을 맞이하곤 한다. 잠이 부족한데다 적어도 열여덟 시간 이상 공복 상태였던 것이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보았다. 오후 한 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고 바깥 홀은 점심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모!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재영이가 지나가시던 이모님을 부르더니 빈 소주병을 흔들며 말했다.

  “야! 우리 수업!”

  난 그녀를 제지했다.

  “나도 수업 있는데........”

  그는 이모님이 가져다주신 소주병을 받아들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죄송해요. 오빠....... 저희 가봐야 해요!”

  이번엔 그의 손을 내가 제지하며 말했다.

  “오빠? 오빠 아닌데....... 그냥 ‘용준아’ 해도 돼. 그쵸, 오빠?”

  재영이의 혀가 살짝 꼬였다.

  “아마도! 편한대로 불러. 난 상관없어.”

  그는 재영이의 말에 대꾸하고 나서 나에게 건배를 청하며 말했다.

 

  벽에 걸린 큰 시계가 오후 네 시를 향하고 있었다. 바깥 홀 손님은 거의 빠진 상태였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를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술기운이라고 변명하기엔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소주병은 어느새 다섯 병. 안주도 바뀌어 있었고 재영이와 그의 목소리도 커져 있다. 재영이는 큰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는데 난 집중하지 않았다. 얼핏 언젠가 내게 했던 교수님과 그의 애제자에 대한 뒷담화인 것 같았다. 잠깐 이야기가 끊기자 그녀는 나와 그를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나 이제 가야겠어. 힘들다.........”

  “어! 같이 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재영이를 보고 난 말했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재영이는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번 그와 날 번갈아 보고는 혀 꼬인 말투로 말한다.

  “아냐, 아냐. 나 약속 있어. 늦었어....... 주말들 잘 보내요!”

  그녀는 중심을 잃은 듯한 몸을 억지로 가누려 애쓰며 식당을 나가버렸다.

  “야..........!”

  그녀를 불렀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숙여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정적이 흘렀다.

  “우리도 일어날까?”

  그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응........”

  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와 나는 말없이 또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집 앞이었다.

  “오늘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하다. 나 때문에 수업도 못 듣고.........”

  내가 집 앞임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추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음........ 당연히 미안해야지!”

  내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박용준이야. 선배 아니니까 그냥 용준이라고 불러.”

  난 그가 내민 손을 보았다. 대꾸를 하거나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가 민망했는지 내밀었던 손을 한 번 쥐었다 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그럴게. 잘 가.”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가 갑자기 내 앞으로 오더니 길을 막았다.

  “아,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자.. 잠깐 술이라도 깨고 갈래? 커... 커피라도 마시면서.........”

  “박용준? 그래, 너. 박용준......... 술이 깨려면 집엘 가야지, 어딜 가? 그리고......... 오늘 수업 빼먹은 거랑, 알바 못 가는 거랑....... 나 너한테 피해보상을 청구해도 모자랄 판이야. 뭐, 내가 뿌리치지 못한 죄가 있어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넌 시간이 아깝지 않니? 박용준........ 난 지금부터 오늘 잃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매워야 할지 고민해야 되거든. 잘 가라. 박용준!”

  난 취기에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식이 입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걸 알아 챈 것이었을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너, 너 왜 웃어? 박용준! 기분 나쁘게....... 난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래, 송연희! 미안, 미안하다. 내가 피해보상 해 줄게! 꼭 해줄 테니까 기억하고 있어라. 송연희! 얼른 들어가. 나, 갈게. 잘 쉬어라. 송연희! 월요일에 보자.”

  그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중간 중간 흘려가며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모퉁이 뒤로 사라지는 그를 보고 서쪽 하늘에 낮게 떠 있는 해를 보았다. 작지만 강렬했다. 눈이 부셨지만 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두 눈이 시큰했고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아르바이트와 수업에 대한 걱정이 그 속에 가득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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