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
 1  2  3  4  >>
 
자유연재 > 기타
고잉홈
작가 : 땡글
작품등록일 : 2020.9.27

쓸쓸한 삶과 죽음을 대하는 고귀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익숙해지겠지
작성일 : 20-09-27 21:21     조회 : 366     추천 : 0     분량 : 9755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일찍 출근길에 나섰다. 분위기전환을 위한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승주!”

  익숙한 목소리에 놀랄 건 없었지만 어느새 옆에 와 팔로 내 목을 안듯이 어깨동무를 했다. 난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뭐야? 새끼........ 며칠 굶기라도 했어? 힘이 하나도 없어가지고........”

  김 주임은 말했다.

  “안녕하세요........”

  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 못하다! 넌 안녕하냐? 너도 안녕 못하지? 에휴.........”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왜요? 안녕........ 왜 못하신대요?”

  내가 물었다.

  “음......... 얘기 못하겠는데? 네가 먼저 말해주면 나도 말해줄게.”

  김 주임의 표정은 매우 밝았지만 왠지 씁쓸함이 묻어나 보였다. 난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금 말하기 싫으면 생각해 봐. 일하면서 생각해 보고, 일 끝나고 삼겹살 먹으면서 얘기해 주기로!”

  그는 밝게 웃으며 내 목을 감쌌던 팔로 내 어깨를 꼭 잡더니 앞장서 갔다.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점점 일거리가 많아졌다. 점심시간도 삼십분을 채 쓰질 못했다. 오후에 잠깐 쉬는 시간도 역시 없었다. 오히려 맘이 더 편했다. 퇴근시간이 다가왔을 땐 조금 불안했지만.......

  좀처럼 일을 제 시간에 끝내지 못해 모두 시계와 동료들을 번갈아 보며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그 때 김 주임이 다가왔다.

  “자! 얼른 마무리들 하고 퇴근 준비 합시다!”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내게 찡긋 눈짓을 보냈다. 눈치를 보던 직원들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나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김 주임이 작업복을 벗고 내게 다시 왔다.

  “가자!”

  그는 내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예....... 잠깐 옷 좀 입고 올게요.”

 

  “하아........! 춥다!”

  작업장을 나오자마자 김 주임이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크게 숨을 내뱉었더니 짙은 쪽빛 하늘에 허연 입김이 뿌려졌다. 김 주임은 두툼한 패딩점퍼의 모자를 덮어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느끼는 한기는 나에게도 전해졌다. 난 점퍼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었다.

 

  “이모! 저희 삼겹살 이인분이랑 소주요!”

  별 대화 없이 회사 앞 큰 길을 가로질러 우리는 삼겹살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주문을 하며 구석자리에 앉았다.

  “다른 조원들은요?”

  “몹쓸 놈들이야! 간만에 한 잔 하자고 했더니 학원 간다, 알바 간다, 바쁜 척들은.......쯧쯧.”

  김 주임은 물을 마시며 볼멘소리를 했다. 나도 그를 따라 물을 마셨다. 곧 이모님이 주문한 삼겹살과 소주를 세팅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김 주임은 얼른 고기를 불판에 올려놓고는 소주병을 따서 두 잔을 채웠다.

  “많이 먹어, 인마. 얼굴에 핏기도 하나 없고....... 만날 그렇게 휘청대지 말고! 머지않아 쓰러질 거 같다, 너.......”

  그는 말했다. 난 내 잔을 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자식! 먼저 말하겠다 이거지? 하하. 은근 귀여운 녀석이야!”

  김 주임은 껄껄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난 그제야 오늘 아침 출근길 상황이 생각났다. 그와 나는 첫 잔을 동시에 넘겼다.

  “무리는 하지 말고! 오늘은 술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어야 돼.”

  그는 불판위의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안녕하지 못한데.......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내가 그에게 먼저 물었다.

  “에잇, 비겁한 놈!”

  그는 내게 나무라는 듯 말하며 비어있는 잔에 소주를 다시 부었다.

  “사는 게, 어차피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거 정도는 누구나 알잖아. 그래도 원하는 대로 살려고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그런데 그게........ 난 참 모르겠더라. 어떻게 보면 누구는 이렇게 살아도 되고 누군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고........ 그런 게 정해져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고기 굽는 일을 멈추지 않고 그는 얘기했지만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어색했다.

  “주세요........”

  난 그가 쥐고 있던 집게와 가위를 건네 들어 고기를 잘랐다.

  “난,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노력이냐, 할 수 없는 정도의 노력이냐를 따지는 건 아닌데....... 너무 어긋난다 싶다. 너무.........”

  그는 아직 본론을 꺼내진 않았지만 난 캐묻지 않고 자른 고기를 그의 접시위에 올려놓았다.

  “허, 제법이네. 자식!”

  그는 내게 말하고 얼른 쌈을 하나 싸서 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돼....... 됐어요.......”

  “먹어, 새꺄! 쪽 팔리게 만들지 말고.”

  정말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난 못 이기는 척 쌈을 받아 입에 넣었다.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힘내야지, 우리!”

  그는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우리는 잠시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소주도 몇 잔 더 마셨다.

  “이모! 저희 김치찌개랑 밥도 주시고....... 소주도요!”

  김 주임은 빈 소주병을 흔들며 이모님을 불러 추가 주문을 했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말했다.

  “먹는 것도 열심히! 하하.........”

  그가 웃었고, 난 그의 웃음에 미소로만 답했다.

  “새끼........ 이제 웃네........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형이....... 아! 앞으로는 그냥 형이라고 불러....... 형이 그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해서 결혼도 하고 싶었는데....... 곧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헤어지자고 하네....... 내가....... 그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라서....... 그 친구를 이해하니까........ 그래서 그렇더라....... 붙잡을 수가 없는데 붙잡고 싶어서.......... 내가 안녕하지 못한 이유, 이제 말했다. 어때? 이제 이해돼? 이제 네 차례야!”

  그는 이모님이 가져다주시는 소주를 받아 다시 내 잔을 채우려 했다. 난 얼른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잔도 채워 주었다. 그러자 그는 잔을 놓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저는........ 글쎄요......... 모르겠어요. 안녕한 건지 아닌지........ 제 자신도 잘........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매일 왜 그런지 내가 어떤 상태인 건지만 생각해요. 그걸 알아야 제대로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정말........”

  난 느리게 말했다. 소주잔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하다가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당황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무슨 변명 같은 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 그냥........ 전....... 주임님처럼 여자 친구....... 친구도 없고 계획도 없고....... 사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난 더듬거렸다.

  “미친 놈!”

  그는 여전히 날 빤히 보며 말했다. 그를 슬쩍 보았다. 그의 두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혼자구나?”

  “...............”

  그의 물음에 난 대답하지 못했다.

  “가족 말야. 너, 가족 없지?”

  “................”

  그의 반복되는 물음에 난 역시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새끼.......... 걱정 마. 나도 없어, 가족! 너만 없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암말 못하고 고개 숙이고......... 그런 거, 그러지마. 인마!”

  그는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고 난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동그래졌던 눈은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고, 때마침 이모님께서 김치찌개와 밥을 가져다 주셨다.

  “감사합니다. 이모님! 아, 맛있겠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먹자!”

  그리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밥에 김치찌개를 한 숟갈 푹 퍼 올리고 쓱쓱 비벼서 한 입 크게 입에 넣었다. 난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또 그를 따라서 찌개에 밥을 비벼 한 입 먹었다.

  “새끼!”

  그는 우적우적 밥을 씹으며 나를 보고 웃었다. 이번엔 그를 따라 행동하지 않았지만 멋쩍게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렇게 먹으면 되지, 뭐. 뭘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긴. 그렇게 그냥 지내면 되는 거지. 배고프면, 먹고 싶으면 먹으려고 하고 보고 싶으면 보게끔 하고, 원하지 않으면 피하고....... 어려우면, 어려워 하다보면........ 포기하거나 풀어내거나 둘 중 하나야. 정답은 없지만 끝은 있겠지. 바보같이 있지도 않은 답만 찾아 헤매지 말고, 그렇게 지내, 인마! 이 김치찌개가, 삼겹살이, 이 소주가 다 우릴 위해 존재해 주는데 모른 척하고 살 순 없잖아? 하하.”

  김 주임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허기진 사람처럼 찌개와 밥을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맛있었다. 우리는 또 소주 한 병을 함께 비웠다.

 

  다시 눈을 떴다. 잠이 깬 이유는 아니었지만 역시 방 안 공기는 찼다. 심호흡을 했다. 코로 알코올 냄새가 느껴졌다. 어제저녁 김 주임과 보냈던 시간이 순간순간 떠올랐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전히 사각 천장과 내 책상, 지난 밤 벗어 던져 놓은 점퍼. 똑같은 방의 풍경이었지만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빠 생각은 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이 날 괴롭히진 않았던 것 같다.

  아빠가 없는 현실은 현실감이 없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 아빠를 생각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물속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건 분명 견디기 힘든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그것이 견딜 만 했던 것 같다. 난 같은 곳에 있었지만 내게 주어지는 새로운 상황들이 깊은 물속의 내가 혼자만은 아님을 알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현실은 내 안으로 점점 스며드는 걸까, 이렇게 아빠는 현실 속에 점점 묻혀 지는 걸까...........

 

  개운하게 해소되지 않은 숙취 덕분에 잡생각을 떨치고 출근 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십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옷을 갈아입고 작업장에 오자마자 김 주임을 찾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고 모두들 작업 준비에 바빠 보였다. 약 5미터 전방에서 작업복을 추스르며 윤식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난 그에게 김 주임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했다. 우물쭈물 하고 있던 찰나에 그는 어느새 내 앞을 그냥 지나가 버렸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직원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바로 포기했다. 그 때, 내게 휴대폰이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근무시간까지는 약 5분 정도 남아있었다. 난 다시 락커룸으로 가서 점퍼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출근 잘 했지? 형은 술병 났어. 오늘 월차 쓴다. 월요일에 보자.]

  그에게서 이미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주말이었던 그 날, 산더미 같았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골목라면’에 들러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김 주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몸은 괜찮으세요? 쉬시고 월요일에 봬요, 형.]

 

  월요일 출근길은 늘 그랬다. 주말동안 혼자서 보내는 시간은 힘들었어도, 그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다시 한 번 고역임을 깨달으며 출근 버스에 오른다.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회사에 도착했다. 야간 작업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직 출근 전이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락커룸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이삼십 분 정도가 흐른 다음에야 주간 작업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같은 조원인 윤식씨, 현상이 형, 태준씨가 차례로 락커룸으로 들어오면서 나와 간단한 목인사만 나누었다. 근무 시간을 5분 정도 남겨 놓았을 때 김 주임이 들어왔다.

  “형!”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일찍 왔네? 자식!”

  “예.........”

  그의 인사가 반가워 난 나름 밝게 대답했고 그런 내 표정을 그가 살피는 듯 했다.

  “늦겠다. 먼저 나가. 곧 나갈게!”

  그는 내 뒤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 말하고 돌아서며 락커문을 열었다. 난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그 벽시계를 반사적으로 쳐다보고 나서 먼저 작업장으로 향했다.

 

  12월이 되었다. 점점 조금씩 일이 많아지는 것이 체감되었다. 쏟아지는 작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는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 퇴근시간조차 칼같이 챙기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난 퇴근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라며 일에 집중했다.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일찌감치 마무리를 하고 돌아보았지만 주위에서 김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난 조원들 중 가장 먼저 락커룸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앉아있던 곳에 다시 앉아 잠시 뻐근한 몸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 약 십 분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부터 직원들은 퇴근을 위해 이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현상이 형, 태준씨, 윤식씨가 역시 차례로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이번엔 목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쳐 보였다. 난 먼저 인사하려 했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당연히, 김 주임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도 하지 못했다. 난 옷을 갈아입었다. 결국 맨 나중에 락커룸을 나섰지만 그 때까지도 김 주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이 많아져서........ 주임이니까 퇴근이 늦겠지.......?’

  난 회사를 나서며 생각했다.

  퇴근 길,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걸어가자 익숙한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목인사로 답하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 쪽 긴 테이블에서 사십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한 아저씨께서 신문을 보며 라면을 먹고 계셨다. 난 늘 앉던 구석자리로 가서 앉았다.

  “사장님! 해장라면이요.......”

  난 주문을 했다. 사장님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만 끄덕하시고 눈을 맞추거나 대답은 하시지 않았다. 라면이 나오는 동안 멀뚱하게 있다가 주머니에 느껴지는 휴대폰을 꺼냈다. 김 주임에게 메시지를 보내볼까 생각했다.

  ‘아직 일하세요?’, ‘퇴근 했어요?’, ‘오늘 바빴죠?’

  몇 가지 질문들을 생각하다가 그냥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다시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언제 나왔는지 사장님이 내 앞에 라면을 내려놓으시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그 새 손님이 또 가게로 들어왔다. 혼자 온 손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늘 먹는 걸로....... 맵게 해 주시고요, 소주도 한 병 주세요.”

  그 손님은 내 자리 반대편 끝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사장님은 역시 고개만 끄덕이셨다. 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저........ 저도 소주 한 병만.......”

  내가 추가주문을 하자 그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소주와 잔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소주 한 잔을 따라 놓고 라면 국물을 먼저 떠먹었다. 뜨거웠다. 면을 한 입 먹고는 앞에 놓인 소주를 털어 넣었다. 잠시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살폈다. 모두 혼자 앉아 있었다. 식사는 다 하신 듯 하지만 여전히 인상을 잔뜩 쓰고 신문을 보고 있는 아저씨와 매운 라면과 소주를 주문해 놓고는 벽만 한없이 바라보고 앉아있는 여자 손님, 무뚝뚝하게 면을 삶고 칼질만 바삐 하고 계신 사장님, 그리고 해장라면에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있는 나. 모두가 조용했다. 음악도 없었고 그저 들리는 소리라고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칼질소리와 식기 부딪치는 딸그락 소리가 전부였다. 문 밖 도로에 차들이 지나는 소리와 간혹 들리는 경적소리는 배경일 뿐이었다. 소주는 썼고 라면은 뜨거웠다가 따뜻해졌다가 이내 차가워졌다.

 

  “어휴........ 죽겠다.”

  다음 날 출근 길, 멍하니 회사 정문을 향해 걷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한숨을 쉬었다. 난 놀라 돌아보았다. 김 주임이었다.

  “어?”

  난 인사하는 것을 까먹었다.

  “놀라긴........ 하암!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나 어제 몇 시에 끝났게?”

  그가 물었다.

  “.............”

  난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보고만 있었다.

  “끝나니까 열 한 시더라. 일용직들은 추가근무가 안 되니까 주임들만 죽어나. 뭐, 불만까지는 아닌데........ 이렇게라도 해야 정규직 유지하지 않겠냐? 너, 알아? 위에서 정규직을 비정규로 전환하느니, 감축한다느니........ 말이 좀 들려서.”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난 겨우 그의 말에 반응했다. 그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었지만 난 우선 뭔가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연말이라 너도 평소보다 두 배는 바쁠 거야. 그럴수록 밥 많이 먹고 기운내서 일해. 너무 열심히 할 필요는 없고. 야근이나 추가근무는 주임이나 대리들 몫이니까 하던 일만 실수 없이 하면 돼!”

  그는 내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갈라졌고 얼굴도 부스스해 보였다.

  “네....... 형도 건강 챙기세요.”

  그는 내 말에 힘들게 씩 웃었다. 나도 씩 웃었다.

  그 때부터 정말 두 배 이상 일의 양이 늘었다. 추가근무까지는 아니더라도 출퇴근 시간을 맞추기는 어려워졌다. 김 주임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난 퇴근길에 ‘골목라면’에서 거의 매일 먹는 라면의 맛을 점점 알게 되었고 잠도 잘 잤다.

 

  그렇게 난 과거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현재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태가 약 한 달이 지속되었다. 조금씩 일이 다시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고 설 연휴 대목을 지내고 나서야 평소수준으로 돌아왔다. 그 때쯤 난 문득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만 두었던 공부에 대한 생각이었다.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회사에서 가장 바빴던 날을 보내고 퇴근했다. 씻지도 못하고 방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문득 고개를 돌려 방구석을 보니 미처 정리해 두지 못했던 박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난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철저히 관심 밖이었다. 어쩌다 눈에 보이면 ‘버려야지’ 하면서 버리는 일마저 미뤄두고 있었다. 난 벌떡 일어나 박스를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노끈으로 묶여있는 박스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가위를 가져다 노끈을 자르고 박스를 열었다.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종이냄새가 풍겨 나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틈틈이 공부하던 자동차학 관련 책들이었다. 내가 공부했던 필기노트들과 정비기능사 문제집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난 천천히 책들을 보다가 비어 있던 책상 위 책장을 채우기로 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모두 익숙했던 책들 가운데 박스 맨 밑에 있던 낯선 책이 눈에 띄었다. ‘자동차 산업과 미래’라고 쓰여 있었다. 어디 하나 손이 탄 흔적이 없는 새 책이었다. 난 그것을 꺼내어 들고 빳빳한 표지를 넘겨보았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새 책 냄새가 났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무언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사진이었다. 아빠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하단에는 ‘99.5.9’이라고 날짜가 찍혀 있었다.

  당시, 어린이날임에도 바빠서 함께 놀아주지 못했던 아빠가 일요일에 나를 데리고 외식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만난 아빠 친구가 찍어주었던 사진으로 기억한다. 사진 속 아빠는 아주 젊었다.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어린 나와 젊은 아빠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을 보며 난 그 때처럼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리고 사진의 뒷면을 보니 무언가 적혀 있었다.

  [승주야, 아빠가 더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해! 늘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해 주지 못하지만 아빠 맘속엔 오직 너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예전처럼 같이 저녁밥 먹을 수 있는 날이 곧 올 테니, 네가 하는 공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 아빠가 언제나 응원할게.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우린 젊으니까! 군대 건강히 다녀오고 혹시 아빠가 연락이 잘 안될 때는 이쪽으로 연락하렴. 아빠랑 제일 친한 선배야.

  박 충만 지부장 02-942-0000

  사랑해, 아들!]

  아빠의 편지였다. 언제였는지, 지난 시간을 말해주듯 글씨는 눅눅함에 옆으로 퍼져 있었다. 난 사진을 보며 지어보았던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눈앞은 곧 흐려졌고 눈물은 사진을 든 내 손등위로 떨어졌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3 오! 나의 보디가드 2020 / 9 / 27 340 0 3945   
22 골목라면 2020 / 9 / 27 358 0 4220   
21 ‘0’의 일상(승주) 2020 / 9 / 27 349 0 853   
20 결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것 2020 / 9 / 27 350 0 1553   
19 변화와 변질의 상반된 의미 2020 / 9 / 27 355 0 3905   
18 사라지는 나 2020 / 9 / 27 368 0 8502   
17 일상은 우릴 깨닫게 하거나 무뎌지게 했다 2020 / 9 / 27 362 0 12743   
16 여름 나기 2020 / 9 / 27 339 0 8314   
15 연애감정 2020 / 9 / 27 369 0 5037   
14 부모와의 인연이란 어떤 것일까 2020 / 9 / 27 372 0 4594   
13 처음이라는 것 2020 / 9 / 27 347 0 10945   
12 갈비의 기억 2020 / 9 / 27 346 0 2923   
11 연희 2020 / 9 / 27 349 0 4131   
10 상처만 주는 변화를 갈구한다 2020 / 9 / 27 357 0 6014   
9 라면 한그릇 2020 / 9 / 27 368 0 5372   
8 익숙해지겠지 2020 / 9 / 27 367 0 9755   
7 두렵지 않은 시간이 포함된 두려운 삶 2020 / 9 / 27 356 0 3825   
6 다시 살기 2020 / 9 / 27 350 0 6362   
5 마지막 기억 2020 / 9 / 27 348 0 13363   
4 하고 싶은 기억 2020 / 9 / 27 361 0 3327   
3 새로움, 지지부진함 2020 / 9 / 27 345 0 2127   
2 어린 부모 2020 / 9 / 27 361 0 6219   
1 승주 2020 / 9 / 27 585 0 1853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너의 플레이리스
땡글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